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화(5,538자)
성채의 손님
이세계 편의점 야간 알바는 시급이 금화다 · 채온유
카샨은 이 팔을 쥔 손을 풀지 않았다. 성채 기사도 가죽 통을 내리지 않았다. 둘 사이에 바르텐이 서 있었다. 양팔을 붙잡힌 채로, 이 상황이 마음에 드는 얼굴이었다.
“경비대장.” 성채 기사가 말했다. 기사는 카샨보다 젊었고, 말투는 카샨보다 높았다. “하르펜 경비대는 영주의 경비대요. 영주는 왕도에 있고, 왕도는 성채에 국경을 맡겼소. 이 봉인을 거스르면 경비대장은 성채를 거스르는 거요.”
“영주는 다섯 달째 우리 녹봉을 안 보냈다.”
“그건 성채가 알 일이 아니오.”
카샨의 턱이 굳었다. 다율은 이 턱을 봤다. 카샨이 지금 무엇을 세는지 알았다. 경비병 열둘과 성채 기사 여섯. 경비병의 창과 기사의 말. 그리고 이 자리에서 창을 들면 다음 달에 일어날 일들.
카샨이 손을 놓았다. 경비병 둘도 따라 놓았다. 바르텐은 소매를 털었다. 소화기 가루가 판자 위에 하얗게 떨어졌다.
“고맙소, 경비대장.” 바르텐이 말했다. “녹봉 이야기는 다음에 하지.”
바르텐은 문턱 쪽을 한 번 돌아봤다. 형광등 아래 다율이 있었다. 바르텐은 아무 말 없이 고개를 한 번 숙이고 기사들 쪽으로 걸어갔다. 털모자 열하나가 뒤를 따랐다.
실레아가 문턱을 넘어 나왔다. 붕대 감은 팔로 칼을 칼집에 넣었다.
“기사님.” 다율이 이 소매를 잡았다. “가지 마세요. 여기 계시면 돼요. 앞문만 못 나가시지, 가게 안은 넓어요.”
“그대의 가게에 숨으면, 사령관은 그대의 가게를 뒤질 거요.” 실레아는 소매를 빼지 않았다. 대신 다율의 손등에 자기 손을 얹었다. 손바닥에 굳은살이 박여 있었다. “내가 명을 어긴 건 내가 고른 일이오. 그 값도 내가 치르겠소. 그대는 그대의 문을 지키시오.”
실레아는 성채 기사들에게 걸어가 스스로 두 손을 내밀었다. 젊은 기사가 머뭇거리다 이 손목에 끈을 감았다. 감는 손이 조심스러웠다. 실레아는 끌려가지 않고 걸어갔다. 쇠창살 문을 지날 때 한 번도 돌아보지 않았다. 대신 붕대 감은 왼손을 들어 보였다. 손가락 사이에 진통제 통이 쥐여 있었다. 어젯밤 계산대에서 다율이 바코드도 안 찍고 꺼낸 이 통이었다.
*
밤에 다시 오겠다던 순경은 새벽 한 시에 왔다. 소화기 가루를 다 쓸어 낸 텅 빈 매장과 대걸레질하는 점장과 계산대의 다율만 보고, 배우들은 다 갔냐고 물었다. 점장은 마지막 장면까지 다 찍었다고 대답했다.
*
다음 날 아침 아홉 시, 밤새마트 계산대 위에 신림동 지도가 펼쳐져 있었다. 다솔이 휴대폰 지도 앱을 캡처해 출력해 왔다. 편의점 위치마다 빨간 점이 찍혀 있었다. 신림역에서 봉천동, 서울대입구, 난곡까지 모두 마흔세 개였다.
“한 가게에서 한 사람이 한 통씩.” 다율이 말했다. “가게 마흔세 개, 사람 넷이면 백칠십두 통이요. 한 가게에서 넷이 따로 들어가서 따로 사면 돼요. 시간 차를 두고.”
“그거 법 어기는 거 아니야?” 도팔석이 물었다.
“법은 한 사람한테 한 번에 한 통이에요. 저희는 한 사람이 한 번에 한 통씩 사요.”
“사람 넷?” 다솔이 손가락을 셌다. “언니, 나, 점장님. 셋인데.”
앞문을 열고 들어온 건 철구였다. 퀵 조끼 대신 낡은 패딩을 입고 있었다. 패딩 소매가 짧았다. 어제 보도블록 위의 고시생 어깨에 자기 패딩을 걸쳐 주고, 고시원 총무에게 남는 것을 얻어 입었다고 했다. 철구는 계산대 위의 지도를 보고, 다율을 봤다.
“회장님한테 문자 보낼 방법이 없더라.” 철구가 말했다. “그래서 그냥 안 하기로 했어. 그 일.”
“오토바이는요?”
“아직 있어. 이번 주까지는.” 철구는 지도의 빨간 점을 손가락으로 짚었다. “넷이면 하루에 다 돌아. 내가 오토바이로 박스 실어 나를게. 점장님은 허리 아프시니까 가까운 데만 가시고.”
