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화(5,411자)

싣지 않는 손

이세계 편의점 야간 알바는 시급이 금화다 · 채온유

실레아는 감방 창살 너머로 이 고요를 들었다⁠. 이백 명이 있는 마당에서 나는 소리가 아니었다⁠. 사령관이 실으라고 두 번 말했고⁠, 두 번 다 아무 소리도 돌아오지 않았다⁠. 서쪽 숲 기사단 삼백 년 동안 성채 마당이 명령에 이렇게 조용했던 적은 없을 것이다⁠. 이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았다⁠. 다음 명령은 말이 아니라 칼로 온다⁠.

열쇠 소리가 났다⁠. 감방 문 앞에 젊은 기사가 서 있었다⁠. 하르펜에서 실레아의 손목에 끈을 감던 기사였다⁠. 기사의 손이 떨렸다⁠. 추위 탓만은 아니었다⁠.

“⁠사령관께서 기사들에게 칼을 뽑으라 하셨소⁠.⁠” 젊은 기사가 말했다⁠. “⁠병사들에게⁠. 나는 그 명을 받지 않으려고 감옥 순찰을 자청했소⁠.⁠” 기사는 열쇠를 자물쇠에 꽂았다⁠. “⁠실레아 경⁠. 마당에 기사가 하나 필요하오⁠. 명을 어겨 본 기사가⁠.⁠”

“⁠옆방도 여시오⁠.⁠”

젊은 기사는 망설이지 않았다⁠. 옆방 창살이 열리고 서울 상인이 짚 부스러기를 털며 나왔다⁠. 상인은 실레아의 붕대를 한 번 보더니 아무 말 없이 주머니에서 거즈를 꺼냈다⁠. 실레아는 팔을 내밀지 않았다⁠.

“⁠나중에 감으시오⁠. 지금은 그대의 손이 필요한 데가 따로 있소⁠.⁠”

*

마당에 내려섰을 때 사령관은 이미 칼을 뽑고 있었다⁠.

창고 문 앞에 병사들이 서 있었다⁠. 맨 앞⁠, 털양말에 붕대 감은 발로 선 병사의 가슴께에 사령관의 칼끝이 닿아 있었다⁠. 병사는 물러서지 않았다⁠. 뒤의 병사들도⁠. 성채 기사 열이 사령관 양옆에 섰지만 칼을 뽑은 기사는 셋뿐이었다⁠. 나머지는 칼자루를 잡고만 있었다⁠.

“⁠마지막이다⁠.⁠” 사령관이 말했다⁠. “⁠실어라⁠.⁠”

다율은 마당을 가로질러 뛰려 했다⁠. 실레아가 다율의 어깨를 잡아 뒤로 돌려세웠다⁠. 그리고 혼자 걸어 나갔다⁠. 칼이 없었다⁠. 성채로 끌려올 때 기사들이 거두어 간 그대로였다⁠. 붕대 감은 왼팔이 갑옷 없는 옷소매 밖으로 늘어졌다⁠.

실레아는 사령관의 칼끝과 병사의 가슴 사이에 섰다⁠.

“⁠사령관⁠.⁠” 실레아는 무릎을 꿇지 않았다⁠. “⁠이 병사의 발은 서울 상인이 감았습니다⁠. 밤새 서른일곱 명을 감았고⁠, 의무병이 마흔을 감았습니다⁠. 사령관께서 그 발로 상자를 지고 고개를 내려가라 하시면⁠, 그 발가락은 고개 중턱에서 떨어집니다⁠. 그다음 겨울에 이 성문을 지킬 발이 없습니다⁠.⁠”

“⁠명을 어긴 기사가 또 명을 어기는가⁠?⁠”

“⁠어기는 게 아닙니다⁠. 사흘 뒤에 거두시려던 걸⁠, 지금 거두시라고 청하는 겁니다⁠.⁠” 실레아는 허리를 숙여 마당의 눈을 한 움큼 쥐었다⁠. 이 눈을 칼집이 비어 있는 자기 허리띠에 문질렀다⁠. 서쪽 숲 기사가 칼을 반납할 때 하는 예였다⁠. “⁠제 칼은 이미 사령관께 있습니다⁠. 그러니 이 병사 앞에 선 것은 기사가 아니라 엘프 하나입니다⁠. 엘프 하나를 베시고 실으라 하십시오⁠.⁠”

사령관의 칼끝이 실레아의 가슴께로 옮겨 왔다⁠. 칼끝이 떨리지 않았다⁠. 마당의 병사들이 숨을 멈췄다⁠.

