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5,328자)

외팔 깃발

클라이밍 짐 회원이 실종됐다 · 류시안

금요일 새벽 다섯 시⁠, 태하는 반지하 방 벽에 등을 기대고 사십칠 초의 마지막 몇 초를 한 장면씩 넘겼다⁠. 화면을 멈추고⁠, 손가락으로 조금 밀고⁠, 다시 멈추었다⁠. 주아가 매트에 앉기 직전이었다⁠.

스타트 홀드까지 내려온 주아는 바로 내려서지 않았다⁠. 왼손 하나로 스타트 홀드를 쥐고⁠, 두 다리를 모아 옆으로 쭉 뻗었다⁠. 몸이 벽과 직각으로 떠올랐다⁠. 깃대에 매단 깃발처럼⁠, 왼팔 하나에 온몸이 가로로 펄럭였다⁠. 일 초쯤이었다⁠. 다음 장면에서 주아는 이미 매트에 앉아 있었다⁠.

태하는 화면을 멈춘 채 웃었다⁠. 웃음이 나오고 나서야 자기가 웃었다는 것을 알았다⁠.

상비군 시절⁠, 훈련이 끝나면 태하와 석빈은 문호 코치가 보는 앞에서 이 동작을 했다⁠. 철봉이든 홀드든 한 손으로 쥐고 몸을 가로로 띄웠다⁠. 둘이 나란히 하면 국기 게양식 같다고 해서 「⁠국기 게양⁠」이라고 불렀다⁠. 문호는 볼 때마다 어깨 나간다고 소리를 질렀고⁠, 소리를 지르면서 웃었다⁠. 석빈은 늘 태하보다 일 초를 더 버텼다⁠.

이 장난을 아는 사람은 상비군 동기 몇과 문호뿐이었다⁠. 주아가 이 동작을 어디서 배웠는지⁠, 태하는 짐작할 수 있었다⁠.

여섯 시에 나롱에게 문자를 보냈다⁠. 「⁠오늘 오전 데스크랑 볼더 구역 좀 봐 줘⁠. 대전 갔다 온다⁠.⁠」 답이 일 분 만에 왔다⁠. 「⁠쌤 무슨 일이에요⁠?⁠? 대전 성심당 가요⁠?⁠? 튀김소보로 사 오면 커버 쳐 드림⁠」 답 아래로 한 줄이 더 붙었다⁠. 「⁠대표님한테는 쌤 치과 간다고 할게요⁠. 이빨 핑계가 제일 안 들켜요⁠.⁠」

*

KTX 창밖으로 겨울 논이 지나갔다⁠. 논바닥에 서리가 하얗게 앉아 있었다⁠. 태하는 휴대전화로 기사 두 개를 번갈아 열었다⁠.

하나는 오늘 아침 기사였다⁠. 「⁠한번컴퍼니⁠, 이르면 다음 달 상장 예비심사 결과⁠… 업계 ‘⁠실내 암벽 붐 타고 몸값 1조 기대⁠’⁠」 증권사 사람의 말이 길게 붙어 있었다⁠. 몸값 1조는 기대일 뿐이라는 말이 맨 아래 작은 글씨로 있었다⁠.

다른 하나는 작년 10월 기사였다⁠. 「⁠대전 실내 암벽장서 세터 추락⁠… 경찰 ‘⁠볼트 고정 불량 추정⁠’⁠」 기사에는 이름이 없었다⁠. 스물여섯 살 세터 하 모 씨⁠. 기사 끝에 한번컴퍼니의 입장이 한 줄 붙어 있었다⁠. 「⁠안전 수칙 교육을 강화하겠다⁠.⁠」

태하는 기사를 닫고 홀드 조각을 주머니에서 꺼냈다⁠. 깨진 날을 엄지로 쓸었다⁠. 석빈이 떨어졌다는 소식을 들은 날⁠, 태하는 오버행에서 문제를 짜고 있었다⁠. 문호가 계단에서 전화를 받고 한참 서 있다가 올라와 말했다⁠. 석빈이 떨어졌다⁠. 허리를 다쳤다⁠. 태하는 대전에 가지 않았다⁠. 다음 주에도⁠, 다음 달에도⁠. 병원비를 보탤 돈이 없었고⁠, 휠체어에 앉은 석빈 앞에 수술한 어깨로 서 있을 자신이 없었다⁠. 한 해가 그렇게 지나갔다⁠.

