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5,469자)

세팅실

클라이밍 짐 회원이 실종됐다 · 류시안

목요일 아침⁠, 철공소 골목에 하얀 탑차가 들어왔다⁠. 옆구리에 「⁠한번그립⁠」이라는 글자가 보라색으로 크게 칠해져 있었다⁠. 기사가 짐칸을 열자 상자가 천장까지 차 있었다⁠. 철공소 사장이 쇠막대를 어깨에 멘 채 탑차를 올려다보더니 혀를 찼다⁠.

“⁠저게 다 짱돌이냐⁠? 우리 공장 쇳덩이보다 많네⁠.⁠”

상자는 엘리베이터 없는 계단으로 하나씩 올라왔다⁠. 코치 셋이 날랐고 세빈이 날랐다⁠. 태하도 날랐다⁠. 상자 하나에 홀드가 스무 개쯤 들었고⁠, 들 때마다 안에서 플라스틱 부딪치는 소리가 났다⁠. 세팅실 바닥이 금세 보라색 상자로 덮였다⁠. 원래 쌓여 있던 오버행의 낡은 홀드 통들은 벽 끝으로 밀려났다⁠.

한번 직원이 태블릿을 들고 따라 올라왔다⁠. 스물 후반쯤 되는 남자였고⁠, 보라색 바람막이를 입고 있었다⁠. 직원은 상자마다 사진을 찍고 문호에게 태블릿을 내밀었다⁠. 문호가 손가락으로 서명했다⁠.

나롱이 휴대전화를 들고 상자 하나 앞에 쪼그려 앉았다⁠.

“⁠쌤⁠, 이거 언박싱 하나만 찍을게요⁠. 보라색 상자 열 때 소리가 좋아요⁠. 사각 소리⁠.⁠”

“⁠언박싱은 본사 계정에서만 올리셔야 해요⁠.⁠” 한번 직원이 말했다⁠. “⁠계약서 십사 조에 있습니다⁠.⁠”

나롱은 휴대전화를 내리고 상자에 대고 작게 말했다⁠.

“⁠너도 계약서가 있구나⁠. 나도 있어⁠. 시급 만 천오백 원⁠.⁠”

*

오전 회원이 빠진 열한 시⁠, 태하는 세팅실 바닥에 앉아 상자 하나를 뜯었다⁠. 보라색 홀드들이 비닐에 싸여 있었다⁠. 비닐을 벗기자 새 홀드 특유의 냄새가 올라왔다⁠. 송진과 페인트를 섞은 듯한 냄새였다⁠. 홀드 뒷면마다 둥근 스티커가 붙어 있었다⁠. 「⁠실내암벽협회 안전 인증⁠」

태하는 홀드를 하나씩 손에 쥐었다⁠.

겉으로는 멀쩡했다⁠. 결이 고르고⁠, 색이 고르고⁠, 무게도 고르게 묵직했다⁠. 큰 핀치 홀드를 집었다⁠. 엄지와 네 손가락으로 양옆을 꼬집듯 쥐는 홀드였다⁠. 태하는 두 손바닥 사이에 핀치를 끼우고 천천히 힘을 주었다⁠. 벽에 매달린 사람이 몸무게를 실을 때처럼⁠, 한쪽으로 비틀면서 눌렀다⁠.

손바닥 아래에서 아주 작은 것이 움직였다⁠.

소리는 없었다⁠. 손바닥 피부만 알아차릴 만한 떨림이었다⁠. 태하는 핀치를 뒤집어 볼트 구멍 둘레를 엄지로 쓸었다⁠. 엄지손톱 끝에 가는 턱이 닿았다⁠. 머리카락보다 가는 금이었다⁠. 불빛에 비춰 보아야 겨우 보였다⁠.

태하는 다음 홀드를 집었다⁠. 다음 것도⁠, 또 다음 것도⁠. 스무 개 가운데 셋에서 손바닥이 같은 떨림을 찾아냈다⁠. 셋 다 볼트 구멍 둘레였다⁠. 볼트를 조이면 힘이 가장 많이 몰리는 자리였다⁠.

세팅실 문이 열렸다⁠. 문호였다⁠. 뒤에 세빈이 상자를 안고 서 있었다⁠.

“⁠태하야⁠. 회장님 쪽에서 일정이 왔다⁠. 주말까지 「⁠유턴⁠」 홀드 전부 이걸로 바꾸고⁠, 벽마다 문제 세 개씩 새로 짠다⁠. 축제 전에 오버행 리뉴얼 영상을 찍는대⁠. 한번 가족 첫 짐이라고⁠.⁠”

“⁠이거 못 박아요⁠.⁠”

문호가 태하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태하는 금 간 핀치를 내밀었다⁠.

