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화(5,301자)

얼음 이빨

이세계 편의점 야간 알바는 시급이 금화다 · 채온유

“⁠세 내면 되죠⁠.⁠”

다율은 대차 손잡이에서 손을 떼지 않고 말했다⁠. 마정석 등 하나가 방 안을 보랏빛으로 비췄다⁠. 세관 기사 셋 중 맨 앞의 사내는 어젯밤 쥐꼬리 골목에서 가죽 통을 들고 있던 젊은 기사였다⁠. 실레아의 손목에 끈을 감던 이 손이 지금은 칼자루 위에 있었다⁠.

“⁠국경 통로로 들어온 물건은 세관이 거둔다고 하셨어요⁠. 거두는 거랑 세 받는 거는 달라요⁠. 사령관님이 광장에서 세를 낸다고 하셨지 다 가져간다고는 안 하셨잖아요⁠.⁠” 다율은 대차 맨 위의 상자를 열어 진통제 통을 꺼냈다⁠. 하나⁠, 둘⁠, 열다섯⁠. 다율은 이것을 판자 위에 쌓았다⁠. “⁠열에 하나예요⁠. 하르펜 장꾼들이 계근대에 내던 것보다 정직한 값이에요⁠. 저 이거 들고 성채에 가요⁠. 사령관님이 손님한테 성문 열려 있다고 하셨으니까⁠.⁠”

젊은 기사는 판자 위의 진통제 열다섯 통을 내려다봤다⁠. 그러고는 뒤의 두 기사를 돌아봤다⁠. 하나가 어깨를 으쓱했다⁠. 젊은 기사는 진통제 한 통을 집어 품에 넣고⁠, 나머지 열넷을 방 구석 탁자에 올렸다⁠.

“⁠성채까지 내가 길잡이를 하겠소⁠.⁠” 기사가 말했다⁠. “⁠사령관께서 손님이 오면 데려오라 하셨소⁠. 거둘 것이 남았으면 성채에서 거두시겠지⁠.⁠”

“⁠그거 품에 넣으신 건 세예요⁠, 개인 구매예요⁠?⁠”

젊은 기사는 대답하지 않았다⁠. 귀까지 빨개져서 먼저 쇠창살 문을 나섰다⁠.

*

하르펜에서 고개까지는 반나절이었다⁠. 길은 성 밖 개울을 건너 짐꾼들의 언덕을 지나고⁠, 이후로는 오르기만 했다⁠. 그롬바는 손수레를 밀며 쉬지 않고 투덜거렸다⁠. 드워프는 산을 파고 들어가는 종족이지 넘어가는 종족이 아니라고⁠, 조상님이 이 꼴을 보면 무덤에서 수염을 쥐어뜯을 거라고⁠. 다율의 운동화는 한 시간 만에 눈이 스며 발가락이 얼었다⁠. 다율은 핫팩 두 개를 양말 속에 넣었다⁠. 그롬바가 이걸 보고 자기 장화에도 넣었다⁠. 젊은 기사가 말 위에서 이걸 보고 한참 망설이다가 손을 내밀었다⁠. 다율은 핫팩 하나를 이 손에 올려 주고 손가락 하나를 폈다⁠. 은화 하나⁠. 젊은 기사는 은화를 던져 주고⁠, 이 핫팩을 안장과 허벅지 사이에 끼워 넣었다⁠. 다음부터 말 위에서 덜 움츠렸다⁠.

보온병의 바나나우유는 정오가 되기 전에 얼었다⁠. 그롬바가 병을 깨물어 노란 얼음을 씹더니⁠, 이게 더 맛있다고 했다⁠.

해가 기울 무렵 고개 꼭대기가 보였다⁠. 바위 비탈이 끝나는 자리에 돌 성채가 솟아 있었다⁠. 회색 성벽이 비탈 양쪽 바위에 박혀 고갯길을 통째로 물고 있었고⁠, 성벽 위로 솟은 탑 다섯이 눈을 이고 아래를 향해 서 있었다⁠. 멀리서 보면 정말로 얼어붙은 이빨 같았다⁠. 성벽 너머 북쪽으로 길이 다시 내려갔다⁠. 이 길 끝⁠, 안개 속에 제국이 있었다⁠.

