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화(5,664자)

앞문과 뒷문

이세계 편의점 야간 알바는 시급이 금화다 · 채온유

도팔석은 자고 있었다⁠.

접이식 의자에 앉아⁠, 헤드랜턴을 이마에 쓴 채⁠, 무릎에 대걸레를 눕히고⁠. 창고 철문은 반쯤 열려 있었고⁠, 문틈으로 하르펜의 찬바람이 들어와 도팔석의 앞치마 끈을 흔들었다⁠. 철문 안쪽의 종이에는 도팔석이 쓴 줄이 세 개였다⁠. 마지막 줄만 볼펜 글씨였다⁠.

다율은 이 앞에 대차를 세웠다⁠. 바퀴가 타일에 닿는 소리에 도팔석이 눈을 떴다⁠. 헤드랜턴 불빛이 다율의 얼굴을 정면으로 비췄다⁠. 눈을 몇 번 깜빡이고⁠, 손목시계를 보고⁠, 다시 다율을 봤다⁠.

“⁠강원도 출장 길었네⁠.⁠”

“⁠이틀이요⁠.⁠”

“⁠이틀 밤⁠.⁠” 도팔석은 손가락 둘을 펴 보였다⁠. 그러고는 일어서려다 허리를 짚고 도로 앉았다⁠. “⁠어젯밤엔 이 문으로 털보 아저씨가 왔다 갔어⁠. 다율 씨 성채에 갇혔다고⁠. 그래서 오늘 밤엔 안 자려고 했는데⁠.⁠”

“⁠주무셨잖아요⁠.⁠”

“⁠눈만 감은 거야⁠. 지방 손님 오시면 소리로 다 알아⁠.⁠”

이때 대차 뒤에서 그롬바가 고개를 내밀었다⁠. 수염 고드름이 녹아 물이 뚝뚝 떨어졌다⁠. 뒤로 칼 없는 엘프가 섰다⁠. 도팔석은 실레아의 빈 칼집을 보고⁠, 붕대를 보고⁠,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매장으로 들어가 온장고에서 두유 셋을 꺼내 왔다⁠.

*

이후로 엿새가 지났다⁠.

엿새 동안 바뀐 것을 다율은 셀 수 있었다⁠. 셀 수 있다는 게 좋았다⁠.

쥐꼬리 골목 끝 창고⁠, 바르텐이 쇠창살을 달고 난로를 박았던 이 방은 그롬바의 가게가 됐다⁠. 바르텐의 상회가 사들였던 건물을 카샨의 경비대가 밀수꾼의 재산이라며 거두었고⁠, 그롬바가 경비대에 자릿세를 내고 빌렸다⁠. 정직한 추로 단 값이었다⁠. 쇠창살은 떼지 않았다⁠. 드워프는 이 창살에 컵라면 용기를 줄줄이 매달아 간판으로 삼았다⁠. 하르펜 사람들은 이 가게를 ‘⁠서울 잡화⁠’라고 불렀다⁠. 그롬바는 「⁠그롬바와 서울 잡화⁠」라고 고쳐 부르라고 했지만 아무도 그러지 않았다⁠.

방 한가운데 탁자는 그대로 두었다⁠. 계산대가 됐다⁠. 이 탁자 위에서 다율은 하르펜 손님에게 물건을 팔고⁠, 그롬바는 하르펜 물건을 받았다⁠. 양초 장수 아낙의 박하 양초⁠, 빵집 할머니의 꿀 과자⁠, 대장장이가 두드려 만든 작은 무쇠 냄비⁠. 이것들이 문턱을 넘어 밤새마트 계산대 옆 「⁠강원도 특산품⁠」 매대에 올라갔다⁠. 다솔이 붙인 이름이었다⁠. 무쇠 냄비는 사흘 만에 다 팔렸다⁠. 산 사람들은 다들 캠핑용이냐고 물었다⁠.

아랫시장 계근대의 놋쇠 저울에는 빵집 할머니의 추가 걸렸다⁠. 대장장이가 이 추를 본떠 똑같은 것을 열 개 부어 만들었고⁠, 다율이 서울에서 새로 사 온 전자저울로 하나씩 달아 맞췄다⁠. 털모자를 쓴 저울잡이들은 시장에 나오지 않았다⁠. 검은 저울 상회의 문에는 경비대의 봉인이 붙었다⁠.

