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화(5,367자)

평창동

클라이밍 짐 회원이 실종됐다 · 류시안

경사로 아래에서 엄팔용이 차 문을 닫았다⁠. 손에 하얀 봉투가 들려 있었다⁠. 두툼했다⁠. 태하는 경사로 첫 칸에 올라섰다⁠. 휠체어 바퀴가 지나다니며 반들반들 닳은 나무판이었다⁠. 엄팔용이 경사로 앞에서 멈췄다⁠. 둘의 키가 비슷해졌다⁠.

“⁠공태하 씨⁠. 서울 가는 기차 표 끊어 드릴까요⁠?⁠”

“⁠표는 있어요⁠.⁠”

“⁠회장님이 석빈 씨 안부를 늘 걱정하세요⁠. 연말이라 인사차 들렀습니다⁠.⁠” 엄팔용은 봉투를 조금 들어 보였다⁠. “⁠비켜 주시면 금방 전하고 가겠습니다⁠.⁠”

“⁠석빈이 문 안 열어요⁠.⁠”

“⁠열지 안 열지는 석빈 씨가 정하겠지요⁠.⁠”

엄팔용의 목소리는 끝까지 낮고 고르게 깔렸다⁠. 태하는 비키지 않았다⁠. 엄팔용이 한 걸음 다가오면 태하는 한 칸 뒤로 물러나야 했고⁠, 한 칸 물러나면 현관이었다⁠. 엄팔용의 오른손이 봉투를 쥔 채 허리께로 내려갔다⁠.

1층 창문이 드르륵 열렸다⁠. 석빈이 창틀에 팔꿈치를 걸치고 내다보았다⁠. 이마에 아직 땀이 맺혀 있었다⁠.

“⁠아저씨⁠! 봉투는 우편함에 넣어 주세요⁠! 우리 엄마가 낯선 남자 집에 들이면 소금 뿌려요⁠. 굵은소금이요⁠. 정장에 얼룩져요⁠!⁠”

엄팔용이 창문을 올려다보았다⁠. 한참 보았다⁠. 그러고는 정말로 경사로 옆 우편함으로 가서 봉투를 밀어 넣었다⁠. 봉투가 반쯤 삐져나왔다⁠. 엄팔용은 손바닥으로 봉투를 마저 밀어 넣고 차에 올랐다⁠. 차가 주차장을 빠져나갈 때까지 석빈은 창틀에서 내려가지 않았다⁠.

“⁠태하야⁠.⁠” 석빈이 창 너머로 말했다⁠. “⁠그 봉투⁠, 니가 꺼내서 버려⁠. 내가 꺼내면 받은 게 돼⁠.⁠”

태하는 우편함에서 봉투를 꺼냈다⁠. 무거웠다⁠. 석빈은 창문을 닫았다⁠. 닫히는 유리 너머로 석빈이 철봉을 다시 잡는 것이 보였다⁠.

태하는 봉투를 경비실에 맡기고 주인에게 돌려보내 달라고 했다⁠. 경비원은 봉투를 받아 들고 무게를 가늠하다가 눈이 커졌다⁠.

*

서울로 올라오는 KTX에서 나롱에게 전화를 걸었다⁠. 신호가 한 번 가자마자 나롱이 받았다⁠.

“⁠쌤⁠, 튀김소보로요⁠.⁠”

“⁠못 샀어⁠. 묵은지 있어⁠.⁠”

“⁠묵은지요⁠?⁠” 나롱이 잠깐 말을 잃었다⁠. “⁠쌤⁠, 저 자취해요⁠. 묵은지면 라면 스무 개는 끓여야 돼요⁠. 그럼 제 한 달 식비가 묵은지 맛이 돼요⁠.⁠”

“⁠싫으면 철공소 사장님 드려⁠.⁠”

“⁠아니요⁠, 받을게요⁠. 받는데요⁠.⁠” 나롱이 목소리를 낮췄다⁠. 데스크 뒤로 숨는 소리가 났다⁠. “⁠쌤⁠, 대표님이 쌤 치과 어디 갔냐고 세 번 물어보셨어요⁠. 제가 이빨 핑계 댔더니 무슨 이빨이냐고 해서⁠, 사랑니라고 했어요⁠. 그랬더니 대표님이 쌤 사랑니 작년에 뺐다고 하셨어요⁠. 대표님은 쌤 이빨까지 다 알아요⁠.⁠”

태하는 창에 이마를 댔다⁠. 유리가 차가웠다⁠.

