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5,401자)

저울 대 저울

이세계 편의점 야간 알바는 시급이 금화다 · 채온유

“⁠서울 사람이 직접 나오면 안 된다는 법은 방금 안 생겼죠⁠?⁠”

다율은 대차를 세우고 손잡이에 걸린 점장의 헤드랜턴을 켰다⁠. 하얀 빛이 카샨의 투구에 부딪혀 튀었다⁠. 카샨이 눈을 찡그렸다⁠.

“⁠저울 값은 하르펜 물건이 낸다고 하셨어요⁠. 이건 아직 계산 안 한 서울 물건이고요⁠. 시장에서 팔리면 그때 하르펜 물건이 되잖아요⁠. 그럼 그때 시장 계근대에서 달아서 내면 되죠⁠. 여기서 한 번⁠, 거기서 한 번 내면 두 번 내는 거예요⁠. 경비대장님이 두 번 걷으시면 검은 저울 상회가 섭섭해할걸요⁠.⁠”

카샨은 다율을 한참 봤다⁠. 카샨의 뒤에서 병사 하나가 하품을 하다 말고 입을 다물었다⁠. 경비대장은 창을 세웠다⁠.

“⁠계근대에서 저울잡이가 달 거다⁠. 거기서 안 내면 그때는 내가 잡는다⁠.⁠”

“⁠네⁠. 그리고 이거요⁠.⁠” 다율은 핫팩 하나를 뜯어 두어 번 흔든 뒤 카샨에게 내밀었다⁠. “⁠견본이에요⁠. 돈 안 받아요⁠.⁠”

카샨은 받지 않으려다 손끝에 닿는 온기에 손을 멈췄다⁠. 비닐 주머니가 카샨의 손바닥 위에서 점점 뜨거워졌다⁠. 이것을 들여다보다가 낮게 물었다⁠. “⁠화염석이냐⁠?⁠”

“⁠핫팩이요⁠.⁠”

카샨은 이 말을 따라 하지 않았다⁠. 대신 핫팩을 갑옷 안⁠, 심장 언저리에 밀어 넣었다⁠. 그러고는 지나가라고 턱으로 돌길 끝을 가리켰다⁠. 다율이 다섯 걸음쯤 가자 병사 하나에게 초소를 맡기고 자기도 뒤따라 걸었다⁠.

*

하르펜 아랫시장은 성문이 닫힌 뒤에 섰다⁠. 고개를 넘어온 대상들이 낮에는 성 밖에서 기다렸다가⁠, 밤이 되면 짐을 풀었다⁠. 다율이 쥐꼬리처럼 좁은 뒷골목을 빠져나가자 눈앞이 갑자기 넓어졌다⁠. 돌 깔린 광장을 따라 천막과 좌판이 끝없이 이어졌고⁠, 기둥마다 걸린 등잔에서 마정석이 푸르스름한 보랏빛으로 타올랐다⁠. 양고기 굽는 연기와 말 땀 냄새와 젖은 양털 냄새가 눈발 속에 뒤섞였다⁠. 광장 한가운데에는 사람 키만 한 검은 돌 받침이 있었고⁠, 이 위에 다율의 대차보다 큰 놋쇠 저울이 걸려 있었다⁠. 검은 칠을 한 접시가 횃불을 받아 번들거렸다⁠.

그롬바의 좌판은 광장 북쪽 모퉁이⁠, 대장간과 양초 가게 사이에 끼어 있었다⁠. 드워프는 다율을 보자 수염을 쥐고 소리를 질렀다⁠.

“⁠조상님⁠! 알약 나라 상인이 직접 왔네⁠!⁠”

이 소리에 고개 열댓 개가 돌아갔다⁠. 다율은 대차를 좌판 앞에 붙이고 보온병 마개를 열었다⁠. 뜨거운 김이 찬 공기 속으로 하얗게 올라갔다⁠. 컵라면 하나를 뜯어 물을 붓고⁠, 휴대폰 타이머를 맞춰 좌판 위에 세웠다⁠. 숫자가 줄어들기 시작했다⁠.

삼 분은 하르펜 사람들에게 긴 시간이었다⁠. 처음에는 셋이 서서 기다렸다⁠. 일 분이 지나자 열이 됐고⁠, 이 분이 지나자 사람들이 서로 어깨 너머로 화면을 들여다봤다⁠. 털모자를 쓴 짐꾼 하나가 뭘 기다리냐고 물었고⁠, 그롬바가 근엄하게 대답했다⁠. 국수가 깨어나는 시간이라고⁠.

