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5,638자)

열쇠

까마귀는 잊지 않는다 · 강여울

늙은 암까마귀는 아침 조회 때마다 조명탑 꼭대기에 앉았다⁠. 조명탑에서는 노란 머리들의 얼굴이 하나하나 다 보였다⁠. 해가 바뀌기 전 마지막 주였고⁠, 마당에는 밤새 언 흙이 하얗게 부풀어 있었다⁠. 노란 머리들은 입김을 내뿜으며 발을 굴렀다⁠. 앞에서 기만이 손나발을 들었다⁠.

“⁠오늘 스물세 층 벽체 타설 들어갑니다⁠. 콘크리트 차 열두 대 와요⁠. 열한 시 전에 형틀 다 닫으세요⁠.⁠”

타설은 철근을 세운 틀 안에 콘크리트를 붓는 일이었다⁠. 노란 머리들은 타설을 친다고도 했다⁠. 늙은 암까마귀는 소리보다 얼굴을 보았다⁠. 맨 앞줄에 머리가 하얗게 센 사내가 팔짱을 끼고 서 있었다⁠. 노란 머리들이 목수 반장이라고 부르는 사내였다⁠. 목수 반장은 손나발 소리가 끝나기를 기다렸다가 한 걸음 앞으로 나왔다⁠.

“⁠소장님⁠, 월급은 언제 나옵니까⁠?⁠”

마당이 조용해졌다⁠. 발 구르는 소리가 멎었다⁠.

“⁠금요일⁠. 이번 주 금요일엔 반드시 넣습니다⁠.⁠”

“⁠지난달에도 금요일이었소⁠. 지지난달에도 금요일이었고⁠.⁠”

“⁠이번엔 진짜요⁠, 반장님⁠.⁠”

“⁠애들이 설 쇠러 내려가야 되는데 차비가 없다는데⁠. 소장님 금요일은 달력에 몇 번이나 있소⁠?⁠”

뒷줄에서 웃음이 터졌다가 금세 잦아들었다⁠. 웃음 끝에 한숨이 붙어 있었다⁠. 뒷줄의 젊은 노란 머리 하나가 소리쳤다⁠.

“⁠원청 본사 앞에 가서 드러누워요⁠, 우리 다 같이⁠!⁠”

“⁠그러면 원청이 우리 계약 끊어⁠. 계약 끊기면 밀린 거 아무도 못 받아⁠. 내가 받아 올게⁠. 금요일까지만 기다려 줘요⁠.⁠”

기만이 손나발을 내리고 고개를 숙였다⁠. 목수 반장은 한참 기만을 보다가 줄로 돌아갔다⁠. 늙은 암까마귀는 노란 머리들의 얼굴을 하나씩 훑었다⁠. 입술이 갈라져 있었다⁠. 볼이 패어 있었다⁠. 겨울 끝의 까마귀들 얼굴이 꼭 저랬다⁠. 땅이 얼고 배밭에 떨어진 것도 다 썩고 나면⁠, 무리는 서로의 볼을 보고 누가 먼저 쓰러질지 알았다⁠.

조회가 끝나자 노란 머리들은 흩어졌고 기만은 혼자 남아 담배를 꺼냈다⁠. 라이터가 켜지지 않았다⁠. 세 번 만에 불이 붙었다⁠. 늙은 암까마귀는 기만의 얼굴을 보며 낮게 울었다⁠. 무리 가운데 아직 기만의 얼굴을 모르는 까마귀는 없었다⁠.

*

흰 깃 수컷은 정오가 되기 전부터 함바 지붕 환기구 옆에서 기다렸다⁠. 함바는 공사장 사람들이 밥을 먹는 가건물이었고⁠, 정오가 되면 문이 쉴 새 없이 열렸다 닫혔다⁠. 문이 열릴 때마다 더운 김과 함께 사람 목소리와 쇠숟가락 소리가 쏟아져 나왔다⁠.

함바 문 안쪽 못에 기만의 점퍼가 매달려 있었다⁠. 기만은 요즘 밥을 먹지 않고 점퍼만 걸어 둔 채 계산대 앞에서 함바 아주머니와 말을 했다⁠. 점퍼 주머니 밖으로 쇠고리 하나가 삐죽 나와 있었다⁠. 쇠고리 끝에 작은 열쇠 둘과 은빛 물고기 장식이 매달려 있었다⁠. 물고기는 문이 열릴 때마다 들어오는 빛을 받아 반짝였다⁠.

