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화(5,352자)

한 번뿐인 벽

클라이밍 짐 회원이 실종됐다 · 류시안

토요일 오전 열 시⁠, 철공소 사장의 1톤 트럭이 성수 플래그십 뒤편 하역장으로 들어갔다⁠. 짐칸에 쇠파이프와 철판이 실려 있었다⁠. 철판 밑⁠, 방수포 아래에 태하와 세빈이 누워 있었다⁠. 쇠 냄새와 기름 냄새가 코를 찔렀다⁠. 트럭이 턱을 넘을 때마다 철판이 덜컹거리며 등을 눌렀다⁠.

“⁠형⁠.⁠” 세빈이 속삭였다⁠. “⁠철판이 제 배 위에 있어요⁠. 바나나가 납작해졌어요⁠.⁠”

“⁠조용히 해⁠.⁠”

트럭이 멈췄다⁠. 하역장 입구에서 젊은 남자 목소리가 났다⁠. 보라색 바람막이를 입었을 목소리였다⁠.

“⁠어디서 오셨어요⁠? 오늘 납품 일정 없는데요⁠.⁠”

“⁠없긴 왜 없어⁠. 무대 받침 철판이야⁠.⁠” 사장의 목소리가 하역장을 울렸다⁠. “⁠무대 다리가 약해서 철판 덧대 달라고 어제 밤에 전화 왔어⁠. 니들 회장님 축제 무대 무너지면 니가 책임질래⁠? 내가 책임질래⁠? 나는 쇠 깎는 사람이라 책임 같은 거 몰라⁠.⁠”

“⁠제가 확인해 볼게요⁠.⁠”

“⁠확인하는 동안 무대가 무너져⁠. 철판은 무거워서 기다리면 더 무거워져⁠.⁠”

잠깐 조용했다⁠. 방수포 밑에서 세빈이 숨을 참았다⁠.

“⁠…빨리 내려 주세요⁠. 열한 시부터 손님 들어와요⁠.⁠”

트럭이 다시 움직였다⁠. 하역장 안으로 들어가 멈췄다⁠. 방수포가 걷혔다⁠. 사장이 짐칸 옆에 서서 내려다보고 있었다⁠.

“⁠무대 다리 약한 건 사실이다⁠. 아까 보니까 용접이 엉망이야⁠. 나중에 진짜 덧대 줘야겠다⁠.⁠”

사장은 장갑 낀 손으로 세빈의 배 위에서 납작해진 바나나를 집어 들고 혀를 찼다⁠. 세빈은 바나나를 돌려받아 껍질째 주머니에 넣었다⁠.

*

하역장 구석의 창고 문이 열리고 세팅 팀장이 나왔다⁠. 손에 가방을 들고 있었다⁠. 팀장은 태하를 보고 놀라지 않았다⁠.

“⁠늦으셨네요⁠. 열 시에 오실 줄 알았는데⁠.⁠”

“⁠어떻게 알았어요⁠?⁠”

“⁠헤드 세터님이 어제 밤에 보도에서 저를 쳐다보셨잖아요⁠.⁠” 팀장은 가방을 열었다⁠. 원래 슬로퍼였다⁠. 누런 안쪽⁠, 하얀 네모⁠. “⁠이거 돌려드릴게요⁠. 마대에 넣으면 고철 업체로 가요⁠.⁠”

태하는 슬로퍼를 받았다⁠. 손바닥이 결을 알아보았다⁠.

“⁠문제는요⁠?⁠”

“⁠회장님 말대로 했어요⁠. 창고에 있던 한번그립 전부요⁠.⁠” 팀장의 얼굴이 굳었다⁠. “⁠헤드 세터님이 왼편에 쌓아 둔 거⁠, 말리려고 했는데 마케팅 쪽에서 사진 찍으러 와 있었어요⁠. 회장님한테 바로 보고가 가요⁠. 그래서 라운지에서 안 보이는 자리에만 멀쩡한 거 썼어요⁠. 보이는 자리는⁠…⁠.⁠”

“⁠12미터부터 15미터⁠.⁠”

“⁠네⁠. 거기가 라운지에서 제일 잘 보이는 자리라서요⁠.⁠” 팀장이 목소리를 낮췄다⁠. “⁠그리고 왼쪽 줄은 안 뗐어요⁠. 내려오는 길이요⁠. 회장님은 라운지에서 안 보이는 건 신경 안 써요⁠. 리허설 끝나고 떼라고 하셨는데⁠, 깜빡했다고 할 거예요⁠.⁠”

