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5,312자)

거꾸로

클라이밍 짐 회원이 실종됐다 · 류시안

밤 열한 시⁠, 마지막 회원이 나가고 셔터를 반쯤 내리자 짐은 소리가 줄었다⁠. 아래층 철공소도 기계를 멈췄고⁠, 들리는 것은 채광창에 부딪히는 바람과 냉장고 모터뿐이었다⁠. 태하는 휴대전화를 매트 위에 세워 두고 사십칠 초를 다시 틀었다⁠. 네 배속 화면 속에서 주아가 슬로퍼에 손바닥을 펴 대고⁠, 이마를 벽에 대고⁠, 거꾸로 내려와 신발을 벗었다⁠. 열 번을 보고 나서 태하는 「⁠유턴⁠」 앞에 섰다⁠.

오르는 길은 손이 외우고 있었다⁠. 두 손 스타트⁠, 오른발을 높이 올려 무릎을 벽 안으로 꺾고⁠, 왼손으로 작은 크림프를 집는다⁠. 크림프는 손가락 첫 마디만 겨우 걸리는 얇은 홀드다⁠. 거기서 몸을 틀어 큰 보라 슬로퍼를 덮고⁠, 슬로퍼를 지나 꼭대기까지 세 번 더 뻗는다⁠. 태하는 꼭대기 홀드를 두 손으로 잡았다⁠. 여기까지는 어제 주아가 한 그대로였다⁠.

내려가는 길은 손이 몰랐다⁠.

오른발을 아래로 내리자 발끝이 허공을 더듬었다⁠. 위에서 볼 때는 발 홀드가 보이지 않았다⁠. 벽이 앞으로 기울어 있어서⁠, 내려다보면 제 배와 벽 사이의 그늘밖에 없었다⁠. 태하는 올라올 때 디딘 자리를 떠올려 발을 놓았다⁠. 미끄러졌다⁠. 다시 놓았다⁠. 손끝에 몸무게가 몰리면서 어깨 안쪽이 찡하게 당겼다⁠. 수술한 자리였다⁠.

슬로퍼까지 내려왔다⁠. 주아는 여기서 왼손 하나로 매달렸다⁠. 태하도 오른손을 떼어 보았다⁠. 왼손바닥 전체가 둥근 홀드에 붙었고⁠, 몸이 오른쪽으로 천천히 돌았다⁠. 오 초를 못 버티고 오른손을 다시 붙였다⁠.

그리고 이상한 것을 느꼈다⁠.

슬로퍼가 손바닥을 긁었다⁠. 세 해 동안 닦아 온 홀드였다⁠. 세척 통에 넣고 솔로 문지르기를 수십 번⁠, 결이 닳아 겉은 맨들맨들했고 가운데에만 고운 모래 같은 결이 남아 있었다⁠. 지금 손바닥 밑의 홀드는 결이 고르고 날이 서 있었다⁠. 갓 찍어 낸 홀드의 결이었다⁠.

태하가 손을 고쳐 쥐려는 순간 왼손이 빠졌다⁠. 몸이 뒤로 떨어졌고⁠, 누군가 등을 받쳤다⁠. 세빈이었다⁠. 두 팔을 벌려 태하의 허리를 받아 매트에 굴렸다⁠.

“⁠죄송해요⁠, 너무 세게 잡았죠⁠.⁠”

“⁠네가 왜 아직 있어⁠?⁠”

“⁠홀드 닦느라고요⁠. 세척 통이 밀려서요⁠.⁠” 세빈은 고무장갑을 벗으며 웃었다⁠. 웃음이 짧았다⁠. “⁠형⁠, 영상 보면서 하는 거예요⁠? 주아 씨 거⁠?⁠”

태하는 일어나 슬로퍼를 손으로 쓸었다⁠.

“⁠이거 오늘 만졌어⁠?⁠”

“⁠아⁠, 네⁠. 아까 낮에 떼서 닦았어요⁠. 초크가 떡져서요⁠. 새 솔 뜯어서 박박 닦았더니 결이 살아났죠⁠? 제가 원래 손목 스냅이 좋아요⁠.⁠”

세빈은 손목을 털어 보였다⁠. 태하는 손바닥을 슬로퍼에 펴 대고 눌렀다⁠. 홀드는 돌지 않았다⁠. 볼트도 단단했다⁠. 결만 낯설었다⁠.

“⁠솔 바꿨으면 말을 하지⁠.⁠”

“⁠죄송해요⁠.⁠”

세빈이 바나나를 하나 까서 내밀었다⁠. 태하는 받지 않았다⁠. 세빈은 제 손에 든 바나나를 한참 내려다보다가 한 입에 반을 먹었다⁠.

