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화(5,415자)

벌금은 국물로

이세계 편의점 야간 알바는 시급이 금화다 · 채온유

“⁠이십 분만요⁠.⁠”

다율은 그렇게 말하고 카샨이 대답하기도 전에 형광등 쪽으로 몸을 돌렸다⁠. 하르펜 사람은 앞문을 못 나가도 서울 사람은 나갈 수 있었다⁠. 원룸까지 뛰면 칠 분이었다⁠. 도팔석의 손에서 대걸레를 빼앗아 문간에 가로로 걸쳐 두고⁠, 점장의 어깨를 두 번 두드렸다⁠.

“⁠점장님이 지키고 계세요⁠. 저분이 경비대장이에요⁠. 들어오시면 저울 값 받으세요⁠.⁠”

“⁠나 저울 없는데⁠?⁠”

“⁠그럼 아무거나 받으세요⁠.⁠”

다율은 자동문을 빠져나가 슬리퍼 바람으로 신림동 새벽 골목을 달렸다⁠. 숨이 목에서 쇠 맛을 냈다⁠. 원룸 계단을 두 칸씩 올라 침대 밑에서 바나나우유 상자를 끌어냈다⁠. 상자 안에서 금화와 은화가 쏟아지는 소리가 났다⁠. 상자를 통째로 안고 다시 뛰었다⁠.

*

밤새마트 창고 철문 앞에서 도팔석은 대걸레를 사이에 두고 경비대장과 마주 서 있었다⁠. 하나는 문 안의 타일 위에⁠, 하나는 문밖의 돌길 위에⁠. 사이에는 문턱 하나와 눈발과 쇠사슬에 묶인 드워프가 있었다⁠.

삼 분쯤 아무도 말하지 않았다⁠. 도팔석은 이 삼 분을 견디지 못하는 사람이었다⁠. 매장으로 들어가 주류 냉장고에서 소주 한 병과 종이컵 두 개를 들고 돌아왔다⁠.

“⁠지방에서 오셨으면 한잔하셔야지⁠.⁠” 도팔석은 문턱 앞에 쪼그려 앉아 종이컵에 소주를 따랐다⁠. “⁠저울 값 대신이에요⁠. 우리 가게 대표 상품⁠.⁠”

카샨은 종이컵을 내려다봤다⁠. 맑은 물 같은 것이 출렁거렸다⁠. 이것을 받아 냄새를 맡고⁠, 미간을 좁히고⁠, 단숨에 들이켰다⁠. 그리고 한참 동안 아무 소리도 내지 않았다⁠. 목울대만 위아래로 움직였다⁠.

“⁠독이냐⁠?⁠” 카샨이 쉰 목소리로 물었다⁠.

“⁠독이면 내가 먼저 죽지⁠.⁠” 도팔석은 자기 잔을 비웠다⁠. “⁠이게 원래 이래요⁠. 두 번째부터 달아⁠.⁠”

두 번째 잔에서 카샨의 어깨가 내려갔다⁠. 세 번째 잔에서 카샨은 투구를 바닥에 내려놓았다⁠. 그롬바가 쇠사슬을 철렁거리며 나도 한 잔 달라고 했고⁠, 카샨은 사슬 끝을 쥔 채로 자기 잔을 드워프에게 건넸다⁠. 도팔석은 경비대장이 문턱 너머로 내민 빈 종이컵을 받아 들며 이 손을 봤다⁠. 장갑 사이로 드러난 새끼손가락 끝이 검었다⁠. 얼어서 죽은 살 색이었다⁠.

“⁠거기 겨울은 어떻게 나요⁠?⁠”

“⁠안 나⁠. 버티지⁠.⁠” 카샨은 네 번째 잔을 받았다⁠. 말이 길어지기 시작했다⁠. “⁠내 밑에 마흔이 있다⁠. 녹봉은 다섯 달째 안 온다⁠. 바르텐이 주는 은화로 빵은 산다⁠. 땔감은 못 산다⁠. 마정석 값을 바르텐이 정하니까⁠. 그러니까 바르텐이 달라는 대로 하는 거다⁠. 너는 안 그러냐⁠?⁠”

도팔석은 대답 대신 소주병을 들여다봤다⁠. 반쯤 남아 있었다⁠. 병을 문턱 위⁠, 정확히 한가운데에 내려놓았다⁠.

