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5,707자)

얼굴

까마귀는 잊지 않는다 · 강여울

바람이 없는데 둥지가 기울었다⁠. 검댕은 잠결에 발가락을 오므려 철사 가닥을 움켜쥐었다⁠. 둥지는 타워크레인 팔 끝⁠, 쇠 난간 두 개가 엇갈리는 자리에 있었다⁠. 지난봄 검댕과 짝이 야적장에서 물어 온 가는 철사와 마른 가지로 엮은 둥지였다⁠. 사람들은 이 철사를 결속선이라고 불렀다⁠. 철근을 묶는 데 쓰는 철사였다⁠. 둥지 전체가 깃 한 올 두께만큼 아래로 쏠렸다가⁠, 숨 두 번 쉬는 동안 그대로 머물렀다가⁠, 천천히 제자리로 돌아왔다⁠.

짝이 목깃을 털며 낮게 그르렁거렸다⁠. 검댕은 부리로 짝의 머리 깃을 두 번 골라 주었다⁠. 까마귀끼리는 그렇게 괜찮다고 말한다⁠. 검댕은 정말 괜찮은지 알 수 없었다⁠.

붉은 불이 머리 위에서 깜빡였다⁠. 크레인 꼭대기의 붉은 불은 밤새 꺼지지 않았고⁠, 깜빡일 때마다 쇠 난간에 낀 서리가 붉게 물들었다가 도로 하얘졌다⁠. 아래로는 짓다 만 건물이 있었다⁠. 검댕의 눈에 건물은 나무였다⁠. 이레에 한 마디씩 자라는 회색 나무⁠. 몸통 안에 가지 대신 쇠막대를 품고 있다가⁠, 사람들이 쇠막대를 감싸 회색 진흙을 부으면 한 마디가 굳었다⁠. 나무가 자랄수록 크레인도 키가 컸고⁠, 크레인의 몸통은 건물 벽에 쇠팔 몇 개로 붙들려 있었다⁠. 둥지는 쇠팔들이 버텨 주는 높이에 있었다⁠.

야적장의 조명탑 아래로 트럭 한 대가 굴러 들어왔다⁠. 불을 끈 트럭이었다⁠. 정문 옆 경비실 창은 어두웠다⁠. 트럭이 철근 더미 옆에 멈추자 흰 안전모를 쓴 사내 하나가 컨테이너 그늘에서 나왔다⁠. 검댕은 고개를 한쪽으로 기울였다⁠. 까마귀는 한쪽 눈으로 볼 때 더 멀리 본다⁠.

철근 다발이 짐칸으로 올라갔다⁠. 하나⁠, 둘⁠, 셋⁠, 넷⁠. 다발이 하나 올라갈 때마다 트럭 엉덩이가 조금씩 내려앉았다⁠. 검댕은 이 깊이를 안다⁠. 가는 가지에 내려앉으면 가지가 딱 그만큼 휘었다⁠. 넷이 넘어가자 검댕은 세기를 그만두었다⁠. 넷을 넘으면 그냥 많다⁠. 트럭 엉덩이는 많이 내려앉았다⁠.

흰 안전모가 고개를 들었다⁠. 라이터 불이 켜졌다⁠. 불빛이 얼굴을 아래에서 비췄다⁠. 왼쪽 눈썹 끝이 끊겨 있었다⁠. 끊긴 자리에 털이 나지 않은 하얀 선이 비스듬히 지나갔다⁠. 턱 밑에 콩알만 한 점이 있었고⁠, 담배를 문 입술 사이로 입김과 연기가 한꺼번에 나왔다⁠. 사내는 크레인을 올려다보지 않았다⁠. 사내가 올려다본 것은 경비실이었다⁠.

트럭이 처음 온 것은 은행잎이 다 떨어진 무렵이었다⁠. 둥지가 처음 기운 것도 은행잎이 다 떨어진 무렵이었다⁠. 검댕은 둘을 나란히 놓고 오래 보았다⁠. 사내는 나무의 가지를 밤에 빼 가고 있었다⁠. 까마귀도 둥지를 지으려고 남의 가지를 훔친다⁠. 검댕도 야적장에서 결속선을 훔쳤다⁠. 다만 검댕은 한 번에 한 가닥씩 물어 왔고⁠, 사내는 한 번에 많이 실어 갔다⁠.