“⁠그리고 대표님이 저녁 내내 「⁠유턴⁠」 앞에 서 계셨어요⁠. 슬로퍼만 올려다보시면서요⁠. 회원들이 말 걸어도 대답을 안 하셨어요⁠. 그러다 세빈 쌤을 대표실로 부르셨는데⁠, 세빈 쌤이 나오면서 바나나를 껍질째 먹으려고 했어요⁠. 제가 말렸어요⁠.⁠”

“⁠세빈이 지금 있어⁠?⁠”

“⁠퇴근했어요⁠. 쌤⁠, 근데요⁠.⁠” 나롱은 한참 망설였다⁠. “⁠저 오늘 단톡방 그만 볼래요⁠. 다들 주아 언니 얘기를 웃기게만 해요⁠. 처음엔 저도 웃겼는데⁠, 이제 안 웃겨요⁠.⁠”

전화를 끊고 나서도 태하는 한동안 휴대전화를 쥐고 있었다⁠. 화면에 손바닥 땀이 뿌옇게 남았다⁠.

토요일 아침 아홉 시⁠,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왔다⁠.

“⁠공태하 씨죠⁠. 주아 엄마예요⁠. 형사님이 번호를 주셨어요⁠.⁠”

주아의 어머니는 일산에서 꽃집을 했다⁠. 서울로 오는 길이라며 평창동 아래 큰길가의 빵집에서 보자고 했다⁠. 태하가 들어가자 창가 자리에서 해람이 손을 들었다⁠. 회색 코트 대신 두꺼운 패딩이었고⁠, 발에는 여전히 구두였다⁠. 맞은편에 짧은 머리의 여자가 앉아 있었다⁠. 손톱 끝이 초록 물에 들어 있었다⁠. 꽃대를 다듬는 손이었다⁠.

“⁠오늘 비번이에요⁠.⁠” 해람이 말했다⁠. “⁠비번에 구두 신는 형사 처음 보죠⁠?⁠”

“⁠운동화 없으세요⁠?⁠”

“⁠있어요⁠. 매트에 구멍 안 내는 걸로 하나 사야 하나 고민 중이에요⁠.⁠”

주아의 어머니는 웃지 않았다⁠. 커피잔을 두 손으로 감싼 채 태하를 보았다⁠.

“⁠주아가 그 짐 얘기를 많이 했어요⁠. 일 년에 두 번 만나는데⁠, 만날 때마다요⁠. 손이 정직한 세터가 있다고⁠.⁠”

태하는 고개를 숙였다⁠. 같은 말을 이번 주에만 세 번째 들었다⁠. 들을 때마다 손바닥이 따끔했다⁠.

“⁠평창동 집에 벽 방이 있어요⁠.⁠” 어머니가 말했다⁠. “⁠주아 열 살 때⁠, 우리 헤어지고 나서 그 사람이 지어 준 방이에요⁠. 이 층 높이를 터서 천장까지 나무 홀드를 박았어요⁠. 주아가 학교 갔다 오면 그 방에서 혼자 매달렸대요⁠. 밤새 매달려 있을까 봐 그 사람이 문밖에 자물쇠를 달았고요⁠. 아홉 시가 되면 밖에서 잠갔어요⁠. 애가 그만 자라고⁠.⁠”

해람의 잔이 받침에 닿는 소리가 났다⁠.

“⁠영상 속 벽이 그 방 벽이에요⁠. 나무 홀드 모양을 내가 알아요⁠. 주아가 처음 매달린 홀드가 화면 왼쪽 위에 있었어요⁠. 곰 얼굴 모양이요⁠. 그 사람이 특별히 깎아 달라고 했대요⁠.⁠”

“⁠어머님은 왜 직접 안 가세요⁠?⁠” 태하가 물었다⁠.

“⁠가 봤어요⁠. 월요일에⁠.⁠” 어머니는 커피잔을 내려놓았다⁠. 손톱의 초록 물이 잔 테두리에 묻었다⁠. “⁠문 앞에서 변호사가 나왔어요⁠. 성인 딸이 엄마를 만나기 싫어한다고⁠. 열두 해 동안 일 년에 두 번 만나는 엄마가 무슨 권리로 왔냐고요⁠. 그 말이 맞아서⁠, 돌아왔어요⁠.⁠”

*

열한 시⁠, 해람과 태하는 평창동 언덕 꼭대기의 대문 앞에 섰다⁠. 대문은 회색 돌담 사이에 끼어 있었다⁠. 담 너머로 유리 지붕이 보였다⁠. 해람이 초인종을 눌렀다⁠. 인터폰에서 엄팔용의 목소리가 나왔다⁠. 기다리라는 말 뒤로 한참 아무 소리도 없었다⁠.