*

다율이 돌아왔을 때 두 사람은 같은 병을 사이에 두고 각자 반대편에 앉아 있었다⁠. 바나나우유 상자를 문턱 앞에 뒤집었다⁠. 금화와 은화가 타일과 돌길 양쪽으로 쏟아졌다⁠. 셋이 같이 셌다⁠. 카샨은 경비대장답게 빨랐고⁠, 도팔석은 계산원답게 빨랐다⁠. 다율은 둘이 센 수를 맞춰 보는 사람이었다⁠.

금화 열여섯 닢⁠. 은화를 금화로 치면 반 닢이 더 나왔다⁠. 서른까지 열세 닢 반이 모자랐다⁠.

“⁠깎아 줄 수 없다⁠.⁠” 카샨이 말했다⁠. 소주 냄새가 났지만 목소리는 맑았다⁠. “⁠바르텐이 정한 값이다⁠.⁠”

“⁠안 깎으셔도 돼요⁠.⁠” 다율은 손을 털고 일어섰다⁠. “⁠나머지는 물건으로 낼게요⁠. 경비대 마흔 명⁠, 이레 동안⁠, 밤마다 컵라면 하나에 핫팩 둘⁠. 하르펜 시장값으로 치면 금화 열넷 넘어요⁠. 그롬바 씨가 증인이고요⁠.⁠”

“⁠넘네⁠.⁠” 쇠사슬에 묶인 그롬바가 즉시 말했다⁠. “⁠열다섯도 넘네⁠. 내가 팔면 열여섯⁠.⁠”

카샨은 땅에 놓인 금화를 내려다봤다⁠. 그리고 다율을 봤다⁠. “⁠내 부하들을 국물로 사겠다는 거냐⁠?⁠”

“⁠국물값은 대장님 앞으로 달아 드릴게요⁠.⁠” 다율은 대차를 끌어다 문턱에 걸쳤다⁠. “⁠못 믿으시겠으면 지금 막사로 가요⁠. 마흔 명한테 직접 물어보세요⁠. 혀가 대답할 거예요⁠.⁠”

*

경비대 막사는 성문 옆 돌벽에 붙은 긴 집이었다⁠. 문을 열자 안쪽이 바깥보다 크게 따뜻하지 않았다⁠. 가운데 화로 하나에 마정석 두 덩이가 겨우 타고 있었다⁠. 마흔 명이 이 화로 둘레에 겹겹이 누워 있었다⁠. 담요를 둘씩 나눠 덮었고⁠, 장화를 벗지 않은 채였다⁠. 장화를 벗으면 언 발이 부어 아침에 다시 들어가지 않았다⁠.

다율은 화로 위에 막사의 쇠솥을 걸고 보온병 물과 눈 녹인 물을 부었다⁠. 물이 끓는 동안 대차의 컵라면 상자를 뜯었다⁠. 경비병들은 처음에는 누운 채로 고개만 돌렸다⁠. 그롬바가 삼 분짜리 휴대폰 타이머를 화로 옆 돌 위에 세우자⁠, 한 명이 일어나 앉았다⁠. 다음 다섯이⁠. 화면의 숫자가 일 분 아래로 내려갈 때는 막사 안의 마흔 명이 다 일어나 있었다⁠.

첫 그릇은 어제 안뜰에서 은화를 깨물어 보던 스무 살짜리 경비병에게 갔다⁠. 경비병은 국물을 마시고 기침을 했다⁠. 매운 기가 목에 걸렸다⁠. 기침을 하면서도 그롬바는 그릇을 놓지 않았다⁠. 다율은 그롬바의 장화 안에 핫팩 하나를 밀어 넣었다⁠. 젊은 경비병이 발가락을 움직였다⁠. 처음에는 조금⁠, 다음에는 장화 가죽이 들썩일 만큼⁠.

“⁠대장님⁠.⁠” 경비병은 카샨을 보지 않고 자기 장화를 보며 말했다⁠. “⁠발가락이 있어요⁠.⁠”

막사 안에 웃음이 퍼졌다⁠. 처음에는 낮게⁠, 다음에는 크게⁠. 마흔 개의 그릇에서 김이 올라 화로 위 천장의 그을음을 적셨다⁠. 핫팩을 겨드랑이에 끼운 늙은 병사 하나가 그롬바에게 이 화염석은 얼마냐고 물었고⁠, 드워프는 쇠사슬을 철렁거리며 시장값부터 불렀다⁠.

카샨은 화로 맞은편에 다율과 마주 앉아 있었다⁠. 컵라면을 받지 않았다⁠.