*

일곱 시에 사이렌이 울렸다⁠. 해가 신도시 아파트 숲 위로 올라와 크레인 꼭대기를 먼저 비췄다⁠. 검댕은 둥지 끝에서 날개를 펴 밤새 낀 서리를 털었다⁠. 온몸이 윤기 나는 검정이었고⁠, 햇빛이 닿는 자리마다 깃에 푸른 기가 돌았다⁠. 두툼하게 휜 검은 부리 위로 어두운 눈이 박혀 있었다⁠. 검댕은 무리에서 가장 큰 큰부리까마귀 수컷이었다⁠. 날개를 다 펴면 쇠 난간 두 칸을 덮었고⁠, 무리는 하늘에서도 넓은 날개를 보고 우두머리를 알아보았다⁠. 검댕은 날개를 접고 깃을 부풀린 채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야적장 앞 마당에 노란 안전모가 가득 모였다⁠. 까마귀 무리보다 훨씬 큰 무리였다⁠. 노란 머리들이 줄을 맞추고⁠, 앞에서 흰 안전모 하나가 손나발에 대고 소리를 질렀다⁠. 검댕은 소리보다 얼굴을 보았다⁠. 왼쪽 눈썹이 끊긴 얼굴이었다⁠.

노란 머리들은 눈썹 끊긴 얼굴을 소장이라고 불렀다⁠. 소장님 오늘 몇 층 칩니까⁠, 소장님 형틀 언제 들어옵니까⁠. 검댕은 소장이라는 소리를 담아 두었다⁠. 같은 얼굴에 같은 소리가 여러 번 붙으면 소리가 곧 얼굴이 된다⁠.

펜스에는 커다란 천이 덮여 있었다⁠. 천 위에는 다 지은 건물들과 웃는 사람들 그림이 있었다⁠. 펜스 밖 길가에 여자 하나가 멈춰 서서 손바닥만 한 판을 들어 건물을 찍었다⁠. 여자는 일주일에 한 번씩 와서 같은 자리에서 같은 판을 들었다⁠.

크레인 기사가 몸통 사다리를 타기 시작했다⁠. 아래에서 꼭대기까지 오르는 데 해가 한 뼘 움직였다⁠. 기사는 중간쯤 쇠팔이 박힌 높이에서 한 번 쉬었고⁠, 사다리에 이마를 대고 숨을 골랐다⁠. 운전석 문이 열리자 작은 상자에서 사람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철근값이 올해 들어 또 올랐다⁠, 전국 공사장 여러 곳이 공사를 멈췄다⁠. 검댕은 상자에서 나온 소리의 뜻을 몰랐다⁠. 크레인 기사는 상자를 껐다⁠.

“⁠검댕아⁠, 밥 묵자⁠.⁠”

검댕은 이 소리를 안다⁠. 검댕이라는 소리는 크레인 기사의 입에서 처음 나왔고⁠, 크레인 기사가 이 소리를 내면 밥이 날아왔다⁠. 크레인 기사가 도시락 뚜껑을 열고 숟가락으로 밥을 한 덩이 떠서 크레인 팔 끝으로 던졌다⁠. 멸치 두 마리가 밥알에 박혀 있었다⁠. 검댕은 밥덩이를 받아 짝에게 먼저 넘겼다⁠.

크레인 기사가 숟가락을 놓는 사이 날개에 흰 깃이 하나 난 젊은 수컷이 운전석 창틀에 내려앉았다⁠. 흰 깃 수컷의 눈이 계기판 위로 가서 멈췄다⁠. 반짝이는 것이 있었다⁠. 크레인 기사가 담배를 찾느라 고개를 숙인 순간 흰 깃 수컷이 라이터를 물고 날았다⁠.

“⁠야⁠! 그거 내 라이터여⁠! 야⁠, 이놈아⁠!⁠”

흰 깃 수컷은 평형추 틀의 틈으로 쏙 들어갔다⁠. 크레인 팔 반대편 끝에 매달린 무거운 콘크리트 덩이들 사이⁠, 흰 깃 수컷이 반짝이를 숨겨 두는 틈이었다⁠. 병뚜껑과 깡통 고리와 은박지가 이미 틈 안에 쌓여 있었다⁠. 크레인 기사가 창밖으로 머리를 내밀고 한참 평형추 틈을 노려보다가⁠, 허허 웃고 말았다⁠.

“⁠니 각시한테 줄라고⁠? 불도 못 붙이는 것이⁠.⁠”

한쪽 눈이 흐린 젊은 수컷이 밥알 몇 톨을 노리고 검댕 옆으로 슬금슬금 다가왔다⁠. 검댕은 목깃을 부풀리고 꽁지를 부챗살처럼 폈다⁠. 외눈 수컷은 고개를 숙이며 한 걸음 물러났다⁠. 물러나면서도 흐리지 않은 눈 하나로 검댕을 끝까지 보았다⁠.

