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5,323자)

분홍 암벽화

클라이밍 짐 회원이 실종됐다 · 류시안

아침 일곱 시⁠, 셔터를 올리자 쇠 냄새가 먼저 들어왔다⁠. 아래층 철공소는 아직 불을 켜지 않았지만⁠, 밤새 식은 선반 기계와 절삭유 냄새가 계단을 타고 3층까지 올라와 있었다⁠. 공태하는 신발장 앞에서 운동화를 벗고 맨발로 매트를 밟았다⁠. 12월의 매트는 차가웠다⁠. 천장 채광창으로 들어온 빛이 45도 경사벽을 비스듬히 갈랐고⁠, 빛이 닿은 자리마다 초크 먼지가 느리게 떠다녔다⁠.

태하는 늘 하던 대로 벽부터 손으로 훑었다⁠. 손바닥을 홀드에 대고 가볍게 눌러 보면 밤사이 일이 대개 다 나왔다⁠. 땀이 마른 초크는 꺼슬했고⁠, 새로 찍힌 초크는 가루가 손금에 묻어났다⁠. 어제 저녁 마감 때 태하가 솔로 닦아 둔 보라색 홀드들에 하얀 손자국이 찍혀 있었다⁠. 작은 손이었다⁠. 손가락이 가늘고 길어서⁠, 태하가 손을 겹치면 손가락 끝이 한 마디씩 남았다⁠.

보라 홀드 아홉 개⁠, 태하가 지난주에 짜서 어제 처음 연 문제 「⁠유턴⁠」이었다⁠.

가운데 고비의 큰 보라 슬로퍼에는 손바닥 두 개가 나란히 찍혀 있었다⁠. 손가락을 활짝 편 자국이었다⁠. 슬로퍼는 손가락을 걸 데가 없는 둥근 홀드라 손바닥 전체로 마찰을 붙여야 하는데⁠, 이렇게 손가락을 다 펴고 오래 누른 자국은 처음 보았다⁠. 초크가 진하게 뭉친 자리를 엄지로 문지르자 아직 덜 마른 습기가 느껴졌다⁠.

그러다 매트 구석의 분홍색이 눈에 들어왔다⁠.

암벽화 한 켤레가 벽 바로 아래에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앞코가 벽을 향했고⁠, 끈이 풀린 채였다⁠. 태하는 쪼그려 앉아 신발을 들지 않고 내려다보았다⁠. 이탈리아 공방에서 발을 본떠 맞췄다는 분홍 암벽화⁠. 데스크 알바 봉나롱이 「⁠우리 알바비 석 달 치⁠」라고 이름표를 붙여 놀리던 신발이었다⁠. 주인은 신발을 한 번도 짐에 두고 간 적이 없었다⁠. 땀 찬 신발을 매트에 벗어 두면 냄새가 밴다며⁠, 늘 끈끼리 묶어 가방 옆에 매달고 다녔다⁠.

*

어제 저녁⁠, 탁주아는 「⁠유턴⁠」을 첫 시도에 올랐다⁠.

나롱이 휴대전화를 들고 따라다녔다⁠. 주아가 마지막 홀드를 두 손으로 잡자 나롱이 비명을 질렀고⁠, 회원 몇이 박수를 쳤다⁠. 주아는 매트로 뛰어내려 초크 묻은 손으로 앞머리를 넘기고⁠, 곧장 태하에게 걸어왔다⁠.

“⁠이거 거꾸로 내려와도 되게 짜셨죠⁠?⁠”

“⁠내려오는 건 문제가 아니에요⁠. 다 오르면 끝이에요⁠.⁠”

“⁠제가 보기엔 내려오는 게 더 어려워요⁠.⁠” 주아는 웃다가 목소리를 낮췄다⁠. “⁠내일 아침 일곱 시에 이거 같이 한 번 봐 줄래요⁠? 할 말이 있어요⁠.⁠”

태하는 솔을 들고 있었다⁠. 지난달 주아는 체험 예약 앱 「⁠한번⁠」으로 일대일 세팅 체험을 샀다⁠. 세 시간에 백이십만 원⁠. 태하가 받은 것은 수당 팔만 원이었다⁠. 볼트 조이는 법과⁠, 조인 홀드에 손바닥을 펴 대고 눌러 보는 법을 가르쳐 주었고⁠, 주아는 이 동작을 몇 번이고 따라 했다⁠.

