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5,652자)

흰 깃

까마귀는 잊지 않는다 · 강여울

흰 깃 수컷은 눈 덮인 컨테이너 지붕 꼭대기에서 페인트 깡통 뚜껑을 발로 끌어당겼다⁠. 밤사이 눈이 손가락 두 마디만큼 내렸다⁠. 지붕은 비스듬했고⁠, 흰 깃 수컷은 뚜껑 위에 두 발을 올리고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뚜껑이 미끄러졌다⁠. 바람이 깃 사이로 파고들었다⁠. 흰 깃 수컷은 짧게 깍깍깍 소리를 내며 지붕 끝까지 미끄러져 내려가다가 끝에서 날개를 펴고 공중으로 튀어 올랐다⁠. 뚜껑은 혼자 떨어져 바닥에서 쨍그랑 울렸다⁠.

다시 올라가 뚜껑을 끌어올리느라 해가 손톱만큼 움직였다⁠. 두 번째로 미끄러져 내려오다가 흰 깃 수컷은 지붕 아래 창 하나가 조금 열려 있는 것을 보았다⁠. 현장 사무실 창이었다⁠. 창틈으로 더운 김이 흘러나왔고⁠, 김 너머 책상 위에서 무언가 반짝였다⁠.

흰 깃 수컷은 뚜껑을 버리고 창틀에 내려앉았다⁠. 방 안은 따뜻했다⁠. 구석에서 붉은 난로가 웅웅거렸다⁠. 책상 위에 은빛 집게가 달린 볼펜이 있었고⁠, 동전 두 개가 있었고⁠, 동전 옆에 흰 안전모가 엎어져 있었다⁠. 안전모 옆에 사람 머리가 엎어져 있었다⁠.

기만이었다⁠. 기만은 접이식 의자에 앉은 채 팔을 베고 책상에 엎드려 잠들어 있었다⁠. 컨테이너 창은 밤새 밝았고⁠, 흰 깃 수컷은 밤새 켜진 창을 크레인 꼭대기에서 보았다⁠. 기만의 손 옆에는 종이가 잔뜩 흩어져 있었다⁠. 종이마다 작은 글자가 빽빽했고⁠, 몇 군데에 붉은 줄이 그어져 있었다⁠. 흰 깃 수컷은 종이에 관심이 없었다⁠. 종이는 반짝이지 않는다⁠.

흰 깃 수컷은 소리 없이 책상으로 건너가 볼펜을 물었다⁠. 볼펜은 생각보다 무거웠다⁠. 동전도 물고 싶었지만 부리는 하나뿐이었다⁠. 흰 깃 수컷이 볼펜을 내려놓고 동전을 물었다가⁠, 다시 동전을 내려놓고 볼펜을 무는 사이에 책상 위 휴대전화가 부르르 떨었다⁠.

기만이 고개를 들었다⁠. 눈이 반쯤 감긴 얼굴과 흰 깃 수컷의 얼굴이 손 한 뼘 거리에서 마주쳤다⁠. 기만의 볼에 종이 자국이 빨갛게 찍혀 있었다⁠. 눈 밑은 거뭇했고⁠, 끊긴 왼쪽 눈썹이 꿈틀했다⁠.

“⁠어⁠?⁠”

흰 깃 수컷은 볼펜을 문 채 날아올랐다⁠. 날아오른 자리가 하필 난로 위였다⁠. 더운 바람에 몸이 휙 솟구쳐 천장 형광등에 부딪혔다⁠. 형광등이 흔들렸다⁠. 기만이 일어나며 의자가 뒤로 넘어갔고⁠, 책상 위 종이컵이 쓰러져 식은 커피가 종이들 위로 쏟아졌다⁠.

“⁠야⁠, 이 새끼⁠, 야⁠! 내 서류⁠!⁠”

기만이 결재판을 휘둘렀다⁠. 흰 깃 수컷은 형광등을 차고 창으로 빠져나갔다⁠. 창틀에 볼펜 집게가 부딪혀 딱 소리가 났지만 부리는 놓지 않았다⁠. 등 뒤에서 휴대전화가 다시 떨었고⁠, 기만이 젖은 종이를 털면서 전화를 받았다⁠.

“⁠네⁠, 부장님⁠. 아닙니다⁠, 일어나 있었습니다⁠. 네⁠. 오늘 오후요⁠. 알겠습니다⁠.⁠”

흰 깃 수컷은 평형추 틀의 틈으로 날아 들어가 라이터 옆에 볼펜을 눕혔다⁠. 은빛 집게가 틈으로 들어오는 햇빛을 받아 반짝였다⁠. 흰 깃 수컷은 고개를 이리 기울이고 저리 기울이며 오래 보았다⁠. 부장님이라는 소리는 담아 두지 않았다⁠. 반짝이지 않는 소리였다⁠.

