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5,383자)

스무 시간

이세계 편의점 야간 알바는 시급이 금화다 · 채온유

“⁠아침을 같이 하시오⁠.⁠” 바르텐이 말했다⁠. “⁠내 집이 이 도시에서 가장 따뜻하오⁠.⁠”

다율은 창고 문을 등지고 섰다⁠. 패딩 지퍼가 반쯤 뜯겨 목덜미로 찬바람이 들어왔다⁠. “⁠저 아침 안 먹어요⁠. 야간이라⁠.⁠”

“⁠그럼 점심을 하시오⁠. 정오에 사람을 보내겠소⁠.⁠”

골목 입구에서 쇠사슬 갑옷이 철렁거리는 소리가 났다⁠. 실레아가 횃불을 든 기사 둘과 함께 서 있었다⁠. 털모자 넷이 실레아를 보고 슬금슬금 벽 쪽으로 붙었다⁠. 뒤에서 그롬바가 한쪽 눈두덩이 부은 채 수염을 털며 걸어 나왔다⁠. 땋은 수염 한 갈래가 풀려 있었다⁠.

“⁠기사 양반이 늦었네⁠.⁠” 드워프가 투덜거렸다⁠. “⁠나 혼자 넷을 붙잡고 있었는데⁠.⁠”

“⁠둘이었소⁠. 나머지 둘은 그대 수염에 걸려 넘어졌소⁠.⁠” 실레아는 바르텐에게 고개를 숙이지 않았다⁠. “⁠이 사람은 성채 기사단의 손님이오⁠. 오늘 하루 기사단 숙소에서 묵을 것이오⁠.⁠”

바르텐은 웃는 얼굴로 한 걸음 물러났다⁠. “⁠정오에 사람을 보내겠소⁠.⁠” 바르텐은 같은 말을 한 번 더 했다⁠.

*

같은 시각⁠, 서울 신림동 밤새마트의 형광등 아래서 도팔석은 잠옷 바지 위에 패딩을 입고 창고 철문 앞에 서 있었다⁠.

다솔의 전화는 여섯 시 삼 분에 왔다⁠. 언니가 없어요⁠, 점장님⁠. 계산대도 비었고⁠, 창고 문은 안에서 잠겼고⁠, 언니 전화는 꺼져 있어요⁠. 도팔석은 택시 안에서 다율에게 일곱 번 전화를 걸었다⁠. 일곱 번 다 전원이 꺼져 있다는 안내가 나왔다⁠. 이 안내 음성이 왜 그런지 알았다⁠. 저쪽에는 기지국이 없다⁠.

철문을 열면 재활용 마대 셋과 고양이 한 마리가 있었다⁠. 도팔석은 문을 닫고⁠, 다시 열었다⁠. 고양이가 도팔석을 올려다보다가 하품을 했다⁠. 도팔석은 문을 닫고 문 앞에 쪼그려 앉았다⁠. 무릎에서 소리가 났다⁠.

“⁠점장님⁠, 경찰에 신고해요⁠?⁠” 다솔이 창고 문간에서 물었다⁠.

“⁠강원도 출장 갔어⁠.⁠”

“⁠네⁠?⁠”

“⁠출장⁠. 지방⁠.⁠” 도팔석은 일어서다 말고 허리를 짚었다⁠. “⁠오늘 야간은 내가 한다⁠. 다솔이 너는 주간 하고⁠. 아무한테도 말하지 마⁠. 특히 본사⁠.⁠”

열한 시⁠, 앞문이 열렸다⁠. 퀵 조끼에 헬멧을 옆구리에 낀 철구였다⁠. 도팔석은 계산대 안에서 진열대 정리를 하다가 멈췄다⁠. 철구는 곧장 계산대 앞으로 와서 금화 다섯 닢을 하나씩 늘어놓았다⁠. 탑이 위를 보게⁠.

“⁠점장님⁠, 창고 열쇠 하나만 복사해 주세요⁠.⁠”

“⁠우리 가게 창고는 열쇠가 없어⁠. 안에서 잠그는 거야⁠.⁠”

“⁠그럼 오늘 밤 자정에 제가 가게에 있을게요⁠. 다율이 못 오잖아요⁠.⁠” 철구는 목소리를 낮췄다⁠. “⁠걔 하르펜에 갇혔죠⁠? 네 시 넘으면 그쪽에 남는 거 다 알잖아요⁠. 자정에 누가 문을 열어 줘야 돌아와요⁠.⁠”

도팔석은 금화를 내려다봤다⁠. 이것이 무엇인지 몰랐던 적이 없었다⁠. 세 해 동안 계산대 밑 빈 담뱃갑에 이 금화가 쌓이는 걸 봐 왔다⁠. 진열대 쪽을 한 번 보고⁠, 철구를 봤다⁠.