“⁠소장님⁠, 밥값이 석 달 치예요⁠. 쌀집에서 나도 독촉받아요⁠.⁠”

“⁠금요일에 드릴게요⁠.⁠”

“⁠금요일⁠, 금요일⁠. 소장님 이름을 금요일로 바꾸쇼⁠.⁠”

문이 열렸다⁠. 노란 머리 셋이 들어갔다⁠. 흰 깃 수컷은 셋의 머리 위를 스쳐 함바 안으로 날아 들어갔다⁠. 함바 안은 덥고 시끄러웠다⁠. 긴 탁자마다 노란 안전모가 벗겨져 놓여 있었고⁠, 국그릇에서 김이 피어올랐다⁠. 흰 깃 수컷은 천장 아래를 한 바퀴 돌고 못 위의 점퍼로 내려앉았다⁠.

“⁠까마귀다⁠!⁠”

“⁠저거 소장님 열쇠 물었다⁠!⁠”

함바 아주머니가 국자를 휘둘렀다⁠. 국자 끝에서 김칫국물이 튀어 노란 머리 하나의 얼굴에 맞았다⁠. 흰 깃 수컷은 물고기 장식을 물고 탁자 위를 낮게 날았다⁠. 열쇠가 무거워 몸이 자꾸 아래로 처졌다⁠. 탁자의 국그릇들을 아슬아슬하게 스칠 때마다 노란 머리들이 숟가락을 든 채 몸을 젖혔다⁠. 한 사람은 소시지 하나를 던졌다⁠. 흰 깃 수컷은 소시지를 보았고⁠, 열쇠를 보았고⁠, 열쇠를 물고 있었다⁠.

“⁠문 닫아⁠, 문⁠!⁠”

문이 닫히기 직전에 흰 깃 수컷은 빠져나갔다⁠. 뒤에서 함바가 웃음으로 터졌다⁠. 기만이 문을 박차고 나왔을 때 흰 깃 수컷은 이미 야적장 너머 자갈 더미 위에 있었다⁠.

흰 깃 수컷은 자갈 더미 한가운데를 발로 긁었다⁠. 자갈 사이에 부리를 박고 돌을 하나씩 들어내어 옆으로 던졌다⁠. 구멍이 부리 길이만큼 깊어지자 열쇠를 넣고 자갈을 덮었다⁠. 덮고 나서 고개를 이리 기울이고 저리 기울였다⁠. 자갈 틈으로 물고기 꼬리가 조금 보였다⁠. 흰 깃 수컷은 다시 파냈다⁠. 더 깊이 묻었다⁠. 덮었다⁠. 이번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자 흰 깃 수컷은 불안해졌다⁠. 다시 파서 물고기가 그대로 있는지 확인하고⁠, 다시 덮었다⁠.

멀리서 기만이 점퍼 주머니를 뒤집으며 사방을 둘러보았다⁠. 기만의 눈이 자갈 더미에서 멈췄다가 지나갔다⁠. 사람은 자갈 위의 까마귀 하나를 보고도 무엇을 묻었는지 모른다⁠.

*

검댕은 크레인이 콘크리트 통을 들어 올리는 동안 스물세 층 형틀 위를 낮게 날았다⁠. 콘크리트를 붓기 전에 젊은 사내 하나가 형틀 안을 들여다보았다⁠. 다른 노란 머리들과 달리 사내의 안전모에는 줄무늬가 그어져 있었다⁠. 노란 머리들은 사내를 감리님이라고 불렀다⁠. 공사가 그림대로 되었는지 지켜보고 확인하는 사람이었다⁠.

감리원은 줄자를 꺼내 철근과 철근 사이를 쟀다⁠. 기만이 감리원의 등 뒤에 바짝 붙어 따라다녔다⁠. 감리원이 무릎을 꿇으면 기만도 쪼그려 앉았고⁠, 감리원이 일어나면 기만도 일어났다⁠.

“⁠소장님⁠, 저 세 군데 더 가야 돼요⁠. 감리원 하나가 현장 셋을 봐요⁠. 여기 한 시간밖에 못 있어요⁠.⁠”

“⁠한 시간이면 충분하십니다⁠.⁠”

검댕은 기만의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끊긴 왼쪽 눈썹⁠. 턱 밑의 점⁠. 검댕이 쉰 울음을 끌자 철근 끝마다 까마귀가 내려앉았다⁠. 무리가 한꺼번에 기만의 머리 위로 쏟아졌다⁠. 기만이 형틀 위에서 두 팔로 머리를 감쌌고⁠, 줄자를 든 감리원이 놀라 고개를 들었다⁠.

