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화(5,539자)

잊지 않는다

까마귀는 잊지 않는다 · 강여울

검댕은 크레인 꼭대기에서 정문이 열리는 것을 보았다⁠. 4월 첫 주의 아침이었다⁠. 쇠 난간에 서리가 끼지 않은 지 여러 날이 지났다⁠. 정문으로 사람들이 줄지어 들어왔다⁠. 정문 옆 천막에서 노란 안전모를 하나씩 받아 썼다⁠. 펜스 밖에서만 보던 얼굴들이 마당 안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하나⁠, 둘⁠, 셋⁠, 넷⁠, 많이⁠. 노란 머리들의 아침 조회보다 몇 곱절 많았다⁠.

마당 한가운데 흰 천막이 쳐져 있었고⁠, 천막 앞에 커다란 판이 세워져 있었다⁠. 판에는 건물 그림과 붉은 선이 그려져 있었다⁠. 판 옆에 파란 안전모가 서 있었다⁠. 새 안전모였고 머리가 반듯하게 빗겨 있었다⁠. 손에 검은 막대를 쥐고 있었다⁠. 사람 목소리를 크게 키우는 막대였다⁠.

감리원은 천막 옆에 서 있었다⁠. 기만은 천막에서 멀찍이 떨어진 철근 더미 옆에 혼자 서 있었다⁠. 흰 안전모 아래 볼에 붉은 줄이 아직 남아 있었다⁠.

정문 밖 길에는 거대한 노란 차 한 대가 서 있었다⁠. 등에 접힌 쇠팔을 실은 차였다⁠. 노란 머리들이 저 차를 보고 크레인을 내릴 차라고 했다⁠. 검댕은 쇠팔이 접힌 모양을 보았고⁠, 손바닥이 아래로 내려가던 모양을 떠올렸다⁠.

펜스 밖에 크레인 기사가 있었다⁠. 점퍼 차림으로 도시락 가방을 들고 펜스 기둥에 기대 있었다⁠. 크레인 기사는 마당을 보지 않고 크레인 꼭대기를 올려다보았다⁠.

*

흰 깃 수컷은 천막 지붕 위에서 파란 안전모의 손목을 보았다⁠. 시계였다⁠. 지난번에 쪼였던 시계줄이 헐거워져 있었다⁠. 파란 안전모가 막대에 대고 말을 시작하며 왼손을 들어 판의 붉은 선을 가리켰다⁠. 손을 들 때마다 시계가 손목에서 미끄러져 내려갔다가 올라왔다⁠.

“⁠입주 예정자 여러분⁠, 먼 길 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오늘 원청이 보강 계획을 직접 말씀드리겠습니다⁠.⁠”

파란 안전모가 손을 크게 휘저었다⁠. 시계가 손목에서 빠져 공중으로 날았다⁠. 흰 깃 수컷은 천막 지붕을 박차고 날았다⁠. 시계는 흙탕물 웅덩이에 떨어졌다⁠. 흰 깃 수컷이 웅덩이에 내려앉아 시계를 물었다⁠. 시계는 진흙투성이였다⁠. 반짝이지 않았다⁠.

흰 깃 수컷은 고개를 이리 기울이고 저리 기울였다⁠. 사람들이 웃음을 터뜨렸다⁠. 흰 깃 수컷은 진흙 묻은 시계를 물고 맨 앞줄의 둥근 안경을 쓴 여자 발 앞으로 날아가 내려놓았다⁠. 여자가 시계를 내려다보고 흰 깃 수컷을 보았다⁠.

“⁠이건 네 거 아니지⁠?⁠”

흰 깃 수컷은 짧게 깍 했다⁠. 웃음이 한 번 더 터졌다⁠. 파란 안전모는 웃지 않았다⁠. 빈 손목을 오른손으로 쥐고 막대에 대고 말을 이었다⁠.

*

늙은 암까마귀는 조명탑 꼭대기에서 파란 안전모의 얼굴을 보았다⁠. 매끈한 턱⁠. 흰 볼⁠. 웃을 때도 움직이지 않는 눈⁠. 밤에 정문 옆에 서 있던 얼굴이었다⁠.