“⁠지방 손님은 다율 씨 담당이야⁠.⁠”

“⁠점장님⁠.⁠”

“⁠그리고 강원도에 갇혔으면 버스 타고 오면 되지⁠.⁠” 도팔석은 금화를 손등으로 한 닢씩 철구 쪽으로 밀었다⁠. 다섯 닢이 다 돌아갈 때까지 도팔석의 손은 떨리지 않았다⁠. “⁠자정에는 내가 있어⁠. 너는 앞치마 반납이나 해⁠.⁠”

철구는 금화를 쓸어 담았다⁠. 헬멧을 쓰기 전에 한마디를 남겼다⁠. 회장님이 이 가게 권리금 얼마냐고 묻더라고요⁠. 점장님 빚이 얼마인지도요⁠. 자동문이 닫혔다⁠. 도팔석은 손등으로 이마를 훔치고⁠, 반듯한 컵라면을 다시 반듯하게 세웠다⁠.

*

기사단 숙소는 성벽에 붙은 이층 돌집이었다⁠. 다율은 짚 냄새 나는 침상에서 세 시간을 잤고⁠, 깨어 보니 실레아가 창가에 앉아 진통제 통을 손에 쥐고 있었다⁠. 사흘 밤 동안 산 세 통이었다⁠. 이것을 성채로 가져갈 짐 꾸러미에 넣다가⁠, 다율이 깬 것을 보고 손을 멈췄다⁠.

“⁠바르텐의 상자는 어디서 와요⁠?⁠” 다율이 물었다⁠.

실레아는 대답하기 전에 창밖을 봤다⁠. 성벽 너머로 고개가 보였다⁠. 눈 덮인 비탈 꼭대기에 이빨처럼 솟은 돌 성채가 있었다⁠. “⁠고개 너머 제국의 광산에서 오오⁠. 마정석은 모두 성채 성문을 지나야 하고⁠, 성문에서 세금을 내야 하오⁠.⁠” 실레아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검은 저울의 상자는 세금을 내지 않소⁠. 성채 사령관이 밤에 뒷문을 열어 주오⁠. 나는 그 문 앞에서 두 번 보초를 섰소⁠.⁠”

“⁠그래서요⁠?⁠”

“⁠그래서 두 번 다 앞만 봤소⁠.⁠” 엘프 기사는 진통제 통을 꾸러미 맨 위에 올렸다⁠. “⁠사령관은 내 상관이오⁠. 그리고 성채 병사 이백 명의 땔감 값도 그 상자에서 나오오⁠. 그대가 아까 계근대에서 본 것과 같은 일이오⁠.⁠”

*

정오에 바르텐이 보낸 사람은 털모자가 아니라 하녀였다⁠. 하얀 앞치마를 두른 중년 여자가 기사단 숙소 문 앞에서 허리를 숙였다⁠. 실레아는 가지 말라고 했다⁠. 그롬바는 가서 고기를 싸 오라고 했다⁠. 다율은 갔다⁠. 적이 무엇을 먹고 사는지는 적의 식탁에서 봐야 알았다⁠.

낮의 하르펜은 밤과 다른 도시였다⁠. 성벽은 회색이었고⁠, 지붕마다 눈이 무릎 높이로 쌓여 있었다⁠. 굴뚝에서 오르는 연기가 하나같이 보랏빛을 띠었다⁠. 사람들은 다율의 패딩과 운동화를 흘끔거렸고⁠, 아이를 업은 여자 하나는 핫팩 냄새를 맡았는지 다율 뒤를 몇 걸음 따라오다 말았다⁠.

검은 저울 상회는 광장 서쪽에서 가장 높은 건물이었다⁠. 안으로 들어서자 공기가 달랐다⁠. 벽마다 박힌 난로에서 마정석이 타며 방 안을 초여름처럼 데웠다⁠. 바르텐은 긴 식탁 끝에 앉아 있었고⁠, 식탁에는 갓 구운 빵과 양고기와 붉은 술이 놓여 있었다⁠. 다율의 자리에는 바나나우유 한 병이 놓여 있었다⁠. 어젯밤 그롬바의 좌판에 맡긴 상자에 들어 있던 병이었다⁠.