타이머가 울리자 다율은 첫 번째 그릇을 맨 앞의 늙은 짐꾼에게 내밀었다⁠. 그롬바는 손등이 갈라져 피딱지가 앉아 있었고⁠, 등에 멘 지게 끈이 어깨를 파고들어 있었다⁠. 짐꾼은 그릇을 두 손으로 받아 국물부터 마셨다⁠. 목울대가 두 번 움직였다⁠. 그롬바는 국수에는 손을 대지 않고 그릇을 가슴에 안았다⁠.

“⁠이거⁠, 집에 가져가도 되오⁠?⁠” 그롬바가 물었다⁠. “⁠마누라가 겨울 들어 따뜻한 걸 못 먹었소⁠.⁠”

다율은 뚜껑을 다시 덮어 주고⁠, 이 위에 핫팩 하나를 올려 주었다⁠. 식지 말라고⁠. 늙은 짐꾼은 그릇을 품에 안고 사람들 사이로 빠져나갔다⁠. 이 뒷모습을 본 사람들이 다음부터는 묻지 않고 동전을 꺼냈다⁠.

새벽 한 시까지 서른일곱 명이 컵라면을 맛봤다⁠. 바나나우유를 마신 양초 장수 아낙은 노란 영약이라며 남은 우유를 병째 품에 넣었고⁠, 신전의 견습 사제는 삼각김밥 포장지에 찍힌 1⁠, 2⁠, 3 숫자를 보고 순서를 지켜 뜯어야 하는 부적이라고 엄숙하게 선언했다⁠. 다율이 1번을 당기고 2번⁠, 3번을 당겨 김을 둘러 주자 사제는 이 순서를 입으로 세 번 따라 외웠다⁠. 그롬바가 옆에서 부적 값을 은화 하나 더 올렸다⁠. 핫팩을 산 대장장이는 이것을 화로에 던져 넣으려다 다율에게 손목을 잡혔다⁠.

“⁠그건 넣는 게 아니라 품는 거예요⁠.⁠”

“⁠화염석을 품어⁠?⁠”

“⁠네⁠. 그래서 화염석보다 비싸요⁠.⁠”

대장장이는 핫팩을 겨드랑이에 끼우고 눈을 감았다⁠. 그롬바의 입에서 나온 소리를 듣고 양초 장수 아낙이 얼굴을 붉혔다⁠.

*

한 시 반⁠, 털모자를 쓴 사내 셋이 군중을 헤치고 들어왔다⁠. 맨 앞의 사내는 허리에 놋쇠 추 꾸러미를 줄줄이 차고 있었다⁠. 추가 걸을 때마다 서로 부딪쳐 짤랑거렸다⁠. 검은 저울 상회의 저울잡이였다⁠.

“⁠아랫시장에서 파는 물건은 계근대에서 달아야 한다⁠.⁠” 저울잡이는 좌판 위의 컵라면 상자를 손등으로 쳤다⁠. “⁠상자째로 가져와⁠. 계근 값 내고⁠.⁠”

다율은 상자 대신 대차 맨 위의 전자저울을 집어 들었다⁠. 손바닥보다 조금 큰 하얀 판이었다⁠. 전원 버튼을 누르자 화면에 「⁠0⁠.0⁠」이 떴다⁠. 몰려 있던 사람들 사이에서 웅성거림이 일었다⁠. 숫자가 빛나는 상자를 처음 보는 얼굴들이었다⁠.

“⁠달기 전에 하나만 여쭤볼게요⁠.⁠” 다율이 말했다⁠. “⁠그 추⁠, 한 번 달아 봐도 돼요⁠?⁠”

“⁠뭐⁠?⁠”

“⁠한 근짜리 추요⁠. 그쪽 추가 진짜 한 근인지 이 저울로 달아 보고 싶어서요⁠.⁠”

저울잡이가 웃었다⁠. 뒤의 둘도 따라 웃었다⁠. 그롬바는 웃지 않았다⁠. 드워프는 좌판 뒤로 몸을 돌려 대장간 옆 골목으로 달려갔다⁠. 짧은 다리가 눈 위에서 미끄러지면서도 빨랐다⁠.

