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5,386자)

워크인의 보랏빛

이세계 편의점 야간 알바는 시급이 금화다 · 채온유

철구는 헬멧을 벗자 서른 남짓한 얼굴이 나왔다⁠. 눈 밑이 거뭇했고⁠, 앞머리가 땀에 눌려 이마에 붙어 있었다⁠. 계산대 옆을 돌아 창고로 들어가려 했다⁠. 다율이 먼저 창고 문간에 섰다⁠. 손에는 대걸레가 아직 들려 있었다⁠.

“⁠여기 직원 아니시잖아요⁠.⁠”

“⁠열하루 전까지 직원이었어⁠.⁠” 철구는 조끼 밑으로 삐져나온 앞치마 끈을 잡아 보였다⁠. “⁠이거 봐⁠. 아직 반납도 안 했어⁠.⁠”

“⁠그러니까 반납하시고요⁠.⁠”

철구가 한 걸음 다가오자 다율은 대걸레 자루를 가로로 들었다⁠. 둘 사이에 걸레 끝에서 떨어진 물이 바닥 타일에 점점이 번졌다⁠. 철구가 고개를 기울여 계산대 위 천장 구석을 봤다⁠.

“⁠카메라 믿고 이러는 거면⁠, 그거 석 달 전에 내가 선 뽑았어⁠.⁠”

다율은 휴대폰을 꺼내 112를 눌러 화면을 철구에게 돌렸다⁠. 통화 버튼 위에 엄지를 올렸다⁠. “⁠보라색 돌 든 상자요⁠. 경찰 아저씨들이 뭐라고 할까요⁠?⁠”

“⁠너도 금화 받았잖아⁠.⁠” 철구는 웃었다⁠. 웃음에 힘이 없었다⁠. “⁠경찰이 금화는 어디서 났냐고 하면 뭐라 그럴 건데⁠? 강원도⁠?⁠”

둘은 그렇게 서 있었다⁠. 엄지는 버튼 위에⁠, 대걸레는 가로로⁠. 냉장고 모터가 한 번 돌았다가 멈췄다⁠. 먼저 내려놓은 건 철구였다⁠. 철구는 진열대에서 참치마요 삼각김밥 두 개를 집어 계산대에 올리고 자기 카드를 꽂았다⁠. 삐 소리가 나자 다율은 손에 밴 버릇대로 “⁠봉투 필요하세요⁠?⁠”라고 물었고⁠, 철구는 이 말에 처음으로 진짜 웃었다⁠.

“⁠너 잘하겠다⁠.⁠” 철구는 삼각김밥을 조끼 주머니에 넣었다⁠. “⁠어차피 내일 밤 회장님 직접 오시면 내 거야⁠. 문 여는 건 너니까⁠, 잘 생각해⁠.⁠”

자동문이 닫히고 오토바이 소리가 골목 끝으로 멀어졌다⁠. 다율은 상자를 끌었다⁠. 음료 진열대 뒤로는 사람이 걸어 들어가 캔과 페트병을 뒤에서 채우는 냉장 창고가 있었다⁠. 점장은 이 방을 워크인이라 불렀다⁠. 다율은 상자를 워크인 맨 안쪽⁠, 이온음료 박스 뒤에 밀어 넣었다⁠. 문을 닫자 진열대 유리 너머 콜라 캔 사이로 보랏빛이 희미하게 비쳤다⁠. 콜라 박스 두 개를 더 쌓았다⁠.

*

여섯 시에 주간 알바 다솔이 왔다⁠. 스물한 살⁠, 패딩 위에 목도리를 세 번 감았고⁠, 들어오면서부터 휴대폰으로 매장을 찍고 있었다⁠. 숏폼 영상에 「⁠편의점 아침 브이로그⁠」를 올린다고 했다⁠. 다율은 인수인계 종이에 한 줄을 더 적었다⁠. 워크인 안쪽 박스 건드리지 말 것⁠.

그러고 나서 이 줄을 지울까 오 분을 고민했다⁠. 하지 말라는 걸 적어 두면 사람은 거길 먼저 본다⁠. 다율은 이 줄을 그대로 두고 나왔다⁠. 다른 데 쓸 시간이 없었다⁠.

아홉 시 반⁠, 종로 귀금속 거리의 금은방은 셔터를 반만 올리고 있었다⁠. 사장은 예순이 넘어 보였고 돋보기를 이마에 걸고 있었다⁠. 다율이 금화 일곱 닢을 유리 진열장 위에 늘어놓자⁠, 사장은 돋보기를 눈으로 내리고 한 닢을 집어 검은 돌판에 그었다⁠. 금빛 줄이 돌판에 남았다⁠. 약병에서 무언가를 한 방울 떨어뜨리고⁠, 한참 보다가 고개를 들었다⁠.