“⁠레슨은 데스크에서 예약하세요⁠.⁠”

주아의 얼굴에서 웃음이 반쯤 내려갔다가 다시 올라왔다⁠.

“⁠네⁠, 세터님⁠.⁠”

나롱의 휴대전화는 이 대화까지 다 담았다⁠. 영상은 밤사이 삼십만 회를 넘겼다⁠.

*

여덟 시 반⁠, 나롱이 계단을 뛰어 올라왔다⁠. 목도리를 풀기도 전에 휴대전화부터 내밀었다⁠.

“⁠쌤⁠, 삼십만이요⁠. 삼십만⁠. 제 계정 인생 그래프가 오버행이에요⁠, 45도로 꺾였어요⁠.⁠”

“⁠올라간 거야⁠, 떨어진 거야⁠?⁠”

“⁠올라간 거죠⁠. 댓글 보세요⁠.⁠”

화면에 글자가 줄줄이 흘렀다⁠. 「⁠언니 손 왜 이렇게 예뻐요⁠」 「⁠저 세터 표정 뭔데 레슨 예약하래 ㅋㅋㅋ⁠」 「⁠신발 얼마예요⁠? 아 묻지 말걸⁠」 마지막 댓글 아래에는 누군가 「⁠이탈리아 수제 280만⁠」이라고 달아 두었다⁠. 나롱이 자랑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석 달 치라고 했잖아요⁠. 틀렸어요⁠. 넉 달 치예요⁠.⁠”

아홉 시에는 아래층 철공소 사장이 출근 전에 들렀다⁠. 십 년째 같은 난이도에 머무는 사람이었다⁠. 사장은 작업복 위에 초크 주머니를 차고 초록 홀드 문제에 매달렸다가 두 번째 홀드에서 떨어졌다⁠. 매트에 엉덩방아를 찧고 누운 채로 말했다⁠.

“⁠태하야⁠, 저 짱돌 누가 미끄럽게 갈아 놨냐⁠?⁠”

“⁠사장님 손이 미끄러운 거예요⁠.⁠”

“⁠쇠 깎는 손이야⁠. 기름이 빠지질 않아⁠.⁠” 사장은 일어나 바지를 털다가 분홍 신발을 보았다⁠. “⁠저거 그 아가씨 거 아니냐⁠? 돈 많은 집 딸⁠.⁠”

태하는 대답하지 않았다⁠.

*

열 시⁠, 대표 지문호가 계단을 올라왔다⁠. 왼쪽 무릎을 펴지 않고 끌듯이 디뎠다⁠. 국가대표 시절 대회 결승에서 착지하다 꺾인 무릎이었다⁠. 문호는 데스크 앞에 직원들을 불러 세웠다⁠. 코치 셋과 세빈과 나롱⁠, 그리고 태하⁠. 코치 셋은 각각 손가락 인대와 허리와 발목을 다쳐 선수를 접은 사람들이었다⁠.

“⁠주아 씨가 어젯밤부터 연락이 안 된단다⁠.⁠”

나롱이 입을 막았다⁠. 문호는 손을 들어 나롱을 멈췄다⁠.

“⁠아버님 쪽에서 조용히 찾는다고 하셨다⁠. 경찰에도 아직 안 갔고⁠, 크게 만들지 말아 달래⁠. 그러니까 우리는 아무것도 모른다⁠. 회원이 물어도 모르고⁠, 기자가 물어도 모른다⁠. 나롱이 영상 내려⁠.⁠”

“⁠삼십만인데요⁠.⁠”

“⁠내려⁠.⁠”

나롱이 휴대전화를 쥔 손을 내렸다⁠. 화면 속에서는 하트가 아직도 하나씩 떠오르고 있었다⁠. 세빈은 문호의 발끝만 보고 있었다⁠. 평소처럼 바나나를 까 들고 있었는데 한 입도 먹지 않았다⁠.

태하가 입을 열었다⁠.

“⁠어젯밤에 왔어요⁠. 주아 씨⁠.⁠”

모두가 태하를 보았다⁠. 문호는 보지 않았다⁠.

“⁠벽에 손자국이 있어요⁠. 마감 때 제가 다 닦았어요⁠. 신발도 저기 있고요⁠. 주아 씨가 그 신발을 두고 갈 사람이 아니에요⁠.⁠”

문호가 그제야 고개를 돌렸다⁠. 매트 구석으로 걸어가⁠, 무릎을 굽히지 못해 허리를 숙인 채 분홍 신발을 집어 들었다⁠. 끈 두 짝을 손가락에 감아 들고 돌아왔다⁠.

