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화(5,451자)
바르텐의 서울
이세계 편의점 야간 알바는 시급이 금화다 · 채온유
바르텐은 쉰 해를 사는 동안 갇혀 본 적이 없었다. 하르펜의 성문은 돈을 내면 열렸고, 성채의 뒷문은 상자를 보내면 열렸다. 그런데 이 가게의 앞문은 다가가도 열리지 않았다. 유리 너머에 길이 있었다. 노란 불이 깜빡이는 기둥과, 말 없이 달리는 쇠 수레와, 밤인데도 대낮처럼 밝은 간판들. 손을 뻗으면 닿을 거리였다. 손을 뻗지 않았다. 아까 짐꾼 하나가 이 문턱 앞에서 세 번 미끄러지는 것을 봤다.
“칼은 넣어 주세요.”
계산대 안에서 이 아가씨가 말했다. 가루를 뒤집어쓴 패딩을 벗고 밤새마트 앞치마만 두르고 있었다. 엘프 기사는 다율 옆에 붕대 감은 팔을 늘어뜨리고 서 있었다. 기사의 칼은 칼집 밖에 있었다.
“여기서 자정까지 계시는 동안 규칙은 두 개예요. 칼 넣으시고, 드신 건 계산하시고요.” 아가씨는 계산대 위 바코드 스캐너를 톡톡 두드렸다. “은화 받아요. 거스름돈도 은화로 드리고요.”
바르텐은 이 말이 거래라는 것을 알았다. 뒤를 돌아 털모자들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칼이 하나씩 칼집으로 들어갔다. 엘프 기사의 칼은 마지막까지 밖에 있었다.
*
새벽 다섯 시가 되자 바르텐의 사람들은 배가 고팠다. 그리고 이들은 이 가게의 물건을 몰랐다. 털모자 하나가 컵라면을 뚜껑째 깨물었다. 짐꾼 하나는 생수병 뚜껑을 못 열어 병목을 이로 물어뜯었다. 아가씨는 이들 하나하나에게 뚜껑 여는 법을, 온수기 누르는 법을, 삼각김밥 띠를 1번부터 당기는 법을 가르쳤다. 계산할 때마다 “봉투 필요하세요”라고 물었고, 털모자들은 이게 무슨 주문인지 몰라 매번 고개를 저었다.
여섯 시 반에 가장 큰 일이 났다. 짐꾼 하나가 창고 옆 직원용 화장실에 들어갔다가 비명을 지르며 뛰어나왔다. 바지춤을 쥔 채였다. 물이 소용돌이를 치며 구멍으로 사라졌다고, 저건 물의 정령을 가둔 우물이라고. 점장이라는 사내가 대걸레를 들고 들어가 한참 있다 나와서 말했다. 지방 손님들은 처음엔 다 놀라요. 털모자 열하나가 차례로 이 우물을 구경하러 들어갔다. 바르텐은 가지 않았다. 다섯 번째 사내가 나와서 성호를 긋는 것을 보고 처음으로 웃음을 참았다.
바닥에 흩어졌던 상자 열둘은 아가씨가 음료 창고에 넣고 손잡이를 끈으로 세 번 감았다. 다율은 이 끈을 감으면서 바르텐을 봤다. 바르텐은 끈이 몇 번 감기는지 셌다.
*
아침 아홉 시, 주간 알바라는 아가씨가 휴대폰을 들고 계산대로 뛰어왔다. 다솔이라 불리는 아이였다. 이 사람은 화면을 다율에게 들이밀었다. 바르텐은 이 화면을 계산대 건너편에서 봤다. 작은 유리판 안에서 하얀 가루 구름과 칼과 비닐 방패가 움직였다. 어젯밤의 이 가게였다.
“언니, 나 새벽에 올렸는데…… 삼십팔만이야.”
“뭐가?”
“본 사람.” 다솔의 목소리가 작아졌다. “제목은 그냥 「편의점 코스프레 패싸움」이라고 했어. 근데 댓글에 어느 지점이냐고, 본사 어디냐고 막 물어.”
아가씨는 화면을 오래 봤다. 바르텐은 다율의 얼굴이 셈을 하는 얼굴이라는 걸 알았다. 하르펜 시장에서 숫자 상자를 들어 올리던 이 얼굴이었다.
이 셈이 끝나기 전에 앞문이 열렸다.
검은 겨울 점퍼에 형광 조끼, 모자에 은빛 문장. 이 도시의 경비병이었다. 둘이었다. 앞의 사내는 젊었고 손을 허리춤의 검은 물건 위에 얹고 있었다. 사내는 매장 안의 털모자 열하나와 칼집과 붕대 감은 엘프를 차례로 봤다.
“신림지구대입니다. 칼 든 사람들이 편의점 안에 있다고 신고가 들어와서요.”
매장 안이 조용해졌다. 털모자들의 손이 칼자루로 가는 것을 바르텐은 손가락 하나를 들어 막았다. 점장이 대걸레를 떨어뜨렸다.