*

성채 마당은 조용했다⁠. 이백 명이 사는 곳인데 이백 명의 소리가 나지 않았다⁠. 다율은 이 조용함이 무엇인지 막사 문을 열고 알았다⁠.

병사들은 짚더미 위에 누워 있었다⁠. 하르펜 경비대 막사와 같았다⁠. 장화를 신은 채⁠, 담요를 둘이 나눠 덮고⁠. 다른 것은 기침이었다⁠. 막사 끝에서 끝까지 기침이 이어졌다⁠. 그리고 냄새⁠. 젖은 양털 냄새 밑에 무언가 썩는 냄새가 섞여 있었다⁠.

막사 한구석에 늙은 의무병이 있었다⁠. 의무병은 술병과 찢은 천 조각을 들고 병사 하나의 발을 닦고 있었다⁠. 장화를 벗긴 발이었다⁠. 발가락 두 개가 검었다⁠. 의무병은 다율을 보고⁠, 다율 뒤의 손수레를 보고⁠, 손수레 위의 상자에 박힌 낯선 글자를 봤다⁠.

“⁠그게 실레아 경이 말한 하얀 알약이오⁠?⁠”

다율은 대답 대신 상자를 열었다⁠. 의무병 옆에 무릎을 꿇고 앉아 병사의 발을 봤다⁠. 신림역 앞 약국 약사가 손끝에 감아 준 거즈를 떠올렸다⁠. 소독약 병을 따서 거즈에 적시고⁠, 검은 발가락 둘레의 붉은 살부터 닦았다⁠. 병사가 이를 악물었다⁠. 연고를 짜서 바르고⁠, 붕대를 손끝부터⁠, 발가락 사이를 하나씩 띄우며 감았다⁠. 의무병이 이 손을 들여다봤다⁠. 처음 보는 감는 법이었다⁠.

“⁠이렇게요⁠. 발가락끼리 붙으면 안 된대요⁠.⁠”

다율은 진통제 두 알을 병사의 입에 넣고 물을 먹였다⁠. 그리고 핫팩을 뜯어 붕대 감은 발 옆이 아니라 무릎 뒤에 대 주었다⁠. 언 데에 직접 대지 말라고 약사가 그랬다⁠.

의무병은 다음 병사의 발을 직접 감았다⁠. 다율이 한 대로⁠. 손이 느렸지만 정확했다⁠. 그롬바는 막사 가운데 화로에 쇠솥을 걸고 물을 끓였다⁠. 마정석이 귀한 성채의 화로에 드워프는 자기 손수레의 판자를 하나 뜯어 넣었다⁠. 삼 분 타이머가 화로 옆 돌 위에 섰다⁠.

밤이 깊어지는 동안 다율은 서른일곱 명의 발과 손을 감았다⁠. 의무병이 마흔 명을 감았다⁠. 막사 곳곳에서 컵라면 김이 올랐다⁠. 기침은 그대로였지만⁠, 이 사이에 다른 소리가 섞였다⁠. 국물 마시는 소리⁠, 핫팩 비닐 비비는 소리⁠, 그리고 누군가 낮게 웃는 소리⁠.

자정 무렵⁠, 처음 발을 감았던 병사가 일어섰다⁠. 그롬바는 짚더미를 짚고 일어나 한 발씩 막사 바닥을 디뎠다⁠. 붕대 감은 발이 장화 대신 털양말에 싸여 있었다⁠. 그롬바는 막사 문까지 걸어갔다가 돌아왔다⁠. 다섯 걸음⁠, 열 걸음⁠. 그롬바는 다율 앞에 와서 섰다⁠. 무슨 말을 하려는지 입술이 움직였는데⁠, 말 대신 발가락을 꼼지락거렸다⁠. 붕대 끝이 따라 움직였다⁠.

의무병이 술병을 내려놓고 얼굴을 손바닥으로 문질렀다⁠.

*

새벽에 다율은 물을 길으러 성채 뒷마당으로 갔다가 창고를 봤다⁠.