“⁠이레다⁠.⁠” 카샨이 말했다⁠. “⁠이레가 지나면 네 국물은 끝난다⁠. 바르텐의 은화는 다음 달에도 온다⁠.⁠”

“⁠이레 지나면 또 팔면 되죠⁠. 저 밤마다 와요⁠.⁠”

“⁠네가 이 막사에 국물을 들였다는 게 바르텐 귀에 들어가면⁠, 다음 달 은화는 안 온다⁠.⁠” 카샨은 장갑을 벗었다⁠. 새끼손가락과 약지 끝이 검었다⁠. 카샨은 이 손을 화로에 쬐었다⁠. “⁠그러면 이 마흔을 네가 먹여라⁠. 밤마다 오든⁠, 문에 갇히든⁠.⁠”

다율은 셈을 했다⁠. 컵라면 하나에 천오백 원⁠, 마흔 명이 서른 날이면⁠, 핫팩까지 치면⁠. 이 돈은 다율의 체크카드에서⁠, 다음 달 대출 상환금에서 나갔다⁠. 화로 불빛 속에서 이 숫자를 끝까지 세고 나서 대답했다⁠.

“⁠할게요⁠.⁠”

카샨은 한참 다율을 봤다⁠. 그러고는 허리춤의 열쇠 꾸러미를 풀어 그롬바 쪽으로 던졌다⁠. 쇠사슬 자물쇠 열쇠였다⁠. 그제야 화로 옆의 남은 컵라면 하나를 집어 뚜껑을 열었다⁠. 국물이 식어 있었다⁠. 이것을 그대로 마셨다⁠.

막사 문이 열린 건 이때였다⁠. 찬바람과 함께 털가죽 외투가 들어왔다⁠. 바르텐은 혼자였다⁠. 문간에 서서 막사 안을 천천히 둘러봤다⁠. 화로 위 쇠솥⁠, 바닥에 쌓인 빈 종이 그릇⁠, 장화 속에서 발가락을 꼼지락거리는 경비병들⁠, 그리고 화로 앞에 마주 앉은 카샨과 다율⁠.

경비병들이 하나둘 그릇을 내려놓았다⁠. 웃음이 멎었다⁠. 스무 살짜리가 핫팩을 장화에서 꺼내려다 말았다⁠.

“⁠국물 냄새가 성문까지 나더군⁠.⁠” 바르텐은 화로 쪽으로 걸어와 쇠솥 안을 들여다봤다⁠. 남은 국물 위에 기름이 떠 있었다⁠. “⁠경비대장⁠. 다음 달 은화는 없소⁠.⁠”

카샨은 일어나지 않았다⁠. 다 마신 종이 그릇을 손에 쥔 채 바르텐을 올려다봤다⁠. “⁠이 드워프를 풀었다고⁠?⁠”

“⁠드워프는 상관없소⁠. 벌금은 받았으니⁠.⁠” 바르텐은 다율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대가 이 마흔을 국물로 샀소⁠. 그러니 다음 달부터는 그대가 사시오⁠. 나는 비싼 물건을 남에게 넘길 때 깎아 주지 않소⁠.⁠”

“⁠제가 산 거 아니에요⁠. 대장님 앞으로 달아 놨어요⁠.⁠”

“⁠달아 둔 값은 누군가 치르오⁠.⁠” 바르텐은 외투 깃을 여몄다⁠. 막사 안의 마흔 쌍의 눈이 바르텐을 따라 움직였다⁠. 바르텐은 이 눈들을 하나씩 마주 봤다⁠. 피하지 않았다⁠. “⁠그대가 이 도시의 마흔을 샀으니⁠, 나는 그대 도시의 가게 하나를 사겠소⁠. 공평하지 않소⁠.⁠”

바르텐은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나갔다⁠. 문이 닫히자 화로 불이 한 번 크게 흔들렸다⁠. 아무도 다시 그릇을 들지 않았다⁠. 다율은 쇠솥에 남은 국물을 국자로 떠서 스무 살짜리 경비병의 빈 그릇에 부었다⁠. 경비병이 그릇을 다시 들었다⁠. 다음 사람이⁠, 다음 사람이⁠.

*

쥐꼬리 골목으로 돌아오는 길에 그롬바는 걸음을 멈췄다⁠. 손목에 쇠사슬 자국이 붉게 남아 있었다⁠. 허리띠에서 작은 칼을 꺼내 바르텐의 짐꾼들에게 뜯겨 풀린 수염 한 갈래를 밑동에서 잘랐다⁠. 붉은 수염이 손바닥 위에서 눈발에 젖었다⁠.

