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화(5,229자)

놀잇배의 밤

삼류 여포두 · 설묵향

여준결은 이 배를 다시 탈 생각이 없었다⁠.

놀잇배는 여씨 저택 앞 물 한가운데 닻을 박고 떠 있었다⁠. 이날 밤과 같은 자리였다⁠. 갑판의 비단 휘장은 걷혀 있었고⁠, 등롱 대신 횃불 두 자루가 뱃머리와 꼬리에 꽂혀 기름 타는 냄새를 피웠다⁠. 상관씨 가주가 보낸 사람이 저택 뒷문에 와서 한 말은 짧았다⁠. 혼자 오라고⁠. 아버지께는 말하지 말라고⁠. 여준결은 오른손에 장갑을 끼고 작은 배를 저어 왔다⁠. 노를 저으면서 손바닥 안의 노 손잡이가 매끈하다는 것을 알았다⁠. 아무것도 새겨져 있지 않았다⁠.

갑판에 오르자 돛대가 먼저 보였다⁠. 돛대에 탁세미가 묶여 있었다⁠. 입에 천이 물려 있었고⁠, 맨발이었다⁠. 감나무 집에서 끌려 나올 때 신을 신을 틈이 없었다⁠. 세미의 눈이 여준결을 보았다⁠. 커다란 눈이었다⁠. 이 눈에 비친 것이 자기 얼굴이라는 것을 여준결은 알았다⁠.

“⁠왔군⁠, 조카⁠.⁠”

상관씨 가주가 갑판 의자에 앉아 있었다⁠. 서른도 안 된 가주는 여준결을 늘 조카라고 불렀다⁠. 가주의 곁에 검은 옷의 무사 하나가 서 있었다⁠. 오른손 엄지와 검지만 남고 나머지 손가락 둘이 없었다⁠. 손가락이 있던 자리를 헝겊으로 감았고⁠, 가는 칼은 왼손에 쥐고 있었다⁠.

“⁠무엇 하자는 거요⁠, 상관 숙부⁠.⁠”

“⁠자네 아버지가 겁을 먹었네⁠.⁠” 상관씨 가주가 일어섰다⁠. “⁠오늘 아침 사당 앞에서 나를 한 시간 세워 두더니⁠, 이번 법정은 아무도 막지 말라 하더군⁠. 그게 무슨 뜻인지 아나⁠? 다섯 세가가 관아 법정 밑으로 줄줄이 들어간다는 뜻이야⁠. 자네가 첫째고⁠, 다음은 누구일지 아무도 모르지⁠.⁠” 가주가 손가락 끝으로 돛대 쪽을 가리켰다⁠. 손가락마다 박인 굳은살이 횃불에 번들거렸다⁠. “⁠저 계집만 없으면 법정에 남는 건 오작의 코와 어부의 노뿐이야⁠. 그건 송사꾼이 다 받아 넘겨⁠. 자네 손으로 끝내게⁠. 물은 깊고⁠, 오늘 밤엔 아무도 웃지 않을 걸세⁠.⁠”

여준결은 세미를 보았다⁠. 그리고 이날 밤을 보았다⁠.

이날 밤 여준결은 물에서 올라와 난간을 잡고 서서 숨을 고르고 있었다⁠. 갑판 위 기녀들이 웃었고⁠, 도련님들이 웃었고⁠, 비파 타는 여자가 비파를 멈추고 웃었다⁠. 웃음이 여준결의 등을 두드렸다⁠. 여준결은 작은 배로 다시 내려섰다⁠. 노를 쥔 아이 앞에⁠. 아이는 웃지 않았다⁠. 다들 웃는데 이 아이만 웃지 않았다⁠. 노를 두 손으로 쥐고⁠, 겁도 없이⁠, 여준결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이 눈이 여준결의 왼 소매를⁠, 젖은 바지를⁠, 손등을 다 보고 있었다⁠. 여준결은 이 눈을 견딜 수 없었다⁠.

“⁠조카⁠?⁠”

여준결은 돛대 쪽으로 한 걸음 갔다⁠. 세미가 묶인 채 몸을 비틀었다⁠. 밧줄이 돛대에 쓸리는 소리가 났다⁠.

*

미향은 사공 노인의 작은 배 위에서 이 횃불을 보았다⁠.