도팔석은 철구를 오래 봤다. 그러고는 계산대 밑에서 앞치마 하나를 꺼내 던졌다. 철구가 반납하지 않은 것과 같은 색이었다. “그건 반납해. 이건 새 거야.”
*
이날 다율은 편의점 열아홉 곳과 약국 네 곳에 들어갔다. 편의점 직원들은 진통제 한 통을 사는 젊은 여자를 아무도 이상하게 보지 않았다. 약국은 달랐다. 신림역 앞 약국의 약사는 다율이 해열진통제 열 통을 계산대에 올리자 안경을 내렸다.
“이걸 다 어디 쓰시게요?”
“강원도 군부대 위문품이요.” 다율은 미리 정해 둔 대답을 했다. “장병들이 동상에 걸려서요.”
“동상에는 이걸로 안 돼요.” 약사는 진통제 열 통 중 다섯 통을 도로 진열대에 넣고, 대신 연고와 소독약과 거즈와 붕대를 계산대에 올렸다. “이거랑 같이 가져가요. 통증만 잡으면 언 데가 썩는 줄 몰라. 붕대는 이렇게, 손끝부터 감고.” 다율은 거즈 하나를 다율의 손가락에 직접 감아 보였다. “군부대면 의무병 있을 거 아니에요. 그 사람한테 보여 줘요.”
다율은 이 손끝을 외웠다. 약사가 감아 준 거즈를 풀지 않고 다음 약국으로 갔다.
오후 네 시, 가게 전화가 울렸다. 도팔석이 받았다. 다율은 계산대 옆에서 진통제 상자를 정리하다가 점장의 목소리가 한 단계 높아지는 것을 들었다. 손님에게 쓰는 목소리였다.
“네, 팀장님. 네. 아, 그 영상이요.” 도팔석은 수화기를 어깨에 끼우고 진열대의 컵라면을 하나 집었다가 놓았다. “그거 웹드라마예요. 동네 대학생들이 찍는다길래 장소만 빌려줬어요. 네. 허가요? 그게, 구두로.”
수화기 너머의 목소리가 길게 이어졌다. 도팔석은 듣는 동안 컵라면 줄을 세 번 다시 세웠다.
“야간 매출이요? 아, 그건 지방 손님이…… 아니, 단체 손님이 좀 생겨서요. 근처에 공사 현장이. 네. 네. 상비약은 한 분에 한 통씩만 팔았어요. 그건 확실해요. 네.” 도팔석은 한참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다음 주요? 야간에요? 네. 알겠습니다. 오시면 커피 드릴게요.”
도팔석은 수화기를 내려놓고 한동안 전화기를 봤다.
“본사 영업 팀장.” 도팔석이 말했다. 다율이 묻기 전이었다. “다음 주에 점검 온대. 야간에. 매출이 갑자기 세 배가 되는 점포는 둘 중 하나래. 대박 났거나, 뭘 숨기거나.”
“뭐라고 하셨어요?”
“대박 났다고 했지.” 도팔석은 웃지 않았다. “근데 그 사람은 숨기는 쪽에 걸었어. 목소리가 그랬어.”
*
저녁 여섯 시, 밤새마트 창고에 진통제 백오십일 통, 연고 서른 개, 소독약 열두 병, 붕대 마흔 롤이 쌓였다. 핫팩 네 상자와 컵라면 여덟 상자가 이 옆이었다. 다솔은 영수증을 세다가 그만뒀다. 철구는 오토바이 배달 앱에서 오늘 하루 퀵 배달 기록이 하나도 없다는 알림을 받았다. 이 알림을 지웠다.
도팔석이 쌓인 상자를 보고 허리를 짚었다. “이게 다 지방 손님 거야?”
“고개 위 성채에 병사가 이백 명이에요.” 다율이 말했다. “동상이랑 상처로 밤마다 앓는 소리가 난대요. 첫날 밤에 실레아 기사님이 그랬어요.”
“그럼 이걸 그 성채까지 들고 가?”
“네.”
도팔석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창고 벽의 종이를 봤다. 세 해 전에 자기가 써 붙인 두 줄 아래에 볼펜으로 한 줄을 더 썼다. 안 닫혀도 기다릴 것.
*
이날 밤 하르펜 광장에 성채 사령관이 내려왔다.
다율이 대차를 끌고 쥐꼬리 골목을 빠져나갔을 때, 광장의 장꾼들이 계근대 쪽을 향해 모여 있었다. 검은 돌 받침 위에 사람이 서 있었다. 예순은 넘어 보였다. 키가 크고 허리가 곧았으며, 검은 담비 털 망토 위로 은빛 이빨 문장의 목걸이를 걸었다. 이 옆에 성채 기사 열이 섰고, 계근대 아래 바르텐이 서 있었다. 손님이라기보다 상회 회장의 얼굴로. 털모자들은 보이지 않았다.
사령관은 군중을 향해 말했다. 목소리가 크지 않은데도 광장 끝까지 닿았다.