“⁠이번 일은 하청 현장소장 한 사람이 원청에 알리지 않고 철근을 덜 넣은 일입니다⁠. 원청은 책임을 통감하고 원청 비용으로 전면 보강하겠습니다⁠.⁠”

늙은 암까마귀는 고개를 파란 안전모로 향하고 꼼짝하지 않았다⁠. 낮고 긴 쉰 울음이 늙은 목에서 끌려 나왔다⁠. 조명탑에서⁠, 펜스에서⁠, 크레인 꼭대기에서⁠, 천막 지붕에서 무리가 따라 울었다⁠. 외눈 수컷도 울었다⁠. 길 건너 아파트 숲에서 돌아온 젊은 까마귀들도 울었다⁠. 젊은 것들은 밤에 이 얼굴을 본 적이 없었다⁠. 무리가 우는 얼굴을 보고 따라 울었다⁠.

사람들이 고개를 들었다⁠. 까마귀 무리가 하늘을 덮고 한 사람을 향해 울고 있었다⁠. 사람들이 파란 안전모를 보았다⁠. 파란 안전모는 막대를 쥔 채 말을 멈췄다⁠.

맨 앞줄의 여자가 손을 들었다⁠.

“⁠소장님 말씀도 듣고 싶어요⁠. 그분이 하셨다면서요⁠.⁠”

“⁠소장님은 오늘 말씀 안 하십니다⁠.⁠”

“⁠왜요⁠?⁠”

파란 안전모가 대답하기 전에 철근 더미 옆에서 흰 안전모가 걸어 나왔다⁠. 늙은 암까마귀는 기만이 걸어오는 동안 울음을 멈추지 않았다⁠. 기만이 천막 앞에서 멈췄다⁠. 감리원 앞의 다른 막대를 집어 들었다⁠. 감리원은 막대를 내주었다⁠.

“⁠현장소장 도기만입니다⁠.⁠”

마당이 조용해졌다⁠. 까마귀들만 울었다⁠. 기만이 고개를 들어 조명탑을 보았다⁠.

“⁠철근 뺀 거 접니다⁠. 은행잎 떨어질 때부터 밤마다 뺐습니다⁠. 크레인 붙든 벽에서도 뺐습니다⁠. 고물상에 팔아서 하청 일꾼 이백 명 월급 줬습니다⁠. 원청이 공사비를 두 번 깎아서 생긴 구멍만큼입니다⁠.⁠”

사람들 사이에서 숨 들이쉬는 소리가 났다⁠. 기만은 막대를 쥔 손을 한 번 고쳐 쥐었다⁠.

“⁠부장님은 아셨습니다⁠. 밤에 트럭 옆⁠, 정문 옆에 서 계셨습니다⁠. 저한테 골조 끝날 때까지만 하라고 하셨습니다⁠. 끝나면 저 혼자 한 걸로 하자고 하셨습니다⁠. 확인서도 받았습니다⁠. 서명은 안 했습니다⁠.⁠”

“⁠증거 있으세요⁠?⁠”

파란 안전모의 목소리가 막대를 거치지 않고 나왔다⁠.

“⁠까마귀요⁠?⁠”

펜스 밖에서 크레인 기사가 소리쳤다⁠.

“⁠사진에 부장님 차 번호판 나와요⁠! 새벽 세 시 사십 분⁠! 운전석에서 내가 찍었소⁠!⁠”

감리원이 휴대전화를 들어 보였다⁠.

“⁠기사님 사진 본사랑 구청에 이미 올렸습니다⁠. 검은 차 나온 거 세 장이에요⁠.⁠”

파란 안전모가 막대를 내렸다⁠. 얼굴이 하얘졌다⁠. 하얘진 얼굴이 사람들을 둘러보았다⁠. 파란 안전모는 바보처럼 무너지지 않았다⁠. 한 걸음 앞으로 나와 막대를 다시 들었다⁠.

“⁠네⁠. 알았다고 칩시다⁠. 제가 안 깎았으면요⁠? 시행사가 분양가를 묶었고⁠, 은행이 이자를 올렸어요⁠. 원청도 깎인 데서 깎은 거예요⁠. 여러분 분양가 오천만 원 올리면 내실 거예요⁠? 입주 넉 달 밀리면 그 전세 기한은 누가 맞춰 줍니까⁠?⁠”

사람들이 말을 잃었다⁠. 늙은 사내 하나가 고개를 숙였다⁠. 늙은 암까마귀는 사람들의 얼굴을 훑었다⁠. 하얀 얼굴과 붉은 얼굴이 섞여 있었다⁠. 둘이 한꺼번에 온 얼굴이 많았다⁠.

맨 앞줄의 여자가 진흙 묻은 시계를 손에 든 채 앞으로 나왔다⁠.