“⁠분실물이다⁠.⁠”

“⁠대표님⁠.⁠”

“⁠분실물은 대표실에 둔다⁠. 태하야⁠, 잠깐 따라와⁠.⁠”

문호는 45도 벽 앞에 멈췄다⁠. 직원들의 귀가 닿지 않을 거리였다⁠. 채광창의 빛이 벽을 넘어가 두 사람의 발치에 고였다⁠.

“⁠너 이 벽 누가 세웠는지 알지⁠?⁠”

“⁠대표님이요⁠.⁠”

“⁠탁 회장님 돈으로 세웠다⁠. 리드벽도⁠, 채광창도⁠, 코치들 월급도⁠. 작년 겨울에 은행이 대출 끊었을 때 우리가 어떻게 버텼는지 알지⁠.⁠” 문호는 신발을 든 손을 들었다⁠. “⁠이 일이 시끄러워지면 회장님 돈이 빠진다⁠. 돈이 빠지면 우리는 석 달을 못 간다⁠. 그럼 손가락 끊어진 놈⁠, 허리 나간 놈⁠, 발목 나간 놈은 어디 가서 일하냐⁠? 어깨 빠진 놈은⁠?⁠”

태하는 어깨를 움직였다⁠. 수술 자국이 티셔츠 안에서 당겼다⁠. 두 해 전 선발전에서 어깨가 빠졌을 때 병원비 천이백만 원을 낸 사람이 문호였다⁠. 문호는 갚으라는 말을 한 번도 하지 않았다⁠. 대신 「⁠너는 손이 좋으니 세터를 해라⁠」 하고 짐 열쇠를 쥐여 주었다⁠.

“⁠주아 씨가 다쳤으면요⁠.⁠”

“⁠아버지가 찾는다잖아⁠. 우리보다 백 배 잘 찾는 사람이야⁠.⁠” 문호는 목소리를 더 낮췄다⁠. “⁠태하야⁠. 너는 홀드만 봐⁠. 사람은 내가 볼게요⁠.⁠”

문호의 말끝에 존댓말이 섞였다⁠. 화가 머리끝까지 차면 문호는 그렇게 말했다⁠.

*

세팅실은 홀드 상자와 드릴 냄새로 꽉 찼다⁠. 태하가 들어가자 세빈이 세척 통 앞에서 펄쩍 뛰었다⁠. 고무장갑 낀 손에 솔이 들려 있었다⁠.

“⁠죄송해요⁠. 아⁠, 형이구나⁠. 죄송해요⁠.⁠”

“⁠뭐가 죄송한데⁠?⁠”

“⁠그냥요⁠. 놀래서요⁠.⁠” 세빈은 솔을 내려놓고 바나나를 집었다가 다시 놓았다⁠. “⁠형⁠, 주아 씨 진짜 어젯밤에 왔어요⁠?⁠”

“⁠손자국 봤잖아⁠.⁠”

“⁠저는 마감 때 먼저 갔어요⁠. 월세 날이라서요⁠.⁠” 세빈은 묻지도 않은 말을 했다⁠. “⁠집주인 아저씨가 문자에 느낌표를 세 개 붙여요⁠. 두 개일 때는 괜찮은데 세 개면 진짜 화난 거예요⁠.⁠”

태하는 대꾸 대신 휴대전화를 열었다⁠. 회원 단톡방 「⁠오버행 새벽반⁠」이 쉬지 않고 울리고 있었다⁠. 「⁠영상 왜 내려갔어요⁠?⁠」 「⁠돈 많은 언니 납치설 돎 ㅋㅋ 아니겠지⁠」 「⁠납치면 신발도 가져가지 않나⁠」 「⁠신발이 넉 달 치라 범인도 양심이 있었던 듯⁠」 메시지들 사이로 누가 기사 하나를 올려 두었다⁠. 「⁠체험 예약 앱 한번⁠, 내년 초 상장 추진⁠… 클라이밍 체인 열두 곳 거느려⁠」 기사 사진 속에서 탁휘준이 유리 벽 앞에 서서 웃고 있었다⁠. 주아와 같은 눈매였다⁠.

세빈이 어깨 너머로 화면을 보다가 말했다⁠.