“⁠그대의 물건이오⁠. 내 사람들이 맡아 두었소⁠.⁠”

“⁠맡은 게 아니라 가져가신 거죠⁠.⁠”

“⁠같은 말이오⁠. 이 도시에서는⁠.⁠”

바르텐은 식사 내내 창밖을 가리키지 않았다⁠. 대신 식사가 끝나자 다율을 데리고 안뜰이 내려다보이는 회랑으로 나갔다⁠. 안뜰에 경비병들이 줄을 서 있었다⁠. 마흔 명쯤⁠. 줄 맨 앞에 탁자가 있었고⁠, 털모자를 쓴 상회 사람이 경비병 하나하나의 손에 은화를 세어 올려 주고 있었다⁠. 경비병들은 은화를 받고 고개를 숙이고 돌아갔다⁠. 줄 옆에 카샨이 팔짱을 끼고 서 있었다⁠. 회랑을 올려다보지 않았다⁠.

“⁠영주는 왕도에 있소⁠. 다섯 달째 녹봉을 보내지 않았소⁠.⁠” 바르텐이 말했다⁠. “⁠이 도시의 문을 지키는 마흔 명을 먹이는 건 영주가 아니라 내 저울이오⁠. 가벼운 추로 번 돈이 저 손바닥에 올라가오⁠. 아가씨가 어젯밤 그 추를 달아 군중에게 보여 줬을 때⁠, 저 마흔 명의 다음 달 녹봉도 같이 달린 거요⁠.⁠”

다율은 안뜰을 내려다봤다⁠. 은화를 받은 경비병 하나가 이것을 이로 깨물어 보고 있었다⁠. 스무 살을 갓 넘긴 얼굴이었다⁠.

“⁠하르펜이 파는 건 마정석 하나뿐이오⁠.⁠” 바르텐은 회랑 난간에 손을 얹었다⁠. “⁠값은 고개 너머 제국이 정하고⁠, 고개 위 성채가 한 몫을 떼어 가오⁠. 나는 그 사이에서 이 도시가 숨을 쉬게 하오⁠. 그대의 문은 숨구멍이 하나 더 생기는 일이오⁠. 마정석을 내보내고⁠, 그쪽 물건을 들여오는⁠.⁠”

“⁠그 돌을 쥔 사람들 손이 떨려요⁠.⁠”

“⁠그 손이 고른 일이오⁠.⁠” 바르텐은 다율 쪽으로 몸을 돌렸다⁠. “⁠동업하시오⁠. 서울 쪽 이문의 절반을 주겠소⁠. 그리고 그대의 금화를 그쪽 돈으로 바꿔 주겠소⁠. 한 주에 세 닢이 아니라⁠, 원하는 만큼⁠. 내 일꾼이 그 길을 알고 있소⁠.⁠”

다율은 이 길이 어디로 나 있는지 알았다⁠. 고시원 3층 복도와⁠, 만 원짜리를 반으로 접어 쥔 손과⁠, 동네 게시판의 댓글 열네 개로⁠.

“⁠계산대 넘는 건 제가 정해요⁠.⁠” 다율이 말했다⁠. “⁠회장님 돈은 고시원 사람들 지갑에서 나와요⁠. 그걸로 바꾼 돈으로 대출 갚으면⁠, 저는 그 사람들 학원비로 제 등록금을 갚는 거예요⁠. 그건 안 해요⁠.⁠”

“⁠그럼 나는 계산대 바깥을 정하겠소⁠.⁠”

바르텐이 이 말을 마치자마자 회랑 끝 계단에서 털모자 하나가 올라와 이 사람의 귀에 무언가를 속삭였다⁠. 바르텐은 고개를 끄덕이고 다율을 봤다⁠. 미안하다는 얼굴은 아니었다⁠.

“⁠드워프의 좌판이 무너졌다는군⁠. 자릿세를 안 낸 땅이라⁠.⁠”

*

그롬바의 좌판은 판자 조각이 되어 눈 속에 박혀 있었다⁠. 차양 천은 찢어져 대장간 지붕에 걸렸고⁠, 짓밟힌 컵라면 용기가 광장 바닥에 하얗게 흩어져 있었다⁠. 마른 면 부스러기를 비둘기들이 쪼았다⁠. 그롬바는 부서진 판자 위에 앉아 풀린 수염을 한 가닥씩 세고 있었다⁠.