“⁠분양가 얘기는 우리가 따로 할게요⁠. 날짜 얘기도요⁠. 벽은 반쪽으로는 못 받아요⁠. 우리 집이 저 동 열여덟 층이에요⁠. 크레인 붙어 있던 벽 바로 밑이요⁠.⁠”

파란 안전모의 주머니에서 휴대전화가 울렸다⁠. 파란 안전모가 전화를 귀에 댔다⁠. 듣기만 했다⁠. 오래 들었다⁠. 전화를 내렸을 때 파란 안전모는 새 안전모를 벗어 손에 들었다⁠. 반듯하게 빗은 머리가 바람에 흐트러졌다⁠.

“⁠…본사에서 임금은 원청이 직접 지급하고⁠, 진단 결과는 공개한답니다⁠. 저는 오늘부로 현장에서 빠지랍니다⁠.⁠”

여자가 손에 든 시계를 파란 안전모에게 내밀었다⁠. 파란 안전모는 시계를 받아 들고 진흙을 엄지로 문질렀다⁠. 시계는 반짝이지 않았다⁠.

기만이 막대를 감리원에게 돌려주었다⁠.

“⁠확인서는 안 씁니다⁠. 경찰서는 제 발로 갑니다⁠.⁠”

목수 반장이 노란 머리들 사이에서 소리쳤다⁠.

“⁠소장님⁠, 밥은 자시고 가쇼⁠!⁠”

*

검댕은 크레인 꼭대기에서 노란 차가 쇠팔을 펴는 것을 보았다⁠. 쇠팔은 크레인보다 낮았지만 크레인의 팔 끝까지 닿았다⁠. 사람들이 크레인 팔에 굵은 줄을 감았다⁠. 오늘 크레인을 내린다고 했다⁠. 팔부터⁠, 몸통은 한 마디씩⁠.

무리가 마지막으로 크레인 꼭대기에 모였다⁠. 외눈 수컷이 난간 한쪽 끝에 앉았다⁠. 늙은 암까마귀가 가장 높은 난간에 앉았다⁠. 흰 깃 수컷은 평형추 틈에서 라이터와 볼펜과 병뚜껑을 하나씩 물어다 이웃 동 옥상으로 나르느라 바빴다⁠. 볼펜이 무거워 두 번 떨어뜨렸다⁠. 세 번째에 옥상에 닿았다⁠.

짝은 크레인에 없었다⁠. 짝은 아침부터 이웃 동 옥상 물통 위에 있었다⁠. 물통 그늘 밑에 마른 가지 둘이 놓여 있었다⁠. 짝이 꺾어 온 가지와 외눈 수컷이 꺾어 온 가지였다⁠.

검댕은 평형추 틀 안으로 들어갔다⁠. 찢어진 둥지가 있었다⁠. 지난봄 짝과 엮은 철사⁠, 매가 오던 날 마대 자루에서 다시 꺼낸 가지⁠, 짝이 깐 비닐 끈⁠. 틀 바닥 쇠 위에 푸르스름한 껍데기 조각 몇이 아직 남아 있었다⁠. 검댕은 둥지에서 결속선 한 가닥을 부리로 뽑았다⁠. 둥지를 엮을 때 가장 먼저 감았던 가닥이었다⁠.

크레인이 아래에서 덜컹 흔들렸다⁠. 노란 차가 크레인 팔을 들어 올리기 시작했다⁠. 바람이 아니었다⁠. 사람이 흔드는 흔들림이었다⁠.

외눈 수컷이 검댕을 보았다⁠. 검댕은 철사를 문 채 외눈 수컷 앞을 지나 난간 끝으로 걸어갔다⁠. 외눈 수컷이 고개를 숙였다⁠. 절하는 몸짓이었다⁠. 검댕은 마주 고개를 숙이지 않았다⁠. 대신 날개를 펴고 크레인 꼭대기를 박차고 날았다⁠. 붉은 불이 등 뒤에서 깜빡였다⁠. 다섯 해를 이 불 아래서 잤다⁠.

무리가 뒤따랐다⁠. 외눈 수컷이 바로 뒤에 붙었고⁠, 젊은 것들이 뒤를 이었고⁠, 늙은 암까마귀가 맨 나중에 날았다⁠. 늙은 암까마귀는 크레인 꼭대기를 떠나기 전에 고개를 한 번 아래로 돌렸다⁠. 정문이었다⁠.