청파루 행수 해란이 남문 초소로 뛰어온 것은 삼경이 지나서였다⁠. 화장도 하지 않은 얼굴이었다⁠. 상관씨 사람들이 청파루 놀잇배를 내놓으라 했고⁠, 돛대에 무엇을 묶는지 보았다고 했다⁠. 이 배는 내 배요⁠, 해란은 숨을 몰아쉬며 말했다⁠. 내 배 위에서 또 사람이 죽는 건 못 보오⁠. 이 말을 하고 해란은 초소 의자에 주저앉았다⁠. 찻값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옥담이 물 한 사발을 떠다 주자 해란은 이것을 단숨에 비우고 사발을 내려다보았다⁠. 그러고는 버릇처럼 입을 열었다가⁠, 무슨 말을 하려던 것인지 깨닫고 도로 다물었다⁠. 옥담이 먼저 말했다⁠. “⁠이건 공짜예요⁠, 행수 아주머니⁠. 성문 물이라서⁠.⁠” 해란이 옥담을 노려보다가⁠, 이날 처음으로 웃었다⁠.

사공 노인은 아무것도 묻지 않고 미향과 옥담을 작은 배에 태웠다⁠. 노인은 노를 소리 없이 저었다⁠. 노가 물에 들어갈 때마다 물이 비단처럼 갈라졌다가 닫혔다⁠. 옥담이 뱃전을 붙잡고 얼굴이 하얘졌다⁠.

“⁠포두⁠, 저 배 멀미⁠…⁠…⁠.⁠”

“⁠지금은 하지 말게⁠.⁠”

“⁠멀미가 말을 듣습니까⁠?⁠”

“⁠들어야지⁠.⁠”

노인이 놀잇배 그늘로 배를 대었다⁠. 이날 밤 아영의 배가 붙어 있던 바로 이 자리였다⁠. 노인이 노를 놓고 미향을 보았다⁠.

“⁠그날 나는 꼬리에서 이 자리를 내려다보고 있었소⁠. 노만 본 게 아니오⁠.⁠” 노인이 뱃전을 손바닥으로 두드렸다⁠. “⁠올라가시오⁠. 여기서 기다리겠소⁠. 이번엔 안 떠나오⁠.⁠”

미향은 쇠사슬 추를 위로 던졌다⁠. 추가 난간 기둥을 감았다⁠. 사슬을 잡고 뱃전을 걸어 올라갔다⁠. 난간 너머로 고개를 내밀었을 때⁠, 돛대 앞에 선 여준결이 보였다⁠. 오른손을 들어 세미의 목께로 뻗고 있었다⁠.

미향은 생각하지 않았다⁠. 난간을 넘으며 사슬을 풀어 던졌다⁠. 추가 여준결의 오른 손목을 감았다⁠. 장갑 위로 혹이 있는 이 손등을⁠. 여준결이 숨을 들이켰다⁠. 아픈 소리였다⁠. 여준결의 손에 쥐어져 있던 것이 갑판에 떨어졌다⁠. 단도였다⁠. 세미를 묶은 밧줄이 반쯤 잘려 있었다⁠.

미향의 눈이 단도와 밧줄 사이를 오갔다⁠. 이 짧은 틈에 검은 옷의 무사가 움직였다⁠.

왼손의 가는 칼이 아래에서 위로 올라왔다⁠. 세미의 옆구리를 향해⁠. 여준결이 사슬에 감긴 오른손을 휘둘렀다⁠. 사슬이 팽팽해지며 미향을 앞으로 끌어당겼고⁠, 사슬 가운데가 칼날을 때렸다⁠. 쇠와 쇠가 부딪쳐 불꽃이 튀었다⁠. 칼날이 세미를 비껴 위로 튀어 올랐다⁠. 그리고 끌려 들어온 미향의 왼 어깨를 비스듬히 갈랐다⁠.

뜨거웠다⁠. 아프기 전에 뜨거웠다⁠. 미향은 무릎을 꿇었다⁠. 사슬을 놓지 않았다⁠.

여준결이 왼손으로 장을 밀었다⁠. 무사가 뒤로 날아가 난간을 넘었다⁠. 물소리가 크게 났다⁠. 상관씨 가주가 의자를 걷어차고 뱃꼬리로 달려가 매어 둔 날랜 거룻배에 뛰어내렸다⁠. 노 젓는 소리가 멀어졌다⁠. 갑판에 횃불 타는 소리만 남았다⁠.

