9화(5,359자)

확인서

까마귀는 잊지 않는다 · 강여울

외눈 수컷은 아침 해를 등지고 길을 건넜다⁠. 젊은 까마귀 넷이 뒤를 따랐다⁠. 아파트 숲 나무마다 반짝이는 끈이 밤새 뒤집혔고⁠, 넷 가운데 둘은 사흘 동안 제대로 잠들지 못했다⁠. 외눈 수컷도 잠들지 못했다⁠. 이유는 달랐다⁠.

외눈 수컷은 평형추 틀 위에 내려앉았다⁠. 꽁지는 이제 거의 다 자라 부채처럼 펴졌다⁠. 검댕이 찢어진 둥지 곁 난간에 앉아 있었다⁠. 무리에서 가장 큰 몸이었지만 깃이 부스스했고⁠, 두툼하게 휜 부리 끝에 마른 밥알이 붙어 있었다⁠. 사흘 동안 깃을 고르지 않은 우두머리였다⁠.

외눈 수컷이 목깃을 부풀렸다⁠. 꽁지를 활짝 펴고 고개를 숙였다가 들었다⁠. 검댕도 목깃을 부풀렸다⁠. 둘이 동시에 고개를 숙였다⁠. 이번에는 얼음이 없었다⁠. 외눈 수컷이 한 걸음 다가갔고 검댕도 한 걸음 다가갔다⁠. 부리와 부리가 부딪쳤다⁠. 딱⁠. 딱⁠. 외눈 수컷이 검댕의 목깃을 물었고⁠, 검댕이 외눈 수컷의 날갯죽지를 쳤다⁠. 깃 몇 개가 평형추 틀 안으로 흩어졌다⁠.

젊은 까마귀들은 이번에는 웃지 않았다⁠. 흰 깃 수컷도 병뚜껑을 떨어뜨리지 않았다⁠. 늙은 암까마귀가 가장 높은 난간에서 둘을 내려다보았다⁠.

외눈 수컷은 물러나지 않았다⁠. 흐리지 않은 왼쪽 눈으로 검댕을 보고⁠, 찢어진 둥지를 보고⁠, 다시 검댕을 보았다⁠. 이 크레인은 둥지를 먹었다⁠. 외눈 수컷의 몸짓은 그렇게 말했다⁠. 우두머리가 얼굴 하나를 쫓는 동안 크레인이 알을 먹었다⁠.

검댕은 부리를 거두었다⁠. 거두고 한 걸음 물러났다⁠. 물러난 자리에서 목깃을 다시 부풀렸다⁠. 우두머리 자리를 내준 것은 아니었다⁠. 외눈 수컷의 말을 들었다는 몸짓이었다⁠. 둘 사이에 짝이 내려앉았다⁠. 짝은 아무에게도 절하지 않고 찢어진 둥지 가장자리에 앉았다⁠. 외눈 수컷이 짝을 보고 고개를 낮췄다⁠.

정문에서 사람 소리가 크게 일었다⁠. 무리가 한꺼번에 고개를 돌렸다⁠.

*

늙은 암까마귀는 정문 기둥 위에서 사람들을 보았다⁠. 펜스를 따라 사람들이 끝없이 서 있었다⁠. 노란 머리들이 아침 조회에 모이는 것보다 많았다⁠. 늙은 암까마귀는 넷까지 세다가 그만두었다⁠. 떼까마귀 무리가 하늘을 덮던 날처럼 사람이 땅을 덮고 있었다⁠. 아이를 안은 사람은 없었다⁠. 늙은 사람과 젊은 사람이 섞여 있었고⁠, 다들 손에 판을 들고 있었다⁠.

정문 앞에 커다란 사진기를 어깨에 멘 사람이 있었다⁠. 사진기 앞에서 다른 사람이 막대 같은 것을 들고 빠르게 말했다⁠. 늙은 암까마귀는 말의 뜻을 몰랐다⁠. 말끝마다 사람들이 고개를 끄덕이는 것만 보았다⁠.

맨 앞에 둥근 안경의 여자가 있었다⁠. 여자의 판 안에서 회색 덩이가 함바 지붕으로 떨어지는 장면이 되풀이되었다⁠. 정문이 열리고 파란 안전모가 걸어 나왔다⁠. 여자가 한 걸음 앞으로 나왔다⁠.