“⁠순도 구십 퍼센트 넘네⁠. 어디서 났어⁠?⁠”

“⁠할머니 유품이요⁠.⁠”

“⁠할머니가 탑 그려진 금화를 일곱 개나⁠?⁠” 사장은 돋보기를 다시 이마로 올렸다⁠. “⁠세 개⁠.⁠”

“⁠네⁠?⁠”

“⁠세 개만 사⁠. 한 주에⁠. 출처 모르는 금을 그 이상 받으면 나도 신고해야 돼⁠. 한 개 오십팔만⁠.⁠” 사장은 금화 세 닢을 저울에 올리고 네 닢을 다율 쪽으로 밀었다⁠. “⁠나머지는 다음 주에 와⁠. 다른 데 가면 더 깎아⁠. 아니면 신고하든가⁠.⁠”

다율은 계좌로 들어온 백칠십사만 원을 대출 상환 버튼으로 옮겼다⁠. 「⁠남은 원금 26⁠,960⁠,000원⁠」 금은방 앞 계단에 앉아 이 숫자를 오래 봤다⁠. 처음으로 줄어든 숫자였다⁠. 엄마에게 문자를 보냈다⁠. 이번 달 이자 내가 냈어⁠. 답이 바로 왔다⁠. 무슨 돈으로⁠. 다율은 강원도 손님들이 팁을 잘 준다고 쳤다가 지우고⁠, 알바비라고 보냈다⁠.

주머니 속에 남은 네 닢이 걸을 때마다 서로 부딪쳐 소리를 냈다⁠. 이 소리가 듣기 좋으면서 거슬렸다⁠. 금화는 하룻밤에 여덟 닢이 생기는데⁠, 서울 돈으로 바뀌는 건 한 주에 세 닢이었다⁠.

*

오후 두 시⁠, 다율이 원룸에서 반쯤 잠들었을 때 다솔에게서 전화가 왔다⁠. 다솔은 웃고 있었다⁠. 숨이 넘어가게 웃다가 말을 하다가 또 웃었다⁠. 언니⁠, 언니 이거 진짜 웃겨⁠. 뭐가 웃기냐고 묻자 다솔은 모르겠다고 했다⁠. 모르겠는데 웃기다고⁠.

다율은 슬리퍼를 신은 채 택시를 탔다⁠.

다솔은 워크인 바닥에 앉아 있었다⁠. 이온음료 박스가 엎어져 있었고⁠, 상자 뚜껑이 반쯤 열려 보랏빛이 냉장 창고 안을 가득 채웠다⁠. 단내가 숨을 쉴 때마다 목구멍 안쪽에 들러붙었다⁠. 다솔은 두 손으로 돌 하나를 감싸 쥐고 있었다⁠. 더는 웃지 않았다⁠. 손이 떨렸다⁠. 손가락 끝부터 손목까지 잔물결처럼 떨리는데 다솔은 이 떨림을 멈추려고 돌을 더 꽉 쥐었다⁠.

“⁠다솔아⁠, 그거 내려놔⁠.⁠”

“⁠언니⁠, 이거 한 시간밖에 안 쥐었어⁠.⁠” 다솔의 이가 딱딱 부딪쳤다⁠. 냉장 창고가 추워서만은 아니었다⁠. “⁠근데 놓으면 안 될 것 같아⁠.⁠”

다율은 계산대 서랍에서 고무장갑을 꺼내 끼고⁠, 다솔의 손가락을 하나씩 폈다⁠. 다솔은 놓지 않으려고 했다⁠. 마지막 손가락을 펼 때 다솔이 울었다⁠. 아까 웃던 것과 똑같은 소리로 울었다⁠. 다율은 돌을 상자에 넣고 뚜껑을 닫고⁠, 워크인 문을 닫고⁠, 다솔을 매장으로 데리고 나와 핫팩 두 개를 뜯어 양손에 쥐여 주었다⁠.

다솔은 십 분쯤 지나서야 말을 이었다⁠. 정오에 철구 오빠가 왔다고 했다⁠. 철구는 다솔이 들어오기 전부터 일하던 야간이었고⁠, 다솔은 그만둔 줄도 몰랐다⁠. 점장님 심부름이라며 워크인에 들어가 상자에서 하나만 꺼내 갔다고⁠. 이게 너무 예뻐서⁠, 다솔도 하나만 쥐어 보고 싶었다고⁠.