대문이 열렸다⁠. 휘준이 현관 앞 계단 위에 서 있었다⁠. 회색 니트에 실내화 차림이었다⁠.

“⁠형사님⁠, 비번이시라고요⁠. 공태하 씨도 오셨네요⁠. 들어오세요⁠. 차라리 잘됐어요⁠. 오늘 다 보시고 끝내시죠⁠.⁠”

거실은 높았다⁠. 이 층을 터서 천장의 유리 지붕까지 빛이 그대로 떨어졌다⁠. 대리석 바닥이 빛을 받아 하얗게 빛났다⁠. 해람이 거실에 들어서다 구두 굽이 미끄러져 한쪽 팔을 휘저었다⁠. 태하가 팔을 잡았다⁠. 해람은 바로 서서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코트 깃을 여몄다⁠. 휘준이 웃음을 참는 얼굴을 했다⁠.

“⁠바닥이 미끄럽지요⁠. 딸이 어릴 때 양말 신고 미끄럼을 탔어요⁠.⁠”

계단 위에서 발소리가 났다⁠. 엄팔용이 먼저 내려오고⁠, 주아가 뒤따랐다⁠. 회색 후드티에 머리를 하나로 묶은 모습이 영상과 같았다⁠. 맨발이었다⁠. 주아는 계단 마지막 칸에서 태하를 보고 걸음을 멈췄다⁠. 눈이 커졌다가⁠, 곧 웃었다⁠.

“⁠세터님⁠. 레슨 예약하러 오셨어요⁠?⁠”

“⁠데스크가 문을 닫았더라고요⁠.⁠”

주아가 소리 내어 웃었다⁠. 웃음 끝에 숨을 한 번 들이켰다⁠. 휘준이 소파 가운데 앉았고⁠, 주아는 휘준 옆에 앉았다⁠. 엄팔용이 소파 뒤에 섰다⁠. 해람과 태하가 맞은편에 앉았다⁠. 탁자 위의 휴대전화에서 변호사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통화 중이었다⁠.

“⁠주아 씨⁠, 탁주아 씨 본인 맞으시죠⁠.⁠” 해람이 수첩을 폈다⁠. “⁠지금 원하시는 곳에 계신 건가요⁠?⁠”

“⁠네⁠. 집이잖아요⁠. 쉬는 중이에요⁠.⁠”

“⁠혼자 이야기할 수 있을까요⁠? 오 분만요⁠.⁠”

“⁠안 됩니다⁠.⁠” 휴대전화 속 변호사가 말했다⁠. “⁠본인이 원하지 않습니다⁠.⁠”

“⁠본인한테 물었는데요⁠.⁠”

“⁠괜찮아요⁠, 형사님⁠.⁠” 주아가 말했다⁠. 웃고 있었다⁠. 오른손이 무릎에 올라갔다⁠. 손가락을 펴서 한 번⁠, 두 번 눌렀다⁠. “⁠저 진짜 괜찮아요⁠. 엄마한테도 그렇게 전해 주세요⁠.⁠”

태하는 주아의 손을 보지 않으려고 주아의 얼굴을 보았다⁠. 주아도 태하를 보았다⁠.

“⁠세터님 문제요⁠.⁠” 주아가 말했다⁠. “⁠「⁠유턴⁠」 내려오는 길이 너무 어려웠어요⁠. 저 끝까지 못 내려왔어요⁠.⁠”

“⁠다 내려왔잖아요⁠. 매트까지⁠.⁠”

“⁠아니요⁠.⁠” 주아가 고개를 저었다⁠. 손이 무릎에서 오므라들었다⁠. 얇은 크림프를 첫 마디로 집는 손이었다⁠. “⁠중간에 하나를 두고 왔어요⁠. 세터님이면 보면 알 거예요⁠. 세터님 손이 제일 먼저 알 거예요⁠.⁠”

“⁠주아야⁠.⁠” 휘준이 딸의 손등에 손을 얹었다⁠. 크림프를 쥔 손가락이 휘준의 손 밑에서 펴졌다⁠. “⁠공태하 씨 바쁘신 분이야⁠.⁠”

휘준이 태하를 보았다⁠.