“⁠그러다 잘려요⁠.⁠”

“⁠그래도요⁠.⁠” 팀장이 바람막이 가슴의 「⁠HEAD OF SETTING⁠」 자수를 손가락으로 쓸었다⁠. “⁠저 벽⁠, 우리 팀 애들이 축제 끝나면 매일 올라가요⁠. 제가 짠 문제도 아닌데 저 자수 달고 있으면 제 문제예요⁠.⁠”

팀장은 보라색 스태프 조끼 두 벌을 내밀었다⁠. 등에 「⁠한 번뿐인 벽 STAFF⁠」 글자가 있었다⁠.

*

두 시⁠, 유리 상자 안이 사람으로 찼다⁠. 매트 앞에 의자 수백 개가 줄지어 있었고⁠, 뒤에는 서서 보는 사람들이 빽빽했다⁠. 바깥 보도에도 사람들이 유리에 바짝 붙었다⁠. 카메라 세 대와 대형 화면 두 개⁠. 화면에 「⁠한 번뿐인 벽 — 생중계⁠」 글자가 떠 있었다⁠.

12미터 라운지에 휘준이 있었다⁠. 증권사 손님들⁠, 협회 사람들⁠, 기자 몇이 함께였다⁠. 휘준은 마이크를 들고 라운지 난간 앞에 섰다⁠.

“⁠우리는 물건을 팔지 않습니다⁠. 한 번뿐인 경험을 팝니다⁠. 오늘 이 벽이 그 증거입니다⁠. 그리고 오늘 이 벽을 처음 오를 사람은⁠, 제가 이 회사를 시작한 이유입니다⁠. 제 딸입니다⁠.⁠”

박수가 터졌다⁠. 대형 화면에 첫 완등 영상 속 주아의 웃는 얼굴이 떠올랐다⁠.

태하는 스태프 조끼를 입고 맨 뒷줄 기둥 옆에 서 있었다⁠. 맨 앞줄 휠체어석에 석빈이 보였다⁠. 무릎 위에 김장 비닐로 싼 꾸러미가 있었다⁠. 옆자리에 석빈의 어머니가 핸드백을 꼭 쥐고 앉아 있었다⁠. 핸드백 지퍼 사이로 소금 봉지 귀퉁이가 삐져나와 있었다⁠. 석빈 옆에 해람이 앉아 있었다⁠. 한정판 운동화였다⁠. 무릎 위에 증거물 봉투가 놓여 있었다⁠. 봉투 안에 분홍색이 비쳤다⁠.

뒤편 기둥 근처에 문호와 코치 셋이 서 있었다⁠. 문호는 국가대표 운동복을 입고 있었다⁠. 지퍼는 여전히 올라가지 않았다⁠. 나롱이 코치들 앞에서 휴대전화를 높이 들고 있었다⁠. 부계정 생중계였다⁠. 화면 구석의 숫자가 빠르게 올라갔다⁠.

“⁠쌤⁠.⁠” 나롱이 태하를 알아보고 입 모양으로 말했다⁠. “⁠조끼 잘 어울려요⁠. 배신자 같아요⁠.⁠”

태하는 대답 대신 조끼 지퍼를 끝까지 올렸다⁠. 문호가 나롱의 어깨 너머로 태하를 보았다⁠. 지퍼가 올라가지 않는 운동복 차림으로⁠, 문호는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

주아가 매트 위로 걸어 나왔다⁠. 보라색 「⁠AMBASSADOR⁠」 티셔츠⁠, 하네스⁠, 귀에 꽂은 작은 무선 마이크⁠. 앰버서더의 말이 생중계에 그대로 실리게 한 마이크였다⁠. 엄팔용이 매트 끝까지 따라왔다⁠. 마케팅 직원이 한번 로고가 박힌 새 암벽화를 들고 달려왔다⁠.

해람이 일어났다⁠. 증거물 봉투를 들고 매트 앞으로 걸어갔다⁠. 엄팔용이 막아섰다⁠.

“⁠형사입니다⁠.⁠” 해람이 신분증을 보였다⁠. 객석의 사람들이 고개를 돌렸다⁠. 카메라 하나가 해람을 잡았다⁠. “⁠증거물 반환하러 왔어요⁠. 감식 끝났거든요⁠. 본인 물건이라 본인한테 드려야 해요⁠.⁠”

해람이 봉투를 열었다⁠. 분홍 암벽화 한 켤레가 나왔다⁠. 주아의 얼굴이 대형 화면에 크게 잡혔다⁠. 주아는 웃었다⁠. 웃음 끝에 숨을 들이켰다⁠.

