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5,493자)

봉투

까마귀는 잊지 않는다 · 강여울

늙은 암까마귀는 개 짖는 소리에 날갯짓을 늦췄다⁠. 트럭이 멈춘 곳은 쇳덩이 산들로 둘러싸인 마당이었다⁠. 찌그러진 냉장고와 녹슨 철판과 굵은 전선 뭉치가 사람 키보다 높게 쌓여 있었다⁠. 마당 입구에 쇠사슬에 묶인 누렁개 한 마리가 트럭을 보고 줄이 끊어질 듯 짖었다⁠.

늙은 암까마귀는 마당 가장자리의 나무 한 그루에 내려앉았다⁠. 껍질이 거칠게 갈라진 늙은 나무였다⁠. 가지는 반쯤 잘려 나갔고⁠, 남은 가지 끝에 지난가을 따지 않은 열매 하나가 까맣게 말라 붙어 있었다⁠. 배였다⁠. 늙은 암까마귀는 발가락으로 가지를 쥐었다가 놓고 다시 쥐었다⁠. 이 가지를 안다⁠. 어미가 이 나무 아래에서 떨어진 배를 쪼던 해⁠, 늙은 암까마귀는 이 가지에서 처음 날았다⁠. 과수원의 배나무들은 다 베어졌고 이 한 그루만 고물상 마당 귀퉁이에 남았다⁠.

누렁개가 늙은 암까마귀를 보고 짖는 소리를 바꿨다⁠. 늙은 암까마귀는 개의 말을 모른다⁠. 개도 까마귀의 말을 모른다⁠. 늙은 암까마귀가 쉰 소리로 한 번 깍 하자 누렁개는 고개를 갸웃하고 꼬리를 두 번 흔들었다⁠. 둘 다 서로를 오해한 채 조용해졌다⁠.

트럭 조수석 문이 열리고 기만이 내렸다⁠. 기만은 오늘 트럭을 따라왔다⁠. 마당 안쪽 컨테이너에서 배가 불룩한 사내가 나왔다⁠. 목에 굵은 금 사슬이 걸쳐져 있었다⁠. 흰 깃 수컷이 보았다면 정신을 놓았을 사슬이었다⁠. 트럭이 바닥에 깔린 넓은 쇠판 위로 올라갔다⁠. 쇠판 옆 작은 화면에 붉은 숫자가 떴다⁠. 금 사슬 사내가 숫자를 보고 혀를 찼다⁠.

“⁠지난번보다 많네⁠. 두 번 치를 한 번에 실었구먼⁠.⁠”

“⁠지게차 열쇠를 새가 물어 갔어요⁠.⁠”

“⁠새가⁠?⁠”

금 사슬 사내가 웃었다⁠. 웃다가 검은 비닐봉지 하나를 기만에게 내밀었다⁠. 봉지 안에서 종이 뭉치가 비쳤다⁠. 기만이 봉지를 받아 안을 들여다보고 얼굴을 들었다⁠.

“⁠사장님⁠, 이거 모자랍니다⁠. 약속한 거보다 한참⁠.⁠”

“⁠철근값 올랐다고 다 비싸게 받는 거 아냐⁠. 어디서 났는지 모르는 물건은 원래 반값이여⁠.⁠”

“⁠애들 월급이 모자라요⁠. 설인데⁠.⁠”

“⁠그건 내 사정이 아니지⁠. 소장님 사정이지⁠.⁠”

기만이 봉지를 쥔 손을 내렸다⁠. 늙은 암까마귀는 종이 뭉치를 안다⁠. 함바 아주머니가 쌀집 사람에게 종이를 건네면 쌀 포대가 들어왔다⁠. 노란 머리들이 함바 아주머니에게 종이를 건네면 국그릇이 나왔다⁠. 종이는 밥이 되었다⁠. 회색 나무의 가지가 트럭에 실려 여기 오면⁠, 종이가 되어 돌아갔다⁠.

늙은 암까마귀는 배나무 가지 위에서 기만의 얼굴을 오래 보았다⁠. 금 사슬 사내의 얼굴도 보았다⁠. 금 사슬 사내의 얼굴은 웃고 있었고⁠, 웃는 얼굴 밑에서 손가락이 봉지 매듭을 다시 묶고 있었다⁠.