*

대전역에서 석빈의 집으로 가는 길에 한번 대전점이 있었다⁠. 태하는 버스에서 내렸다⁠.

새로 지은 상가 건물 2층과 3층을 통째로 쓰는 짐이었다⁠. 유리문에 보라색 글자가 박혀 있었다⁠. 「⁠한번 클라이밍 대전 — 당신의 한 번을 위한 벽⁠」 안은 따뜻하고 밝았고⁠, 향초 냄새가 났다⁠. 초크 냄새를 덮으려고 피운 향이었다⁠. 데스크 뒤 화면에서 축제 광고가 돌고 있었다⁠. 18미터 유리 벽 앞에서 웃는 모델들⁠, 그리고 화면 아래 글자⁠. 「⁠한 번뿐인 벽 — 12월 18일 성수⁠」

일일 이용권은 이만 이천 원이었다⁠. 태하는 돈을 내고 신발을 갈아 신었다⁠.

리드벽 하나에 보라색 천이 드리워 있었다⁠. 천 앞에 안내판이 놓였다⁠. 「⁠VIP 프라이빗 체험 전용 — 예약 고객만⁠」 작년 10월⁠, 석빈이 세팅하던 벽이었다⁠. 기사 사진 속 벽과 기울기가 같았다⁠.

태하는 옆 볼더 벽으로 가서 보라 홀드 하나에 손을 얹었다⁠. 손바닥을 펴서 누르고⁠, 조금 비틀었다⁠. 볼트 구멍 언저리에서 손바닥만 아는 떨림이 왔다⁠. 옆의 것도 눌렀다⁠. 다음 것은 괜찮았다⁠. 세 번째 것에서 다시 떨림이 왔다⁠.

“⁠회원님⁠, 홀드 만지시면 안 됩니다⁠.⁠”

보라색 조끼를 입은 매니저가 다가왔다⁠. 스물 초반쯤 되어 보였다⁠.

“⁠만지라고 있는 거잖아요⁠.⁠”

“⁠오르실 때만요⁠. 손바닥으로 누르시는 건 세팅 팀만 할 수 있어요⁠.⁠” 매니저는 태하의 손을 보았다⁠. 초크가 손금마다 박힌 손이었다⁠. “⁠혹시 업계 분이세요⁠?⁠”

“⁠오버행이요⁠. 서울⁠.⁠”

“⁠아⁠, 이번에 한번 가족 되신 데요⁠?⁠” 매니저의 얼굴이 밝아졌다⁠. “⁠축하드려요⁠. 저희 다음 달부터 인센티브 나와요⁠. 상장하면요⁠.⁠”

“⁠여기 벽에서 작년에 세터가 떨어졌죠⁠.⁠”

매니저의 얼굴이 그대로 굳었다⁠. 밝은 표정이 지워지지 않고 얼어붙은 채였다⁠.

“⁠저는 올해 들어와서 몰라요⁠. 그 얘기는 하면 안 된다고 교육받았어요⁠.⁠”

“⁠누가요⁠?⁠”

“⁠본사에서요⁠. 안전 교육 시간에요⁠.⁠” 매니저는 목소리를 낮췄다⁠. “⁠회원님⁠, 이용권 환불해 드릴게요⁠. 그냥 가 주세요⁠. 저 이거 오래 다녀야 돼요⁠.⁠”

태하는 이만 이천 원을 돌려받고 유리문을 나왔다⁠. 문이 닫히자 향초 냄새가 끊기고 겨울바람이 손바닥의 초크를 날렸다⁠.

석빈의 집은 대전 변두리의 오래된 아파트 1층이었다⁠. 현관 앞 계단 옆에 나무판을 덧대 만든 경사로가 있었다⁠. 초인종을 누르자 안에서 쇠 부딪치는 소리가 났다⁠.

문을 연 것은 석빈의 어머니였다⁠. 고무장갑을 낀 채 태하를 보더니 손을 입에 댔다⁠.

“⁠태하 아니니⁠? 상비군 태하⁠.⁠”

“⁠안녕하세요⁠.⁠”

“⁠석빈아⁠! 태하 왔다⁠! 태하⁠!⁠”

거실 안쪽에서 대답이 없었다⁠. 어머니가 태하의 팔을 끌어 안으로 들였다⁠. 거실과 방 사이 문틀에 철봉이 끼워져 있었다⁠. 철봉 아래 휠체어가 있었고⁠, 휠체어 위의 석빈이 두 손으로 철봉을 잡고 몸을 끌어 올리고 있었다⁠. 허리 아래는 휠체어 시트에 가만히 남아 있었다⁠. 팔과 등만 올라갔다 내려왔다⁠. 석빈은 태하를 보고도 턱걸이를 멈추지 않았다⁠.