“⁠입주 예정자 대표입니다⁠. 벽 속 철근이 도면의 반이라면서요⁠. 진단 결과 공개하세요⁠.⁠”

“⁠하청 현장소장 한 사람이 원청 모르게 저지른 일입니다⁠. 원청이 책임지고 보강합니다⁠. 입주 날짜도 최대한 지키겠습니다⁠.⁠”

“⁠소장 혼자요⁠? 그럼 원청은 몇 달 동안 아무것도 몰랐어요⁠?⁠”

“⁠네⁠. 몰랐습니다⁠. 하청 자료만 받았습니다⁠.⁠”

“⁠크레인이 바람도 없는데 몇 달을 흔들렸는데요⁠? 우리가 펜스 밖에서도 봤는데⁠, 원청은 안에서 못 봤어요⁠?⁠”

파란 안전모가 대답하려는 순간 늙은 암까마귀가 울었다⁠. 고개를 파란 안전모의 얼굴로 향하고 낮고 길게⁠. 펜스 위에서⁠, 조명탑에서⁠, 크레인 꼭대기에서 무리가 따라 울었다⁠. 외눈 수컷도 울었다⁠. 외눈 수컷이 이 얼굴을 보고 운 것은 처음이었다⁠.

까마귀들이 파란 안전모의 머리 위로 쏟아졌다⁠. 파란 안전모가 두 팔로 머리를 감쌌다⁠. 손목시계가 번쩍였고⁠, 흰 깃 수컷이 번쩍임을 노렸다가 늙은 암까마귀에게 또 꽁지를 물렸다⁠. 파란 안전모는 몸을 웅크린 채 정문 안으로 뒷걸음질 쳤다⁠. 커다란 사진기가 뒷걸음질 치는 파란 안전모를 따라 돌았다⁠.

펜스 밖에서 웃음과 수군거림이 한꺼번에 일었다⁠.

“⁠까마귀가 원청 부장한테도 덤비네⁠.⁠”

“⁠저 새들이 소장만 쫓는다더니⁠.⁠”

여자가 판을 든 채 사람들을 돌아보았다⁠.

“⁠까마귀는 얼굴을 기억한대요⁠. 밤에 본 얼굴을 낮에도 알아본대요⁠. 저 새들이 저 사람을 언제 봤을까요⁠?⁠”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사진기가 여자의 얼굴을 비추다가 크레인 꼭대기를 비췄다⁠.

*

흰 깃 수컷은 사진기 옆 사람이 든 막대 끝을 보았다⁠. 막대 끝에 털 뭉치가 달려 있었다⁠. 회색이었고 바람에 털이 한 올씩 날렸다⁠. 흰 깃 수컷은 털 뭉치를 오래 보았다⁠. 짐승이었다⁠. 움직이지 않는 짐승이었다⁠. 막대를 든 사람이 말을 할 때마다 털 뭉치는 막대 든 사람의 입 앞으로 다가갔다⁠.

흰 깃 수컷이 털 뭉치 위에 내려앉았다⁠. 털 뭉치는 물지 않았다⁠. 흰 깃 수컷은 부리로 털을 한 올 뽑아 보았다⁠. 막대를 든 사람이 비명을 질렀다⁠.

“⁠어⁠, 어⁠, 마이크에 새 앉았어요⁠! 선배⁠, 이거 찍어요⁠?⁠”

“⁠찍어⁠, 찍어⁠! 이게 그림이야⁠!⁠”

펜스 밖 사람들이 웃었다⁠. 흰 깃 수컷은 뽑은 털 한 올을 물고 정문 기둥으로 날아갔다⁠. 털은 반짝이지 않았다⁠. 흰 깃 수컷은 털을 기둥 위에 내려놓고 고개를 이리 기울이고 저리 기울였다⁠. 사람들이 왜 웃는지는 몰랐지만⁠, 웃는 얼굴들이 저를 보고 있다는 것은 알았다⁠. 흰 깃 수컷은 짧게 깍깍대며 기둥 위를 두 바퀴 돌았다⁠.

*

검댕은 오후에 하얀 화물차가 다시 들어오는 것을 보았다⁠. 매잡이였다⁠. 매잡이는 가죽 장갑을 끼고 천 덮은 상자를 내렸다⁠. 파란 안전모가 헝클어진 머리로 매잡이에게 다가갔다⁠.