*

새벽 한 시⁠, 태하는 철공소 골목 끝의 반지하 방에 누워 천장을 보았다⁠. 손바닥이 아직 따끔했다⁠. 날 선 결에 긁힌 자리였다⁠. 손을 펴서 형광등에 비춰 보자 손금 사이로 초크가 하얗게 남아 있었다⁠. 비누로 세 번을 씻어도 초크는 손금에서 다 빠지지 않았다⁠.

지난달 세팅 체험 날⁠, 주아는 세 시간 내내 질문을 했다⁠. 볼트는 왜 손으로 먼저 돌려요⁠? 렌치는 언제 써요⁠? 홀드가 돌면 어떻게 돼요⁠? 태하는 짧게 대답했다⁠. 손으로 먼저 돌려야 나사산이 안 망가진다⁠. 렌치는 마지막에 쓴다⁠. 홀드가 돌면 사람이 떨어진다⁠.

“⁠그럼 세터님은 홀드가 안 도는 걸 어떻게 알아요⁠?⁠”

태하는 막 조인 홀드에 손바닥을 펴 대고 눌러 보였다⁠. 손바닥 전체로 홀드를 벽 쪽으로 밀고⁠, 조금 비틀어 본다⁠. 돌지 않으면 손을 뗀다⁠. 주아가 따라 했다⁠. 손바닥이 작아서 홀드 반밖에 덮지 못했다⁠.

“⁠이거 좋다⁠. 꼭 ‘⁠여기 있어⁠’ 하고 도장 찍는 것 같아요⁠.⁠”

“⁠도장 아니에요⁠. 확인이에요⁠.⁠”

“⁠세터님은 농담을 돈 받고 하세요⁠?⁠”

“⁠백이십만 원에 농담은 없어요⁠.⁠”

주아는 웃었고⁠, 체험이 끝날 때까지 렌치를 한 번도 놓지 않았다⁠. 체험이 끝나고 장비를 정리할 때 주아는 육각 렌치 하나를 손에 쥔 채로 물었다⁠. 이거 하나 사 가도 돼요⁠? 태하는 데스크에서 파는 물건이 아니라고 했다⁠. 주아는 렌치를 든 손을 공구함 위로 가져갔다⁠. 넣는 것을 태하는 보지 못했다⁠. 넣었다고 믿었을 뿐이었다⁠.

태하는 휴대전화를 켜서 사십칠 초를 한 번 더 틀었다⁠. 슬로퍼 옆에서 오래 움직이던 주아의 오른손이 화면에서는 흐린 덩어리로만 보였다⁠. 렌치를 쥔 손일 수도 있었다⁠.

태하는 일어나 앉았다⁠. 세팅실 공구함의 육각 렌치는 열두 개였다⁠. 하나가 비어 있는지⁠, 아침에 가서 확인하기로 했다⁠.

*

아침 일곱 시⁠, 세팅실 공구함을 연 태하는 렌치 꽂이 하나가 비어 있는 것을 보았다⁠. 4밀리 육각 렌치였다⁠. 「⁠유턴⁠」의 볼트는 전부 이 크기였다⁠. 태하는 빈 꽂이에 손가락을 넣어 보았다⁠. 먼지가 앉지 않은 자리였다⁠.

열한 시⁠, 구두 소리가 계단을 올라왔다⁠.

회색 코트를 입은 여자가 데스크 앞에 섰다⁠. 마흔 중반쯤이었고⁠, 서류 봉투를 옆구리에 끼고 있었다⁠. 경찰 신분증을 꺼내 데스크에 놓았다⁠. 실종수사팀 금해람⁠.

“⁠탁주아 씨 실종 신고 건으로 왔습니다⁠. 어머님이 어젯밤에 내셨어요⁠.⁠”

나롱이 신분증과 해람의 얼굴을 번갈아 보더니 해람의 발밑을 가리켰다⁠.

“⁠형사님⁠, 신발이요⁠.⁠”

“⁠네⁠?⁠”

“⁠매트는 신발 벗고 올라가셔야 돼요⁠. 구두 굽이 매트에 구멍 내요⁠. 그 매트 한 장이 제 넉 달 치예요⁠.⁠”

해람은 매트 끝에 걸친 제 구두를 내려다보고⁠, 한 걸음 물러섰다⁠. 그리고 진지한 얼굴로 물었다⁠.

