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5,321자)

고시촌의 견본

이세계 편의점 야간 알바는 시급이 금화다 · 채온유

“⁠기사님⁠, 칼 넣으세요⁠. 손님 다치시면 저희 가게 책임이에요⁠.⁠”

다율은 그렇게 말하면서 진통제 통을 실레아와 카샨 사이⁠, 창끝 바로 위에 들어 올렸다⁠. 창끝이 종이 상자 모서리에 닿았다⁠. 카샨이 미간을 좁혔다⁠. 창을 더 밀면 상자가 뚫리고⁠, 상자가 뚫리면 알약이 돌길에 쏟아질 판이었다⁠.

“⁠이 약은 아직 하르펜 물건이 아니에요⁠.⁠” 다율이 말했다⁠. “⁠계산을 안 했거든요⁠. 계산 안 한 물건은 저희 가게 물건이에요⁠. 저는 서울 사람이고요⁠.⁠”

“⁠문밖으로 나오면 하르펜 물건이다⁠.⁠”

“⁠그럼 문 안에서 팔면요⁠?⁠”

카샨이 처음으로 다율을 똑바로 봤다⁠. 투구를 낀 옆구리가 들썩였다⁠. 웃은 건지 한숨을 쉰 건지 알 수 없었다⁠.

“⁠기사님이 문 안으로 한 발 들어가면 그 발은 저울 값을 낸다⁠.⁠”

실레아가 칼을 칼집에 넣었다⁠. 철컥⁠, 하는 소리가 길게 울렸다⁠. 금화 한 닢을 카샨 쪽으로 던졌다⁠. 카샨은 받지 않았고⁠, 금화는 이 사람의 장화 앞 눈 위에 떨어졌다⁠. 병사 하나가 허리를 굽혀 이걸 주웠다⁠. 실레아는 문턱을 넘어와 다율의 손에서 진통제를 받고⁠, 다율이 거슬러 주는 은화를 받지 않았다⁠.

“⁠삼분의 일을 저자에게 냈으니⁠, 이 은화는 그대가 가지시오⁠.⁠” 실레아의 목소리는 낮았다⁠. “⁠성채의 기사가 성 밖 경비대장에게 길값을 낸 건 오늘이 처음이오⁠. 나는 오늘 밤을 기억하겠소⁠.⁠”

이 말이 카샨에게 하는 말인지 다율에게 하는 말인지 다율은 끝까지 몰랐다⁠.

*

이날 밤 손님은 셋이었다⁠. 실레아⁠, 그리고 초소 앞에서 망설이다 돌아간 횃불 둘⁠. 마지막에 그롬바가 왔다⁠. 초소에서 은화를 세 번 나눠 내고 들어와서는 계산대에 이마를 박았다⁠.

“⁠컵라면 열두 개를 저놈들 저울에 달았네⁠. 열두 개가 여덟 개 값으로 나오더군⁠.⁠”

“⁠왜요⁠?⁠”

“⁠검은 저울 상회 추는 엉터리네⁠.⁠” 그롬바는 이마를 들지 않고 말했다⁠. “⁠저놈들이 살 때는 무거운 추로 달고⁠, 팔 때는 가벼운 추로 달고⁠. 아랫시장 사람은 다 알아⁠. 다 알고도 거기에 단다⁠. 시장 계근대는 저 상회 것밖에 없으니까⁠. 나는 좌판 자릿세가 석 달 밀렸네⁠. 그 빚도 저놈들 저울로 쟀지⁠.⁠”

“⁠추를 다른 저울로 달아 보면 되잖아요⁠.⁠”

“⁠하르펜에 다른 저울이 어디 있나⁠?⁠”

다율은 계산대 옆 택배 저울을 내려다봤다⁠. 화면에 0⁠.00이 떠 있었다⁠. 그롬바가 이 숫자를 따라 봤다⁠. 이마를 천천히 들었다⁠.

새벽 네 시까지 다율이 번 돈은 금화 한 닢과 은화 열한 닢이었다⁠. 어젯밤의 절반도 안 됐다⁠.

*

다섯 시 십 분⁠, 앞문이 열렸다⁠. 서른 가까워 보이는 남자였다⁠. 목 늘어난 후드티 위에 슬리퍼⁠, 손에는 형광펜이 꽂힌 두꺼운 수험서⁠. 그롬바는 진열대를 보지 않고 곧장 계산대로 왔다⁠.