*

해가 높아졌을 때 크레인이 멈췄다⁠. 크레인 기사가 무전기에 대고 소장을 불렀다⁠. 검댕은 짝을 둥지에 두고 아래로 내려갔다⁠. 야적장 철근 더미 위에 내려앉자 쇠의 냉기가 발바닥으로 올라왔다⁠. 크레인 발치에서 두 사람이 마주 서 있었다⁠. 사다리를 다시 내려온 크레인 기사와 흰 안전모였다⁠.

“⁠어젯밤에 스물한 층 이음에서 쇠 우는 소리가 났어야⁠. 운전석이 혼자 흔들려⁠.⁠”

“⁠바람이겄지⁠.⁠”

“⁠바람 한 점 없었당께⁠. 니도 봤잖여⁠, 연기가 똑바로 올라간 거⁠.⁠”

흰 안전모의 얼굴이 하얘졌다가 금세 붉어졌다⁠. 사람 얼굴은 겁이 나면 하얘지고 화가 나면 붉어진다⁠. 둘이 한꺼번에 오는 얼굴은 드물다⁠. 검댕은 고개를 기울여 흰 안전모의 얼굴을 보았다⁠. 끊긴 왼쪽 눈썹⁠. 턱 밑의 점⁠. 새벽 라이터 불빛 아래의 얼굴이었다⁠.

“⁠점검 날 당겨 줄게⁠. 그 얘기는 딴 데 하지 마라⁠.⁠”

“⁠딴 데 어디⁠?⁠”

“⁠원청이고 감리고⁠.⁠”

“⁠기만아⁠.⁠”

크레인 기사가 흰 안전모를 기만이라고 불렀다⁠. 다른 사람은 모두 소장이라고 불렀고⁠, 기만이라고 부르는 사람은 크레인 기사 하나였다⁠. 검댕은 두 소리를 같은 얼굴에 붙였다⁠. 도기만⁠. 노란 머리들이 가끔 성까지 붙여 도 소장이라고 불렀다⁠.

“⁠니 요새 밤에 뭐 하냐⁠.⁠”

기만이 대답하지 않았다⁠. 기만은 크레인 몸통을 손바닥으로 한 번 두드렸다⁠. 쇠가 웅 하고 울었다⁠. 웅 소리가 꼭대기까지 올라가는 동안 기만은 크레인 기사의 눈을 피해 신발 끝을 보았다⁠.

“⁠기사는 크레인만 봐⁠. 크레인은 내가 볼라니까⁠.⁠”

검댕은 부리를 벌렸다⁠. 목 안 깊은 데서 쉰 울음이 길게 끌려 나왔다⁠. 까아아악⁠. 한 번⁠, 두 번⁠, 세 번⁠. 까마귀끼리 이 소리는 위험한 얼굴을 알린다⁠. 철근 더미 위로 까마귀들이 하나둘 내려앉았다⁠. 외눈 수컷이 먼저 왔고⁠, 흰 깃 수컷이 라이터를 숨기고 왔고⁠, 늙은 암까마귀가 맨 나중에 와서 가장 높은 철근 끝에 앉았다⁠.

검댕이 날았다⁠. 기만의 머리 위를 스치듯 지나며 발톱으로 흰 안전모를 걷어찼다⁠. 안전모가 벗겨져 바닥을 굴렀다⁠. 외눈 수컷이 뒤따라 내리꽂히자 기만이 두 팔로 머리를 감싸고 주저앉았다⁠. 안전모는 굴러서 흙탕물 웅덩이에 빠졌다⁠.

마당 건너에서 노란 머리들이 웃음을 터뜨렸다⁠.

“⁠소장님⁠, 새가 소장님만 찍었네⁠! 관상에 새똥이 들었나 봐요⁠!⁠”

“⁠어제 까마귀 고기 드셨어요⁠?⁠”

기만이 일어나 웅덩이에서 안전모를 건졌다⁠. 흙물이 턱 밑의 점으로 흘러내렸다⁠. 기만이 야적장 바닥에서 짧은 철근 토막 하나를 집어 던졌다⁠. 토막은 까마귀들 사이 허공을 지나 펜스에 맞고 떨어졌다⁠. 철근 더미 위의 까마귀는 한 마리도 날지 않았다⁠. 다들 고개를 기울여 기만의 얼굴을 보고 있었다⁠.

“⁠저 새끼들이 왜 나만⁠…⁠.⁠”

크레인 기사는 웃지 않았다⁠. 크레인 기사는 크레인 꼭대기를 올려다보았다⁠.

*

늙은 암까마귀는 해가 기울 때 무리를 불렀다⁠. 크레인 꼭대기 쇠 난간 위로 까마귀들이 줄지어 앉았다⁠. 늙은 암까마귀는 가장 끝에 앉아 정문을 내려다보았다⁠. 퇴근하는 노란 머리들 사이로 흰 안전모가 걸어 나오고 있었다⁠.

