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화(5,312자)

바꿔 단 홀드

클라이밍 짐 회원이 실종됐다 · 류시안

트렁크 등은 노랗고 약했다⁠. 세빈은 홀드를 안은 채 트렁크 턱에 걸터앉았다⁠. 차가 세빈의 무게만큼 조금 기울었다⁠. 태하는 세빈 앞에 섰다⁠. 철공소 뒷마당의 쇳조각 더미가 가로등 불빛을 받아 군데군데 반짝였다⁠.

“⁠월요일 아침 여덟 시 이십 분에 대표님이 전화하셨어요⁠.⁠” 세빈이 말했다⁠. 홀드 안쪽을 엄지로 쓰는 손이 멈추지 않았다⁠. “⁠집에서 휴대전화로 카메라를 보셨대요⁠. 새벽 거요⁠. 주아 씨가 슬로퍼에서 오래 뭘 하는 거요⁠. 점심때 슬로퍼를 떼라고 하셨어요⁠. 닦는 척하고⁠, 안에 붙은 거 있으면 가져오라고요⁠. 그리고 같은 걸로 바꿔 달라고⁠.⁠”

“⁠같은 거⁠.⁠”

“⁠세팅실에 한번그립 샘플 상자가 와 있었어요⁠. 지난달에요⁠. 형 슬로퍼랑 모양이 똑같은 게 있었어요⁠. 한번그립이 저 모양을 베껴서 찍은 거예요⁠. 색도 맞췄고요⁠.⁠” 세빈은 웃으려다 말았다⁠. “⁠형이 대표실에서 카메라 보고 있을 때 제가 벽에서 바꿨어요⁠. 형 등 뒤에서요⁠. 드릴 소리 안 나게 손으로 풀었어요⁠.⁠”

태하는 월요일 점심을 떠올렸다⁠. 모니터 속 주아만 보고 있었다⁠. 대표실 유리창 너머 45도 벽에서 무슨 소리가 났는지 기억나지 않았다⁠.

“⁠안에 뭐가 있었어⁠?⁠”

“⁠메모리 카드요⁠. 손톱만 한 거⁠. 투명 테이프로 홀드 안쪽에 붙어 있었어요⁠. 테이프에 초크 묻은 손가락 자국이 찍혀 있었고요⁠.⁠” 세빈은 홀드를 기울여 안쪽을 트렁크 등에 비췄다⁠. 누런 안쪽 한가운데에 테이프가 떨어져 나간 자리가 네모나게 하얬다⁠. 네모 가장자리에 아주 작은 초크 지문이 하나 남아 있었다⁠. “⁠카드는 한 시 반에 대표님 드렸어요⁠. 대표님이 봉투를 주셨어요⁠. 삼백이요⁠.⁠”

태하는 홀드를 빼앗았다⁠. 세빈이 붙잡지 않았다⁠. 홀드는 손에 익은 무게였다⁠. 손바닥을 바깥 면에 대자⁠, 세 해 동안 닳아 맨들한 결이 손금에 꼭 맞게 붙었다⁠. 태하는 손을 떼지 못했다⁠.

“⁠삼백에⁠.⁠”

“⁠형⁠.⁠”

“⁠주아 씨가 왼팔 하나로 삼 분을 매달려서 붙인 거야⁠. 삼백에 떼어서 팔았어⁠?⁠”

“⁠월세가 넉 달 밀렸어요⁠.⁠” 세빈이 고개를 들었다⁠. 눈이 붉었다⁠. “⁠형은 대표님이 천이백 내 줬잖아요⁠. 아무도 형한테 뭐라고 안 해요⁠. 저는 삼백 받으면 안 돼요⁠? 저는 상비군도 못 갔어요⁠. 손목이 나가서 청소년 대표에서 끝났어요⁠. 형이 대회 나가던 해에 저는 세척 통 닦았어요⁠. 오버행 아니면 저 받아 주는 데 없어요⁠.⁠”

태하는 대꾸하지 못했다⁠. 홀드를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근데 못 버렸어요⁠.⁠” 세빈이 말했다⁠. 목소리가 갈라졌다⁠. “⁠대표님은 버리라고 하셨어요⁠. 철공소 고철 통에 넣으라고⁠. 근데 형 손때잖아요⁠. 형이 첫 월급으로 산 거잖아요⁠. 제가 「⁠유턴⁠」 같이 짤 때 형이 그랬잖아요⁠. 이건 손이 기억하는 홀드라고⁠. 그래서 트렁크에 넣어 놓고 일주일 동안 밤마다 꺼내 봤어요⁠.⁠”

세빈은 주머니에서 바나나를 꺼냈다⁠. 껍질을 까지 않고 손에 쥐었다가⁠, 울면서 껍질을 깠다⁠. 한 입 먹고 우물거리며 말했다⁠.