이때 성문 쪽에서 쇠 장화 소리가 났다⁠. 여럿이었다⁠. 마당의 모든 고개가 그쪽으로 돌았다⁠.

*

성문을 들어선 것은 하르펜 경비대였다⁠. 마흔⁠. 창을 들고⁠, 장화 목마다 하얀 비닐 끝이 삐져나와 있었다⁠. 맨 앞에 카샨이 투구를 옆구리에 끼고 걸어왔다⁠. 숨이 차 있었다⁠. 이 옆에 그롬바가 있었다⁠. 드워프는 얼굴이 시뻘겠고 수염 끝에 고드름이 달렸다⁠. 밤사이 고개를 내려가 하르펜 막사 문을 두드렸고⁠, 해가 뜨기 전에 다시 올라왔다⁠. 짧은 다리로 두 번⁠.

“⁠하르펜 경비대의 카샨이다⁠.⁠” 카샨이 마당 한가운데에서 멈췄다⁠. 사령관의 칼끝을 보고⁠, 이 앞의 실레아를 보고⁠, 창고의 보랏빛을 봤다⁠. “⁠성채에 칼을 들고 온 게 아니다⁠. 국경 통로의 하르펜 쪽 끝을 지키러 왔다⁠.⁠”

“⁠하르펜 경비대가 성채 안에서 무엇을 지키나⁠?⁠” 사령관이 칼을 거두지 않고 말했다⁠.

“⁠사령관께서 광장에서 말씀하셨다⁠. 쥐꼬리 골목의 문은 국경 통로라고⁠.⁠” 카샨은 창 자루로 마당의 언 땅을 찍었다⁠. “⁠쥐꼬리 골목은 하르펜 땅이다⁠. 그 통로로 하르펜 땅을 지나는 짐은 하르펜 경비대가 먼저 연다⁠. 세 안 낸 마정석이면 하르펜 법대로 거둔다⁠. 그건 영주의 법이고⁠, 영주는 성채에 국경을 맡겼지 하르펜을 맡기진 않았다⁠.⁠”

다율은 카샨을 봤다⁠. 카샨은 다율을 보지 않았다⁠. 다만 경비대장이 이렇게 길게 말하는 것은 술이 들어갔을 때뿐이라던 도팔석의 말이 떠올랐다⁠. 카샨의 얼굴은 술이 아니라 고개 바람에 붉었다⁠.

“⁠그러니 실으시려면 실으십시오⁠.⁠” 카샨이 말했다⁠. “⁠하르펜 성문에서 다 열어 보겠습니다⁠. 장날 광장 계근대 위에서⁠. 그 상자들 뚜껑의 고리 문양도 같이⁠.⁠”

카샨은 대답을 기다리지 않았다⁠. 창고 문 앞으로 걸어가 맨 앞의 상자에 창날을 꽂았다⁠. 붕대 감은 발의 병사가 이 옆에 쪼그려 앉아 뚜껑 틈에 손가락을 넣었다⁠. 둘이 같이 당겼다⁠. 못이 비명을 지르며 빠졌다⁠.

보랏빛이 마당 눈 위로 쏟아졌다⁠. 마정석이 짚을 깔고 빼곡히 들어 있었다⁠. 카샨은 이 상자를 보고 고개를 끄덕이고는⁠, 창고 맨 안쪽에 따로 쌓인 작은 상자들로 갔다⁠. 이 상자들에서는 보랏빛이 새지 않았다⁠. 뚜껑에는 같은 고리 문양이 지져져 있었다⁠. 병사가 하나를 비틀어 열었다⁠. 짚 밑에서 기름종이로 싼 꾸러미가 나왔다⁠. 카샨이 창날로 종이를 갈랐다⁠.

다율은 이 안의 물건을 알았다⁠. 하나하나⁠, 바코드가 어느 면에 붙었는지까지⁠. 해열진통제 다섯 통⁠. 일회용 라이터 열 개⁠. 건전지 한 묶음⁠. 비닐에 싸인 그대로였다⁠. 신림동 어느 편의점에서 누군가 한 번에 하나씩 산 물건들이었다⁠. 철구의 오토바이가 떠올랐다⁠. 첫날 밤⁠, 바르텐이 라이터 바퀴를 굴리며 처음으로 웃던 얼굴도⁠.