“⁠여기⁠, 보라색 돌 빌려준다던데요⁠.⁠”

다율의 손이 바코드 스캐너 위에서 멈췄다⁠. 남자의 눈은 충혈돼 있었다⁠. 오른손이 수험서 모서리를 쥐었다 놓았다를 되풀이했다⁠.

“⁠누가 그래요⁠?⁠”

“⁠퀵 하시는 분이요⁠. 저희 고시원 3층 사는⁠.⁠” 남자는 말을 빨리 했다⁠. “⁠한 시간에 오만 원이요⁠. 쥐고 있으면 잠이 안 와요⁠. 행정법 한 권을 하룻밤에 봤어요⁠. 근데 그분이 오늘 돌을 다른 방에 빌려줘야 한다고 해서⁠, 여기가 원래 나오는 데라길래요⁠.⁠”

“⁠한 번 쥐어 보신 거예요⁠?⁠”

“⁠세 번이요⁠.⁠” 남자가 웃었다⁠. 웃는 입꼬리가 떨렸다⁠. “⁠세 번째엔 웃음이 좀 덜 났어요⁠. 그래서 한 번만 더 하면 될 것 같아서요⁠.⁠”

다율은 남자에게 따뜻한 두유 한 병을 계산해 주고 돈을 받지 않았다⁠. 남자는 두유를 받아 들고 한참 서 있다가⁠, 돌은 없냐고 한 번 더 묻고 나갔다⁠. 자동문 앞에서 다율은 남자의 슬리퍼를 봤다⁠. 고시원 공용 슬리퍼였다⁠. 발등에 매직으로 고시원 이름이 적혀 있었다⁠.

견본은 팔린 게 아니었다⁠. 빌려지고 있었다⁠. 한 시간에 오만 원씩⁠, 방에서 방으로⁠.

여섯 시에 교대하러 온 다솔은 목도리를 풀기도 전에 휴대폰을 내밀었다⁠. 동네 커뮤니티 앱의 게시판 화면이었다⁠. 제목은 「⁠신림 보라돌 아는 사람⁠?⁠」 쥐고 있으면 밤새 공부가 된다더라⁠, 고시촌에서 돈다더라⁠, 어디서 구하냐는 글이었고⁠, 밑에 댓글이 열네 개 달려 있었다⁠. 반은 장난이었고 반은 진심이었다⁠. 나도 구함⁠. 쪽지 주세요⁠. 그거 쥐면 웃음 나온다던데 진짜임⁠?

“⁠언니⁠, 이거 그거 맞지⁠.⁠” 다솔은 핫팩을 쥔 손을 주머니에 넣은 채였다⁠. 어제보다 떨림이 덜했다⁠. 덜하다는 게 오히려 다율을 불안하게 했다⁠. “⁠나 어젯밤에 이 글 보고 쪽지 보낼 뻔했어⁠. 진짜 뻔만 했어⁠.⁠”

다율은 다솔의 휴대폰을 받아 게시판 글에 신고 버튼을 눌렀다⁠. 사유를 고르는 화면에 맞는 항목이 없었다⁠. 기타를 누르고⁠, 이유 칸에 아무것도 적지 못한 채 화면을 껐다⁠. 하룻밤 사이에 돌 하나가 고시원 세 방을 돌았고⁠, 동네 게시판의 댓글 열네 개가 됐다⁠.

*

신림동 고시촌은 오전 열한 시에도 조용했다⁠. 비탈길을 따라 같은 모양의 건물들이 붙어 있었고⁠, 건물마다 1층 유리문에 월 삼십오만⁠, 식사 제공⁠, 창문 있음 같은 종이가 붙어 있었다⁠. 다율은 슬리퍼에서 본 고시원 이름 하나를 들고 비탈을 세 번 오르내린 끝에 이 건물을 찾았다⁠.

총무는 예순 남짓한 여자였다⁠. 1층 공동 주방에서 밥솥 뚜껑을 열고 있었다⁠. 다율이 3층 퀵 기사를 찾는다고 하자⁠, 총무는 밥주걱을 든 채 다율을 위아래로 훑었다⁠.