“⁠형⁠. 대표님 말 들어요⁠. 이번엔요⁠.⁠”

세빈의 고무장갑 끝에서 물이 떨어져 매트 위에 작은 자국을 냈다⁠.

*

점심때 문호가 은행에 간다며 나갔다⁠. 대표실 문은 잠그지 않았다⁠. 문호는 한 번도 잠근 적이 없었다⁠.

태하는 대표실 책상 위 모니터를 켰다⁠. 카메라는 넷이었다⁠. 출입문⁠, 데스크⁠, 리드벽⁠, 45도 벽⁠. 뒷문 카메라는 몇 달째 검은 화면이었다⁠. 고칠 돈이 없다고 문호가 말했었다⁠. 태하는 45도 벽 카메라의 어젯밤을 불러냈다⁠.

새벽 한 시 십 분⁠, 출입문 화면에 주아가 들어왔다⁠. 「⁠한번⁠」 앱의 심야 단독 이용권이었다⁠. 짐 하나를 밤새 혼자 쓰는 상품이었고⁠, 하룻밤에 오십만 원이었다⁠. 주아는 패딩을 벗고 분홍 암벽화를 신고 곧장 「⁠유턴⁠」 앞에 섰다⁠.

태하는 재생 속도를 네 배로 올렸다⁠.

주아는 「⁠유턴⁠」을 다시 올랐다⁠. 어제보다 느렸다⁠. 꼭대기 홀드를 두 손으로 잡은 뒤⁠, 뛰어내리지 않았다⁠. 잠깐 매달려 숨을 고르더니 오른발을 내려 올라온 길을 거꾸로 짚었다⁠. 손이 홀드를 하나씩 놓고 아래 홀드를 찾아 더듬었다⁠. 클라이밍에서 내려오기는 오르기보다 어렵다⁠. 다음 홀드가 눈에 안 보이고⁠, 몸무게가 손끝에서 빠져나간다⁠. 주아는 보이지 않는 홀드를 발로 더듬으면서 내려왔다⁠.

큰 보라 슬로퍼에서 주아가 멈췄다⁠. 왼손 하나로 슬로퍼를 쥐고 매달린 채⁠, 오른손을 초크 주머니에 넣었다⁠. 무언가를 꺼냈다⁠. 화면이 거칠어 손에 든 것이 보이지 않았다⁠. 오른손은 슬로퍼 옆 벽에 붙어 오래 움직였다⁠. 삼 분이 넘었다⁠. 왼팔 하나로 45도 벽에 삼 분을 매달려 있는 사람은 오버행 코치 중에도 없었다⁠.

태하는 휴대전화를 들어 모니터를 찍기 시작했다⁠.

주아가 두 손바닥을 슬로퍼에 활짝 펴 대고 눌렀다⁠. 이마를 벽에 댔다⁠. 사십 초쯤 그대로 있었다⁠.

태하의 손바닥이 저릿했다⁠. 볼트를 다 조이고 나서 홀드가 도는지 보는 동작이었다⁠. 태하가 세팅 체험에서 가르쳐 준 그대로였다⁠.

주아는 끝까지 거꾸로 내려와 매트에 앉았다⁠. 분홍 신발을 벗어 벽 아래에 앞코가 벽을 향하게 놓았다⁠. 그리고 고개를 들어 카메라를 똑바로 보았다⁠. 두 시 사십일 분⁠, 운동화를 손에 들고 화면 밖으로 나갔다⁠. 뒷문 방향이었다⁠.

대표실 문이 열렸다⁠.

문호가 서 있었다⁠. 은행 서류 봉투를 든 채였다⁠. 태하는 휴대전화를 내리지 않았다⁠. 문호도 내리라고 하지 않았다⁠. 문호는 천천히 책상으로 와서 마우스를 쥐었다⁠. 어젯밤 파일을 고르고 삭제를 눌렀다⁠. 「⁠영구 삭제하시겠습니까⁠?⁠」 한 번 더 눌렀다⁠. 화면 속 45도 벽이 회색 네모로 바뀌었다⁠.

“⁠고장 난 카메라가 하나 더 생겼네⁠.⁠” 문호가 말했다⁠. “⁠넌 아무것도 못 봤어요⁠.⁠”

태하는 휴대전화를 주머니에 넣었다⁠. 네 배속으로 찍힌 영상은 사십칠 초였다⁠. 주아가 슬로퍼에 손바닥을 펴 대는 데서부터⁠, 카메라를 올려다보는 데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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