장날 밤 음료 창고에 남았던 상자 열둘은 카샨의 경비병들이 문턱 너머로 날라 갔다⁠. 경비대는 이 마정석을 밀수품으로 거두었고⁠, 거둔 돌을 경비대 막사 화로에 넣었다⁠. 하르펜에서 이 돌은 등잔 기름이었다⁠. 이날 밤부터 막사 화로에는 마정석 두 덩이가 아니라 여덟 덩이가 탔다⁠. 다율은 점장 책상 서랍의 철제 상자에서 은박지에 싼 마지막 한 조각을 꺼내 이 화로에 던졌다⁠. 은박지가 오그라들고⁠, 보랏빛 불꽃이 한 번 솟았다가 다른 불꽃들 사이로 섞였다⁠. 경비병 마흔은 이 불 앞에서 장화를 벗고 잤다⁠.

성채에서는 젊은 기사가 사흘에 한 번 고개를 내려왔다⁠. 이제 실레아 대신 진통제를 사러 왔다⁠. 한 번에 한 통⁠, 금화 한 닢⁠. 이것을 의무병에게 가져간다고 했다⁠. 사령관은 아무 말도 안 했다고⁠. 성채 창고의 마정석은 왕국에 거두었다고 했는데⁠, 이 상자들이 어디로 갔는지는 젊은 기사도 몰랐다⁠.

서울에서는 철구가 낮 배달을 시작했다⁠. 오토바이는 도팔석이 철구의 밀린 할부 석 달 치를 대신 내고 지켰다⁠. 대신 철구는 낮마다 신림 일대 편의점과 약국을 돌며 다율이 적어 준 대로 진통제를 한 통씩 사 왔다⁠. 저녁이면 이것을 밤새마트 창고에 내려놓고 갔다⁠. 고시원 3층의 이 고시생은 총무가 고향 집 부모에게 연락해 데려갔다고 했다⁠. 철구는 이 이야기를 할 때 오토바이 헬멧을 벗지 않았다⁠.

다율의 은행 앱 숫자는 엿새째 그대로였다⁠. 금화는 한 닢도 금은방에 가지 않았다⁠. 하르펜에서 번 금화는 하르펜에서 컵라면과 붕대가 됐다⁠. 다율은 앱을 끄고⁠, 「⁠강원도 특산품⁠」 매대에서 빵집 할머니의 꿀 과자 하나를 집어 제 카드로 계산했다⁠.

닷새째 밤⁠, 다율은 카샨을 따라 하르펜 성 아래 감옥으로 내려갔다⁠. 돌계단이 서른 개였고⁠, 내려갈수록 마정석 등이 줄었다⁠. 맨 끝 방의 창살 너머에 바르텐이 앉아 있었다⁠. 털가죽 외투는 거두어 갔는지 홑옷 차림이었다⁠. 허리에 천칭이 없으니 사람이 한 치쯤 작아 보였다⁠.

다율은 창살 사이로 바나나우유 한 병을 밀어 넣었다⁠. 빨대도 꽂아서⁠.

“⁠값은⁠?⁠” 바르텐이 물었다⁠.

“⁠은화 하나요⁠. 외상 달아 둘게요⁠.⁠”

바르텐은 병을 들어 한 모금 마셨다⁠. 첫날 밤처럼 혀끝에 오래 굴렸다⁠. “⁠여전히 달군⁠.⁠” 그러고는 병을 무릎 위에 놓았다⁠. “⁠길드가 오면 그대는 나를 찾게 될 거요⁠.⁠”

“⁠왜요⁠?⁠”

“⁠그 길드와 말을 섞어 본 하르펜 사람은 나 하나요⁠. 그들은 값을 묻지 않소⁠. 만든 손을 묻지⁠. 그대는 그 손이 어디 있는지 모르잖소⁠. 서울의 공장 이름 하나도⁠.⁠” 바르텐은 빈 병을 창살 사이로 돌려 내밀었다⁠. 다 마셨다⁠. “⁠그대가 나를 이 방에서 꺼내는 날⁠, 그 값을 다시 이야기합시다⁠.⁠”

다율은 빈 병을 받았다⁠. 카샨이 다율의 뒤에서 열쇠 꾸러미를 흔들었다⁠. 갈 시간이었다⁠. 다율은 계단을 오르며 한 번도 돌아보지 않았다⁠. 이 빈 병을 분리수거함에 넣지 않고 밤새마트 계산대 밑에 두었다⁠.

*

엿새째 밤 열한 시⁠, 도팔석의 휴대폰이 울렸다⁠. 문자였다⁠. 도팔석은 이것을 읽고⁠, 다시 읽고⁠, 다율에게 화면을 내밀었다⁠.