라운지의 휘준이 엄팔용을 내려다보았다⁠. 수백 명이 보고 있었다⁠. 생중계 화면이 돌고 있었다⁠. 휘준은 아주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엄팔용이 비켜섰다⁠.

주아는 매트에 앉아 분홍 신발을 신었다⁠. 끈을 조였다⁠. 오른발 앞코에 열이틀 전 초크가 아직 하얗게 남아 있었다⁠. 마케팅 직원이 한번 신발을 든 채 멍하니 서 있었다⁠.

“⁠협찬보다 비싸요⁠.⁠” 주아가 직원에게 말했다⁠. 마이크가 이 말을 실어 날랐다⁠. 객석에서 웃음이 터졌다⁠.

*

주아는 자동 확보기 줄을 하네스에 걸고 스타트 두 홀드를 잡았다⁠.

첫 몇 홀드는 가볍게 갔다⁠. 박수가 따라 올라갔다⁠. 6미터의 크림프⁠. 손가락 첫 마디⁠. 9미터에는 원래 슬로퍼 대신 한번그립의 새 슬로퍼가 있었다⁠. 주아는 슬로퍼를 덮었다⁠. 손바닥이 결을 찾다가 멈췄다⁠. 날 선 결이었다⁠. 주아는 손을 떼지 않고 위를 올려다보았다⁠. 12미터⁠, 13미터⁠, 14미터⁠. 보라색 홀드가 줄지어 있었다⁠.

태하는 기둥 옆에서 주아의 손을 보았다⁠. 손바닥이 홀드 위에 올라갈 때마다 태하의 손바닥이 따라 저렸다⁠.

12미터⁠. 주아가 로고가 박힌 홀드를 한 손으로 잡았다⁠. 몸이 라운지로 돌아갔다⁠. 휘준과 사람 키 하나 거리였다⁠. 휘준이 샴페인 잔을 들어 보였다⁠. 주아는 웃지 않았다⁠. 다음 홀드로 뻗었다⁠.

13미터⁠. 큰 핀치였다⁠. 주아가 오른손으로 핀치를 쥐고 몸을 틀어 왼발을 높이 올렸다⁠. 몸무게가 핀치에 실렸다⁠. 한쪽으로 비틀렸다⁠.

딱⁠.

소리가 유리 상자 안에 울렸다⁠. 화요일 성수 바닥에서 태하가 들은 소리였다⁠. 대전 석빈의 손에 남았을 소리였다⁠. 핀치가 볼트 구멍 언저리에서 갈라졌다⁠. 주아의 오른손에 깨진 반쪽이 남았다⁠.

주아의 몸이 벽에서 떨어졌다⁠.

객석에서 비명이 터졌다⁠. 자동 확보기의 줄이 팽팽해졌다⁠. 주아의 몸이 일 미터쯤 떨어지다 줄에 받쳐 멈추고⁠, 그네처럼 크게 흔들렸다⁠. 어깨가 벽에 부딪혔다⁠. 둔한 소리가 났다⁠. 주아는 줄에 매달려 천천히 돌았다⁠. 오른손에는 깨진 핀치를 그대로 쥐고 있었다⁠.

맨 앞줄에서 석빈이 휠체어 바퀴를 움켜쥐었다⁠. 무릎 위의 꾸러미가 미끄러졌다⁠. 석빈의 어머니가 꾸러미를 받아 쥐었다⁠.

대형 화면에 매달린 주아의 손이 크게 잡혔다⁠. 손바닥 안의 보라색 반쪽⁠, 희끗하고 거친 단면⁠.

*

“⁠중계 끊어⁠.⁠” 휘준의 목소리가 라운지 마이크를 타고 유리 상자 안에 울렸다⁠. 휘준은 마이크를 들고 있다는 것을 잊은 얼굴이었다⁠. 곧 마이크를 내렸다⁠. 대형 화면이 꺼졌다⁠. 나롱의 부계정 생중계는 꺼지지 않았다⁠. 나롱은 휴대전화를 머리 위로 더 높이 들었다⁠.

