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화(5,426자)

18미터

클라이밍 짐 회원이 실종됐다 · 류시안

금요일 오후 네 시⁠, 문제가 끝났다⁠.

태하는 마지막 볼트를 조이고 로프에서 내려와 처음부터 끝까지 한 번 올라 보았다⁠. 자동 확보기 줄을 하네스에 걸었다⁠. 하네스는 허리와 허벅지에 두르는 띠였고⁠, 줄이 거기 연결되면 손을 놓아도 바닥까지 떨어지지 않았다⁠. 스타트 두 손⁠, 쉬운 몇 홀드⁠, 6미터의 크림프⁠. 9미터에서 원래 슬로퍼를 덮었다⁠. 손바닥이 결을 알아보았다⁠. 12미터에서 로고가 박힌 작은 홀드를 한 손으로 잡고 몸을 가로로 띄웠다⁠. 라운지 소파가 사람 키 하나 거리에 있었다⁠. 소파 위에 축제용 꽃바구니가 놓여 있었다⁠.

꼭대기까지 갔다⁠. 18미터⁠. 유리 지붕 너머로 하늘이 낮게 깔려 있었다⁠. 아래를 내려다보자 매트가 손바닥만 했다⁠. 세빈이 매트 한가운데에서 두 팔을 흔들었다⁠.

태하는 손을 놓지 않았다⁠. 꼭대기 왼편의 낡은 홀드로 손을 옮겨 거꾸로 짚으며 내려왔다⁠. 위에서는 보이지 않는 발 홀드를 발끝으로 더듬었다⁠. 「⁠유턴⁠」보다 네 배 높은 내려오기였다⁠. 15미터에서 수술한 어깨가 떨렸고⁠, 10미터에서 손바닥에 땀이 찼다⁠. 초크를 찍으려고 손을 뒤로 돌릴 때마다 몸이 벽에서 떨어지려 했다⁠. 맨 아래에서 두 번째⁠, 철공소 사장의 초록 홀드에 오른발을 올렸을 때 태하는 웃었다⁠. 매트가 가까웠다⁠.

맨 아래 홀드를 놓고 매트에 내려섰다⁠. 다리가 후들거렸다⁠. 세빈이 물병을 내밀었다⁠.

“⁠형⁠, 몇 분 걸렸어요⁠?⁠”

“⁠몰라⁠.⁠”

“⁠이십육 분이요⁠. 올라가는 데 육 분⁠, 내려오는 데 이십 분⁠.⁠” 세빈이 휴대전화 화면을 보여 주었다⁠. “⁠주아 씨는 형보다 가벼우니까 십오 분이면 될 거예요⁠.⁠”

“⁠가벼운 게 문제가 아니야⁠. 무서운 게 문제지⁠.⁠”

*

여섯 시⁠, 리허설이 시작됐다⁠. 유리 상자 안에 조명이 켜지고 카메라 세 대가 벽을 향했다⁠. 한번 마케팅 직원들이 매트 위를 오갔다⁠. 바깥 거리에 사람들이 모여 유리에 얼굴을 대고 안을 들여다보았다⁠. 내일 축제의 미리 보기였다⁠.

휘준은 12미터 라운지에 앉아 있었다⁠. 소파 가운데에서 다리를 꼬고⁠, 손님 둘과 샴페인 잔을 들고 있었다⁠. 증권사에서 왔다는 손님들이었다⁠. 휘준이 벽을 가리키며 무언가 설명했고⁠, 손님들이 웃었다⁠.

주아는 엄팔용과 함께 들어왔다⁠. 회색 후드티 대신 보라색 한번 티셔츠를 입고 있었다⁠. 가슴에 「⁠AMBASSADOR⁠」 글자가 박혀 있었다⁠. 발에는 이번에도 대여화였다⁠. 주아가 매트에 올라서자 마케팅 직원이 달려왔다⁠.

“⁠앰버서더님⁠, 내일은 한번 신발 신으셔야 해요⁠. 협찬이에요⁠.⁠”

“⁠내일 제 신발 돌려받을 거예요⁠.⁠”

“⁠네⁠?⁠”

“⁠분홍색이요⁠. 이탈리아 거⁠. 협찬보다 비싸요⁠.⁠” 주아가 웃었다⁠. 직원이 당황해서 태블릿을 내려다보았다⁠.