「⁠오늘 야간 불시 점검 갑니다⁠. 영업팀장⁠, 감사팀 1명 동행⁠. 매출 자료와 재고 실사 준비 바랍니다⁠.⁠」

“⁠다음 주라며요⁠.⁠”

“⁠불시라잖아⁠. 불시는 원래 이래⁠.⁠” 도팔석은 앞치마 끈을 다시 맸다⁠. 손이 미끄러져 두 번 다시 맸다⁠. “⁠영상 그거 조회수가 백만 넘었대⁠. 댓글에 신림삼거리점이라고 누가 썼대⁠. 그리고 상비약 판매 기록⁠. 본사 시스템에 다 뜬대⁠. 한 사람 한 통인데⁠, 같은 날 같은 카드로 신림 일대 편의점 열아홉 곳⁠.⁠”

“⁠법은 지켰어요⁠.⁠”

“⁠본사는 법 말고 이상한 걸 봐⁠.⁠” 도팔석은 계산대 밑을 열어 빈 담뱃갑을 꺼냈다가⁠, 비어 있다는 걸 알고 도로 넣었다⁠. “⁠다율 씨⁠. 오늘 밤엔 지방 손님 받지 마⁠. 문 닫아 놓자⁠.⁠”

다율은 시계를 봤다⁠. 열한 시 이십 분이었다⁠. 그롬바에게 오늘 밤 쉰다고 말할 방법이 없었다⁠. 문은 자정에만 열렸다⁠.

*

열한 시 오십오 분⁠, 앞문이 열렸다⁠.

들어온 사람은 둘이었다⁠. 앞의 사내는 쉰 남짓에 회색 코트를 입었고⁠, 손에 커피 두 잔이 든 종이 캐리어를 들고 있었다⁠. 뒤의 여자는 서른쯤으로⁠, 회사 로고가 박힌 패딩에 태블릿을 끼고 있었다⁠. 사내가 커피를 계산대 위에 내려놓으며 웃었다⁠. 웃는데 눈이 매장을 한 바퀴 다 돌고 있었다⁠.

“⁠도 점장님⁠, 오랜만입니다⁠. 영업팀장입니다⁠. 이쪽은 감사팀⁠.⁠” 팀장은 다율을 봤다⁠. “⁠야간 직원분이시죠⁠? 옥다율 씨⁠.⁠”

“⁠네⁠.⁠”

“⁠영상 잘 봤어요⁠. 연기 잘하시던데⁠.⁠” 팀장은 커피 한 잔을 다율 쪽으로 밀었다⁠. “⁠매출도 잘 봤고요⁠. 야간 매출이 석 달 전의 세 배예요⁠. 상비약은 같은 카드로 한 날 열아홉 번⁠. 컵라면이랑 핫팩 발주는 평소의 열 배⁠. 그리고 「⁠강원도 특산품⁠」은 저희 납품 목록에 없는 상품이고요⁠.⁠”

감사팀 여자가 태블릿을 열었다⁠. 화면에 숫자가 줄지어 떠 있었다⁠. 여자는 태블릿을 든 채 계산대 옆 「⁠강원도 특산품⁠」 매대로 가서 박하 양초 하나를 집었다⁠. 코에 대 보고⁠, 뒤집어 바닥을 봤다⁠.

“⁠원산지 표시가 없네요⁠. 바코드도 없고⁠.⁠”

“⁠강원도요⁠.⁠” 도팔석이 말했다⁠.

“⁠강원도 어디요⁠?⁠”

도팔석은 입을 열었다가 닫았다⁠. 매대의 무쇠 냄비를 반듯하게 줄 세우며 대답했다⁠. “⁠…⁠…깊은 데⁠.⁠”

감사팀 여자는 양초를 내려놓고 태블릿에 무언가를 적었다⁠. 손가락이 빨랐다⁠. 여자는 고개를 들어 창고 쪽을 턱으로 가리켰다⁠.

“⁠재고 실사부터 할게요⁠. 창고 좀 열어 주세요⁠.⁠”

도팔석이 계산대 앞으로 나섰다⁠. 다율과 팀장 사이였다⁠.

“⁠우리 야간 직원입니다⁠.⁠” 점장이 말했다⁠. 목소리가 손님에게 쓰는 목소리가 아니었다⁠. “⁠매출은 내가 설명할게요⁠. 창고는 내가 열고⁠. 이 친구는 계산대만 봐요⁠. 계산대에서 실수한 적 한 번도 없어요⁠.⁠”

팀장이 도팔석을 처음 보는 사람처럼 봤다⁠. 다율도 그랬다⁠.

자정이었다⁠.

창고 쪽에서 노크가 울렸다⁠. 세 번⁠, 쉬고⁠, 두 번도 아니었다⁠. 한 번⁠, 오래 쉬고⁠, 한 번도 아니었다⁠. 네 번이 똑같은 간격으로⁠. 쇠를 두드리는 소리였다⁠. 손이 아니라 지팡이 끝으로⁠.