*

외눈 수컷은 정오 무렵 크레인 팔 끝으로 걸어 나갔다⁠. 밤새 내린 눈이 쇠 위에서 얼어 발바닥이 미끄러웠다⁠. 검댕이 둥지 앞에 앉아 있었다⁠. 둥지는 오늘도 아침에 두 번 기울었다⁠. 외눈 수컷은 두 번 다 보았다⁠.

외눈 수컷의 오른쪽 눈은 우윳빛으로 흐렸다⁠. 어릴 때 다른 공사장에서 쇠를 자르는 불꽃 옆을 날다가 쇳가루가 들어갔다⁠. 이후로 외눈 수컷은 공사장의 소리를 믿지 않았다⁠. 쇠를 가는 소리⁠, 쇠를 내려놓는 소리⁠, 쇠가 혼자 우는 소리⁠. 지난밤에는 쇠가 혼자 울었다⁠.

길 건너에 먼저 지은 아파트 숲이 있었다⁠. 회색 건물들 사이로 키 큰 나무들이 줄지어 서 있었다⁠. 밤에 손전등을 비추는 사람도⁠, 불 끈 트럭도 없었다⁠. 외눈 수컷은 지난가을부터 길 건너 나무들을 눈여겨보았다⁠. 외눈 수컷이 검댕 앞에서 목깃을 부풀렸다⁠. 꽁지를 부챗살처럼 펴고⁠, 고개를 숙여 절하듯 아래위로 흔들었다⁠. 우두머리 앞에서 이렇게 하는 것은 서열을 묻는 짓이다⁠.

검댕도 목깃을 부풀렸다⁠. 두툼하게 휜 검은 부리를 외눈 수컷에게 겨누고 꽁지를 폈다⁠. 무리에서 가장 큰 몸이 한층 더 부풀었다⁠. 두 수컷이 동시에 고개를 숙였다가 들었다⁠. 외눈 수컷이 한 걸음 다가갔다⁠. 검댕도 한 걸음 다가갔다⁠. 둘이 함께 세 번째 걸음을 내디딘 순간 발밑의 얼음이 둘을 한꺼번에 놓아 버렸다⁠.

두 수컷이 나란히 미끄러졌다⁠. 날개를 퍼덕이고 발톱으로 쇠를 긁으며 크레인 팔 아래로 매달렸다⁠. 외눈 수컷은 왼발로⁠, 검댕은 오른발로 같은 쇠막대에 걸쳐 거꾸로 대롱거렸다⁠. 쇠 난간 위의 젊은 까마귀들이 짧게 깍깍거렸다⁠. 웃음소리였다⁠. 흰 깃 수컷은 웃다가 물고 있던 병뚜껑을 떨어뜨렸다⁠.

검댕이 먼저 몸을 뒤집어 쇠 위로 올라갔다⁠. 외눈 수컷이 올라왔을 때 검댕은 이미 한 칸 높은 난간에 앉아 내려다보고 있었다⁠. 외눈 수컷은 고개를 낮췄다⁠. 낮추면서 흐리지 않은 왼쪽 눈으로 둥지를 보았다⁠. 둥지가 또 깃 한 올만큼 기울었다⁠. 검댕은 둥지를 보지 않고 외눈 수컷만 보았다⁠.

외눈 수컷은 물러났다⁠. 물러나서 아파트 숲 위를 한 바퀴 돌고 왔다⁠. 돌아올 때 젊은 까마귀 둘이 뒤를 따랐다⁠.

*

오후에 검은 차가 정문으로 들어왔다⁠. 검댕은 현장 사무실 컨테이너 지붕에 내려앉았다⁠. 차에서 파란 안전모를 쓴 사내가 내렸다⁠. 턱이 매끈했고 볼이 희었다⁠. 왼손 손목에서 커다란 시계가 해를 받아 번쩍였다⁠. 검댕 옆에서 흰 깃 수컷이 목을 길게 뺐다⁠.

기만이 사무실에서 뛰어나왔다⁠. 커피에 젖은 종이를 아직 손에 쥐고 있었다⁠.

“⁠부장님⁠, 먼 길 오셨네요⁠.⁠”

“⁠소장님⁠, 공정이 사흘 늦었어요⁠.⁠”

파란 안전모는 인사를 받지 않고 바로 말했다⁠. 목소리는 부드러웠고⁠, 부드러운 목소리 사이로 손가락이 하나씩 접혔다⁠.