“⁠이 가게는 비싼 게 다 알바비로 계산되나요⁠?⁠”

“⁠그게 제일 와닿아서요⁠.⁠”

문호가 대표실에서 나왔다⁠. 무릎을 끌며 데스크까지 와서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태하는 리드벽에서 회원의 줄을 잡아 주다가 줄을 코치에게 넘기고 데스크로 걸어갔다⁠.

“⁠주아 씨가 마지막으로 여기 온 게 언제죠⁠?⁠” 해람이 물었다⁠.

“⁠일요일 저녁입니다⁠. 새 문제를 첫 번에 올라서⁠, 회원들이 박수도 쳤어요⁠. 여덟 시쯤 나갔습니다⁠.⁠”

“⁠그 뒤로는요⁠?⁠”

“⁠안 왔습니다⁠. 저희는 열한 시에 닫습니다⁠.⁠”

“⁠심야 이용권이라는 게 있던데요⁠. 어머님 말씀이⁠, 따님이 앱으로 자주 샀다고⁠.⁠”

“⁠그날은 쓰지 않았습니다⁠.⁠”

“⁠카메라는요⁠?⁠”

“⁠45도 벽 카메라가 그날 고장이었어요⁠. 오래된 기계라서요⁠.⁠”

문호의 목소리는 낮고 느렸다⁠. 한 번도 머뭇거리지 않았다⁠. 해람이 수첩에 무언가를 적다가 고개를 들었다⁠. 눈길이 문호의 어깨 너머⁠, 다가오는 태하에게 멈췄다⁠.

“⁠이분은요⁠?⁠”

“⁠세터입니다⁠. 문제 짜는 사람이요⁠.⁠” 문호가 대신 대답했다⁠. “⁠태하야⁠, 들어가 일 봐⁠.⁠”

태하는 들어가지 않았다⁠. 데스크 모서리에 손을 짚었다⁠. 손바닥에 묻은 초크가 검은 상판에 하얗게 찍혔다⁠.

“⁠왔어요⁠. 새벽 한 시 십 분에⁠.⁠”

문호가 태하를 보았다⁠. 이번에는 똑바로 보았다⁠.

“⁠태하야⁠.⁠”

“⁠두 시 사십일 분에 뒷문 방향으로 나갔어요⁠. 신발은 벽 밑에 두고요⁠.⁠” 태하는 휴대전화를 꺼내 해람 앞에 놓았다⁠. “⁠카메라는 고장이 아니었어요⁠. 대표님이 어제 점심때 지웠어요⁠. 제 앞에서요⁠. 지우기 전에 이만큼 찍었어요⁠.⁠”

데스크 뒤의 나롱이 숨을 들이켰다⁠. 리드벽 아래 코치가 줄을 잡은 채 고개를 돌렸다⁠. 문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무릎을 짚은 손등에 핏줄이 올라왔다⁠.

해람은 휴대전화를 들어 사십칠 초를 보았다⁠. 한 번 보고⁠, 소리를 끄고 한 번 더 보았다⁠.

“⁠이 손바닥 펴서 누르는 거⁠, 뭐예요⁠?⁠”

“⁠볼트 다 조이고 홀드가 도는지 보는 거예요⁠. 세터들이 해요⁠. 제가 주아 씨한테 가르쳤어요⁠.⁠”

“⁠왜 가르쳤어요⁠?⁠”

“⁠백이십만 원 냈거든요⁠.⁠”

해람이 눈썹을 올렸다가 다시 화면을 보았다⁠.

“⁠대표님⁠. 원본 지우셨어요⁠?⁠”

“⁠고장 난 파일이라 정리했습니다⁠.⁠” 문호의 대답에는 이제 존댓말만 남았다⁠. “⁠형사님⁠. 주아 씨는 성인입니다⁠. 아버님이 조용히 찾고 계시고요⁠. 우리 같은 작은 짐이 회원 사생활을 떠들어서 좋을 게 없어서 그랬습니다⁠.⁠”

“⁠그건 제가 판단할게요⁠.⁠” 해람은 휴대전화를 태하에게 돌려주었다⁠. “⁠이 영상 저한테 보내 주세요⁠. 그리고 분실물이라는 신발⁠, 주세요⁠.⁠”

*

문호가 대표실에서 분홍 암벽화를 들고 나왔다⁠. 해람은 증거물 봉투에 신발을 넣다가⁠, 봉투 입구에서 손을 멈췄다⁠.