늙은 암까마귀는 고개를 흰 안전모의 얼굴로 향하고 꼼짝하지 않았다⁠. 부리 끝도 꽁지도 움직이지 않은 채 낮고 긴 쉰 울음을 끌었다⁠. 젊은 까마귀들이 늙은 암까마귀의 고개가 향한 곳을 보았다⁠. 흰 안전모⁠. 왼쪽 눈썹⁠. 하나가 따라 울었고⁠, 둘이 따라 울었고⁠, 곧 난간 위의 모든 까마귀가 한 얼굴을 보며 울었다⁠.

함께 울며 본 얼굴은 잊히지 않는다⁠. 늙은 암까마귀가 어미에게 배운 대로였다⁠. 어미는 또 제 어미에게 배웠다⁠. 한 번 운 까마귀는 몇 해가 지나도 같은 얼굴을 보면 운다⁠. 울었던 까마귀가 낳은 새끼도⁠, 새끼가 본 적 없는 얼굴을 보며 운다⁠. 새끼는 어미가 우는 얼굴을 보고 따라 운다⁠.

늙은 암까마귀는 이 땅이 회색 나무로 덮이기 전을 안다⁠. 크레인이 선 자리는 과수원이었다⁠. 가을이면 떨어진 배가 풀숲에서 달게 썩었고⁠, 까마귀들은 배밭 가장자리 미루나무에 둥지를 틀었다⁠. 과수원 주인 아들이 총을 들고 나타나던 해⁠, 늙은 암까마귀의 어미가 총 든 얼굴을 가르쳤다⁠. 사람들이 산을 깎고 미루나무를 베고 배밭을 밀던 해에도 무리는 총 든 얼굴을 보며 울었다⁠. 총 든 얼굴은 이제 오지 않는다⁠. 늙은 암까마귀는 아직 총 든 얼굴을 안다⁠.

해 질 녘 하늘로 북쪽에서 내려온 떼까마귀 무리가 지나갔다⁠. 몇 천 마리가 한 덩이로 뭉쳐 연기처럼 휘었다⁠. 겨울마다 북쪽 먼 땅에서 내려와 들판을 따라 남쪽으로 가는 무리였다⁠. 젊은 까마귀들이 고개를 들어 떼까마귀를 보았다⁠. 늙은 암까마귀는 고개를 들지 않았다⁠. 늙은 암까마귀는 정문 밖으로 멀어지는 흰 안전모를 끝까지 보았다⁠.

*

밤이 깊어 조명탑이 반쯤 꺼졌을 때 검댕은 아래에서 올라오는 빛에 눈을 떴다⁠. 손전등 불빛이 크레인 몸통을 타고 천천히 올라오고 있었다⁠. 쇠팔이 박힌 벽 근처에서 빛이 한참 머물렀다⁠. 빛은 다시 위로 올라와 크레인 팔을 따라 미끄러졌고⁠, 둥지에서 멈췄다⁠.

검댕은 둥지 끝에 서서 빛을 마주 보았다⁠. 눈이 부셨다⁠. 짝이 둥지 바닥에 몸을 낮추고 날개를 반쯤 폈다⁠. 빛 너머는 보이지 않았다⁠. 검댕은 빛을 쥔 손이 누구의 손인지 안다⁠. 빛 아래에서 담배 끝이 붉게 타올랐고⁠, 라이터 불빛이 한 번 더 얼굴을 비췄다⁠.

기만이 휴대전화를 귀에 댔다⁠. 소리는 바람을 타고 올라왔다⁠.

“⁠새 쫓는 업체 하나 알아봐⁠. 내일 당장⁠. … 쫓는 걸로 안 돼⁠. 둥지째 뜯어야지⁠. 크레인 꼭대기에 있어⁠. 아니⁠, 기사한테 시킬 거야⁠.⁠”

손전등이 꺼졌다⁠. 둥지가 또 기울었다⁠. 이번에는 깃 두 올 두께만큼 쏠렸다⁠. 짝이 철사 가닥을 부리로 물고 버텼다⁠. 검댕은 짝의 등 위로 날개를 덮었다⁠. 아래 어둠 속에서 기만이 담배를 바닥에 비벼 끄고 컨테이너로 걸어 들어갔다⁠. 컨테이너 창에 불이 켜졌고⁠, 새벽까지 꺼지지 않았다⁠.

1화는 어땠나요?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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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막차승객2026.10.31· 1화

    바람이 없는데 둥지가 기울었다는 첫 줄이 너무 무서워요. 까마귀가 먼저 안다는 게 소름이에요.

    • 강여울작가2026.10.31

      높은 데 사는 새가 먼저 알아채는 게 있더라고요. 검댕은 그 기울기를 몸으로 셉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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