“⁠빚 받으러 왔어⁠?⁠”

“⁠빚 주러 왔어요⁠.⁠”

총무는 이 대답이 마음에 들었는지 주걱으로 위층을 가리켰다⁠. 철구의 방은 3층 복도 끝이었다⁠. 문 아래 틈으로 단내가 희미하게 새어 나왔다⁠. 다율은 문을 두드렸다⁠. 대답이 없었다⁠. 대신 옆방 문이 열리고 수면바지 차림의 여자가 고개를 내밀었다⁠. 머리를 하나로 묶었는데 반은 풀려 있었고⁠, 손에는 만 원짜리 다섯 장이 반으로 접혀 쥐여 있었다⁠.

“⁠새로 오신 분이에요⁠? 돌 가져오는⁠?⁠” 여자는 웃고 있었다⁠. 입이 너무 크게 웃었다⁠. “⁠저 어제 순서 놓쳤어요⁠. 오늘은 제가 먼저예요⁠. 줄 선 거 아저씨한테 말해 주세요⁠.⁠”

“⁠저는 돌 안 가져와요⁠.⁠”

여자는 다율의 빈손을 내려다봤다⁠. 웃음이 그대로 얼굴에 붙은 채로⁠, 눈만 다른 사람의 것이 됐다⁠. 다율은 아무 말 없이 문을 닫았다⁠. 문 안에서 만 원짜리를 다시 세는 소리가 났다⁠. 총무가 계단 밑에서 소리쳤다⁠. 이 총각 낮에는 신림 사거리 뒤 주차장 컨테이너에 있어⁠, 퀵 하는 사람들 모이는 데⁠.

“⁠근데 학생⁠.⁠” 총무가 덧붙였다⁠. “⁠요 며칠 그 방 앞에 밤마다 사람들이 줄을 서⁠. 2층 행시생⁠, 4층 공무원 준비하는 애⁠. 다들 아침에 눈이 벌개서 나와⁠. 우리 고시원은 밤에 조용해야 되는 데야⁠.⁠”

*

주차장 컨테이너 앞에는 오토바이 일곱 대가 서 있었다⁠. 난로 위 주전자에서 김이 올랐고⁠, 퀵 기사들이 배달 앱 화면을 보며 믹스커피를 마셨다⁠. 철구는 컨테이너 문간 플라스틱 의자에 앉아 삼각김밥을 먹고 있었다⁠. 다율을 보자 김밥을 반쯤 문 채 멈췄다⁠.

“⁠여기까지 왔어⁠?⁠”

“⁠돌 주세요⁠.⁠”

철구는 김밥을 마저 씹고 삼켰다⁠. 다른 퀵 기사들이 고개를 들었다⁠. 철구가 손을 휘휘 저어 아무것도 아니라는 시늉을 했다⁠. 그러고는 일어나 다율을 주차장 구석⁠, 고장 난 오토바이들이 쌓인 철망 앞으로 데려갔다⁠.

“⁠한 시간에 오만 원⁠.⁠” 다율이 말했다⁠. “⁠고시원 사람들한테⁠.⁠”

“⁠팔진 않았어⁠. 빌려줬지⁠.⁠” 철구는 조끼 안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꺼내지는 않았다⁠. “⁠나 오토바이 할부 넉 달 밀렸어⁠. 사채도 조금⁠. 회장님은 금화를 주는데⁠, 너도 알잖아⁠. 금은방은 한 주에 세 닢이야⁠. 딴 데 갔더니 반값 쳐 주더라⁠. 그래서 돌을 빌려준 거야⁠. 원화로 받으려고⁠.⁠”

“⁠그 사람들 손 떨어요⁠.⁠”

“⁠알아⁠.⁠” 철구는 다율을 보지 않았다⁠. 철망 너머 고장 난 오토바이의 깨진 계기판을 봤다⁠. “⁠나도 한 번 쥐어 봤어⁠. 그래서 회장님한테 상자째로는 안 된다고 했었어⁠. 근데 상자째로 안 하면 나는 이번 달 못 넘겨⁠.⁠”

다율은 앞치마 주머니에서 금화 두 닢을 꺼내 손바닥에 올렸다⁠. 어제 금은방에서 받아 온 네 닢 중 둘이었다⁠. “⁠이걸로 돌 사요⁠. 다시 회장님한테 돌려줄 거면 그건 그쪽 사정이고요⁠. 근데 이 돌은 오늘부터 신림동에 없어요⁠.⁠”

철구가 금화를 내려다봤다⁠. 바르텐이 주는 것과 똑같은 탑이 찍혀 있었다⁠. 이 금화가 원화로 몇 원인지⁠, 어디서 바꿀 수 있는지⁠, 바꾸다 걸리면 어떻게 되는지를 다 아는 얼굴로 한참 서 있었다⁠. 그러고는 안주머니에서 은박지에 싼 것을 꺼냈다⁠. 은박지가 웅웅 울렸다⁠.