“⁠내일 열 시에 사람들 들어와요⁠. 그 전에 새들 싹 쫓아 주세요⁠. 오늘 저녁부터⁠.⁠”

매잡이는 상자를 땅에 내려놓고 천을 걷지 않았다⁠. 펜스 밖 사람들을 보았다⁠. 크레인 꼭대기를 보았다⁠. 펜스 위⁠, 조명탑 위⁠, 정문 기둥 위의 까마귀들이 다들 고개를 한곳으로 돌리고 있었다⁠. 파란 안전모였다⁠.

“⁠부장님⁠, 저것들이 지금 누굴 보는지 아세요⁠?⁠”

“⁠새가 뭘 봐요⁠.⁠”

“⁠사람 천 명 앞에서 매 띄우면⁠, 까마귀가 매를 놔두고 누굴 쫓는지 다 보여요⁠. 지난번에 소장님 때도 그랬어요⁠. 그래도 띄워요⁠?⁠”

파란 안전모의 얼굴이 하얘졌다⁠. 하얘지기만 했다⁠.

“⁠돈은 드린다니까요⁠.⁠”

“⁠안 합니다⁠. 지난번 돈도 돌려드릴게요⁠.⁠”

매잡이가 상자를 다시 화물차에 실었다⁠. 화물차 문을 닫기 전에 크레인 꼭대기를 올려다보고 혼잣말처럼 말했다⁠.

“⁠오늘 일 많이 했네⁠, 너희들⁠.⁠”

화물차가 정문을 빠져나갔다⁠. 파란 안전모는 혼자 마당에 남아 손목시계를 보았다⁠. 시계를 보는 동안 까마귀 셋이 머리 위를 낮게 지나갔다⁠. 파란 안전모는 고개를 숙이고 차로 걸어갔다⁠.

*

검댕은 하청 사무실 창틀에 내려앉았다⁠. 사무실 안이 사람으로 가득했다⁠. 노란 머리들이 벽에 등을 붙이고 서 있었고⁠, 가운데 책상을 사이에 두고 기만과 파란 안전모가 앉아 있었다⁠. 파란 안전모의 머리가 헝클어져 있었다⁠. 책상 위에 확인서가 놓여 있었고⁠, 확인서 위에 은빛 물고기가 그대로 있었다⁠.

“⁠오늘까지 서명 안 하시면 내일 계약 해지 통보 나갑니다⁠. 본사 결정이에요⁠.⁠”

목수 반장이 벽에서 등을 떼고 한 걸음 나왔다⁠.

“⁠소장님⁠, 서명하쇼⁠. 우리 애들 돈부터 받읍시다⁠.⁠”

“⁠반장님⁠.⁠”

“⁠나는 소장님 편이오⁠. 그래서 하는 말이오⁠. 소송 몇 년 가면 우리 애들 다 흩어지오⁠. 흩어지면 아무도 안 받소⁠.⁠”

뒷줄의 젊은 노란 머리가 소리쳤다⁠.

“⁠서명하면 소장님 혼자 감옥 가요⁠!⁠”

“⁠감옥은 소장님이 가도 밥은 이백 명이 굶소⁠!⁠”

사무실이 시끄러워졌다⁠. 검댕은 얼굴들을 하나씩 보았다⁠. 어떤 얼굴은 하얬고 어떤 얼굴은 붉었다⁠. 둘이 한꺼번에 오는 얼굴도 여럿이었다⁠. 기만의 얼굴은 어느 색도 아니었다⁠.

기만이 은빛 물고기를 손에 쥐었다⁠.

“⁠반장님⁠, 서명하면 이번 돈은 받습니다⁠. 다음 현장에서 원청이 또 깎습니다⁠. 깎으면 또 누가 철근을 뺍니다⁠. 저 아니면 다른 소장이⁠.⁠”

“⁠다음 현장 얘기는 다음에 하세요⁠.⁠”

파란 안전모가 말했다⁠. 부드러운 목소리였다⁠.

“⁠지금은 이 현장이에요⁠. 이백 명이고⁠, 천 세대예요⁠. 소장님이 고르시는 거예요⁠.⁠”

“⁠내일 아침에 답 드리겠습니다⁠.⁠”

“⁠내일 아침이면 늦어요⁠.⁠”

파란 안전모가 의자에서 몸을 일으켰다⁠. 헝클어진 머리를 손으로 쓸어 넘겼다⁠.