“쥐꼬리 골목 끝의 창고에 문이 하나 있다. 저쪽 세상과 이어진 문이다. 그 문으로 하얀 알약과 화염석과 노란 영약이 들어왔다. 그 물건들을 내 성채의 병사들이 먹고 품었다.” 사령관은 잠시 말을 끊었다. 군중이 숨을 죽였다. “국경을 넘는 물건은 성채가 거둔다. 왕국의 법이다. 오늘부터 그 문은 국경 통로다. 그 창고에 성채의 세관을 둔다. 그 문을 지나는 모든 것은 성채에 세를 낸다.”
웅성거림이 일었다. 다율은 대차를 군중 앞으로 밀었다. 바퀴가 언 돌을 긁는 소리에 사람들이 길을 열었다.
“그 문은 저희 가게 창고 문이에요.”
사령관이 계근대 위에서 다율을 내려다봤다. 처음 보는 얼굴이 아니라는 눈빛이었다.
“서울 상인이군.”
“편의점 야간 알바예요.” 다율은 대차 손잡이를 쥐었다. 손잡이에 매단 금화 주머니와 수염과 헤드랜턴과 단검이 흔들렸다. “그 문은 국경이 아니에요. 계산대예요. 사는 사람이 고르고 파는 사람이 고르는 데요. 그 사이에 성채가 서면 성채가 고르게 돼요.”
“그렇다.” 사령관은 망설이지 않았다. “그대의 약을 내 병사가 먹는다. 그러니 그 약이 들어오는 문은 내 병사를 지키는 성채가 쥐어야 한다. 그대가 오늘 밤 문을 닫으면 내 병사 이백은 내일 아프다. 그대 한 사람 손에 이백을 맡길 수는 없다.”
다율은 숨을 들이마셨다. 사령관의 말은 틀린 데가 없었다. 그래서 위험했다. 대차 위의 상자 하나를 툭 쳤다.
“그럼 사령관님 성채 문으로 들어오는 바르텐 회장님 상자는요? 세 안 내고 밤에 뒷문으로 들어오는 거요. 그것도 성채가 쥐고 계신 거예요?”
광장이 조용해졌다. 계근대 아래 바르텐이 눈을 감았다. 사령관은 다율을 오래 봤다. 그리고 군중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서쪽 숲의 실레아는 명을 어기고 성채를 떠나 쥐꼬리 골목에서 칼을 썼다. 사흘 뒤 성채 마당에서 기사의 칼을 거둔다.” 사령관은 다율의 물음에 답하지 않았다. 대신 다른 것을 말했다. “서울 상인. 그대가 성채에 할 말이 있으면 성채로 올라오라. 내 성문은 손님에게 열려 있다.”
사령관은 계근대에서 내려와 기사들과 함께 성문 쪽으로 걸어갔다. 바르텐이 뒤를 따르다가 다율 곁을 지나며 낮게 말했다. 이 자는 저울을 쓰지 않소. 그냥 가져가오.
*
새벽 세 시 오십 분. 다율은 쥐꼬리 골목 창고 문 앞에 대차를 세웠다. 대차에는 상자가 사람 키만큼 실려 있었다. 진통제 백오십일 통, 연고, 소독약, 붕대, 핫팩, 컵라면. 그롬바가 자기 손수레에 나머지를 실었다. 드워프는 고개 넘는 길을 안다고 했다. 성채까지 걸어서 반나절이라고.
철문 앞에는 도팔석이 있었다. 헤드랜턴을 켜고, 무릎에 대걸레를 눕힌 채 접이식 의자에 앉아서. 뒤로 다솔과 철구가 창고 박스 더미에 기대 있었다.
“네 시 넘으면 하르펜에 남는 거 알지.” 도팔석이 말했다.
“알아요.”
“성채에 하루, 오는 데 하루. 내일 자정에 안 오면 모레 자정.” 점장은 손가락을 접어 세다가 그만뒀다. “나 몰라. 이번엔 진짜 몰라.”
“기다리신다면서요. 벽에 쓰셨잖아요.”
도팔석은 대답 대신 헤드랜턴을 벗어 대차 손잡이의 원래 자리에 다시 걸었다.
세 시 오십구 분. 다율은 문턱 바깥쪽 하르펜의 판자 위에 섰다. 도팔석이 문을 닫았다. 문틈으로 형광등 빛이 가늘어지다가 사라졌다. 탑에서 종이 네 번 울렸다. 다율은 손잡이를 다시 당기지 않았다.
등 뒤에서 판자가 삐걱였다. 창고 방 안에 누군가 있었다. 마정석 등 하나가 켜졌다. 회색 망토 셋, 은빛 이빨 문장. 성채 기사들이 방 구석 어둠 속에서 일어서고 있었다. 맨 앞의 기사가 다율의 대차를 내려다봤다.
“국경 통로로 들어온 물건이다.” 기사가 말했다. “세관이 거둔다. 짐에서 손을 떼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