그롬바가 돌아왔을 때 손에는 손때가 까맣게 앉은 놋쇠 추 하나가 들려 있었다⁠. 바닥에 영주의 인장이 찍혀 있었다⁠. 그롬바 뒤로 허리가 굽은 할머니 하나가 밀가루 묻은 앞치마를 두른 채 따라왔다⁠.

“⁠빵집 할멈 영감이 쓰던 거네⁠.⁠” 그롬바가 숨을 몰아쉬며 추를 높이 들었다⁠. “⁠선대 영주 때 성에서 나눠 준 왕실 표준 추야⁠. 하르펜에 이거 하나 남았네⁠.⁠”

다율은 표준 추를 전자저울에 올렸다⁠. 숫자가 몇 번 흔들리다 멈췄다⁠. 「⁠600⁠.0⁠」 다율은 화면을 군중 쪽으로 돌렸다⁠. 앞줄 사람들이 숫자를 읽지 못하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다율은 추를 내려놓고 저울잡이에게 손을 내밀었다⁠.

“⁠이제 그쪽 한 근 추요⁠.⁠”

저울잡이는 손을 허리띠로 가져갔다가 멈췄다⁠. 군중이 그롬바를 보고 있었다⁠. 짐꾼들과 양초 장수와 대장장이와 견습 사제가⁠, 컵라면 국물을 아직 입에 머금은 얼굴로⁠. 사내는 추를 풀지 않았다⁠. 이때 군중 속에서 털모자 하나가 손을 뻗어 저울잡이의 허리에서 추 하나를 낚아챘다⁠. 아까 국물을 품고 갔던 늙은 짐꾼이었다⁠. 이 사람은 이 추를 전자저울 위에 탁 내려놓았다⁠.

숫자가 흔들리다 멈췄다⁠. 「⁠540⁠.5⁠」

다율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화면을 사람들 쪽으로 돌려 들고⁠, 표준 추를 옆에 다시 놓았다⁠. 육백과 오백사십⁠. 하르펜 사람들은 숫자를 몰랐다⁠. 그러나 두 추가 같은 크기로 보인다는 것과⁠, 숫자가 다르다는 것은 알았다⁠. 광장이 조용해졌다⁠. 등잔 속 마정석이 타는 소리가 들릴 만큼⁠.

“⁠열에 하나씩 가벼워요⁠.⁠” 다율이 말했다⁠. “⁠이 추로 달아서 사신 소금이랑 밀가루는⁠, 열 근 값을 내고 아홉 근을 받아 가신 거예요⁠. 열 해 동안 사 드셨으면 한 해치는 그냥 내신 거고요⁠.⁠”

누군가 처음 욕을 했다⁠. 다음은 쉬웠다⁠.

빵집 할머니는 욕을 하지 않았다⁠. 전자저울 옆에 놓인 남편의 추를 집어 앞치마에 문질렀다⁠. 밀가루가 놋쇠의 홈에 들어가 하얗게 박혔다⁠. “⁠우리 영감이 이 계근대 저울잡이였어⁠. 상회가 저울을 사들이던 해에 이 추를 내놓으라는 걸 안 내놓고⁠, 그해 겨울에 죽었지⁠.⁠” 할머니는 추를 다율의 손에 쥐여 주었다⁠. “⁠빵 반죽 달 때만 꺼냈어⁠. 이걸로 달아 판 빵은 한 번도 모자란 적이 없어⁠.⁠”

*

“⁠한 해라⁠.⁠”

사람들 사이가 갈라졌다⁠. 검은 털가죽 외투가 눈을 쓸며 다가왔다⁠. 바르텐은 계근대 검은 돌 받침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저울잡이들이 바르텐의 뒤로 물러섰다⁠. 바르텐은 전자저울 화면을 들여다보고⁠, 표준 추를 손가락으로 한 번 쓸었다⁠.

“⁠숫자가 예쁘군⁠.⁠” 바르텐이 말했다⁠. “⁠아가씨는 하나를 모르오⁠. 하르펜에서 저울은 무게를 재는 물건이 아니오⁠. 누가 값을 정하는지를 재는 물건이오⁠. 열에 하나 가벼운 추로 이 시장이 스무 해를 굴러왔소⁠. 이 사람들은 그 추가 가볍다는 걸 몰랐던 게 아니오⁠. 가벼운 추라도 있어야 장사를 할 수 있었던 거요⁠.⁠”

“⁠그럼 이제 무거운 추로 장사하면 되겠네요⁠.⁠” 다율은 전자저울을 들어 보였다⁠. “⁠이거 만 원이에요⁠. 서울에서는 아무나 사요⁠.⁠”

“⁠그 만 원짜리가 이 도시에 하나뿐이면⁠, 그걸 쥔 사람이 값을 정하겠지⁠.⁠” 바르텐은 고개를 돌렸다⁠. “⁠경비대장⁠.⁠”

카샨이 군중 맨 뒤에 서 있었다⁠. 내내 거기 있었다⁠. 카샨의 갑옷 가슴께가 핫팩 때문에 조금 불룩했다⁠.