“⁠바나나는 왜 울 때 먹어도 맛있어요⁠?⁠”

“⁠몰라⁠.⁠”

“⁠진짜 맛있어요⁠. 죄송해요⁠.⁠”

태하는 홀드를 옆구리에 끼고 세빈 옆에 걸터앉았다⁠. 트렁크가 둘의 무게로 조금 더 기울었다⁠.

“⁠카드 안에 뭐가 있었는지 봤어⁠?⁠”

“⁠아니요⁠. 대표님이 바로 가져가셨어요⁠.⁠” 세빈이 고개를 저었다⁠. “⁠근데 대표님 휴대전화에 그날 저녁 문자가 왔어요⁠. 제가 대표실 옆에 있어서 봤어요⁠. 「⁠받았습니다⁠. 내일 아침 서류 보내겠습니다⁠. 탁⁠」⁠”

*

자정이 넘어 둘은 셔터를 반만 올리고 기어 들어갔다⁠. 짐은 캄캄했고⁠, 채광창으로 들어온 가로등 불빛이 45도 벽에 희미한 사각형을 그렸다⁠. 세빈이 사다리를 펴서 벽에 댔다⁠. 태하가 올라갔다⁠.

2027년에 찍힌 새 슬로퍼를 풀었다⁠. 볼트가 쉽게 돌았다⁠. 떼어 낸 홀드를 세빈에게 내려 주고⁠, 원래 슬로퍼를 받아 들었다⁠. 누런 안쪽을 벽에 대고 볼트를 손으로 끼웠다⁠. 손으로 먼저 돌려야 나사산이 망가지지 않는다⁠. 주아에게 가르친 순서 그대로였다⁠. 렌치로 마지막을 조였다⁠.

손바닥을 펴서 눌렀다⁠. 홀드가 돌지 않았다⁠. 손바닥 밑의 결이 맨들했고⁠, 가운데의 고운 결이 손금 한가운데에 와서 닿았다⁠. 태하는 손을 떼지 않았다⁠. 일주일 전 새벽⁠, 주아도 이 자리에 손바닥을 펴 대고 사십 초를 버텼다⁠. 왼팔 하나로 삼 분을 매달려 카드를 붙인 다음이었다⁠. 손을 떼면 벽에서 떨어질 만큼 지쳤을 것이다⁠. 그래도 사십 초를 눌렀다⁠.

“⁠형⁠.⁠” 사다리 아래에서 세빈이 말했다⁠. “⁠새 거는 어떻게 해요⁠?⁠”

“⁠버리지 마⁠. 형사님 드릴 거야⁠. 너도 같이 가고⁠.⁠”

세빈이 한동안 대답하지 않았다⁠. 사다리를 쥔 손에 힘이 들어가 사다리가 조금 떨렸다⁠.

“⁠저 잡혀가요⁠?⁠”

“⁠몰라⁠.⁠”

“⁠모르면 저 오늘 잠 못 자요⁠.⁠”

“⁠나도 못 자⁠.⁠” 태하는 사다리를 내려왔다⁠. 매트에 발을 딛고 「⁠유턴⁠」을 올려다보았다⁠. 아홉 개의 보라 홀드 가운데 가운데 것 하나만 색이 바래 있었다⁠. 어둠 속에서도 손이 알아보는 색이었다⁠. “⁠내일 아침에 대표님 오시면 먼저 얘기할 거야⁠. 형사님은 그다음⁠.⁠”

태하는 해람에게 문자를 보냈다⁠. 「⁠사람 데려갈게요⁠. 손 말고 사람⁠.⁠」 답은 금방 왔다⁠. 「⁠자정 넘어서 문자하는 사람은 다 나쁜 소식이던데⁠. 좋은 소식이죠⁠?⁠」 태하는 답을 보내지 않았다⁠.

일요일 아침 일곱 시⁠, 오버행에 라면 냄새가 퍼졌다⁠.

나롱이 데스크 뒤에서 휴대용 버너에 냄비를 올려놓고 있었다⁠. 냄비 안에서 묵은지가 라면 국물과 함께 끓었다⁠. 셔터를 올리러 온 태하가 냄새에 걸음을 멈췄다⁠.