감리원의 눈이 까마귀를 따라 올라갔다⁠. 까마귀들 너머로 크레인 몸통이 보였다⁠. 크레인 몸통을 붙든 쇠팔이 아래층 벽에 박힌 자리에서 회색 가루가 실처럼 흘러내리고 있었다⁠. 감리원이 눈을 가늘게 떴다⁠.

“⁠저거 뭐예요⁠? 이음부에서 뭐가 떨어지는데⁠.⁠”

“⁠먼지입니다⁠. 위에서 타설하면 가루 날려요⁠.⁠”

“⁠새들이 왜 소장님만 쫓아요⁠?⁠”

“⁠제가 둥지를 뜯었습니다⁠. 원한 산 거죠⁠.⁠”

감리원은 웃지 않았다⁠. 무리가 물러나자 감리원은 형틀에서 내려와 크레인 발치로 걸어갔다⁠. 크레인 기사가 점심을 먹으러 막 사다리를 내려온 참이었다⁠. 검댕은 크레인 몸통 사다리에 앉아 두 사람을 내려다보았다⁠.

“⁠기사님⁠, 크레인 흔들려요⁠?⁠”

크레인 기사가 감리원을 보았다⁠. 감리원 어깨 너머로 형틀 위의 기만이 보였다⁠. 기만은 이쪽을 보고 있었다⁠. 크레인 기사의 이가 빠진 입이 열렸다가 닫혔다⁠.

“⁠…괜찮어요⁠.⁠”

“⁠입주 예정자 모임 게시판에 크레인 흔들리는 영상 올라왔다고 본사에서 전화 왔어요⁠. 바람도 없는데 흔들린다고⁠.⁠”

“⁠높은 데는 원래 좀 놀아요⁠. 괜찮어요⁠.⁠”

감리원은 태블릿에 무언가를 적고 고개를 끄덕였다⁠. 크레인 기사는 도시락을 열지 않고 다시 사다리를 올랐다⁠. 운전석에 앉아 한참 창밖을 보다가 밥을 한 숟갈 떠서 크레인 팔 끝으로 던졌다⁠. 둥지가 없는 난간에 밥덩이가 떨어져 부서졌다⁠. 검댕은 밥덩이 앞에 내려앉아 오래 보다가 먹었다⁠. 크레인 기사는 다음 숟갈을 떠서 또 던졌다⁠. 그날따라 밥이 많이 날아왔다⁠.

*

흰 깃 수컷은 열쇠를 묻은 밤 자갈 더미 위에서 잤다⁠. 묻어 둔 물고기 위였다⁠. 새벽 세 시⁠, 불 끈 트럭이 야적장으로 들어왔다⁠. 흰 깃 수컷은 눈을 반쯤 뜨고 보았다⁠.

기만이 지게차로 걸어갔다⁠. 지게차는 철근 다발을 쇠 갈퀴로 떠서 트럭에 올리는 노란 차였다⁠. 기만은 운전석에 올라앉아 점퍼 주머니를 뒤졌다⁠. 오른쪽⁠, 왼쪽⁠, 안주머니⁠, 바지 주머니⁠. 손전등을 켜 운전석 바닥을 비췄다⁠. 기만이 내려와 지게차 주위를 한 바퀴 돌았다⁠. 손전등 불빛이 자갈 더미를 스쳤다⁠. 흰 깃 수컷은 꼼짝하지 않았다⁠.

트럭 운전석에서 고물상 기사가 내렸다⁠. 털모자를 눈썹까지 눌러쓴 사내였다⁠.

“⁠소장님⁠, 뭐 해요⁠? 시간 없어요⁠.⁠”

“⁠지게차 열쇠가 없어⁠. 낮에 새가 물어 갔어⁠.⁠”

“⁠새가요⁠?⁠”

“⁠까마귀가⁠.⁠”

“⁠아이고⁠, 소장님⁠. 이번이 마지막이라매요⁠. 사람 불러 놓고 이게 뭐예요⁠.⁠”

“⁠다음 주에 한 번 더 와⁠.⁠”

“⁠우리 사장님이 돈 먼저 줬어요⁠. 물건 안 나오면 사장님이 소장님 회사로 전화한대요⁠. 원청이든 어디든⁠.⁠”

“⁠다음 주에 두 배로 실어 줄게⁠.⁠”

“⁠손으로라도 실어요⁠.⁠”

“⁠다발 하나가 몇 근인데 손으로 실어⁠.⁠”

고물상 기사가 트럭 문을 쾅 닫았다⁠. 트럭이 빈 짐칸으로 정문을 빠져나갔다⁠. 엉덩이가 높이 들려 있었다⁠. 짐칸이 가벼우면 트럭은 엉덩이를 들고 간다⁠. 흰 깃 수컷은 들린 엉덩이를 처음 보았다⁠.