*

검댕은 하청 사무실 컨테이너 지붕에 내려앉았다⁠. 설 앞 금요일이었다⁠. 컨테이너 창이 반쯤 열려 있었고 난로 열기가 창틈으로 흘러나왔다⁠. 노란 머리들이 컨테이너 앞에 길게 줄을 서 있었다⁠. 줄은 함바 앞까지 이어졌다⁠. 검댕은 넷까지 세고 그만두었다⁠.

창 안 책상 구석의 작은 텔레비전이 혼자 떠들었다⁠. 설을 앞두고 전국 건설 현장에서 못 받은 임금이 지난해보다 늘었다⁠, 원청이 하청 임금을 함께 책임지게 한 법이 있어도 현장에서는 지켜지지 않는다⁠. 화면 속에서 노란 안전모를 쓴 사람들이 어느 큰 건물 앞에 앉아 있었다⁠. 기만은 화면을 보지 않았다⁠. 창 안에서 기만이 흰 봉투를 하나씩 집어 들었다⁠. 이름을 부르면 노란 머리 하나가 들어가 봉투를 받았다⁠. 봉투를 받은 얼굴은 하나같이 바뀌었다⁠. 굳었던 입가가 풀리고⁠, 패인 볼에 핏기가 돌았다⁠. 어떤 얼굴은 봉투를 받자마자 열어 보았고⁠, 어떤 얼굴은 열지 않고 가슴팍 안주머니에 넣은 뒤 손바닥으로 두 번 눌렀다⁠.

목수 반장은 봉투를 열어 종이를 셌다⁠. 다 세고 나서 한 번 더 셌다⁠.

“⁠반이네⁠.⁠”

“⁠나머지는 설 지나고 드릴게요⁠. 반장님⁠, 이번엔 진짜⁠…⁠”

“⁠금요일이오⁠?⁠”

“⁠…네⁠.⁠”

목수 반장은 봉투를 접어 안주머니에 넣었다⁠. 나가려다 돌아서서 기만의 어깨를 한 번 짚었다⁠.

“⁠소장님 얼굴이 반쪽이오⁠. 밥은 자시고 다니쇼⁠.⁠”

검댕은 기만의 얼굴을 보았다⁠. 목수 반장의 손이 어깨에 닿는 동안 끊긴 왼쪽 눈썹이 떨렸다⁠. 기만은 고개를 숙여 다음 봉투를 집었다⁠.

*

줄 끝에 크레인 기사가 있었다⁠. 크레인 기사는 들어와서 문을 닫았다⁠. 기만이 봉투를 내밀었다⁠. 크레인 기사는 받지 않았다⁠.

“⁠이 돈 어디서 났냐⁠.⁠”

“⁠원청이 깎은 거⁠, 내가 메웠다⁠. 받어⁠.⁠”

“⁠벽에서 메웠지⁠.⁠”

기만의 손이 허공에서 멈췄다⁠. 난로가 웅웅거렸다⁠. 검댕은 창틀 위에서 두 얼굴을 번갈아 보았다⁠. 크레인 기사의 이 빠진 입은 꾹 닫혀 있었고⁠, 기만의 입은 반쯤 열린 채 아무 소리도 내지 않았다⁠.

“⁠스물한 층 이음에서 가루 떨어지는 거⁠, 나 운전석에서 날마다 본다⁠. 날마다 쬐끔씩 많아져⁠.⁠”

“⁠보강은 골조 끝나고 할 거여⁠.⁠”

“⁠그때까지 버티믄⁠?⁠”

“⁠버텨⁠. 버티게 할 거여⁠.⁠”

“⁠니가 버티게 하냐⁠, 벽이 버티지⁠.⁠”

기만이 봉투를 책상에 내려놓았다⁠. 크레인 기사 앞으로 밀었다⁠.

“⁠니 딸 결혼식 다음 달이라매⁠. 축의금 받을 거 생각하고 식장 잡았다매⁠.⁠”

크레인 기사가 봉투를 내려다보았다⁠. 오래 내려다보다가 봉투를 집었다⁠. 열어 보지 않았다⁠. 작업복 앞주머니에 넣고 문을 열고 나갔다⁠. 나가면서 컨테이너 지붕을 올려다보았고⁠, 지붕 끝의 검댕과 눈이 마주쳤다⁠. 크레인 기사가 먼저 눈을 돌렸다⁠.

*

흰 깃 수컷은 하청 사무실 창틀에 남은 봉투들을 처음부터 보고 있었다⁠. 봉투는 반짝이지 않았다⁠. 하얗고 납작할 뿐이었다⁠. 그런데 노란 머리들이 봉투 앞에서 짓는 얼굴은 흰 깃 수컷이 은빛 병뚜껑 앞에서 짓는 얼굴과 똑같았다⁠. 흰 깃 수컷은 이 얼굴을 안다⁠. 갖고 싶은 것을 처음 손에 넣은 얼굴이다⁠.