“웹드라마예요.” 아가씨가 말했다. 목소리가 하나도 흔들리지 않았다. “이세계 편의점 웹드라마요. 어젯밤에 액션 장면 찍었고, 오늘 밤에 마지막 장면 찍어요. 배우분들이 분장을 못 지우셔서요. 특수 분장이라.”
순경은 엘프 기사의 귀를 봤다. 기사는 귀를 감추지 않았다. 순경은 이 귀를 한참 보다가 바르텐을 봤다.
“이분은요?”
“악역이요.” 아가씨가 말했다. “회장님 역할.”
바르텐은 순경을 내려다봤다. 이 도시의 경비병은 칼 대신 무엇을 차는지 궁금했다.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검은 저울 상회의 회장 바르텐이오. 소란을 끼쳐 미안하오.”
순경은 웃음을 참는 얼굴이 됐다. 촬영 허가가 있냐고 물었고, 점장이 본사에 확인해 보겠다고 했고, 순경은 칼은 진짜 칼이냐고 물었고, 아가씨는 소품이라고 했다. 순경이 털모자의 칼집을 가리키며 한 번만 보자고 했을 때, 엘프 기사가 앞으로 나왔다. 기사는 자기 칼을 칼집째 풀어 순경에게 내밀었다. 순경이 칼집에서 칼을 한 뼘 뽑았다가 도로 넣었다. 칼날에 아직 지난밤의 피가 말라 붙어 있었다. 순경은 이걸 봤다. 바르텐은 순경이 이걸 본 것을 봤다.
“……분장 잘하셨네.” 순경이 칼을 돌려주었다. “밤에 다시 올게요. 칼은 밖에 들고 나가지 마세요.”
“못 나가요.” 아가씨가 말했다. 순경은 이 말을 농담으로 듣고 나갔다.
*
정오에 점장이 바르텐 앞에 네모난 그릇 하나를 내려놓았다. 투명한 뚜껑 아래 칸이 여섯으로 나뉘어 있었고, 칸마다 다른 것이 들어 있었다. 흰밥, 붉게 졸인 고기, 노란 달걀, 검은 나물. 점장은 이것을 데우는 상자에 넣었다가 꺼내 주며 도시락이라고 했다. 지방 손님 점심 대접이라고.
바르텐은 젓가락을 쓸 줄 몰랐다. 점장이 플라스틱 숟가락을 가져다주었다. 바르텐은 칸을 하나씩 먹었다. 순서를 정하고, 한 칸을 다 비운 뒤에 다음 칸으로 갔다. 다 먹고 나서 금화 한 닢을 꺼냈다.
“은화로 줘요.” 점장이 말했다. “금화 내시면 내가 거슬러 드릴 게 없어.”
바르텐은 은화 한 닢을 놓았다. 점장은 이것을 앞치마 주머니에 넣고 돌아서다가, 멈춰 서서 물었다.
“그 영감님 묻힌 데, 어디예요?”
바르텐은 숟가락을 내려놓았다. 이 사내가 무엇을 묻는지 알았다. 세 해 전 단팥빵을 쥐고 얼어 죽은 짐꾼.
“성 밖 개울 건너, 짐꾼들 묻는 언덕이오. 표시는 없소.”
“표시가 없으면 어떻게 찾아요?”
“그 할멈은 찾았소. 봄마다.” 바르텐은 빈 도시락의 여섯 칸을 내려다봤다. “그 할멈이 가고 나서는 아무도 안 찾소.”
점장은 고개를 끄덕이고 진열대로 갔다. 반듯한 단팥빵들을 하나씩 집어 다시 줄을 맞추었다. 바르텐은 이 손을 한참 봤다.
*
오후 두 시, 바르텐은 앞문 유리 앞의 플라스틱 의자에 앉아 있었다. 털모자들은 진열대 사이에서 졸았고, 엘프 기사는 계산대 옆에 서서 졸지 않았다. 바르텐은 한 번 더 앞문 앞에 서 봤다. 털가죽 외투 자락을 여미고, 문턱 앞에서 오른발을 내밀었다. 발이 미끄러졌다. 누가 장화 뒤꿈치를 잡아당기는 것 같았다. 다섯 번을 해 봤다. 다섯 번째에도 같은 자리에 섰다. 졸던 털모자 하나가 눈을 떴다가 도로 감았다.
이때 유리 너머에 사내 하나가 섰다.
목 늘어난 회색 옷 위에 얇은 겉옷 하나, 발에는 이름이 쓰인 슬리퍼. 서른이 안 된 얼굴이었다. 사내는 유리문에 이마를 댔다. 문이 열리지 않았다. 아가씨가 잠금 장치를 풀지 않았다. 사내는 유리 너머로 바르텐을 봤다. 그러고는 바르텐의 어깨 너머, 끈으로 감긴 음료 창고 쪽을 봤다. 바르텐은 코를 벌름거렸다. 문틈으로 단내가 새어 나가고 있었다.
“여기 있죠.” 유리 때문에 사내의 목소리가 뭉개졌다. “냄새 나요. 보라색. 한 번만요. 한 시간만.”