태하는 점검 로프에 하네스를 걸고 있었다⁠. 헤드 세터는 리허설 동안 옆 로프에 매달려 홀드를 살핀다⁠. 오르는 사람 곁에서 홀드가 돌거나 미끄러지면 바로 조이는 일이었다⁠. 주아가 태하를 보았다⁠. 태하는 고개만 끄덕였다⁠. 엄팔용이 매트 끝에서 둘을 보고 있었다⁠.

*

주아는 자동 확보기 줄을 하네스에 걸고 스타트 두 홀드를 잡았다⁠. 첫 몇 홀드를 가볍게 올랐다⁠. 바깥 거리에서 박수가 났다⁠. 유리 너머라 박수 소리가 둔하게 들렸다⁠. 6미터의 크림프에서 주아는 손가락 첫 마디를 얹고 잠깐 멈췄다⁠. 크림프를 내려다보았다⁠. 「⁠유턴⁠」의 크림프였다⁠. 주아는 아무 말 없이 다음 홀드로 뻗었다⁠.

태하는 옆 로프를 타고 주아보다 한 뼘 아래에서 따라 올랐다⁠.

9미터에서 주아가 슬로퍼를 덮었다⁠. 두 손바닥으로⁠.

주아의 몸이 멈췄다⁠. 손바닥이 홀드 위에서 미끄러지듯 움직였다⁠. 맨들맨들한 바깥을 쓸고⁠, 가운데의 고운 결을 찾았다⁠. 결을 찾은 손바닥이 그대로 굳었다⁠. 주아는 손가락을 활짝 폈다⁠. 그리고 눌렀다⁠.

이마를 벽에 댔다⁠.

사십 초쯤이었다⁠. 아래에서 마케팅 직원이 “⁠앰버서더님⁠, 괜찮으세요⁠?⁠” 하고 외쳤다⁠. 라운지의 휘준이 샴페인 잔을 내려놓았다⁠. 엄팔용이 매트 끝에서 한 걸음 나섰다⁠. 주아는 이마를 떼고 아래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괜찮아요⁠! 숨 고르는 거예요⁠!⁠”

주아는 다음 홀드로 뻗었다⁠. 뻗으면서 옆 로프의 태하를 보았다⁠. 눈가가 젖어 있었다⁠. 웃고 있었다⁠.

*

12미터에서 주아는 로고가 박힌 작은 홀드를 한 손으로 잡고 몸을 라운지로 돌렸다⁠. 휘준과 눈이 마주쳤다⁠. 사람 키 하나 거리였다⁠. 주아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몸을 가로로 띄우지도 않고 다시 벽으로 돌아섰다⁠. 휘준이 손님들에게 웃어 보였다⁠.

15미터에서 주아가 멈췄다⁠. 라운지는 발아래였다⁠. 카메라는 바닥에 있었다⁠. 유리 상자 안에 울리는 소리는 아래의 마케팅 직원들 목소리와 음악뿐이었다⁠. 태하가 옆 로프에서 주아의 눈높이까지 올라왔다⁠. 둘 사이가 팔 하나 길이였다⁠.

“⁠세터님⁠.⁠” 주아가 작게 말했다⁠. “⁠그 슬로퍼⁠, 진짜 세터님 거예요⁠?⁠”

“⁠응⁠. 세빈이가 트렁크에 일주일 넣어 놨었어⁠. 형사님이 감식하고 돌려줬어요⁠. 주아 씨 지문 나왔대요⁠.⁠”

“⁠카드는요⁠?⁠”

“⁠대표님이 회장님한테 넘겼어요⁠.⁠”

주아는 벽을 짚은 손에 초크를 찍었다⁠. 한참 말이 없었다⁠.

“⁠알았어요⁠. 아빠 서재 파쇄기 소리 들었어요⁠. 화요일 밤에요⁠.⁠” 주아가 말했다⁠. “⁠그래도 홀드는 돌아왔네⁠.⁠”

“⁠주아 씨⁠. 내일 꼭대기에서 손 놓지 말고 왼쪽으로 내려와요⁠. 맨 아래에 석빈이가 있어요⁠. 형사님도 있고요⁠. 내려오면 바로 형사님한테 가요⁠. 회장님 차 말고⁠.⁠”

“⁠석빈 씨가 와요⁠?⁠”

“⁠앞줄에요⁠. 깨진 홀드 반쪽 들고요⁠.⁠”

주아가 웃었다⁠. 웃음 끝에 숨을 들이켰고⁠, 이번에는 숨이 떨렸다⁠.