기만이 크레인 기사를 따라 문밖으로 나가 무언가를 말하는 사이⁠, 흰 깃 수컷은 창틀의 봉투 하나를 물고 날았다⁠. 봉투는 가벼웠다⁠. 열쇠보다 훨씬 가벼웠다⁠. 흰 깃 수컷은 가벼운 것을 문 기쁨에 마당 위를 크게 한 바퀴 돌았다⁠. 돌다가 바람을 정면으로 맞았다⁠.

봉투 입이 벌어졌다⁠. 종이가 한 장씩 빠져나와 바람을 탔다⁠. 흰 깃 수컷은 남은 봉투를 꽉 물었고⁠, 꽉 문 자리가 찢어지면서 종이 뭉치가 한꺼번에 쏟아졌다⁠. 마당 위로 종이가 눈처럼 흩날렸다⁠.

“⁠돈이다⁠!⁠”

노란 머리들이 줄을 깨고 뛰었다⁠. 누구는 안전모로 종이를 덮쳤고⁠, 누구는 펜스까지 쫓아갔고⁠, 누구는 웅덩이에 빠진 종이를 건져 입김으로 말렸다⁠. 함바 아주머니가 국자를 든 채 뛰어나와 한 장을 낚아챘다⁠.

“⁠이건 밥값이다⁠! 소장님⁠, 이건 내가 그냥 받는다⁠!⁠”

“⁠아주머니⁠, 그거 반장님 조 거예요⁠!⁠”

흰 깃 수컷은 빈 봉투 조각을 문 채 함바 지붕에 내려앉았다⁠. 아래가 너무 시끄러웠다⁠. 흰 깃 수컷은 조각을 내려다보았다⁠. 반짝이지 않았다⁠. 흰 깃 수컷은 조각을 지붕 환기구 옆에 내려놓고 짧게 깍깍댔다⁠. 노란 머리들이 하는 짓이 까마귀 무리가 함바 쓰레기통에 몰려들 때와 똑같았다⁠.

*

검댕은 정문으로 검은 차가 들어오는 것을 보았다⁠. 파란 안전모가 차에서 내리자마자 종이 한 장이 날아와 반짝이는 구두 코에 앉았다⁠. 파란 안전모가 허리를 숙여 종이를 집었다⁠. 앞뒤를 뒤집어 보고⁠, 마당을 둘러보았다⁠. 노란 머리들이 종이를 쫓아 뛰어다니고 있었다⁠. 기만이 마당 한가운데에 서 있었다⁠.

파란 안전모가 기만 앞으로 걸어갔다⁠. 검댕은 마당의 철근 더미로 내려앉았다⁠. 짝이 뒤따라 내려왔다⁠. 두 사람의 얼굴이 다 보이는 자리였다⁠.

“⁠소장님⁠, 기성금 아직 안 나갔는데요⁠. 이 돈은 어디서 나왔어요⁠?⁠”

“⁠부장님이 깎으신 만큼입니다⁠.⁠”

기만의 목소리는 낮았다⁠. 검댕은 기만의 얼굴이 하얘지지도 붉어지지도 않는 것을 보았다⁠.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철근 단가 올랐다고 깎으시고⁠, 공기 줄였다고 또 깎으셨습니다⁠. 깎인 자리에서 나왔습니다⁠.⁠”

파란 안전모가 손에 든 종이를 접었다⁠. 반으로 접고⁠, 또 반으로 접었다⁠. 고개를 들어 크레인 꼭대기를 한 번 올려다보았다가 기만의 얼굴로 돌아왔다⁠. 목소리를 낮춰 기만에게만 들리게 말했다⁠. 철근 더미 위의 검댕에게도 들렸다⁠.

“⁠나는 들은 거 없어요⁠. 골조 끝날 때까지만 하세요⁠. 끝나면 그건 소장님이 혼자 한 거고요⁠.⁠”

“⁠알고 깎으셨습니까⁠?⁠”

“⁠우리 사이에 그런 걸 물어요⁠?⁠”

파란 안전모가 접은 종이를 기만의 가슴 주머니에 꽂아 주었다⁠. 손목시계가 번쩍였다⁠.