사내는 손바닥을 유리에 댔다. 손가락이 떨렸다. 바르텐은 이 떨림을 알았다. 하르펜 짐꾼들이 마정석 연기를 너무 오래 마시면 늙어서 그렇게 떨었다. 그러나 이 사내는 늙지 않았다. 그리고 이 사내의 떨림은 연기가 아니라 바르텐의 상자에서 나온 돌 한 조각에서 왔다.
아가씨가 계산대에서 나와 유리문 앞에 섰다. 바르텐 옆이었다. 다율은 유리 너머 사내에게 고개를 저었다. 사내는 오래 서 있다가, 문 앞 보도블록 위에 주저앉았다. 눈이 녹은 바닥이었다. 바르텐은 무릎을 끌어안고 몸을 앞뒤로 흔들었다.
“회장님 물건 산 사람이에요.” 아가씨가 바르텐을 보지 않고 말했다. “빌린 거지만요. 철구 씨한테 한 시간에 오만 원 주고.”
바르텐은 대답하지 않았다. 사내를 봤다. 하르펜에서 상자를 보낼 때 셈한 것은 무게와 값과 성채의 몫과 경비대의 은화였다. 이 도시의 보도블록 위에서 무릎을 끌어안고 흔들리는 등은 이 셈에 없었다.
“하르펜에서는 그 돌을 태우면 연기가 위로 가오.” 바르텐이 겨우 말했다. “여기서는 사람 안으로 들어가는군.”
“네.”
골목 끝에서 오토바이 소리가 났다. 퀵 조끼를 입은 사내가 오토바이를 세우고 내렸다. 철구였다. 바르텐의 일꾼. 철구는 유리문 안의 바르텐을 보고 잠깐 멈췄다가, 보도블록에 앉은 사내 옆으로 갔다. 사내 옆에 쪼그려 앉아 주머니에서 핫팩을 꺼내 뜯고, 두어 번 흔들어 사내의 손에 쥐여 주었다. 사내가 핫팩을 쥐었다. 철구는 자기 패딩을 벗어 사내의 어깨에 걸쳤다. 그러고는 유리문 너머의 바르텐을 올려다봤다. 한참을.
바르텐은 이 눈길을 피하지 않았다. 피할 수가 없었다. 문턱을 넘을 수 없었다.
“그대가 이긴 것 같소?” 바르텐이 아가씨에게 물었다.
“아뇨.” 아가씨가 말했다. “저 사람은 아직 저기 앉아 있잖아요.”
바르텐은 숨을 길게 내쉬었다. 그리고 다시 상인의 목소리로 돌아왔다. “그럼 하나 알려 주겠소. 내가 새벽까지 하르펜에 돌아가지 않으면, 내 사람이 고개 위 성채로 말을 달리게 되어 있소. 성채 사령관은 그대의 문을 오래전부터 원했소. 내가 그 문을 쥐고 있는 동안은 나를 통해 원했지. 내가 없으면, 그는 직접 가지러 올 거요.”
*
자정. 아가씨가 철문을 열었다.
바르텐의 방은 바르텐의 방이 아니었다. 난로는 꺼져 있었고, 탁자 위에 빈 컵라면 그릇이 여남은 개 쌓여 있었다. 그롬바라는 드워프가 바르텐의 의자에 앉아 수염을 땋고 있었고, 뒤에 경비대장 카샨이 창을 들고 서 있었다. 경비병 열둘이 방 둘레에 섰다. 쇠창살 문은 열려 있었다.
“검은 저울 상회 회장 바르텐.” 카샨이 말했다. “어젯밤 쥐꼬리 골목에서 도끼를 든 상회 사람들의 일로 경비대가 그대를 잡는다.”
바르텐은 문턱을 넘어 하르펜의 판자를 밟았다. 스무 시간 만이었다. 판자는 따뜻하지 않았다. 카샨을 봤다. 녹봉 다섯 달을 그에게서 받은 사내였다. 이 사람은 이 사내의 장화 목에서 비닐 끝이 삐져나온 것을 봤다.
경비병 둘이 바르텐의 양팔을 잡았다. 이때 쇠창살 밖 골목에서 말발굽 소리가 났다. 둘, 넷, 여섯. 횃불이 아니라 마정석 등을 매단 창이 창살 너머로 들어왔다. 회색 망토에 은빛 이빨 문장. 성채 기사들이었다. 맨 앞의 기사가 말에서 내려 창살 문간에 섰다. 손에 붉은 봉인이 찍힌 가죽 통을 들고 있었다.
“얼음 이빨 성채 사령관의 명이다.” 기사가 말했다. “검은 저울 상회의 바르텐은 성채의 손님이다. 하르펜 경비대는 손을 떼라.”
카샨은 바르텐의 팔을 놓지 않았다. 기사의 눈이 카샨을 지나 문턱 너머로 갔다. 계산대 쪽 형광등 아래, 붕대 감은 팔로 칼을 쥔 엘프 기사가 서 있었다.
“그리고 서쪽 숲의 실레아 경.” 성채 기사가 말했다. “명을 어기고 성채를 떠난 일로, 사령관께서 직접 찾으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