성벽에 붙은 돌 창고였다⁠. 문 하나가 반쯤 열려 있었고⁠, 이 틈으로 보랏빛이 새어 나왔다⁠. 다율은 물동이를 내려놓고 틈에 얼굴을 댔다⁠. 나무 상자였다⁠. 첫날 밤 밤새마트 창고에 밀려 들어왔던 것⁠, 바르텐의 방 구석에 쌓여 있던 것⁠, 장날 밤 매장 통로에 흩어졌던 것과 같은 모양⁠. 이것이 천장까지 쌓여 있었다⁠. 다율은 세다가 그만뒀다⁠. 쉰을 넘었다⁠. 상자마다 뚜껑에 불로 지진 표시가 있었다⁠. 검은 저울 상회의 천칭이 아니었다⁠. 처음 보는 문양이었다⁠. 둥근 고리 안에 불꽃 하나⁠.

“⁠제국 광산에서 오는 거요⁠.⁠”

등 뒤에서 젊은 기사가 말했다⁠. 다율이 창고 앞에 선 것을 보고도 막지 않았다⁠.

“⁠전에는 바르텐 회장이 밤에 뒷문으로 받아 갔소⁠. 세 없이⁠. 그 값의 셋에 하나가 성채에 남았소⁠. 그걸로 이 겨울 땔감을 샀고⁠.⁠” 젊은 기사는 창고 문을 마저 열지도⁠, 닫지도 않았다⁠. “⁠이제 회장이 문을 못 쓰니⁠, 사령관께서 그 문을 직접 쓰시겠다는 거요⁠. 세관이라는 이름으로⁠.⁠”

“⁠그럼 이 상자들이 전부 제 가게로 와요⁠?⁠”

젊은 기사는 대답하지 않았다⁠. 품에서 진통제 통을 꺼내 만지작거렸다⁠. 하르펜에서 세라고 하며 넣어 둔 이 통이었다⁠.

*

대청으로 가는 회랑에서 바르텐이 기다리고 있었다⁠. 털가죽 외투는 그대로였지만 허리의 천칭이 없었다⁠. 털모자도 짐꾼도 곁에 없었다⁠. 성채 기사 하나가 열 걸음 떨어져 바르텐을 보고 있었다⁠.

“⁠천칭은요⁠?⁠”

“⁠사령관께 맡겼소⁠. 손님은 무기를 맡기는 법이라더군⁠.⁠” 바르텐은 회랑 창 너머 마당을 내려다봤다⁠. 막사 굴뚝에서 컵라면 김이 섞인 연기가 오르고 있었다⁠. “⁠그대가 밤새 막사에서 한 일은 들었소⁠. 하르펜 경비대 막사에서 한 일과 같군⁠.⁠”

“⁠같은 거 아니에요⁠. 여기선 붕대도 감았어요⁠.⁠”

바르텐은 이 말에 웃지 않았다⁠. 목소리를 낮췄다⁠. “⁠창고의 상자⁠, 뚜껑의 문양을 봤소⁠?⁠”

“⁠고리 안에 불꽃이요⁠.⁠”

“⁠그 문양이 무엇인지 알면 그대는 오늘 대청에서 다른 대답을 할 거요⁠.⁠” 바르텐이 다율 쪽으로 눈을 돌렸다⁠. 상인의 눈이었다⁠. 무언가를 팔려는 눈⁠. “⁠그러나 그 값은 오늘 치를 수 없소⁠. 나는 지금 손님이라⁠, 내 물건을 팔 수가 없소⁠.⁠”

“⁠그럼 언제요⁠?⁠”

“⁠내가 다시 내 저울을 찰 때⁠.⁠” 바르텐은 열 걸음 밖의 기사를 턱으로 가리켰다⁠. “⁠아니면 저 사람들이 나를 저울에 달 때⁠.⁠”

*

성채 대청은 높고 추웠다⁠. 벽에 걸린 깃발들이 바람도 없는데 흔들렸다⁠. 긴 탁자 끝에 사령관이 앉아 있었다⁠. 이 오른쪽에 바르텐이 서 있었다⁠. 손님이 앉지 않고 서 있었다⁠.

“⁠막사를 봤나⁠?⁠” 사령관이 물었다⁠.

“⁠봤어요⁠.⁠”

“⁠그럼 셈이 됐겠지⁠.⁠” 사령관은 탁자 위에 손을 깍지 꼈다⁠. “⁠이백 명⁠. 왕도는 녹봉도 약도 땔감도 안 보낸다⁠. 성채는 스스로 먹어야 한다⁠. 그대의 물건이 내 병사를 살리고⁠, 창고의 돌이 그 물건값을 낸다⁠. 그대는 성채 세관의 서울 상인이 된다⁠. 성채가 약을 주문하면 그대가 들인다⁠. 성채가 상자를 보내면 그대가 그쪽으로 내보낸다⁠. 금화는 원하는 만큼 주겠다⁠. 바르텐보다 많이⁠.⁠”

다율은 바르텐을 봤다⁠. 바르텐은 다율을 보지 않았다⁠. 사령관의 깍지 낀 손을 보고 있었다⁠.