“⁠언니 근데⁠.⁠” 다솔이 핫팩을 쥔 손을 내려다봤다⁠. 떨림이 겨우 잦아들고 있었다⁠. “⁠그거 하나만 더 쥐어 보면 안 돼⁠?⁠”

다율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워크인 손잡이에 케이블 타이를 세 번 감았다⁠.

세 시에 점장 도팔석이 발주를 넣으러 왔다⁠. 다율은 도팔석을 워크인 앞으로 끌고 가 케이블 타이를 끊고 상자를 보여 줬다⁠. 도팔석은 보랏빛을 한참 내려다봤다⁠. 그러고는 코를 한 번 킁 하더니 말했다⁠.

“⁠지방 특산물이네⁠. 냉장 보관 잘했다⁠.⁠”

“⁠점장님⁠.⁠”

“⁠강원도 쪽은 겨울에 이런 거 많이 캐⁠.⁠” 도팔석은 워크인 문을 닫았다⁠. 손잡이를 놓는 손이 한 번 미끄러졌다⁠. 도팔석은 이 손을 앞치마에 닦고⁠, 라면 매대로 가서 이미 반듯한 컵라면들을 줄을 맞춰 다시 세우기 시작했다⁠.

다율은 매대 반대편으로 돌아가 도팔석의 맞은편에 섰다⁠. 컵라면 줄 사이로 점장의 정수리가 보였다⁠.

“⁠강원도에 엘프가 살아요⁠?⁠”

“⁠요즘 귀 뚫는 게 유행이야⁠. 위쪽으로⁠.⁠”

“⁠드워프는요⁠?⁠”

“⁠광산 쪽 분들이 원래 체격이 좋아⁠.⁠”

“⁠점장님⁠.⁠” 다율은 컵라면 하나를 줄 밖으로 빼서 도팔석의 손등 앞에 놓았다⁠. “⁠다솔이 아까 이거 한 시간 쥐고 웃다가 울었어요⁠. 손을 떨면서 하나만 더 달래요⁠. 철구 씨는 그걸 들고 나갔고요⁠. 강원도 특산물이 원래 그래요⁠?⁠”

도팔석은 빼낸 컵라면을 도로 줄 안에 넣었다⁠. 넣고 나서도 손을 떼지 않았다⁠. 한참 있다가 다율을 보지 않고 말했다⁠.

“⁠철구 걔도 처음엔 컵라면만 팔았어⁠.⁠”

“⁠그다음엔요⁠?⁠”

“⁠그다음엔 그만뒀지⁠.⁠” 점장은 앞치마 주머니에서 차 키를 꺼냈다⁠. 발주 화면은 열어 놓기만 하고 아무것도 넣지 않은 채였다⁠. “⁠다율 씨⁠. 지방 손님은 지방 손님이야⁠. 그렇게 해야 이 가게가 그냥 편의점이야⁠. 그렇게 안 하면 나는 이 가게를 어떻게 해야 될지 몰라⁠.⁠”

점장은 자동문 앞에서 한 번 돌아봤다⁠. 무언가를 더 말할 것처럼 입을 열었다가⁠, 오늘 밤 진통제 재고는 두 통 남았으니 아껴 팔라고만 하고 나갔다⁠. 다율은 상비약 칸을 열어 봤다⁠. 정말 두 통이었다⁠.

*

자정⁠, 철문을 두드리는 소리는 한 번⁠, 오래 쉬고⁠, 한 번이었다⁠.

다율은 노크가 끝나기 전에 문을 열었다⁠. 상자는 이미 문턱 앞까지 끌어다 놓았다⁠. 돌길 위에 바르텐이 서 있었고⁠, 횃불을 든 짐꾼 셋이 뒤에 있었다⁠. 하르펜의 밤은 어제보다 추웠다⁠. 문틈으로 들어온 눈발이 다율의 앞치마에 붙었다⁠.