“⁠스물아홉⁠.⁠” 석빈이 말했다⁠. “⁠서른⁠.⁠”

석빈은 철봉을 놓고 휠체어에 털썩 앉았다⁠. 땀이 목을 타고 흘렀다⁠. 팔뚝이 상비군 시절보다 굵었다⁠.

“⁠앉아서 하니까 더 잘 돼⁠. 다리가 무게를 안 보태 주거든⁠. 이게 장점이야⁠, 장점⁠.⁠”

“⁠석빈아⁠.⁠”

“⁠한 해 만이네⁠. 오는 길 안 막혔냐⁠? 일 년 동안 길이 막혀서 못 온 거면 이해해 줄게⁠.⁠”

석빈은 웃었다⁠. 웃는 얼굴이 문호와 비슷했다⁠. 화가 날수록 부드러워지는 얼굴이었다⁠. 어머니가 식혜를 두 잔 내오다가 석빈의 말투를 듣고 쟁반으로 석빈의 어깨를 툭 쳤다⁠.

“⁠손님한테 말 곱게 해⁠.⁠”

“⁠손님 아니야⁠, 엄마⁠. 빚쟁이야⁠. 문병 빚⁠.⁠”

“⁠빚은 니가 졌지⁠. 저 태하가 너 상비군 때 라면을 몇 개를 끓여 줬는데⁠.⁠”

“⁠엄마⁠, 라면은 내가 끓였어⁠.⁠”

“⁠그럼 태하가 설거지를 했겠지⁠.⁠”

어머니는 쟁반을 들고 부엌으로 갔다⁠. 부엌에서 김치냉장고 문을 여닫는 소리가 났다⁠. 석빈이 식혜를 반쯤 마시고 컵을 무릎에 올렸다⁠. 무릎은 컵이 기울어도 움찔하지 않았다⁠.

*

태하는 주머니에서 홀드 조각을 꺼내 석빈의 손바닥에 올렸다⁠.

석빈의 손이 굳었다⁠. 석빈은 조각을 들여다보지도 않고 손으로 쥐었다⁠. 엄지가 깨진 날을 따라 움직였다⁠. 「⁠대전 1022⁠」라는 글씨를 만지지 않고도 아는 손이었다⁠.

“⁠이거 어디서 났어⁠?⁠”

“⁠주아 씨 초크 주머니 안에요⁠. 오버행에⁠.⁠”

석빈은 오래 말이 없었다⁠. 조각을 쥔 손이 무릎 위에서 하얗게 질렸다⁠.

“⁠지난달에 그 애가 왔었어⁠. 돈 많은 집 딸⁠. 혼자 KTX 타고 와서 저 경사로를 내려다보면서 한참 서 있더라⁠. 아빠 회사 서류를 가져왔어⁠. 공장에서 홀드 굳히는 시간을 반으로 줄인 거⁠, 시험해 보니까 볼트 구멍에서 금이 가더라는 거⁠, 대전점 말고도 두 군데서 홀드가 깨졌다는 거⁠. 그리고 내 합의서도⁠.⁠”

“⁠합의서요⁠.⁠”

“⁠이억⁠. 받고 입 다문다는 거⁠. 내가 사고 원인이 내 볼트 탓이라고 인정한다는 거⁠.⁠” 석빈은 조각을 들어 보였다⁠. “⁠나는 조였어⁠. 끝까지 조였고⁠, 손바닥으로 눌러 봤어⁠. 너랑 똑같이⁠. 안 돌았어⁠. 매달려서 몸을 틀었는데 홀드가 깨졌어⁠. 깨진 반쪽이 손에 남은 채로 떨어졌다⁠. 병원에서 깨어 보니까 손에 아직 쥐고 있더라⁠.⁠”

석빈은 조각을 다시 태하의 손에 쥐여 주었다⁠.