“⁠내려가는 상자에는 돌이⁠, 올라가는 상자에는 이게 들었군⁠.⁠” 카샨이 라이터 하나를 집어 들었다⁠. 카샨은 이것을 켤 줄 몰랐다⁠. “⁠하르펜 쪽에서 온 물건이 왜 성채 창고에서 고개 너머로 갈 채비를 하고 있나⁠?⁠”

병사들이 꾸러미 쪽으로 몰려들었다⁠. 진통제 통을 알아보는 얼굴이 여럿이었다⁠. 지난밤 자기들 입에 들어간 것과 같은 하얀 알약이 성채 창고에서 고개 너머로 갈 날을 기다리고 있었다⁠. 병사들은 이것을 눈으로 봤다⁠.

사령관의 얼굴에 처음으로 셈이 지나갔다⁠. 이 셈은 길지 않았다⁠. 병사 이백과 하르펜 경비대 마흔⁠, 그리고 광장의 군중⁠. 카샨은 실레아의 가슴께에서 칼끝을 거두었다⁠. 칼을 칼집에 넣는 소리가 마당에 오래 울렸다⁠.

그러고는 바르텐을 봤다⁠.

*

바르텐은 창고 문 옆에 서 있었다⁠. 이 마당에서 아무도 바르텐을 보고 있지 않았다⁠. 사령관이 바르텐을 볼 때까지⁠.

“⁠검은 저울 상회의 바르텐⁠.⁠” 사령관이 말했다⁠. 목소리가 광장에서와 같았다⁠. 크지 않은데 끝까지 닿았다⁠. “⁠세 없는 마정석을 성채 창고에 숨기고⁠, 성채의 뒷문을 몰래 써 왔다⁠. 오늘 하르펜 경비대장과 성채 병사들 앞에서 그 상자가 드러났다⁠. 성채는 국경의 법으로 밀수꾼을 잡는다⁠.⁠”

기사 둘이 바르텐의 양팔을 잡았다⁠. 칼을 뽑지 않았던 기사들이었다⁠. 바르텐은 저항하지 않았다⁠. 사령관을 봤다⁠. 오래⁠.

“⁠성채의 뒷문은 사령관께서 열어 주셨지⁠.⁠” 바르텐이 말했다⁠.

“⁠성채의 문은 성채가 연다⁠. 누가 그 문을 몰래 지났는지는 성채가 정한다⁠.⁠” 사령관은 돌아섰다⁠. “⁠창고의 마정석은 왕국에 거둔다⁠. 서울 상인의 물건은 돌려준다⁠. 성채 병사들이 쓴 약값은 성채가 치른다⁠.⁠”

사령관은 마당을 가로질러 대청으로 걸어가다가 실레아 앞에서 멈췄다⁠.

“⁠서쪽 숲의 실레아⁠. 기사의 칼은 성채가 거두었다⁠. 오늘부로 성채를 떠나라⁠.⁠”

실레아는 고개를 숙였다⁠. 고개를 숙인 채로 대답했다⁠. “⁠칼은 이미 드렸습니다⁠. 이제는 엘프 하나가 떠나는 것입니다⁠.⁠”

사령관이 대청으로 사라졌다⁠. 남긴 것은 그대로였다⁠. 성채는 성채의 것이었고⁠, 사령관은 사령관이었다⁠. 다만 이 마당에서 이 상자를 들어 줄 손은 하나도 없었다⁠.

*

병사들이 흩어진 마당에서 다율은 실레아의 팔에 붕대를 새로 감았다⁠. 손끝부터⁠. 피가 굳어 붕대가 살에 붙어 있었다⁠. 소독약을 적셔 한 겹씩 떼어 냈다⁠. 실레아는 이를 악물지 않았다⁠. 대신 하늘을 봤다⁠. 고개 위의 하늘은 하르펜보다 가까웠다⁠.

“⁠칼이 없으면 이제 뭐 하실 거예요⁠?⁠”

“⁠그대 가게의 문지기는 이미 점장이 하고 있소⁠.⁠” 실레아가 말했다⁠. “⁠그러니 다른 일을 찾아야겠지⁠. 하얀 알약을 성채까지 나르는 일이라든가⁠.⁠”

“⁠그거 시급 금화예요⁠.⁠”

“⁠그대가 정하는 값이니 믿겠소⁠.⁠”

그롬바가 고드름 달린 수염을 털며 다가왔다⁠. 카샨은 뒤에서 경비병들을 모으고 있었다⁠. 스무 살짜리가 붕대 감은 성채 병사와 장화를 맞대 보며 누구 핫팩이 더 뜨거운지 다투고 있었다⁠.