“⁠세터님 문제 진짜 못됐다⁠. 맨날 내려오게 만들어⁠.⁠”

“⁠주아 씨가 짜 달라고 했잖아요⁠.⁠”

“⁠알아요⁠.⁠” 주아는 벽에 이마를 댔다⁠. “⁠근데요⁠, 세터님⁠. 저는 내려가서 형사님한테 가기만 하는 거 싫어요⁠.⁠”

“⁠그게 제일 안전해요⁠.⁠”

“⁠안전하면 아빠가 또 사요⁠.⁠” 주아가 고개를 들었다⁠. 목소리는 작았지만 단단했다⁠. “⁠제가 형사님한테 가면⁠, 아빠는 변호사를 사고⁠, 판사님 시간을 사고⁠, 석빈 씨 입을 다시 사요⁠. 지난 일주일도 다 샀잖아요⁠. 우리 짐도 사고⁠, 세터님도 샀고요⁠. 아빠는 사람들 앞에서만 못 사요⁠. 수많은 사람이 보는 데서는요⁠.⁠”

“⁠무슨 말이에요⁠?⁠”

“⁠벽 위에서 말할 거예요⁠. 아빠 앞에서⁠. 라운지가 사람 키 하나 거리잖아요⁠. 세터님이 그렇게 짰잖아요⁠.⁠” 주아가 태하를 보았다⁠. “⁠다 알고 짠 거잖아요⁠.⁠”

태하는 대답하지 못했다⁠. 알고 짰다⁠. 라운지와 사람 키 하나 거리⁠. 휘준이 피할 수 없는 자리⁠. 그러면서도 주아가 거기서 말하지 않기를 바랐다⁠. 말하지 않고 왼쪽으로 내려와 해람에게 가기를⁠.

“⁠위험해요⁠. 회장님이 무슨 수를 쓸지 몰라요⁠. 실장도 있고⁠.⁠”

“⁠세터님⁠.⁠” 주아가 웃었다⁠. “⁠저 아빠 돈으로 이것저것 다 사 봤어요⁠. 심야 이용권⁠, 세팅 체험⁠, 해외 볼더링 여행⁠, 이탈리아 신발⁠. 한 번에 몇백씩⁠. 근데 돈 주고 산 거 중에 제 손에 남은 건 굳은살밖에 없더라고요⁠. 굳은살은 제가 만든 거예요⁠. 이번 거는 제가 할래요⁠.⁠”

아래에서 마케팅 직원이 외쳤다⁠. “⁠앰버서더님⁠, 꼭대기 컷 찍을게요⁠!⁠”

주아는 벽을 짚고 다시 올라가기 시작했다⁠. 올라가다 한 번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세터님⁠. 레슨은 데스크에서 예약하라고 하셨잖아요⁠.⁠”

“⁠미안해요⁠.⁠”

“⁠이건 무료 레슨이었어요⁠.⁠” 주아가 말했다⁠. “⁠백이십만 원보다 좋았어요⁠.⁠”

*

꼭대기에서 주아는 두 손으로 마지막 홀드를 잡았다⁠. 카메라가 올려다보았다⁠. 마케팅 직원이 “⁠손 놓으세요⁠, 웃으면서요⁠!⁠” 하고 외쳤다⁠. 주아는 손을 놓았다⁠. 자동 확보기의 줄이 감기며 주아의 몸이 천천히 내려왔다⁠. 날개처럼⁠. 박수⁠. 주아는 웃고 있었다⁠.

매트에 내려선 주아 앞으로 휘준이 내려와 있었다⁠. 라운지에서 계단으로 내려온 것이었다⁠. 휘준은 딸의 하네스 고리를 직접 풀어 주었다⁠.

“⁠잘했다⁠. 내일도 이렇게 하면 된다⁠. 꼭대기에서 웃고 손 놓고⁠. 그다음은 차⁠.⁠”

“⁠아빠는 벽 한 번도 안 올라가 봤지⁠.⁠”

휘준의 손이 하네스 고리에서 멈췄다⁠.