“⁠3월 말에 골조 못 끝내면 분양 일정이 다 틀어져요⁠. 천 세대예요⁠. 그 사람들 날짜 보고 이사 계획 다 잡아 놨어요⁠.⁠”

“⁠부장님⁠, 기성금이 두 달째 안 들어왔습니다⁠. 공사한 만큼 주시는 돈 말입니다⁠. 애들 월급을 제가 어디서 냅니까⁠?⁠”

“⁠철근 단가 오른 거⁠, 원청도 떠안았어요⁠. 본사에서 공사비 다시 짜라고 내려온 걸 저도 받아만 온 거고요⁠.⁠”

“⁠두 번 깎으셨습니다⁠.⁠”

“⁠우리 사이에 이러지 맙시다⁠.⁠”

파란 안전모가 기만의 어깨를 두 번 두드렸다⁠. 시계가 또 번쩍였다⁠.

“⁠공정만 맞춰 주세요⁠. 방법은 소장님이 저보다 잘 아시잖아요⁠.⁠”

기만의 얼굴이 하얘졌다⁠. 이번에는 붉어지지 않았다⁠. 검댕은 하얘지기만 하는 얼굴을 처음 보았다⁠. 기만은 젖은 종이를 접었다 펴고⁠, 다시 접었다⁠.

검댕이 쉰 울음을 끌었다⁠. 철근 더미에서⁠, 조명탑에서⁠, 펜스 위에서 까마귀들이 몸을 일으켰다⁠. 무리가 기만의 머리 위로 내려왔다⁠. 늙은 암까마귀가 앞장섰고 외눈 수컷도 뒤따랐다⁠. 기만이 종이로 머리를 가렸다⁠. 종이가 찢어져 날렸다⁠.

파란 안전모는 한 걸음 물러나 웃었다⁠.

“⁠소장님 얼굴이 새들한테 찍혔네요⁠. 뭐 하셨어요⁠?⁠”

흰 깃 수컷이 무리에서 빠져나와 파란 안전모의 왼손을 노렸다⁠. 부리가 시계 줄을 찍었다⁠. 파란 안전모가 비명을 지르며 손을 털었다⁠. 흰 깃 수컷은 시계를 떼어 내지 못하고 공중에서 한 바퀴 돌았다⁠. 다시 노리려는 흰 깃 수컷을 늙은 암까마귀가 부리로 쪼아 쫓아냈다⁠.

“⁠이거 퇴치 안 해요⁠? 다음 달 원청 안전 점검인데⁠, 크레인에 새 둥지 나오면 감점이에요⁠.⁠”

“⁠오늘 업체 옵니다⁠.⁠”

파란 안전모는 손목을 문지르며 차로 돌아갔다⁠. 기만은 사무실 앞에 혼자 남아 찢어진 종이 조각을 주웠다⁠. 사무실 안 텔레비전에서 사람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지방의 건설사 하나가 또 문을 닫았다⁠, 하청 일꾼들이 본사 앞에 모였다⁠. 기만은 텔레비전을 껐다⁠.

*

해가 기울 무렵 하얀 화물차 한 대가 들어왔다⁠. 검댕은 조명탑 꼭대기에서 화물차를 보았다⁠. 짐칸에서 늙은 사내가 상자 하나를 내렸다⁠. 상자는 천으로 덮여 있었다⁠. 사내는 왼손에 팔꿈치까지 오는 두꺼운 가죽 장갑을 끼고 있었다⁠.

사내가 천을 걷었다⁠. 상자 안의 것이 장갑 위로 올라왔다⁠. 갈색 날개⁠, 노란 발⁠, 갈고리처럼 휜 부리⁠. 사냥에 쓰도록 사람이 길들인 매였다⁠. 매가 고개를 돌려 조명탑을 올려다보았다⁠.

검댕은 쉰 울음을 끌지 않았다⁠. 매 앞에서 까마귀가 내는 소리는 따로 있다⁠. 짧고 날카로운 깍깍깍⁠, 깍깍깍⁠. 무리가 한꺼번에 날아올라 크레인 꼭대기로 모였다⁠. 짝이 둥지에서 날개를 폈다⁠. 늙은 암까마귀는 날지 않고 가장 높은 난간에 그대로 앉아 매를 보았다⁠.

기만이 사무실에서 나와 늙은 사내 앞으로 걸어갔다⁠. 늙은 사내는 매를 장갑 위에 앉힌 채 고개를 들어 크레인을 한참 보았다⁠. 크레인 꼭대기의 까마귀들은 매를 보지 않았다⁠. 다들 기만을 보고 있었다⁠.