“⁠볼트 구멍 둘레에 금이 있어요⁠. 스무 개 중에 셋이요⁠. 사람이 매달려서 비틀면 여기서 갈라져요⁠.⁠”

문호는 핀치를 받아 들고 불빛에 이리저리 비추었다⁠. 한참 보았다⁠. 보이지 않았다⁠. 문호의 눈은 홀드의 금을 보는 눈이 아니었다⁠. 무릎을 다치고 은퇴하기 전에도⁠, 문호는 홀드를 손으로 고르지 않고 눈으로 골랐다⁠.

“⁠스티커 붙어 있잖아⁠. 협회 인증⁠.⁠”

“⁠스티커는 손이 아니에요⁠.⁠”

“⁠그럼 협회가 틀렸다는 거냐⁠? 협회 안전위원장이 누군지는 아냐⁠?⁠” 문호가 핀치를 상자에 도로 넣었다⁠. “⁠탁 회장님이야⁠. 올해부터⁠.⁠”

세빈이 안고 있던 상자를 바닥에 내려놓다가 모서리를 떨어뜨렸다⁠. 상자 안에서 홀드들이 부딪쳐 덜그럭거렸다⁠. 세빈은 바로 사과했다⁠.

“⁠죄송해요⁠.⁠”

“⁠너는 왜 사과부터 해⁠?⁠” 문호가 말했다⁠.

“⁠습관이에요⁠.⁠”

태하는 일어서서 문호와 마주했다⁠. 세팅실은 좁았다⁠. 둘 사이에 상자 두 줄이 놓였고⁠, 둘 다 상자를 밟지 않으려고 발끝을 모았다⁠.

“⁠대표님⁠. 대전점 얘기 들으셨죠⁠. 작년 가을에 세터 하나 떨어진 거요⁠.⁠”

“⁠세터가 볼트 덜 조여서 떨어진 거다⁠. 협회 보고서에 그렇게 나왔어⁠.⁠”

“⁠떨어진 게 석빈이에요⁠.⁠”

문호의 얼굴이 굳었다⁠. 하석빈은 태하의 상비군 동기였다⁠. 문호가 국가대표 코치 시절 둘을 같이 가르쳤다⁠. 석빈이 떨어진 뒤로 오버행에서 석빈의 이름을 꺼낸 사람은 없었다⁠.

“⁠석빈이는 볼트를 덜 조이는 놈이 아니에요⁠. 대표님도 아시잖아요⁠.⁠”

“⁠알지⁠.⁠” 문호가 말했다⁠. 목소리가 갈라졌다⁠. “⁠아는데⁠, 석빈이는 합의했다⁠. 합의한 일을 왜 네가 다시 꺼내⁠?⁠”

“⁠이걸 제 손으로 박으라고 하시니까요⁠.⁠”

“⁠네 손으로 안 박아도 돼요⁠.⁠” 문호의 말끝에 존댓말이 섞였다⁠. 문호는 태하 너머 세빈을 보았다⁠. “⁠볼트는 네가 안 박아도 박을 사람 있어⁠.⁠”

세빈의 손이 상자 테이프 위에서 멈췄다⁠.

*

오후에는 「⁠한번⁠」 앱에서 알림이 왔다⁠. 오버행 회원 전부의 휴대전화가 거의 동시에 울렸다⁠. 「⁠오버행 by 한번 — 프리미엄 회원 전환 안내⁠. 지금 가입하시면 축제 VIP 체험 우선 예약⁠!⁠」 축제 VIP 체험은 한 번에 오십만 원이었다⁠. 18미터 유리 벽을 개막 직후 한 시간 동안 소수만 오른다고 했다⁠.

철공소 사장이 작업복 차림으로 데스크에 와서 휴대전화를 내밀었다⁠. 한번 직원이 아직 데스크 옆에 서 있었다⁠.

“⁠이봐요⁠. 프리미엄이 되면 뭐가 달라져⁠?⁠”

“⁠샤워실 어메니티가 바뀌고요⁠, 전용 라커와⁠, 회원 등급별 초크가 제공됩니다⁠.⁠”

“⁠등급별 초크⁠?⁠”

“⁠프리미엄 회원님께는 미세 입자 초크를 드립니다⁠.⁠”

사장은 제 초크 주머니를 열어 안을 들여다보았다⁠. 공장 기름이 섞여 회색이 된 초크가 반쯤 남아 있었다⁠.