“⁠내일 열 시에 입주 예정자 현장 공개 합니다⁠. 본사가 정했어요⁠. 사람들 안으로 들여서 보강 계획 보여 주고⁠, 원청이 책임진다는 거 보여 줄 거예요⁠. 소장님은 그 자리에 계시면 됩니다⁠. 아무 말씀 안 하셔도 돼요⁠. 크레인은 공개 끝나는 대로 해체 들어갑니다⁠. 보강하려면 크레인부터 내려야 하니까요⁠.⁠”

검댕은 해체라는 소리를 몰랐다⁠. 파란 안전모가 이 소리를 할 때 손가락이 창밖 크레인을 가리켰고⁠, 손바닥이 아래로 내려갔다⁠. 검댕은 손바닥이 내려가는 모양을 보았다⁠.

*

짝은 해가 질 때 찢어진 둥지에서 일어났다⁠. 일어나서 둥지 가장자리를 한 바퀴 걸었다⁠. 철사 한 가닥을 부리로 물었다가 놓았다⁠. 둥지 바닥을 두 번 두드렸다⁠. 처음 이 틀 안을 들여다보던 날과 같은 몸짓이었다⁠. 이번에는 두드린 뒤 둥지에 다시 앉지 않았다⁠.

짝이 날아올랐다⁠. 크레인 꼭대기를 한 바퀴 돌고⁠, 이웃 동으로 날아갔다⁠. 이웃 동은 지난가을에 서른 마디까지 자라 골조가 끝난 건물이었다⁠. 옥상에 커다란 물통 하나가 얹혀 있었다⁠. 짝은 물통 위에 내려앉아 오래 앉아 있었다⁠. 옥상은 흔들리지 않았다⁠.

짝이 돌아왔다⁠. 부리에 마른 가지 하나를 물고 있었다⁠. 이웃 동 옥상 구석 화단에서 꺾어 온 가지였다⁠. 짝은 가지를 찢어진 둥지에 놓지 않았다⁠. 검댕 앞에 내려놓았다⁠.

검댕은 가지를 보았다⁠. 외눈 수컷이 난간 끝에서 가지를 보았다⁠. 늙은 암까마귀가 가지를 보았다⁠.

외눈 수컷이 날아올랐다⁠. 이웃 동 옥상으로 날아가 물통 위를 한 바퀴 돌고⁠, 옥상 난간을 따라 걸었다⁠. 흐리지 않은 눈으로 옥상 구석구석을 들여다보았다⁠. 화단의 마른 흙⁠, 물통 밑 그늘⁠, 바람이 비껴가는 계단실 지붕⁠. 외눈 수컷은 돌아와 마른 가지 하나를 짝의 가지 옆에 내려놓았다⁠. 절하지 않았고 목깃을 부풀리지도 않았다⁠. 가지 둘이 나란히 놓였다⁠. 흰 깃 수컷이 와서 둘 사이에 병뚜껑을 놓으려다가 짝의 눈길을 받고 도로 물었다⁠.

검댕은 가지를 물지 않았다⁠. 고개를 들어 크레인 꼭대기의 붉은 불을 보았다⁠. 다섯 해를 이 불 아래서 잤다⁠. 검댕은 가지 곁에 앉아 깃을 부풀린 채 밤을 맞았다⁠.

*

늙은 암까마귀는 자정 무렵 정문 기둥 위에서 흰 안전모를 보았다⁠. 기만이 혼자 정문 안쪽에 서 있었다⁠. 안전모를 벗어 손에 들고⁠, 다른 손에 은빛 물고기를 쥐고 있었다⁠. 기만은 고개를 들어 크레인 꼭대기를 오래 올려다보았다⁠. 크레인은 바람 없이 서 있었다⁠. 오늘 밤에는 흔들리지 않았다⁠. 멈춘 크레인은 흔들리지 않는다⁠.

기만이 정문 기둥 위의 늙은 암까마귀를 보았다⁠. 늙은 암까마귀는 고개를 기만의 얼굴로 향하고 꼼짝하지 않았다⁠. 울지는 않았다⁠.

“⁠내일은 니들도 와라⁠. 다 와⁠.⁠”

기만이 안전모를 다시 썼다⁠. 하청 사무실로 걸어 들어가 불을 켰다⁠. 불은 새벽까지 꺼지지 않았다⁠. 확인서 위에는 아무것도 놓여 있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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