“⁠늦었어⁠.⁠” 철구는 은박지를 다율 손에 올리면서 금화를 가져갔다⁠. “⁠벌써 셋이야⁠. 고시원에서 이거 다시 찾는 사람⁠. 그 셋이 나 말고 딴 데서 찾을 거야⁠. 회장님은 그걸 기다려⁠.⁠”

“⁠알아요⁠.⁠”

“⁠모르는 거 하나 더⁠.⁠” 철구가 헬멧을 집어 들었다⁠. “⁠회장님은 저울에 안 달리는 건 안 믿어⁠. 너 지금 거절한 거 아니야⁠. 아직 저울에 안 올라간 거지⁠.⁠”

철구는 헬멧을 쓰고 오토바이에 올라 시동을 걸었다⁠. 배기음이 철망을 흔들었다⁠. 다율은 은박지를 쥔 손을 패딩 주머니에 넣었다⁠. 손바닥이 따뜻했다⁠. 이 따뜻함이 기분 좋다는 걸 알아채고⁠, 주머니에서 손을 뺐다⁠.

*

오후 세 시⁠, 다율은 신림역 지하상가 생활용품점에서 만 원짜리 전자저울을 하나 샀다⁠. 건전지 두 개가 들어가고 0⁠.1그램까지 쟀다⁠. 계산대 직원이 영수증 필요하냐고 물었고⁠, 다율은 처음으로 이 질문을 받는 사람이 되어 네⁠, 하고 대답했다⁠.

은박지에 싼 돌은 철제 금고 상자에 넣어 점장 사무실 책상 서랍에 잠갔다⁠. 바르텐에게 돌려줄지⁠, 하르펜 어딘가에 던질지는 아직 정하지 못했다⁠. 정한 것은 하나였다⁠. 하르펜 사람들이 저울 값 때문에 이 문으로 못 오면⁠, 이 문에서 이 사람들한테 가면 된다⁠.

밤 열 시⁠, 출근한 다율이 창고에서 대차를 끌어내는 걸 보고 도팔석이 패딩 지퍼를 내리다 말았다⁠.

“⁠그거 뭐 하게⁠?⁠”

“⁠지방 출장이요⁠.⁠”

“⁠출장비는 없어⁠.⁠” 도팔석은 그렇게 말하고 사무실로 들어가더니 등산용 헤드랜턴 하나를 들고 나왔다⁠. 고무줄이 늘어나 있었고⁠, 배터리 칸에 매직으로 팔석이라고 적혀 있었다⁠. “⁠강원도 밤길은 어두워⁠. 네 시 전에 와⁠. 네 시 넘으면 나 몰라⁠.⁠”

“⁠넘으면 어떻게 되는데요⁠?⁠”

“⁠몰라⁠. 몰라서 모른다는 거야⁠.⁠” 점장은 랜턴을 대차 손잡이에 걸어 주고⁠, 컵라면 상자의 테이프를 손바닥으로 한 번 눌러 붙인 뒤 퇴근했다⁠.

자정 오 분 전⁠, 다율은 창고의 대차에 컵라면 여섯 상자와 핫팩 두 상자⁠, 바나나우유 한 상자를 실었다⁠. 맨 위에 전자저울을 얹고⁠, 보온병 두 개에 뜨거운 물을 채워 옆에 꽂았다⁠. 대차 바퀴 하나가 삐걱거렸다⁠.

자정⁠. 노크는 없었다⁠. 다율이 먼저 문을 열었다⁠.

찬바람과 횃불과 말똥 냄새가 한꺼번에 밀려 들어왔다⁠. 다섯 걸음 앞 초소에서 카샨이 화로에 손을 쬐다 고개를 들었다⁠. 다율은 대차 손잡이를 쥐고⁠, 처음으로 문턱을 넘었다⁠. 대차 앞바퀴가 하르펜의 언 돌길에 닿으며 덜컹 소리를 냈다⁠.

카샨이 일어섰다⁠. 창이 카샨의 손에서 가로로 들렸다⁠.

“⁠서울 사람이 직접 나오시겠다⁠?⁠”

3화는 어땠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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