“⁠주아야⁠, 손 놓아라⁠!⁠” 휘준이 난간에서 외쳤다⁠. 이번에는 마이크 없이⁠. “⁠손 놓으면 내려온다⁠! 줄이 내려 준다⁠!⁠”

주아는 손을 놓지 않았다⁠. 줄에 매달린 채 왼손으로 벽의 홀드 하나를 잡았다⁠. 몸이 벽에 다시 붙었다⁠.

휘준이 라운지 계단을 뛰어 내려왔다⁠. 엄팔용이 매트 끝에서 자동 확보기 기계로 다가갔다⁠. 진행 요원 둘이 사다리차를 밀고 나오기 시작했다⁠. 휘준이 매트에 내려서며 외쳤다⁠.

“⁠구조해⁠! 앰버서더 다쳤다⁠. 사다리 대고 끌어내려⁠!⁠”

태하는 기둥 옆에서 뛰었다⁠. 객석 사이 통로를 지나 매트 위로 올라섰다⁠. 스태프 조끼 등의 글자가 펄럭였다⁠. 자동 확보기 기계와 사다리차 사이⁠, 줄이 벽으로 올라가는 바로 앞에 태하가 섰다⁠.

휘준과 얼굴이 마주쳤다⁠. 사람 키 하나 거리였다⁠.

“⁠비키세요⁠.⁠” 휘준이 말했다⁠. 말끝을 내리지 않았다⁠. “⁠딸이 다쳤습니다⁠.⁠”

“⁠주아 씨가 안 내려온다잖아요⁠.⁠”

“⁠딸이 13미터에 매달려 있어요⁠. 저 홀드가 깨진 거 못 봤어요⁠?⁠”

“⁠봤어요⁠. 회장님이 다시 달게 한 홀드요⁠. 제가 화요일에 금 갔다고 왼편에 쌓아 둔 거요⁠.⁠” 태하가 말했다⁠. 목소리가 객석 앞줄까지 들렸다⁠. “⁠석빈이 손에서 깨진 거랑 같은 거요⁠.⁠”

엄팔용이 태하의 팔을 잡았다⁠. 이번에는 세게 잡았다⁠. 태하는 비키지 않았다⁠. 수술한 어깨가 비틀렸다⁠. 이를 악물었다⁠.

“⁠엄 실장님⁠.⁠”

매트 가장자리에서 해람의 목소리가 났다⁠. 해람이 신분증을 든 채 걸어 나왔다⁠. 한정판 운동화로 매트를 밟았다⁠.

“⁠본인 의사요⁠.⁠” 해람이 휘준을 보았다⁠. “⁠회장님이 제일 좋아하시는 말이잖아요⁠. 본인이 안 내려온다잖아요⁠. 사다리 대고 끌어내리면 그건 구조가 아니라 데려가는 거예요⁠. 지난주 새벽 두 시 사십일 분처럼요⁠.⁠”

엄팔용의 손이 태하의 팔에서 멈췄다⁠. 진행 요원들이 사다리차를 밀다가 서로 얼굴을 보았다⁠. 객석의 휴대전화 수백 개가 매트를 향해 들려 있었다⁠.

휘준이 고개를 들어 딸을 올려다보았다⁠.

*

13미터에서 주아가 벽에 몸을 붙였다⁠. 깨진 핀치 반쪽을 하네스 고리에 끼웠다⁠. 손이 떨렸다⁠. 어깨가 부딪힌 자리를 왼손으로 한 번 짚었다⁠. 그리고 귀에 꽂은 마이크를 손가락으로 눌렀다⁠. 마이크는 대형 화면 대신 유리 상자 안의 스피커로 이어져 있었다⁠. 중계는 끊겼어도 스피커는 살아 있었다⁠.

“⁠아빠⁠.⁠”

주아의 목소리가 유리 상자 안에 울렸다⁠. 숨이 차서 떨렸다⁠. 웃음이 섞이지 않은 목소리였다⁠.

“⁠거기서 기다려요⁠. 내가 내려갈게⁠. 줄 말고⁠, 내 손으로⁠.⁠”

주아는 왼편을 보았다⁠. 벽의 왼쪽 가장자리⁠, 라운지 기둥에 가려 있던 낡은 홀드 줄⁠. 색이 바래고 결이 닳은⁠, 오버행의 홀드들⁠. 주아는 오른발을 내려 발끝으로 아래를 더듬었다⁠. 위에서는 보이지 않는 발 홀드를 찾아⁠.

태하의 손바닥에 땀이 찼다⁠. 주아가 거꾸로 내려오기 시작했다⁠.

14화는 어땠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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