“⁠쌤이 주신 묵은지요⁠. 일요일 아침 당번은 제가 열잖아요⁠. 아침밥이에요⁠.⁠”

“⁠짐에서 라면 끓이면 대표님이 뭐라고 하셔⁠.⁠”

“⁠대표님 아직 안 오셨어요⁠. 그리고 이거 대전 어머님 손맛이에요⁠. 대표님도 한 젓가락 드시면 뭐라고 못 하실걸요⁠.⁠”

계단 아래에서 철공소 사장이 고개를 내밀었다⁠. 일요일인데도 작업복 차림이었다⁠.

“⁠이게 무슨 냄새야⁠? 위에서 김치찌개 끓이냐⁠?⁠”

“⁠라면이요⁠, 사장님⁠. 드실래요⁠?⁠”

“⁠짱돌 잡기 전에 라면 먹으면 손이 미끄러워⁠.⁠” 사장은 그렇게 말하고 계단을 올라와 나롱 옆에 앉았다⁠. 젓가락을 받아 들었다⁠. “⁠한 젓가락만⁠.⁠”

태하는 웃지 않고 대표실로 들어갔다⁠. 옆구리에 끼고 온 원래 슬로퍼를 문호의 책상 한가운데에 올려놓았다⁠. 안쪽이 위로 가게 뒤집어서⁠. 테이프가 떨어져 나간 하얀 네모가 형광등 아래 드러났다⁠. 태하는 문호의 의자에 앉지 않았다⁠. 책상 옆에 서서 기다렸다⁠.

책상 위에는 서류철이 하나 펼쳐져 있었다⁠. 맨 위 장에 「⁠주식 전환 계약서⁠」라는 글자가 있었고⁠, 맨 아래 문호의 도장이 빨갛게 번져 있었다⁠. 도장을 두 번 찍었는지 테두리가 두 겹이었다⁠. 서류철 옆에 낡은 액자가 엎어져 있었다⁠. 태하는 액자를 세웠다⁠.

열 해 전 사진이었다⁠. 진천 선수촌 실내 암벽장 앞⁠, 운동복 차림의 문호 코치가 팔짱을 끼고 서 있었다⁠. 문호의 양옆에서 열여섯 살 태하와 석빈이 각자 철봉 하나씩을 한 손으로 잡고 몸을 가로로 띄우고 있었다⁠. 「⁠국기 게양⁠」이었다⁠. 사진 속 문호는 소리를 지르는 입 모양이었고⁠, 눈은 웃고 있었다⁠. 석빈의 몸이 태하보다 손가락 한 마디만큼 더 반듯했다⁠.

태하는 액자를 엎지 않고 세워 둔 채로 두었다⁠.

*

여덟 시 반⁠, 문호가 무릎을 끌며 대표실 문을 열었다⁠. 라면 냄새에 미간을 찡그렸다가 책상 위의 홀드를 보고 그대로 멈췄다⁠.

문호는 한참 문간에 서 있었다⁠. 이윽고 들어와 문을 닫고 의자에 앉았다⁠. 홀드를 만지지 않았다⁠. 손을 무릎에 올리고 문질렀다⁠.

“⁠세빈이가 안 버렸구나⁠.⁠”

“⁠세빈이가 다 말했어요⁠. 삼백 주신 것도요⁠.⁠”

“⁠그 돈은 세빈이 잘못이 아니다⁠. 내가 준 거다⁠.⁠” 문호는 홀드 안쪽의 하얀 네모를 보았다⁠. “⁠카드는 회장님 드렸어⁠. 그날 저녁에⁠. 회장님이 다음 날 아침에 빚을 지분으로 바꾸는 서류를 보내셨지⁠. 원래는 은행처럼 한꺼번에 돌려 달라고 하실 참이었다⁠. 그럼 오버행은 그 주에 문 닫는 거였고⁠.⁠”

“⁠카드에 뭐가 있었어요⁠?⁠”

“⁠안 봤다⁠.⁠”

“⁠안 봤어요⁠?⁠”

“⁠보면 알게 되잖아⁠.⁠” 문호가 고개를 들었다⁠. “⁠알면 못 넘기잖아⁠. 그래서 안 봤어요⁠.⁠”