“⁠드워프는 동업할 때 수염을 나누네⁠.⁠” 그롬바는 이 수염을 다율의 대차 손잡이에 감아 매듭을 지었다⁠. 점장의 헤드랜턴 옆이었다⁠. 손가락이 굵어 매듭이 두 번 풀렸고⁠, 세 번째에 묶였다⁠. “⁠이제 자네 손해는 내 수염 손해고⁠, 자네 이문은 내 수염 이문이네⁠. 내 조상이 이 수염을 보고 있어⁠.⁠”

“⁠수염이 계약서예요⁠?⁠”

“⁠계약서는 태우면 끝나지⁠. 수염은 다시 자라⁠.⁠” 그롬바는 남은 수염 두 갈래를 쓰다듬었다⁠. “⁠그러니까 자네가 망해도 나는 다시 자라네⁠. 좋은 동업이지⁠.⁠”

다율은 웃다가 손잡이에 묶인 수염을 엄지로 한 번 쓸었다⁠. 거칠고 차가웠다⁠. 이날 밤 번 돈은 없었다⁠. 금화 열여섯 닢이 나갔고⁠, 마흔 명의 이레가 다율 앞으로 달렸고⁠, 드워프 하나가 다율 편이 됐다⁠.

*

다음 날 낮⁠, 다율은 다솔을 데리고 신림역 뒤 식자재 도매 마트에 갔다⁠. 컵라면 이백팔십 개는 가게 재고로는 모자랐다⁠. 둘은 카트 두 대에 박스를 쌓았다⁠. 핫팩은 창고형 매대 맨 아래 칸의 것을 다 털었다⁠. 계산원이 캠핑 가시냐고 물었고⁠, 다솔이 강원도요⁠, 하고 대답했다⁠.

“⁠언니⁠, 강원도 진짜 그렇게 추워⁠?⁠” 카트를 밀던 다솔이 물었다⁠. 다솔의 손은 이제 거의 떨리지 않았다⁠. 대신 손톱 밑이 물어뜯겨 있었다⁠.

“⁠거기 경비병들은 장화 안 벗고 자⁠.⁠”

“⁠경비병이 왜 있어⁠, 강원도에⁠?⁠”

“⁠군부대 있잖아⁠.⁠”

“⁠아⁠, 맞다⁠.⁠” 다솔은 납득했다⁠. 다솔은 박스 위에 휴대폰을 세워 카트 미는 장면을 찍으려다⁠, 다율의 눈치를 보고 내려놓았다⁠. “⁠근데 언니⁠. 그 보라 돌⁠, 강원도에서 나는 거면⁠, 강원도 사람들은 다 그거 쥐고 살아⁠?⁠”

“⁠거기선 그거 태워⁠.⁠” 다율은 박스 하나를 고쳐 쌓았다⁠. “⁠난로에 넣고⁠.⁠”

다솔은 한참 생각하다가⁠, 그럼 거기 사람들은 연기만 맡아도 웃겠다고 했다⁠. 다율은 이 말에 웃지 못했다⁠. 하르펜의 굴뚝마다 보랏빛 연기가 올랐지만 웃는 사람은 없었다⁠. 이 돌은 문을 건너와야 사람을 웃게 했다⁠.

이날 낮 다율은 잠을 거의 못 잤다⁠. 은행 앱의 「⁠남은 원금 26⁠,960⁠,000원⁠」은 그대로였고⁠, 체크카드 잔액은 컵라면 이백팔십 개와 핫팩 오백육십 개 값만큼 줄어 있었다⁠. 다음 주 금은방에 가져갈 금화가 한 닢도 없었다⁠.

밤 열 시⁠, 다율은 밤새마트 자동문을 들어섰다⁠. 계산대 안에 도팔석이 서 있었다⁠. 퇴근 시간이 지났는데 패딩을 입지 않았다⁠. 계산대 위에 손가락 두 개만 한 누런 막대가 놓여 있었고⁠, 도팔석의 손이 이 막대를 쥐고 있었다⁠. 계산대 옆에는 퀵 조끼를 입은 철구가 팔짱을 끼고 서 있었다⁠.

도팔석은 다율을 보자 막대를 쥔 손에 힘을 줬다⁠. 손등의 핏줄이 섰다⁠.

“⁠다율 씨⁠.⁠” 점장이 말했다⁠. 목소리가 이상하게 차분했다⁠. “⁠나 이 가게 넘기기로 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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