“⁠그 애가 증거가 필요하다길래 반쪽에서 조금 떼어 줬어⁠. 나머지는 내가 갖고 있어⁠. 근데 거기까지야⁠.⁠”

“⁠같이 가요⁠. 형사가 있어요⁠. 사건을 끝까지 보겠다는 사람이에요⁠.⁠”

“⁠태하야⁠.⁠” 석빈이 휠체어 바퀴를 손으로 밀어 태하 앞으로 다가왔다⁠. 무릎과 무릎이 닿을 거리였다⁠. “⁠내가 입을 열면 이억을 토해 내야 돼⁠. 그 돈으로 이 집 대출 갚았어⁠. 엄마가 평생 갚던 대출⁠. 경사로도 그 돈으로 깔았고⁠, 이 철봉도⁠. 니가 이억 갚아 줄래⁠?⁠”

태하는 대답하지 못했다⁠.

“⁠못 하지⁠. 니 어깨 수술비도 지 코치님이 냈잖아⁠. 우리는 다 누가 내 준 돈으로 앉아 있어⁠. 나는 이 바퀴 의자에⁠, 너는 오버행에⁠.⁠” 석빈은 바퀴를 뒤로 밀었다⁠. “⁠그 애한테도 똑같이 말했어⁠. 그 애가 그러더라⁠. 오버행 세터가 내 편 들어 줄 거라고⁠. 손이 정직한 사람이라고⁠.⁠”

“⁠제 얘기를 했어요⁠?⁠”

“⁠너 말고 오버행 세터가 또 있냐⁠? 세빈이는 손이 빠르지⁠, 정직하진 않아⁠.⁠” 석빈이 웃었다⁠. 이번에는 문호를 닮지 않은 웃음이었다⁠. “⁠그 애가 「⁠국기 게양⁠」도 해 봤어⁠. 저 철봉에서⁠. 내가 가르쳐 줬거든⁠. 오 초 버티더라⁠. 너보다 오래⁠.⁠”

“⁠주아 씨가 벽에서 그걸 했어요⁠. 사라지기 직전에요⁠. 카메라 앞에서⁠.⁠”

석빈의 얼굴에서 웃음이 내려갔다⁠. 석빈은 철봉을 올려다보았다⁠. 문틀에 끼운 철봉에는 손이 닿는 자리마다 초크가 하얗게 묻어 있었다⁠.

“⁠그럼 나를 가리킨 거네⁠.⁠”

“⁠네⁠.⁠”

“⁠나는 안 간다⁠.⁠” 석빈이 말했다⁠. 목소리가 낮았다⁠. “⁠엄마 집이 날아가⁠. 니가 아무리 쳐다봐도 안 간다⁠. 대신 하나만 말해 줄게⁠. 그 애가 여기서 나가면서 그랬어⁠. 아빠 회사 상장 전에 다 터뜨릴 거라고⁠. 그러면 아빠가 자기를 가만두지 않을 거라고⁠. 그래서 터뜨리기 전에 꼭 맡겨 둘 데가 있다고⁠.⁠”

“⁠어디요⁠?⁠”

“⁠벽에⁠.⁠” 석빈이 말했다⁠. “⁠벽은 아빠가 못 찾는대⁠. 아빠는 벽을 오를 줄 모르니까⁠.⁠”

*

어머니가 현관까지 따라 나와 태하의 손에 비닐봉지를 쥐여 주었다⁠. 묵은지 한 포기가 들어 있었다⁠. 봉지 밖으로 김치 국물 냄새가 새어 나왔다⁠.

“⁠자주 와⁠. 석빈이가 말은 저래도 너 기다렸어⁠. 너 나오는 대회 영상 아직도 찾아봐⁠. 너 이제 대회 안 나가는 거 알면서도⁠.⁠”

태하는 고개를 숙였다⁠. 석빈은 거실에서 다시 철봉에 매달리고 있었다⁠. 서른하나⁠, 서른둘⁠. 숫자 세는 소리가 현관까지 들렸다⁠.

아파트 앞 주차장으로 나오자 검은 차 한 대가 막 들어오고 있었다⁠. 수요일에 철공소 골목에서 엉거주춤 멈췄던 차였다⁠. 차는 석빈의 집 현관 바로 앞⁠, 경사로 아래에 멈췄다⁠. 운전석 문이 열리고 엄팔용이 내렸다⁠. 귀에 꼬불꼬불한 줄이 꽂혀 있었다⁠.

엄팔용은 태하를 보았다⁠. 놀라지 않았다⁠. 태하가 여기 있을 줄 알았던 얼굴이었다⁠. 엄팔용은 태하에게서 눈을 떼고 1층 창문을 올려다보았다⁠. 창 너머에서 석빈의 팔이 철봉 위로 올라갔다가 내려왔다⁠.

태하의 손에서 김치 봉지가 흔들렸다⁠. 태하는 차 쪽으로 걸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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