기만은 혼자 지게차 옆에 서 있었다⁠. 손전등을 끄고 고개를 들어 크레인을 올려다보았다⁠. 크레인 몸통이 한 번 울었다⁠. 기만이 작게 중얼거렸다⁠.

“⁠니들이 나를 살리는 거냐⁠, 죽이는 거냐⁠.⁠”

흰 깃 수컷은 소리를 담아 두지 않았다⁠. 반짝이지 않는 소리였다⁠. 흰 깃 수컷은 몸 밑의 자갈을 발로 조금 더 끌어 덮었다⁠.

*

외눈 수컷은 아침부터 자갈 더미 둘레를 어슬렁거렸다⁠. 꽁지는 아직 반밖에 자라지 않았지만 걸음은 우두머리처럼 느렸다⁠. 흰 깃 수컷이 밤새 자갈 더미에서 잔 것을 외눈 수컷이 모를 리 없었다⁠. 외눈 수컷은 자갈을 부리로 툭툭 건드리며 흐리지 않은 눈으로 흰 깃 수컷을 곁눈질했다⁠.

흰 깃 수컷은 외눈 수컷이 노란 머리 하나의 도시락에 정신이 팔린 틈에 자갈을 파헤쳤다⁠. 물고기가 그대로 있었다⁠. 흰 깃 수컷은 물고기를 물고 평형추 틀로 날아올랐다⁠. 열쇠는 무거웠고⁠, 오르는 동안 두 번 쉬었다⁠. 반짝이를 숨기는 틈에는 라이터와 볼펜과 병뚜껑이 이미 가득했다⁠. 흰 깃 수컷은 잠깐 고민하다가 새 둥지 바닥⁠, 짝이 깔아 둔 비닐 끈 밑으로 물고기를 밀어 넣었다⁠.

짝이 돌아와 둥지에 앉았다가 벌떡 일어났다⁠. 배 밑에 딱딱한 것이 있었다⁠. 짝은 비닐 끈을 들추고 물고기를 부리로 끄집어내 둥지 가장자리로 밀었다⁠. 흰 깃 수컷이 날아와 물고기를 다시 바닥 가운데로 밀었다⁠. 짝이 다시 가장자리로 밀었다⁠. 흰 깃 수컷이 다시 가운데로 밀었다⁠. 세 번째에 짝은 흰 깃 수컷의 머리를 부리로 콕 쪼았다⁠.

결국 물고기는 둥지 가장자리 철사 사이에 끼었다⁠. 흰 깃 수컷은 물고기가 보이도록 고개를 기울여 보고는 만족해서 짧게 깍깍댔다⁠. 검댕은 둥지 위 난간에 앉아 모든 것을 보았고⁠, 아무 소리도 내지 않았다⁠. 둥지 바닥이 물고기만큼 무거워졌다⁠. 무리 가운데 열쇠가 어디 있는지 아는 까마귀는 넷이 넘지 않았다⁠.

*

이튿날 밤에도 트럭이 왔다⁠. 기만은 새 열쇠를 가지고 있었다⁠. 지게차 회사에서 낮에 사람이 와서 놓고 간 열쇠였다⁠. 늙은 암까마귀는 조명탑 꼭대기에서 철근 다발이 짐칸에 실리는 것을 보았다⁠. 하나⁠, 둘⁠, 셋⁠, 넷⁠, 많이⁠. 지난밤 못 실은 것까지 실었다⁠. 트럭 엉덩이가 지난번보다 깊이 내려앉았다⁠.

트럭이 정문 밖으로 나갔다⁠. 늙은 암까마귀는 조명탑을 박차고 날았다⁠. 무리 가운데 공사장 담장 밖까지 트럭을 따라간 까마귀는 아직 없었다⁠. 늙은 암까마귀는 담장을 넘었다⁠. 불 켜진 아파트 숲을 지나고⁠, 빈 상가 건물들을 지나고⁠, 신호등이 혼자 바뀌는 사거리를 지났다⁠. 트럭의 붉은 꼬리등이 어둠 속에서 두 개의 점으로 흔들렸다⁠.

신도시의 불빛이 끝나는 자리에서 길은 어둠으로 들어갔다⁠. 늙은 암까마귀는 날갯짓을 늦추지 않았다⁠. 아래로 지나가는 땅의 모양을 늙은 암까마귀는 알았다⁠. 낮은 둔덕⁠, 휘어진 개울⁠, 개울가의 미루나무 그루터기⁠. 몸이 먼저 알았다⁠. 이 길 끝에 무엇이 있었는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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