“⁠보관료는 됐고요⁠.⁠” 다율은 상자를 발로 밀었다⁠. 상자는 문턱을 넘어 돌길 위로 반쯤 나갔다⁠. “⁠도로 가져가세요⁠. 저희 가게는 반품도 받고⁠, 반송도 해 드려요⁠.⁠”

바르텐은 상자를 보지 않고 다율을 봤다⁠. 그리고 짐꾼에게 손짓해 뚜껑을 열게 했다⁠. 허리춤의 작은 천칭을 풀어 한 손으로 들고⁠, 상자 안의 돌을 하나씩 접시에 올렸다⁠. 하나를 올리고⁠, 내리고⁠, 다음 것을 올렸다⁠. 횃불이 바람에 흔들릴 때마다 보랏빛이 바르텐의 얼굴 아래에서 일렁였다⁠. 서른한 번째에서 손을 멈췄다⁠.

“⁠하나가 비오⁠.⁠”

“⁠그건 제가 아니라⁠…⁠…⁠.⁠”

“⁠알고 있소⁠.⁠” 바르텐은 천칭을 허리에 도로 걸었다⁠. 바르텐은 처음으로 소리 내어 웃었다⁠. 낮고 짧았다⁠. “⁠견본은 이미 나갔군⁠.⁠”

“⁠견본이요⁠?⁠”

“⁠물건이 팔리려면 먼저 한 번 맛을 봐야 하오⁠.⁠” 바르텐은 상자 뚜껑을 손바닥으로 덮었다⁠. “⁠아가씨가 어젯밤 드워프에게 국물 한 모금을 먹였듯이 말이오⁠. 한 모금 먹은 자는 다시 오오⁠. 이제 그대가 문을 열어 주지 않아도⁠, 그쪽 거리 사람들이 그대의 앞문을 두드리며 이 돌을 찾을 거요⁠.⁠”

다율의 입이 처음으로 바로 열리지 않았다⁠. 손바닥에 고무장갑 냄새가 아직 남아 있었다⁠. 다솔의 손가락이 하나씩 펴지던 감각도⁠.

바르텐이 옆으로 비켜섰다⁠. 뒤쪽 어둠 속에서 사내 하나가 걸어 나왔다⁠. 서른 중반쯤⁠, 쇠 투구를 옆구리에 끼고 긴 창을 어깨에 걸쳤다⁠. 외투 깃에는 은빛 탑 문양이 박혀 있었다⁠. 손짓하자 창을 든 병사 넷이 따라 나와 문밖 양쪽에 섰다⁠. 둘은 들고 온 말뚝을 돌 틈에 박기 시작했다⁠. 망치 소리가 돌길을 울렸다⁠.

“⁠하르펜 경비대장 카샨이다⁠.⁠” 사내는 짧게 말했다⁠. “⁠오늘부터 이 문으로 드나드는 하르펜 물건은 검은 저울에 먼저 단다⁠. 값의 삼분의 일을 저울 값으로 낸다⁠. 안 내면 못 지나간다⁠.⁠”

“⁠그런 법이 언제 생겼는데요⁠?⁠”

“⁠방금⁠.⁠”

말뚝 위로 횃불 걸이가 올라갔다⁠. 초소였다⁠. 철문에서 다섯 걸음 떨어진 자리⁠, 하르펜 쪽에서 이 문으로 오려면 반드시 이 앞을 지나야 하는 자리였다⁠.

돌길 저편에서 쇠사슬 갑옷이 부딪치는 소리가 났다⁠. 실레아였다⁠. 실레아는 볼을 감싸고 있지 않았고⁠, 걸음이 어제보다 빨랐다⁠. 손에는 오늘 밤의 한 통 값인 금화 한 닢이 쥐여 있었다⁠.

카샨의 창이 실레아의 가슴 앞을 가로로 막았다⁠.

“⁠기사님도 저울 값을 내셔야 합니다⁠.⁠”

“⁠나는 성채의 기사요⁠. 성채 병사들이 먹을 약을 사러 왔소⁠.⁠”

“⁠성채 기사님이 성 밖에서 칼을 뽑으시면⁠, 성채 사령관께 보고가 갑니다⁠.⁠” 카샨은 창을 거두지 않았다⁠. “⁠사령관께서 좋아하실지는 모르겠습니다⁠.⁠”

실레아의 손이 칼자루를 잡았다⁠. 칼날이 칼집에서 한 뼘 나왔다⁠. 횃불 빛이 이 한 뼘 위로 미끄러졌다⁠. 병사 넷이 동시에 창끝을 내렸다⁠.

다율은 계산대에서 들고 나온 진통제 한 통을 쥔 채⁠, 문턱 위에 섰다⁠. 한 발은 신림동 창고의 타일 위에⁠, 한 발은 하르펜의 언 돌 위에⁠. 창끝과 칼날 사이의 거리는 다율의 팔 길이만 했다⁠.

2화는 어땠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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