“⁠이게 미세 입자가 아니면 뭐냐⁠? 내 거는 쇳가루까지 들었어⁠. 이게 진짜 프리미엄이지⁠.⁠”

나롱이 데스크 아래에서 웃음을 참다가 기침을 했다⁠. 한번 직원은 웃지 않고 태블릿에 무언가를 적었다⁠. 사장은 휴대전화를 주머니에 넣고 초록 문제로 걸어가 두 번째 홀드에서 또 떨어졌다⁠. 매트에 누운 채로 말했다⁠.

“⁠프리미엄 되면 저 짱돌 좀 덜 미끄럽게 해 주나⁠?⁠”

*

저녁 일곱 시⁠, 해람에게서 전화가 왔다⁠. 뒤에서 복사기 돌아가는 소리가 들렸다⁠.

“⁠원본 영상 받았어요⁠. 위에서는 내일 종결 검토 들어간대요⁠. 본인 의사 확인⁠, 범죄 혐의 없음⁠.⁠”

“⁠무릎은요⁠?⁠”

“⁠그 얘기 하려고 전화했어요⁠.⁠” 해람이 숨을 한 번 쉬었다⁠. “⁠어머님한테 영상 보여 드렸거든요⁠. 어머님이 그러시더라고요⁠. 주아는 긴장하면 손톱을 뜯지⁠, 무릎은 안 누른대요⁠. 열두 해 떨어져 살았어도 그건 안대요⁠.⁠”

“⁠아빠는 안다던데요⁠. 무릎 누르는 버릇⁠.⁠”

“⁠한쪽은 거짓말을 하는 거죠⁠.⁠” 해람이 말했다⁠. “⁠공태하 씨⁠, 영상 속 벽 보셨어요⁠? 나무 홀드요⁠. 그런 벽 어디서 만드는지 알아요⁠?⁠”

“⁠주문 제작이에요⁠. 나무 홀드는 비싸서 짐에서는 잘 안 써요⁠. 개인 집에 다는 사람들이 써요⁠.⁠”

“⁠개인 집이요⁠.⁠”

해람은 이 말을 한 번 더 따라 하고 전화를 끊었다⁠. 끊기 직전에 복사기에 종이가 끼어 삑삑 울었고⁠, 해람이 “⁠또야⁠” 하고 혼잣말을 하는 소리가 들렸다⁠.

*

여덟 시 반⁠, 45도 벽에서 드릴 소리가 났다⁠.

세빈이 사다리에 올라가 「⁠유턴⁠」 꼭대기 홀드를 풀고 있었다⁠. 사다리 아래에 한번그립 상자가 열려 있었다⁠. 세빈은 보라 홀드를 떼어 상자 옆에 내려놓고⁠, 새 보라 홀드를 벽에 대고 볼트를 손으로 돌려 끼웠다⁠.

“⁠내려와⁠.⁠”

세빈이 돌아보았다⁠. 드릴을 든 손이 떨렸다⁠.

“⁠대표님이 꼭대기부터 하래요⁠. 슬로퍼는 놔두고요⁠. 그건 손대지 말래요⁠.⁠”

“⁠왜 슬로퍼는 놔둬⁠?⁠”

“⁠모르죠⁠. 저는 시키는 거 하는 거예요⁠.⁠” 세빈은 볼트를 반쯤 돌리다 멈췄다⁠. “⁠형⁠, 저 이번 달 월세 아직 못 냈어요⁠. 느낌표 네 개 왔어요⁠. 네 개는 처음이에요⁠.⁠”

태하는 사다리 다리를 잡았다⁠. 흔들지 않고 붙잡기만 했다⁠.

“⁠그거 뒤집어 봐⁠. 볼트 구멍 둘레⁠.⁠”

세빈이 홀드를 떼어 뒤집었다⁠. 엄지로 볼트 구멍 둘레를 쓸었다⁠. 세빈의 엄지가 멈췄다⁠. 세빈도 세터였다⁠. 손이 먼저 알았다⁠.

“⁠…있네요⁠.⁠”

“⁠박을 거야⁠?⁠”

세빈은 홀드를 든 채 사다리 위에서 오래 내려오지 않았다⁠. 그러다 금 간 홀드를 상자에 넣고⁠, 원래 꼭대기 홀드를 다시 벽에 대고 조였다⁠. 내려와서 사다리를 접으며 태하를 보지 않고 말했다⁠.