*

여준결은 사슬이 감긴 오른손을 내려다보았다⁠. 장갑 위로 피가 배어 나왔다⁠. 사슬 고리가 혹을 짓눌러 다시 터진 것이었다⁠. 사슬을 풀지 않았다⁠. 사슬 끝은 미향의 손에 있었다⁠. 미향의 어깨에서 흐른 피가 사슬을 타고 내려와 갑판에 떨어졌다⁠. 둘은 사슬 하나로 이어진 채 서로를 보았다⁠.

“⁠밧줄을 끊고 있었소⁠?⁠” 미향이 물었다⁠.

“⁠그렇소⁠.⁠”

“⁠왜⁠?⁠”

“⁠내 일에 남의 칼이 끼어드는 건 싫소⁠.⁠” 여준결이 말했다⁠. 그러고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것도 거짓말이오⁠.⁠” 여준결이 돛대의 세미를 보았다⁠. 세미는 반쯤 잘린 밧줄에 매달린 채 여준결을 보고 있었다⁠. 커다란 눈으로⁠. “⁠저 눈을 또 볼 수가 없었소⁠.⁠”

미향은 피 묻은 손으로 사슬을 조금 당겼다⁠. 여준결이 이 힘에 끌려 반걸음 다가왔다⁠.

“⁠그날 밤 그 아이 눈은 봤소⁠?⁠”

여준결의 입술이 움직였다⁠. 한동안 아무 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그 아이는 웃지 않았소⁠.⁠” 여준결이 말했다⁠. “⁠다들 웃는데 그 아이만 안 웃었소⁠. 노를 쥐고 나를 똑바로 봤소⁠. 아버지도 그렇게 나를 본 적이 없소⁠.⁠” 여준결이 사슬에서 손을 뺐다⁠. 고리가 장갑을 긁으며 풀려 갑판에 떨어졌다⁠. “⁠법정에서 물으시오⁠. 거기서 말하겠소⁠. 여기서는 더 못 하오⁠.⁠”

여준결은 작은 배로 내려갔다⁠. 사공 노인의 배가 아니라 자기가 저어 온 배였다⁠. 미향은 여준결을 막지 않았다⁠. 막을 손이 없었다⁠. 왼팔이 들리지 않았다⁠.

옥담이 난간을 넘어 올라와 세미의 밧줄을 풀었다⁠. 세미가 입의 천을 뱉어 내고 미향에게 기어 왔다⁠. 제 치맛자락을 찢어 미향의 어깨를 눌렀다⁠. 손이 떨렸지만 누르는 힘은 단단했다⁠.

“⁠포두님⁠, 포두님⁠.⁠”

“⁠세미 아가씨⁠, 다친 데 없소⁠?⁠”

“⁠발바닥만요⁠. 신을 못 신어서⁠.⁠”

“⁠그럼 됐소⁠.⁠”

*

함두봉은 동이 트기 전에 감나무 집으로 불려 왔다⁠. 마루에 누운 미향의 어깨를 보더니 검시 상자를 열었다⁠. 그리고 미향이 아니라 어깨에 대고 말하기 시작했다⁠.

“⁠어깨야⁠, 고생했다⁠. 가는 칼이 아래에서 위로 올라왔구나⁠. 비스듬히⁠, 얕게⁠. 뼈는 안 다쳤어⁠. 다행이다⁠. 꿰매야겠다⁠. 실이 들어가면 따끔할 거다⁠. 미안하다⁠.⁠”

“⁠함 오작⁠.⁠” 미향이 이를 악물고 말했다⁠. “⁠나한테도 말해도 되네⁠. 사당에서 끝까지 말했잖나⁠.⁠”

함두봉이 바늘을 든 채 미향의 얼굴을 보았다⁠. 혀가 굳었다⁠. 다시 어깨를 보았다⁠.