*

흰 깃 수컷은 정문 기둥 위에 내려앉았다⁠. 기만이 상자 하나를 안고 정문으로 걸어 나오고 있었다⁠. 상자에서 결재판 모서리와 접이식 의자 다리가 삐죽 나와 있었다⁠. 흰 안전모는 상자 위에 얹혀 있었다⁠.

정문 안쪽 길 양옆에 노란 머리들이 서 있었다⁠. 누가 줄을 세운 것도 아닌데 줄이 길게 이어졌다⁠. 목수 반장이 맨 끝에 있었다⁠. 기만이 지나가자 목수 반장이 노란 안전모를 벗어 가슴에 댔다⁠. 다른 노란 머리들도 하나둘 안전모를 벗었다⁠. 흰 깃 수컷은 정문 기둥 위에서 벗겨진 노란 머리들을 내려다보았다⁠. 반짝이는 것은 하나도 없었는데⁠, 흰 깃 수컷은 고개를 이리 기울이고 저리 기울이며 오래 보았다⁠.

기만이 정문 기둥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상자를 한 팔로 받치고 다른 손을 점퍼 주머니에 넣었다⁠. 꺼낸 손에 은빛 물고기가 있었다⁠. 기만이 기둥 위의 흰 깃 수컷을 올려다보았다⁠.

“⁠니 거다⁠. 니가 먼저 가져갔응께⁠.⁠”

기만은 물고기를 정문 기둥 시멘트 턱에 내려놓고 두 걸음 물러났다⁠. 흰 깃 수컷은 물고기를 보았고⁠, 기만의 얼굴을 보았다⁠. 끊긴 왼쪽 눈썹⁠. 턱 밑의 점⁠. 볼의 붉은 줄⁠. 흰 깃 수컷은 내려가 물고기를 물었다⁠. 무거웠다⁠. 처음 물던 날처럼 무거웠다⁠. 흰 깃 수컷은 두 번 쉬어 가며 이웃 동 옥상으로 날아올랐다⁠.

펜스 밖에서 크레인 기사가 기만에게 걸어왔다⁠. 도시락 가방을 열어 주먹밥 하나를 꺼내 상자 위에 얹었다⁠.

“⁠묵고 가라⁠.⁠”

기만이 주먹밥을 보았다⁠. 크레인 기사를 보았다⁠. 둘은 아무 말 없이 나란히 정문 밖 길로 걸어갔다⁠.

*

검댕은 이웃 동 옥상 물통 위에서 아래를 보았다⁠. 짝이 물통 그늘에 가지 둘을 엇갈려 놓고 결속선 한 가닥을 감고 있었다⁠. 검댕이 크레인에서 물어 온 가닥이었다⁠. 흰 깃 수컷이 은빛 물고기를 가지 사이에 밀어 넣었다⁠. 짝이 물고기를 가장자리로 밀었다⁠. 흰 깃 수컷이 가운데로 밀었다⁠. 짝이 다시 가장자리로 밀었고⁠, 물고기는 철사 끝에 끼어 햇빛을 받았다⁠. 이번에는 짝도 흰 깃 수컷도 물고기를 더 밀지 않았다⁠. 해가 옥상에 닿자 검댕의 깃에 푸른 기가 돌았다⁠.

정문 밖 길을 상자를 안은 사내와 도시락 가방을 든 사내가 걸어가고 있었다⁠. 젊은 까마귀 셋이 날아올라 상자를 안은 사내의 머리 위를 따라갔다⁠. 아파트 숲에서 돌아온 것들이었다⁠. 트럭을 한 번도 본 적 없는 것들이 끊긴 눈썹을 내려다보며 쉰 울음을 길게 끌었다⁠. 사내는 고개를 들지 않고 걸었다⁠. 늙은 암까마귀는 옥상 난간에 앉아 고개를 사내에게 향하고 꼼짝하지 않았다⁠. 울지 않았고⁠, 눈도 돌리지 않았다⁠.

검댕은 울지 않았다⁠. 고개를 돌려 크레인을 보았다⁠. 노란 차의 쇠팔이 크레인 팔을 통째로 들어 천천히 땅으로 내렸다⁠. 팔이 내려가자 꼭대기의 붉은 불이 한 번 깜빡이고 꺼졌다⁠. 크레인 몸통만 남은 자리 위로 바람이 지나갔다⁠. 옥상은 흔들리지 않았다⁠. 짝이 철사 한 가닥을 더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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