“⁠허⁠, 희한하네⁠. 까마귀가 매를 놔두고 사람 하나를 쳐다보는 건 처음 보네⁠.⁠”

“⁠새는 새고⁠, 쫓기만 하시면 됩니다⁠.⁠”

“⁠소장님⁠, 저것들한테 뭐 했어요⁠?⁠”

“⁠한 거 없습니다⁠.⁠”

“⁠까마귀는 얼굴을 기억해요⁠. 매로 쫓으면 며칠은 가요⁠. 근데 다시 와요⁠. 둥지는 뜯어도 얼굴은 못 뜯어요⁠.⁠”

늙은 사내는 웃었고⁠, 기만은 웃지 않았다⁠.

“⁠둥지는 내일 새벽에 기사가 뜯습니다⁠. 아저씨는 뜯는 동안 쫓아 주세요⁠.⁠”

“⁠쫓는 건 해요⁠. 죽이는 건 안 합니다⁠. 그건 미리 말해 둡니다⁠.⁠”

매잡이는 매를 상자에 넣고 천을 덮었다⁠. 천 밑에서 방울 소리가 한 번 울렸다⁠.

*

늙은 암까마귀는 해가 진 뒤 함바 지붕 위로 내려앉았다⁠. 함바는 공사장 사람들이 밥을 먹는 가건물이었고⁠, 지붕 환기구에서 늘 김치찌개 김이 올라왔다⁠. 환기구 옆은 겨울에도 따뜻했다⁠. 늙은 암까마귀는 환기구 온기에 배를 대고 아래 뒷문을 내려다보았다⁠.

뒷문 계단에 크레인 기사와 기만이 나란히 앉아 컵라면을 먹었다⁠. 크레인 기사는 국물을 마시다 말고 컵을 무릎에 내려놓았다⁠.

“⁠나는 못 뜯겄다⁠. 저것들 여기서 세 해를 났어야⁠.⁠”

“⁠새 둥지 하나 갖고 왜 이래⁠.⁠”

“⁠니가 뜯어⁠.⁠”

“⁠나는 크레인 못 올라가는 거 알잖아⁠. 높은 데서 다리 떨리는 거⁠.⁠”

기만이 젓가락으로 라면을 휘저었다⁠. 휘젓기만 하고 먹지는 않았다⁠.

“⁠원청 점검에서 둥지 나오면 크레인 정지야⁠. 정지 먹으면 니 일당도 날아가⁠. 다음 현장은 누가 꽂아 주는데⁠? 부장이 꽂아 줘⁠. 니 나이에 크레인 기사 부르는 데가 몇 군데나 남았냐⁠.⁠”

크레인 기사가 대답하지 않았다⁠. 늙은 암까마귀는 크레인 기사의 얼굴을 보았다⁠. 이가 하나 빠진 입이 오물거렸다⁠. 말을 삼키는 입이었다⁠. 크레인 기사는 국물을 마저 마시고 빈 컵을 손으로 구겼다⁠.

“⁠니 얼굴 보고 우는 거⁠, 저것들이 괜히 그러는 거 아니다⁠.⁠”

“⁠새가 뭘 알아⁠.⁠”

기만이 몸을 일으키다가 뒷문 위 지붕을 올려다보았다⁠. 늙은 암까마귀와 눈이 마주쳤다⁠. 늙은 암까마귀는 고개를 기만의 얼굴로 향한 채 꼼짝하지 않았다⁠. 기만이 먼저 눈을 돌렸다⁠.

*

새벽은 아직 어두웠다⁠. 검댕은 둥지 옆 난간에서 눈을 뜨고 있었다⁠. 짝은 둥지 바닥에 몸을 붙이고 있었다⁠. 사다리를 오르는 발소리가 쇠를 타고 꼭대기까지 울렸다⁠. 크레인 기사는 평소보다 해가 한 뼘 일찍 올라왔다⁠.

운전석 문이 열렸다⁠. 크레인 기사는 오늘 상자를 켜지 않았다⁠. 도시락도 열지 않았다⁠. 운전석 창이 끝까지 내려갔고⁠, 창밖으로 긴 장대 하나가 천천히 나왔다⁠. 장대 끝에 쇠갈고리가 달려 있었다⁠.

검댕은 크레인 기사의 얼굴을 보았다⁠. 이가 하나 빠진 입이 꾹 닫혀 있었다⁠. 검댕아 하고 부르던 입이었다⁠. 장대 끝 갈고리가 둥지의 철사 가닥에 닿았다⁠. 짝이 목깃을 세우고 부리를 딱딱 부딪쳤다⁠.

“⁠미안허다⁠. 내려가서 딴 데 지어라⁠, 잉⁠?⁠”

갈고리가 둥지를 끌어당겼다⁠. 검댕은 날개를 펴고 운전석 창으로 몸을 던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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