“⁠스물셋⁠.⁠” 드워프는 고개를 들지 않았다⁠. “⁠스물넷⁠. 수염이 다 있는지 세는 거네⁠. 다른 건 셀 게 안 남아서⁠.⁠”

양초 장수 아낙이 다가와 그롬바 옆에 상자 두 개를 내려놓았다⁠. 컵라면 상자였다⁠. 아낙 뒤로 빵집 할머니와 늙은 짐꾼이 서 있었다⁠. 털모자들이 몰려오기 전에 셋이서 한 상자씩 들고 양초 가게 뒤로 숨겼다고 했다⁠. 세 번째 상자는 빵 반죽 통 안에 들어갔다가 밀가루를 뒤집어썼다⁠.

“⁠노란 영약도 두 병 건졌어⁠.⁠” 아낙이 앞치마 주머니를 두드렸다⁠. “⁠이건 내가 마셨고⁠.⁠”

그롬바가 수염 세기를 멈췄다⁠. 상자를 내려다보고⁠, 아낙과 할머니와 짐꾼을 차례로 보고⁠, 조상 이름을 하나 불렀다⁠. 목이 메어서 조상 이름이 반만 나왔다⁠.

밤 열한 시⁠, 다율과 그롬바와 실레아가 쥐꼬리 골목 끝 창고 문 앞에 서 있을 때 경비대가 왔다⁠. 병사 여섯이 횃불을 들고 골목을 막았다⁠. 이들은 다율을 지나쳐 그롬바의 양팔을 잡았다⁠.

“⁠아랫시장 자릿세 석 달⁠, 그리고 오늘 자 두 배⁠.⁠” 병사 하나가 외웠다⁠. 외운 티가 났다⁠. “⁠경비대장 명이다⁠.⁠”

실레아가 칼자루를 잡았다⁠. 그롬바가 고개를 저었다⁠. 성채 기사가 경비대와 칼을 섞으면 다음은 실레아의 일이 아니라 성채의 일이 된다는 걸⁠, 드워프는 하르펜에서 마흔다섯 해를 산 사람답게 알고 있었다⁠. 다율에게 한쪽 눈을 찡긋하고 끌려갔다⁠. 부은 눈이라 찡긋하는 게 아니라 아파서 감는 것처럼 보였다⁠.

*

자정⁠. 창고 문 안쪽에서 무언가가 바뀌는 기척이 났다⁠. 다율이 손잡이를 당기기도 전에 문이 안에서 열렸다⁠.

형광등 빛이 하르펜의 눈 위로 쏟아졌다⁠. 문간에 도팔석이 서 있었다⁠. 잠옷 바지에 밤새마트 앞치마⁠, 손에는 대걸레⁠. 다율을 보고⁠, 실레아를 보고⁠, 뒤의 돌길과 횃불과 마정석이 타는 보랏빛 등잔을 봤다⁠. 입이 천천히 벌어졌다가 닫혔다⁠.

“⁠…⁠…강원도가 많이 변했네⁠.⁠”

다율은 웃음이 터질 뻔했다⁠. 터지기 전에 골목 입구에서 쇠사슬 끄는 소리가 났다⁠. 카샨이 걸어오고 있었다⁠. 투구를 쓰지 않았고⁠, 한 손에 쇠사슬 끝을 쥐고 있었다⁠. 사슬 반대편에 그롬바가 손목이 묶인 채 끌려왔다⁠. 드워프의 수염에 눈이 엉겨 있었다⁠.

카샨은 문 앞 다섯 걸음에서 멈췄다⁠. 도팔석의 대걸레를 한 번 보고⁠, 다율을 봤다⁠.

“⁠밀린 자릿세와 벌금⁠, 금화 서른 닢이다⁠.⁠” 카샨이 말했다⁠. “⁠서울 상인이 대신 낸다면 지금 풀어 준다⁠. 못 내면 내일 아침 이 드워프를 광장 계근대에 단다⁠. 자기 빚 무게만큼⁠, 해가 질 때까지⁠.⁠”

다율은 숫자를 셌다⁠. 금은방에서 남은 두 닢⁠, 침대 밑 바나나우유 상자 안의 것들⁠, 지난 사흘 밤 동안 번 것⁠. 다 합쳐도 서른이 될지 안 될지⁠, 셈을 끝내지 못한 채 카샨의 사슬 쥔 손을 봤다⁠. 장갑 사이로 핫팩 비닐 끝이 삐져나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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