“⁠한 짝에만 초크가 많네요⁠.⁠”

태하가 봉투 안을 들여다보았다⁠. 오른발 앞코에 하얀 가루가 두껍게 묻어 있었다⁠. 오른손으로 초크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내 오래 만지는 동안⁠, 오른발 앞코를 슬로퍼 옆 작은 발 홀드에 박고 버틴 자국이었다⁠.

“⁠오른손으로 뭘 했어요⁠. 벽 옆에서⁠. 삼 분 넘게요⁠.⁠”

“⁠뭘요⁠?⁠”

“⁠모르겠어요⁠.⁠”

해람은 봉투를 봉하고⁠, 매트 끝까지 걸어가 「⁠유턴⁠」을 올려다보았다⁠. 구두를 벗고 스타킹 바람으로 매트에 올라서더니⁠, 첫 두 홀드를 두 손으로 잡았다⁠. 엉덩이가 매트에서 한 뼘도 뜨지 않았다⁠. 해람은 그대로 잡은 채 태하를 돌아보았다⁠.

“⁠이게 운동이에요⁠, 고문이에요⁠?⁠”

“⁠처음엔 다 그래요⁠.⁠”

“⁠따님은 이걸 거꾸로 내려왔다는 거죠⁠?⁠”

“⁠네⁠.⁠”

해람이 손을 놓고 매트에 주저앉았다⁠. 코트 자락이 초크 범벅이 되었다⁠. 나롱이 이 꼴을 찍으려고 휴대전화를 들었다가 해람의 눈과 마주치고 내렸다⁠.

“⁠공태하 씨⁠.⁠” 해람이 낮게 말했다⁠. “⁠솔직하게 말할게요⁠. 성인 실종은 범죄 정황이 없으면 본인 의사가 먼저예요⁠. 오늘 아침에 아버님 회사에서 우리 서장님한테 먼저 전화가 왔어요⁠. 딸이 쉬러 간 거니까 조용히 해 달라고요⁠. 저는 이 영상이랑 신발로 버텨야 해요⁠.⁠”

“⁠버티면요⁠?⁠”

“⁠버티는 데까지는 가 보는 거죠⁠.⁠”

해람은 구두를 신고 계단을 내려갔다⁠. 문호는 데스크에서 해람의 뒷모습을 끝까지 보다가 태하에게 한마디도 하지 않고 대표실로 들어갔다⁠. 문이 닫혔다⁠. 문호가 대표실 문을 닫는 것을 태하는 처음 보았다⁠.

*

밤 아홉 시⁠, 세빈이 먼저 퇴근하겠다고 했다⁠. 월세 이야기를 또 했고⁠, 나롱은 형사님 영상을 못 찍은 것을 세 번 한탄했다⁠. “⁠주가가 오르는 순간을 놓친 기분이에요⁠. 형사님 엉덩이 주가요⁠.⁠” 코치 하나가 웃다가 허리를 잡았다⁠.

태하는 혼자 남아 다시 슬로퍼에 손을 얹었다⁠. 결이 손바닥을 긁었다⁠. 새 솔로 닦으면 결이 살아난다는 말은 맞는 말이었다⁠. 다만 세 해 동안 닦아 낸 결은 솔 하나로 돌아오지 않았다⁠.

휴대전화가 울렸다⁠. 모르는 번호였다⁠.

“⁠공태하 씨죠⁠.⁠” 남자 목소리가 정중했다⁠. 말끝을 부드럽게 내렸다⁠. “⁠탁휘준입니다⁠. 주아 아빠예요⁠. 우리 딸이 좋아하던 문제를 짜신 분이라고 들었습니다⁠. 좋은 문제라고요⁠.⁠”

태하는 대답하지 못했다⁠. 손바닥이 아직 슬로퍼 위에 있었다⁠.

“⁠딸 얘기는 형사님 말고 나랑 합시다⁠. 내일 오전 열 시⁠, 오버행에서 뵙겠습니다⁠. 지 대표님한테는 내가 말해 둘게요⁠.⁠”

전화가 끊겼다⁠. 태하는 휴대전화를 내려놓고 슬로퍼를 쥔 손에 힘을 주었다⁠. 날 선 결이 손금 사이로 파고들었다⁠.

2화는 어땠나요?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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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명지후2026.10.31· 2화

    네 배속 화면 속 사십칠 초를 계속 돌려 보는 장면, 무서운데 눈을 못 떼겠어요.

    • 류시안작가2026.11.01

      태하 씨는 벽 앞에서 사람 손 모양을 읽는 사람이에요. 그 사십칠 초 안에 주아 씨가 남긴 게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