“⁠대표님한테는 내일 한다고 할게요⁠.⁠”

“⁠내일도 박지 마⁠.⁠”

“⁠형은 쉽죠⁠.⁠” 세빈이 처음으로 사과 없이 말했다⁠. “⁠형은 대표님한테 수술비 빚졌어도 대표님이 형 좋아하잖아요⁠. 저는 아니에요⁠.⁠”

세빈은 사다리를 어깨에 메고 세팅실로 들어갔다⁠.

밤 열 시⁠, 회원이 다 빠지고 나서 태하는 매트에 누워 사십칠 초를 다시 틀었다⁠. 휴대전화를 얼굴 위로 들었다⁠. 몇 번을 봐도 주아의 손바닥이 슬로퍼를 누르는 자리에서 눈이 멈췄다⁠. 이번에는 일부러 누르기가 끝난 다음을 보았다⁠.

슬로퍼에서 손을 떼고 내려온 주아는 작은 크림프에 왼손을 걸었다⁠. 다음 발 홀드로 내려가려면 몸을 오른편으로 틀어야 했다⁠. 주아는 반대로 틀었다⁠. 오른손을 왼손 너머로 건너 뻗어 벽을 짚고⁠, 온몸을 왼편으로 돌렸다⁠. 엉덩이가 벽에서 떨어졌고 얼굴이 벽 밖을 향했다⁠. 「⁠유턴⁠」에는 없는 동작이었다⁠. 돌아누운 그대로 주아는 이 초쯤 머물렀다가 다시 몸을 바로 했다⁠.

태하는 일어나 벽 앞에 섰다⁠. 크림프까지 올라가 왼손 첫 마디를 걸었다⁠. 크림프가 손가락 끝을 파고들었다⁠. 오른손을 왼손 너머로 건너 벽을 짚었다⁠. 몸을 왼편으로 돌렸다⁠. 어깨가 비명을 질렀다⁠. 수술한 자리 안쪽에서 무언가 팽팽하게 당겨졌다⁠.

돌아누운 태하의 얼굴 앞에 세팅실 문이 있었다⁠.

문 위쪽에 손바닥만 한 유리창이 있었고⁠, 유리창 너머로 세팅실 안의 형광등 불빛이 보였다⁠. 이 높이⁠, 이 각도에서만 유리창 안이 들여다보였다⁠. 매트에 서서 보면 유리창에는 천장만 비쳤다⁠. 유리창 너머 정면에 파란 플라스틱 통이 놓여 있었다⁠. 주인 없는 초크 주머니 통이었다⁠. 회원들이 두고 가서 몇 달째 아무도 찾아가지 않은 초크 주머니를 모아 두는 통⁠.

태하는 손을 놓고 매트로 떨어졌다⁠. 어깨를 감싸 쥐고 한동안 일어나지 못했다⁠. 숨을 고르고 나서 세팅실로 들어갔다⁠.

통 안에 초크 주머니가 서른 개쯤 엉켜 있었다⁠. 검은 것⁠, 남색 것⁠, 해골 무늬⁠, 고양이 모양⁠, 누가 버린 줄도 모를 낡은 것들⁠. 맨 아래에서 분홍색이 손에 닿았다⁠. 원통형의 작은 주머니였다⁠. 입구를 조이는 끈에 은색 고리가 달려 있었다⁠. 주아가 늘 허리 뒤에 차고 다니던 주머니였다⁠.

주머니 안에 초크가 반쯤 차 있었다⁠. 태하는 손가락을 넣었다⁠. 마른 가루가 손가락 사이로 흘렀다⁠. 바닥 가까이에서 손끝에 딱딱한 것이 닿았다⁠.

꺼내 보니 홀드 조각이었다⁠. 손바닥 반만 한 크기였고⁠, 한쪽 가장자리가 날카롭게 깨져 있었다⁠. 보라색이었다⁠. 깨진 단면은 안쪽이 희끗하고 거칠었다⁠. 덜 굳은 수지가 깨질 때 생기는 단면이었다⁠. 뒷면에 공장에서 찍은 글자가 반쯤 남아 있었다⁠. 「⁠한번그⁠」 글자 아래로 누군가 검은 매직으로 적어 둔 숫자가 있었다⁠. 「⁠대전 1022⁠」

작년 10월 22일⁠. 석빈이 떨어진 날이었다⁠.

태하는 조각을 손바닥에 올려놓았다⁠. 깨진 날이 손금을 따라 차갑게 닿았다⁠. 세팅실 밖에서 계단 내려가는 발소리가 났다⁠. 세빈이었다⁠. 퇴근한다던 세빈이 아직 짐에 남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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