“⁠상자는 안 내보내요⁠.⁠”

“⁠그럼 약도 안 들인다는 건가⁠?⁠”

“⁠약은 들여요⁠. 상자는 안 내보내요⁠.⁠”

“⁠둘은 한 저울에 달려 있다⁠.⁠” 사령관이 말했다⁠. 바르텐이 할 법한 말이었다⁠. 다만 사령관은 저울을 차고 있지 않았다⁠. “⁠그대가 하나만 고를 수는 없다⁠.⁠”

“⁠사령관님 병사들 발은 제가 감았어요⁠.⁠” 다율은 목소리를 낮추지 않았다⁠. “⁠그 발로 그 상자 들고 고개 내려가라고 하시면⁠, 그 사람들이 저한테 뭐라고 할지는 그 사람들한테 물어보세요⁠. 저는 사령관님한테 안 물어요⁠.⁠”

사령관은 오래 다율을 봤다⁠. 그리고 손을 풀었다⁠.

“⁠남은 물건은 성채가 거둔다⁠.⁠” 사령관이 기사들에게 말했다⁠. “⁠서울 상인은 손님 방에 모셔라⁠. 실레아 경 옆방이 비었지⁠.⁠”

*

손님 방은 감방이었다⁠. 돌벽에 쇠창살 하나⁠, 짚 한 단⁠. 옆방과의 벽에 주먹만 한 구멍이 나 있었다⁠. 이 구멍으로 실레아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대가 왜 여기 있소⁠?⁠”

“⁠기사님 옆방이 비었대서요⁠.⁠”

구멍 너머에서 짧은 웃음소리가 났다⁠. 웃다가 팔이 아팠는지 숨을 들이켜는 소리가 이어졌다⁠. 실레아의 붕대는 갈지 않은 채였다⁠. 다율은 패딩 주머니를 뒤졌다⁠. 기사들이 짐을 거두면서 주머니는 뒤지지 않았다⁠. 진통제 한 통과 거즈 한 묶음이 나왔다⁠. 이것을 구멍으로 밀어 넣었다⁠.

“⁠이것도 한 통이에요⁠. 법 지켰어요⁠.⁠”

“⁠알고 있소⁠. 대한민국의 법이오⁠.⁠”

창살 너머로 성채 마당이 내려다보였다⁠. 동이 트고 있었다⁠. 마당에 노새 스무 마리가 줄지어 섰고⁠, 이 앞에 사령관이 나와 있었다⁠. 이 옆에 바르텐⁠. 창고 문이 활짝 열려 보랏빛이 마당 눈 위로 쏟아졌다⁠.

“⁠실어라⁠.⁠” 사령관의 목소리가 마당을 울렸다⁠. “⁠해가 지기 전에 하르펜에 닿는다⁠. 오늘 자정에 국경 통로로 내보낸다⁠.⁠”

병사들이 막사에서 나왔다⁠. 하나⁠, 둘⁠, 열⁠, 서른⁠. 이들은 창고 쪽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창고 문 앞에서 멈췄다⁠. 상자를 들지 않았다⁠. 맨 앞에⁠, 밤사이 처음 일어섰던 병사가 서 있었다⁠. 털양말에 붕대 감은 발로⁠. 병사의 가슴께가 불룩했다⁠. 핫팩이었다⁠. 뒤로 병사들이 한 줄⁠, 두 줄 늘어섰다⁠. 모두 붕대를 감았거나⁠, 핫팩을 품었거나⁠, 둘 다였다⁠.

사령관이 이들을 봤다⁠. 병사들은 움직이지 않았다⁠.

“⁠실으라고 했다⁠.⁠”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마당에 바람 소리만 났다⁠. 이 바람 속에서 다율은 핫팩 비닐이 바스락거리는 소리를 들었다⁠. 이백 개는 아니었다⁠. 그래도 많았다⁠.

13화는 어땠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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