“⁠공태하 씨⁠. 보셨지요⁠. 딸은 집에 있고⁠, 쉬고 있습니다⁠. 이 아이 엄마는 열두 해 전에 이 아이를 두고 나갔어요⁠. 나는 이 아이 하나 보고 회사를 키웠고⁠, 이 아이를 위해 저 위에 벽을 지었습니다⁠.⁠”

“⁠밖에서 잠기는 벽이요⁠.⁠”

거실이 조용해졌다⁠. 휴대전화 속 변호사도 말이 없었다⁠. 엄팔용이 소파 등받이를 쥐었다⁠. 휘준의 얼굴에서 웃음이 사라졌다가⁠, 아주 천천히 돌아왔다⁠.

“⁠아이를 재우려고 단 자물쇠예요⁠. 아빠라면 다 압니다⁠.⁠” 휘준이 일어났다⁠. “⁠오늘 이야기는 여기까지 하시죠⁠. 공태하 씨⁠, 축제 제안은 아직 유효합니다⁠. 형사님⁠, 커피도 못 드려 죄송합니다⁠.⁠”

주아도 일어났다⁠. 엄팔용이 주아의 팔꿈치에 손을 대지 않고 곁에 붙어 섰다⁠. 주아는 계단을 오르다가 중간에서 돌아보았다⁠. 태하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대신 계단 난간을 손바닥으로 짚었다⁠. 손가락을 펴고⁠, 꾹 눌렀다⁠.

이 층 복도 끝에 나무 문이 있었다⁠. 문밖에 놋쇠 자물쇠가 달려 있었다⁠. 주아가 들어가자 엄팔용이 문을 닫았다⁠. 철컥 소리가 거실까지 내려왔다⁠.

*

언덕을 내려가는 해람의 차 안에서 히터가 덜덜 소리를 냈다⁠. 해람은 한참 운전만 하다가 신호에 멈췄다⁠.

“⁠본인이 괜찮다잖아요⁠. 공식적으로 저는 여기까지예요⁠. 월요일에 종결 서류 올라가요⁠.⁠”

“⁠문 잠기는 소리 들으셨잖아요⁠.⁠”

“⁠들었죠⁠. 아빠가 딸 방문 닫는 소리로도 들려요⁠. 판사님 귀에는요⁠.⁠” 해람은 운전대를 손바닥으로 쓸었다⁠. “⁠중간에 하나를 두고 왔다는 거⁠, 무슨 뜻이에요⁠?⁠”

“⁠슬로퍼요⁠. 손바닥 펴서 누른 데요⁠.⁠” 태하는 휴대전화 케이스에서 테이프 조각을 꺼내 보였다⁠. “⁠거기 뭘 붙여 놨어요⁠. 누가 떼어 갔고⁠, 홀드도 같은 모델 새 걸로 바꿔 달았어요⁠.⁠”

해람은 테이프 조각을 오래 보았다⁠. 신호가 바뀌고 뒤차가 경적을 울렸다⁠.

“⁠누가 바꿨는지 알아요⁠?⁠”

“⁠짐작은요⁠.⁠”

“⁠짐작은 서류에 못 써요⁠.⁠” 해람이 차를 출발시켰다⁠. “⁠사람을 데려와요⁠. 손 말고⁠, 사람이요⁠.⁠”

*

밤 열한 시⁠, 오버행 셔터는 내려가 있었다⁠. 태하는 열쇠로 셔터를 올리지 않고 건물 뒤로 돌았다⁠. 철공소 뒷마당과 붙은 작은 주차장이었다⁠. 세빈의 낡은 경차가 늘 서는 자리에 세빈의 차가 있었다⁠. 트렁크가 열려 있었고⁠, 트렁크 등 아래 세빈이 서 있었다⁠.

세빈의 두 손에 큰 보라 홀드가 들려 있었다⁠.

뒤집혀 있어서 그릇처럼 파인 안쪽이 위를 향했다⁠. 안쪽이 누렇게 물들어 있었다⁠. 세 해 동안 세척 통을 들락거린 색이었다⁠. 세빈은 홀드 안쪽을 엄지로 쓸고 있었다⁠. 주차장 바닥에 바나나 껍질 두 개가 떨어져 있었다⁠.

태하의 발소리에 세빈이 돌아보았다⁠. 홀드를 떨어뜨리지 않았다⁠. 오히려 두 팔로 꼭 끌어안았다⁠.

“⁠형⁠.⁠”

태하는 트렁크 앞까지 걸어갔다⁠. 손을 내밀었다⁠. 세빈은 홀드를 안은 채 움직이지 않았다⁠. 트렁크 등 불빛이 세빈의 젖은 눈가를 비추었다⁠.

“⁠죄송해요⁠.⁠” 세빈이 말했다⁠. 이번 사과는 길었다⁠. “⁠진짜 죄송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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