문호는 서랍에서 흰 봉투 다섯 개를 꺼내 책상에 늘어놓았다⁠. 이달 치 월급 봉투였다⁠. 오버행은 아직도 코치와 세터의 월급을 현금으로 봉투에 넣어 주었다⁠. 통장으로 넣으면 돈이 그냥 숫자처럼 보인다고⁠, 문호가 고집하는 일이었다⁠. 봉투마다 문호의 삐뚤빼뚤한 글씨가 있었다⁠. 맨 끝 봉투에는 「⁠태하⁠」

“⁠도장 안 찍었으면 이 봉투가 이달에 비었어⁠. 손가락 굽은 놈은 애가 둘이다⁠. 허리 나간 놈은 어머니 요양원비를 낸다⁠. 너는 홀드를 보고⁠, 나는 이 봉투를 본다⁠. 우리는 그렇게 나눠서 일했어⁠.⁠”

태하는 책상 모서리를 손으로 짚었다⁠. 손바닥 밑으로 차가운 나무 결이 느껴졌다⁠.

“⁠한번그립 공장이 홀드 굳히는 시간을 반으로 줄였대요⁠. 시험해 보니까 볼트 구멍에서 금이 갔대요⁠. 대전점 말고 두 군데서 더 깨졌대요⁠. 석빈이 합의서도 있었대요⁠. 주아 씨가 그걸 넣어 둔 거예요⁠. 대표님이 그걸 회장님한테 돌려준 거고요⁠.⁠”

문호의 손이 무릎 위에서 멈췄다⁠.

“⁠석빈이는 볼트 덜 조인 게 아니었어요⁠. 대표님 제자요⁠. 저랑 같이 대표님한테 「⁠국기 게양⁠」 하다 혼나던 놈이요⁠. 깨진 홀드 반쪽을 손에 쥔 채로 깨어났대요⁠.⁠”

“⁠태하야⁠.⁠”

“⁠그리고 주아 씨는 평창동 집에 있어요⁠. 밖에서 잠기는 방에요⁠. 어제 문 잠기는 소리 들었어요⁠.⁠” 태하는 숨을 골랐다⁠. “⁠대표님은 어디 있는지 알고 계셨죠⁠. 처음부터⁠.⁠”

문호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표실 밖에서 나롱과 철공소 사장이 라면 국물을 두고 다투는 소리가 났다⁠. 국물까지 먹으면 프리미엄이냐⁠, 국물은 서비스다⁠. 문호가 닫힌 문을 한 번 돌아보았다⁠. 웃음소리를 듣는 얼굴이 아팠다⁠.

“⁠새벽 두 시 이십 분에 회장님이 전화하셨다⁠.⁠”

문호가 말했다⁠. 목소리가 아주 낮았다⁠. 태하는 몸을 숙여야 들을 수 있었다⁠.

“⁠딸 휴대전화 위치가 오버행으로 나온다고⁠. 지금 거기 있느냐고⁠. 나는 집이라서 모른다고 했지⁠. 그랬더니 문을 좀 열어 달라고 하셨어⁠. 딸을 데리러 가겠다고⁠. 아빠가 딸 데리러 간다는데⁠, 새벽 두 시에 혼자 남의 짐에 있는 딸을 데리러 간다는데⁠, 내가 뭐라고 해⁠?⁠”

문호는 홀드를 처음으로 손으로 만졌다⁠. 손바닥을 바깥 면에 대고⁠, 펴지도 누르지도 못한 채 얹기만 했다⁠.

“⁠뒷문 번호를 불러 드렸다⁠. 뒷문 카메라 고장 난 것도 말씀드렸고⁠. 아침에 카메라를 보니까 아가씨가 신발을 벗어 놓고 카메라를 올려다보더라⁠. 그걸 보고 알았지⁠. 데리러 간 게 아니라는 걸⁠.⁠” 문호의 손이 홀드 위에서 떨렸다⁠. “⁠그래서 지웠다⁠. 내가 문을 연 게 거기 다 찍혀 있는 것 같아서⁠.⁠”

태하는 문호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쉰두 해 동안 벽을 잡아 온 손이었다⁠. 손가락 관절마다 굳은살이 박혀 있었고⁠, 굳은살 사이로 하얀 초크가 끼어 있었다⁠. 은퇴한 지 열 해가 넘었는데도 손금의 초크는 빠지지 않았다⁠.

“⁠문을 연 건 나다⁠.⁠” 문호가 말했다⁠. “⁠태하야⁠. 내가 열었어요⁠.⁠”

7화는 어땠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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