“⁠봉투 마저 나눠 주세요⁠. 설인데⁠. 애들 고향 가야죠⁠.⁠”

파란 안전모는 차로 돌아갔다⁠. 문을 열기 전에 손목시계를 한 번 보았다⁠. 기만은 마당 한가운데 그대로 서 있었다⁠. 노란 머리들이 주운 종이를 하나둘 기만에게 가져왔다⁠. 웅덩이에서 건진 젖은 종이도 있었다⁠. 함바 아주머니는 한 장을 앞치마 주머니에 넣은 채 끝내 가져오지 않았다⁠.

*

해가 기울 때 무리는 크레인 꼭대기에 모였다⁠. 늙은 암까마귀는 밤새 날아 고물상에 다녀온 날개를 접고 가장 높은 난간에 앉아 있었다⁠. 검댕은 늙은 암까마귀 옆에 앉았다⁠.

검댕은 오늘 하루를 몸으로 다시 짚었다⁠. 회색 나무의 가지가 밤에 트럭으로 나간다⁠. 트럭은 옛 배밭으로 간다⁠. 가지는 종이가 되어 돌아온다⁠. 종이는 노란 머리들의 얼굴을 풀어 준다⁠. 종이는 밥이 된다⁠. 검댕도 겨울이면 함바 쓰레기통을 뒤져 짝에게 물어다 주었다⁠. 짝이 알을 품는 봄이면 남의 둥지에서 알을 훔친 적도 있었다⁠. 무리를 먹이는 우두머리는 남의 것을 가져온다⁠.

기만은 가지 도둑이었다⁠. 가지를 훔쳐 제 무리를 먹이는 도둑이었다⁠. 기만이 가지를 뺄 때마다 크레인은 흔들렸다⁠.

늙은 암까마귀는 정문을 나서는 흰 안전모를 보며 낮고 길게 울었다⁠. 먹이를 물어 오는 얼굴이어도 둥지를 무너뜨리는 얼굴이었다⁠. 늙은 암까마귀는 한 얼굴에 한 울음만 붙인다⁠.

정문 밖으로 검은 차가 빠져나갔다⁠. 파란 안전모가 창을 내리고 경비에게 손을 흔들었다⁠. 손목에서 마지막 햇빛이 번쩍였다⁠. 검댕은 고개를 파란 안전모의 얼굴로 돌렸다⁠. 매끈한 턱⁠. 흰 볼⁠. 웃을 때도 움직이지 않는 눈⁠.

검댕이 쉰 울음을 끌었다⁠. 늙은 암까마귀가 검댕을 보았다⁠. 늙은 암까마귀는 밤에 파란 안전모를 본 적이 없었다⁠. 둥지를 뜯는 것도⁠, 트럭에 가지를 싣는 것도 보지 않았다⁠. 늙은 암까마귀는 오래 망설였다⁠. 검댕이 한 번 더 울었다⁠. 짝이 따라 울었다⁠. 흰 깃 수컷이 따라 울었다⁠. 외눈 수컷은 울지 않고 아파트 숲 위를 보았다⁠.

외눈 수컷이 난간 끝에서 목깃을 부풀렸다⁠. 젊은 까마귀 셋이 외눈 수컷 옆으로 몸을 옮겼다⁠. 우두머리가 울면 무리가 따라 우는 것이 까마귀의 법이었다⁠. 따라 울지 않는 것은 우두머리를 묻는 짓이었다⁠. 검댕은 외눈 수컷 앞으로 걸어가 두툼하게 휜 부리를 외눈 수컷의 흐린 눈 앞에 들이댔다⁠. 외눈 수컷은 물러나지 않았다⁠. 흐리지 않은 눈으로 검댕을 보고⁠, 아파트 숲을 보고⁠, 다시 검댕을 보았다⁠. 얼굴 하나를 배우면 적이 하나 는다⁠. 외눈 수컷의 몸짓은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사람 둘을 적으로 두면 크레인에 매가 둘 오고 갈고리가 둘 온다⁠.

검댕은 부리를 거두지 않았다⁠. 둘 사이로 늙은 암까마귀의 쉰 숨소리가 지나갔다⁠. 외눈 수컷이 먼저 고개를 돌렸고⁠, 돌린 채 끝내 울지 않았다⁠.

늙은 암까마귀가 고개를 검은 차로 향하고 꼼짝하지 않았다⁠. 늙은 목에서 낮고 긴 쉰 울음이 끌려 나왔다⁠. 무리가 두 번째 얼굴을 배우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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