“⁠성 밖에서 들어온 마법 물품은 허가가 없으면 경비대가 거두어 간다⁠. 그게 하르펜 법이지 않소⁠.⁠” 바르텐은 전자저울을 턱으로 가리켰다⁠. “⁠저 숫자 상자는 혼자 빛나오⁠.⁠”

카샨은 바로 움직이지 않았다⁠. 다율을 보고⁠, 늙은 짐꾼을 보고⁠, 바르텐을 봤다⁠. 한 박자가 지나갔다⁠. 그러고 나서 앞으로 걸어 나와 다율의 손에서 전자저울을 거두었다⁠. 다율이 쥔 손에 힘을 주자 카샨이 낮게 말했다⁠. “⁠놓아⁠. 안 놓으면 너를 거둔다⁠.⁠”

다율은 놓았다⁠. 전자저울의 숫자가 카샨의 장갑 속에서 「⁠0⁠.0⁠」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내일부터는⁠.⁠” 바르텐은 군중을 향해 목소리를 높였다⁠. “⁠드워프 그롬바의 좌판에서 서울 물건을 사는 자는 자릿세를 두 배로 내시오⁠. 검은 저울 상회가 빌려준 땅이니까⁠.⁠”

웅성거림이 가라앉았다⁠. 아까 욕을 했던 입들이 다물렸다⁠. 다율은 이 다물리는 속도를 봤다⁠. 숫자는 사람들 머리에 남았지만⁠, 땅은 바르텐의 것이었다⁠.

*

세 시 오십 분⁠. 다율의 휴대폰 알람이 울렸다⁠. 다율은 남은 상자를 그롬바에게 맡기고 빈 대차를 끌고 뛰었다⁠. 광장을 빠져나가 쥐꼬리 골목으로 꺾자 골목 입구에 털모자 넷이 서 있었다⁠. 저울잡이들이었다⁠. 한 사내가 다율의 대차를 발로 막았다⁠.

“⁠계근 값을 안 냈지⁠.⁠”

“⁠압수해 가셨잖아요⁠, 저울을⁠.⁠”

“⁠그러니까 몸으로 내⁠.⁠”

다율은 대차를 버리고 사내들 사이로 몸을 밀어 넣었다⁠. 누군가 패딩 모자를 잡아당겼다⁠. 지퍼가 목을 조였다⁠. 주머니에 남은 핫팩 하나를 뜯지도 않고 사내의 얼굴에 던졌고⁠, 사내가 이것을 화염석으로 알고 비명을 지르며 피하는 사이 골목 안으로 뛰어들었다⁠. 뒤에서 그롬바의 고함이 들렸다⁠. 드워프가 사내 하나의 다리에 매달린 모양이었다⁠.

골목 끝에 낡은 창고 문이 보였다⁠. 다율이 손잡이를 잡았을 때⁠, 성 위의 탑에서 종이 울렸다⁠. 한 번⁠, 두 번⁠, 세 번⁠, 네 번⁠.

문을 당겼다⁠. 안은 어두웠다⁠. 먼지 냄새와 쥐똥 냄새⁠. 썩은 나무 상자 몇 개⁠. 형광등도 컵라면 매대도 없었다⁠. 다율은 문을 닫았다 다시 열었다⁠. 같은 어둠이었다⁠. 문틀을 손바닥으로 더듬었다⁠. 신림동 창고 철문의 초록 페인트 대신 거친 나무결이 손에 걸렸다⁠.

등 뒤 눈 위로 느린 발소리가 다가왔다⁠. 다율은 돌아보지 않고도 누군지 알았다⁠. 털가죽 외투가 눈을 쓰는 소리였다⁠.

“⁠네 시가 지났군⁠.⁠” 바르텐이 말했다⁠. “⁠다음 자정까지 스무 시간이오⁠. 그동안 아가씨는 내 도시의 손님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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