감사팀 여자가 고개를 들었다⁠. “⁠뒷문에 누가 와요⁠?⁠”

“⁠택배요⁠.⁠” 다율이 말했다⁠.

“⁠자정에요⁠?⁠”

“⁠새벽 배송이요⁠.⁠”

노크가 다시 울렸다⁠. 이번에는 문이 안쪽으로 열렸다⁠. 다율은 철문을 잠그지 않았다는 것을 그제야 기억했다⁠. 도팔석이 문을 반쯤 열어 두는 버릇이 이틀 밤 사이에 몸에 붙어 있었다⁠.

창고 문간에 그롬바가 서 있었다⁠. 이 옆에 실레아⁠. 둘 다 다율이 아니라 둘 사이에 선 사람을 보고 있었다⁠.

키가 큰 사람이었다⁠. 잿빛과 흰빛이 섞인 긴 옷을 입었고⁠, 가슴에 고리 하나와 이 안의 불꽃이 수놓여 있었다⁠. 손에 든 쇠 등잔 속에서 불꽃이 흔들리지 않고 타고 있었다⁠. 바람이 문틈으로 불어 드는데도⁠. 뒤로 같은 옷을 입은 사람 둘이 무거워 보이는 가죽 자루를 하나씩 들고 서 있었다⁠.

사절은 문턱을 넘었다⁠. 하르펜 사람이 들어올 수 있는 데까지는 들어올 수 있었다⁠. 사절은 창고를 지나 매장으로 걸어 나왔다⁠. 그리고 영업팀장과 감사팀 여자 사이를 지나⁠, 아무도 보지 않고⁠, 계산대 앞에 섰다⁠.

사절은 품에서 무언가를 꺼내 계산대 위에 내려놓았다⁠. 빈 컵라면 용기였다⁠. 다율이 처음 그롬바에게 물을 부어 주었던 것과 같은 상품이었다⁠. 다만 이 바닥에 불로 지진 고리와 불꽃이 찍혀 있었다⁠. 이 옆에 그롬바는 하얀 판 하나를 내려놓았다⁠. 화면이 깨지고 뒷면이 뜯긴 만 원짜리 전자저울이었다⁠.

“⁠제국 연금술 길드의 사절이오⁠.⁠” 사절이 말했다⁠. 하르펜 말이었는데⁠, 발음이 고개 너머의 것이었다⁠. 사절은 다율을 봤다⁠. 바르텐처럼 무게를 다는 눈이 아니었다⁠. 무언가를 뜯어 보는 눈이었다⁠. “⁠우리는 이 그릇과 이 숫자 상자를 뜯어 보았소⁠. 만든 손을 찾지 못했소⁠. 이것을 만드는 곳이 이 문 너머에 있소⁠?⁠”

사절의 뒤에서 사람들이 가죽 자루를 계산대 옆 바닥에 내려놓았다⁠. 자루가 타일에 닿는 소리가 났다⁠. 금괴가 상판에 앉던 소리보다 훨씬 무거웠다⁠.

“⁠이것을 만드는 곳을 사겠소⁠.⁠”

창고 문간에서 그롬바가 자루를 눈으로 달다가⁠, 조상을 부르려던 입을 도로 다물었다⁠. 실레아의 오른손이 허리로 갔다가 빈 칼집 위에서 멈췄다⁠. 도팔석은 다율의 등 뒤에서 숨을 한 번 크게 들이쉬고⁠, 내쉬지 않았다⁠.

감사팀 여자의 태블릿이 여자의 손에서 미끄러질 뻔했다⁠. 영업팀장은 사절의 수놓인 옷을 보고⁠, 바닥의 자루를 보고⁠, 다율을 봤다⁠. 영업팀장이 웃지 않는 얼굴로 입을 열었다⁠.

“⁠옥다율 씨⁠. 이분은 누구고⁠, 저 창고 문 너머는 어딥니까⁠?⁠”

다율은 계산대 안에 서 있었다⁠. 앞에는 본사가⁠, 옆에는 제국이 있었다⁠. 뒤에는 도팔석이⁠, 창고 문간에는 그롬바와 실레아가⁠. 계산대 위에는 빈 컵라면 그릇과 깨진 전자저울과 식은 커피 두 잔⁠. 바코드 스캐너를 손에 쥐었다⁠. 쥐고 나서야 알았다⁠. 둘 중 누구에게 먼저 대답하느냐가⁠, 이 문으로 무엇이 넘어갈지를 정했다⁠.

사절이 다시 물었다⁠. 팀장도 다시 물었다⁠. 두 목소리가 계산대 위에서 겹쳤다⁠.

여기까지가 지금까지 나온 이야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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