“⁠어깨야⁠, 네 주인이 나한테 말을 시키는구나⁠. 한 번 해 봤다고 매번 되는 게 아니라고 좀 전해 다오⁠.⁠”

옥담이 웃다가 미향에게 눈총을 맞고 입을 막았다⁠. 막은 손가락 사이로 웃음이 새어 나와 코로 픽픽 빠졌다⁠. 세미는 미향의 오른손을 잡고 있었다⁠. 바늘이 살을 뚫을 때마다 미향의 손가락이 세미의 손을 쥐었다⁠.

해가 뜰 무렵⁠, 관아 사환이 대문을 두드렸다⁠. 사환은 미향의 꿰맨 어깨를 보고 놀라 말을 더듬다가 겨우 전했다⁠.

“⁠지⁠, 지부 영감께서 방을 붙이셨습니다⁠. 부 법정을 사흘 뒤 아침에 연다고요⁠. 한 달 뒤가 아니라 사흘 뒤요⁠. 성안이 벌써 난리입니다⁠.⁠”

미향은 마루에서 몸을 일으키려다 어깨를 붙잡고 도로 누웠다⁠. 사흘이면 여준결 손등의 혹은 아직 남아 있을 것이었다⁠. 지부가 이것을 모를 리 없었다⁠. 지부가 서두르는 까닭은 혹이 아니라 다른 데 있었다⁠.

*

이 까닭은 한낮에 감나무 집 대문으로 들어왔다⁠. 추관 영감이었다⁠. 관복이 아니라 낡은 평복 차림이었고⁠, 혼자였다⁠. 영감은 마루에 누운 미향을 내려다보고 한참 혀를 찼다⁠. 그러고는 마루 끝에 걸터앉아 감나무를 올려다보았다⁠.

“⁠자네 아버지가 이 나무 심던 날 나도 여기서 술을 마셨네⁠.⁠”

“⁠그 말씀을 요즘 여러 분께 듣습니다⁠, 영감⁠.⁠”

“⁠다들 마셨지⁠. 공짜 술이었으니까⁠.⁠” 추관이 소매에서 열쇠 하나를 꺼내 마루에 내려놓았다⁠. 쇠가 무겁고 검었다⁠. “⁠증물 창고 열쇠일세⁠. 여씨 가주와 차를 마신 건 맞아⁠. 그 자리에서 열쇠를 달라 하더군⁠. 안 줬네⁠. 자네 포졸이 창고 뒤에서 얻어맞은 날 밤부터 내 허리춤에서 한 번도 안 풀었어⁠. 노는 거기 그대로 있네⁠.⁠”

미향은 열쇠를 보았다⁠. 그리고 추관의 얼굴을 보았다⁠. 지부 앞에서 소리부터 지르던 이 얼굴이 오늘은 늙어 보였다⁠.

“⁠지부 영감이 왜 서두르시는지 아십니까⁠?⁠”

“⁠양절로 제형사에서 사람이 온다는 소문이 돌았어⁠. 제형사가 무언지는 자네도 알지⁠? 이 고을 저 고을⁠, 여러 부의 옥사를 위에서 다시 살피는 관청 말일세⁠. 거기 판관이 이 일을 들었다는 거야⁠. 붕어 광주리 이야기부터 남문 문지기 이야기까지⁠.⁠” 추관이 쓴웃음을 지었다⁠. “⁠판관이 오기 전에 지부는 이 일을 닫고 싶어 해⁠. 비무 중의 과실로⁠, 피값과 곤장 몇 대로⁠. 판결이 나 버리면 판관도 뒤집기 어렵거든⁠.⁠”

“⁠그럼 저는 무엇으로 법정에 섭니까⁠? 포두로는 못 섭니다⁠.⁠”

“⁠증인으로 서게⁠.⁠” 추관이 일어섰다⁠. “⁠그 아이를 갈대밭에서 처음 건진 사람이 자네야⁠. 처음 건진 사람은 증인일세⁠. 지부도 그건 못 막아⁠.⁠” 추관은 대문 쪽으로 걷다가 돌아보았다⁠. “⁠조 포두⁠. 자네 아버지는 세 번째 지부를 만나고 나온 날 나한테 술을 사 달라고 했네⁠. 그날 나는 바쁘다고 안 샀어⁠. 그 술을 이번에 사겠네⁠. 판결이 나면⁠.⁠”

이 사람이 나간 뒤 세미가 열쇠를 집어 미향의 오른손에 쥐여 주었다⁠. 쇠가 손바닥 안에서 금방 따뜻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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