카샨이 경비병들을 세워 두고 다율 쪽으로 왔다⁠. 실레아의 새 붕대를 한 번 보고⁠, 다율 앞에 섰다⁠. 투구를 옆구리에 낀 채였다⁠.

“⁠숫자 상자⁠.⁠” 카샨이 말했다⁠. “⁠그날 밤 거둔 거⁠. 바르텐 상회에 넘겼다⁠. 다음 날 아침에⁠. 마법 물품은 상회 창고에 둔다는 게 그동안의 법이었다⁠.⁠”

“⁠알아요⁠.⁠”

“⁠알았으면 왜 안 물었나⁠?⁠”

“⁠물으면 대장님이 대답하셔야 하잖아요⁠.⁠” 다율은 붕대 끝을 매듭지었다⁠. “⁠그날 밤 대장님은 저 안 거두셨어요⁠. 저울만 거두셨고요⁠.⁠”

카샨은 한참 서 있었다⁠. 그러고는 장갑을 벗어 검은 새끼손가락을 내려다봤다⁠. “⁠바르텐이 잡혔으니 이제 은화는 영영 없다⁠. 내 마흔은 네 국물로 산다⁠. 성채 이백도 네 약으로 산다⁠. 너 하나한테 이백마흔이 달렸다⁠.⁠”

“⁠한 달 치는 점장님 금화로 있어요⁠. 그다음은 그다음에 셀게요⁠.⁠”

“⁠너는 늘 그다음에 세는군⁠.⁠” 카샨이 장갑을 도로 꼈다⁠. 웃은 건지 한숨을 쉰 건지 이번에도 알 수 없었다⁠.

마당 저편에서 기사 둘이 바르텐을 끌고 성문 쪽으로 걸어갔다⁠. 하르펜 아래 감옥으로 데려간다고 했다⁠. 바르텐의 외투 자락이 눈 위를 쓸었다⁠. 바르텐은 다율 곁을 지날 때 걸음을 멈췄다⁠. 기사들이 바르텐의 팔을 당겼지만 바르텐은 한 번만 버텼다⁠.

“⁠어제 회랑에서 한 말⁠, 기억하시오⁠.⁠” 바르텐이 말했다⁠. “⁠나를 저울에 달 때 값을 알려 주겠다고⁠.⁠”

다율은 붕대 감던 손을 멈췄다⁠.

“⁠그 고리 안의 불꽃은 제국 연금술 길드의 문양이오⁠. 그 상자의 돌은 그 길드가 광산에서 캐서 내게 넘긴 거요⁠. 내가 하르펜 경비대에 준 은화도⁠, 그대 앞에 놓은 금괴도⁠, 다 그 길드의 돈이었소⁠.⁠” 바르텐의 목소리는 정중했다⁠. 장사꾼이 마지막 값을 부를 때처럼⁠. “⁠그 길드는 마정석을 서울에 팔아 달라고 한 적이 없소⁠. 그건 내 셈이었지⁠. 그들이 원한 건 그쪽 물건이었소⁠. 하얀 알약⁠, 바람에 안 꺼지는 불⁠, 그리고 카샨이 거두어 간 그 숫자 상자⁠.⁠”

카샨이 고개를 들었다⁠. 카샨의 얼굴이 굳었다⁠. 전자저울을 압수한 이 밤⁠, 이 상자를 상회에 넘긴 것이 누구였는지 다율은 묻지 않아도 알았다⁠.

“⁠그 숫자 상자는 지금 고개 너머에 있소⁠. 길드의 탑에⁠.⁠” 바르텐은 고개 북쪽⁠, 안개 속의 길을 턱으로 가리켰다⁠. “⁠그들은 그 상자를 뜯어 보고 이렇게 물었소⁠. 이걸 만든 곳은 어디냐고⁠. 나는 하르펜의 쥐꼬리 골목이라고 답했소⁠. 이제 나는 저울에 달렸으니⁠, 그들은 더 이상 나를 거치지 않을 거요⁠.⁠”

기사들이 바르텐을 끌었다⁠. 이번에는 버티지 않았다⁠. 바르텐은 끌려가면서 마지막 한마디를 던졌다⁠.

“⁠그대 문으로 직접 올 거요⁠. 금괴보다 무거운 걸 들고⁠.⁠”

14화는 어땠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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