“⁠올라갈 필요가 없었다⁠. 너를 올려 보냈으니까⁠.⁠” 휘준은 고리를 마저 풀었다⁠. “⁠9미터에서 한참 멈추더구나⁠. 무슨 생각을 했니⁠?⁠”

“⁠홀드가 좋아서요⁠.⁠”

“⁠그래⁠.⁠” 휘준은 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주아의 머리에 초크 가루가 묻어 있었다⁠. 휘준은 손을 털지 않았다⁠. “⁠15미터에서도 한참 멈추더구나⁠. 헤드 세터님하고⁠.⁠”

주아는 대답하지 않았다⁠. 엄팔용이 주아 곁으로 왔다⁠. 휘준이 고개를 돌려 옆 로프에서 막 내려온 태하를 보았다⁠.

*

“⁠헤드 세터 일은 여기까지입니다⁠.⁠” 휘준이 말했다⁠. 마케팅 직원들이 다 듣는 데서였다⁠. “⁠수고하셨어요⁠. 보수는 약속대로 드리겠습니다⁠. 축제에는 오지 않으셔도 됩니다⁠.⁠”

“⁠문제는요⁠?⁠”

“⁠오늘 밤에 바꿉니다⁠. 한번그립으로 전부요⁠. 저 낡은 홀드들도⁠, 왼쪽 줄도⁠, 9미터의 그 홀드도⁠.⁠” 휘준은 세팅 팀장을 불렀다⁠. 팀장이 바람막이 차림으로 달려왔다⁠. “⁠창고에 있는 한번그립 전부 쓰세요⁠. 아침 열 시까지요⁠.⁠”

“⁠전부요⁠?⁠” 팀장이 되물었다⁠.

“⁠전부요⁠.⁠”

팀장이 창고 앞을 보았다⁠. 태하도 보았다⁠. 창고 앞에 무릎 높이로 쌓인 보라색 더미가 있었다⁠. 화요일에 태하가 손바닥으로 골라 왼편에 쌓아 둔 홀드들이었다⁠. 볼트 구멍에 금이 간 것들⁠.

“⁠회장님⁠, 저건 안 돼요⁠.⁠” 태하가 말했다⁠. “⁠금 간 거예요⁠. 사람이 매달리면 깨져요⁠.⁠”

“⁠협회 인증 받은 홀드입니다⁠. 내가 협회 안전위원장이고요⁠.⁠” 휘준이 엄팔용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헤드 세터님 배웅해 드려요⁠.⁠”

엄팔용이 태하의 팔꿈치를 잡았다⁠. 세게 잡지 않았다⁠. 대신 놓지도 않았다⁠. 세빈이 매트 끝에서 홀드 통을 안은 채 굳어 있었다⁠. 주아가 태하를 보았다⁠. 주아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대신 오른손을 들어 손바닥을 펴 보였다⁠. 손바닥 한가운데에 9미터의 초크가 하얗게 묻어 있었다⁠.

*

밤 열한 시⁠, 태하와 세빈은 유리 벽 바깥 보도에 서 있었다⁠. 출입문에 「⁠관계자 외 출입 금지⁠」 팻말이 붙었다⁠. 유리 너머에서 세팅 팀이 로프에 매달려 홀드를 떼고 있었다⁠. 드릴 소리가 유리에 막혀 모기 소리처럼 작게 들렸다⁠.

세빈이 패딩 주머니에 손을 넣고 발을 굴렀다⁠. 입김이 유리에 하얗게 서렸다⁠.

“⁠형⁠, 내일 어떻게 들어가요⁠? 팻말 붙었잖아요⁠. 실장님이 출입문에 서 있을 거고요⁠.⁠”

“⁠생각 중이야⁠.⁠”

“⁠생각하는 동안 저 더미가 다 벽에 올라가요⁠.⁠” 세빈이 유리에 이마를 댔다⁠. “⁠주아 씨가 저거 잡고 매달려요⁠. 내일 수많은 사람 앞에서요⁠.⁠”

태하는 휴대전화를 꺼냈다⁠. 연락처를 내리다가 한 이름에서 멈췄다⁠. 「⁠철공소 사장님⁠」 통화 버튼을 누르자 신호가 두 번 가고 쇠 깎는 소리와 함께 사장이 받았다⁠.

“⁠태하냐⁠? 이 밤에 웬일이냐⁠? 짱돌 잘 붙였냐⁠?⁠”

“⁠사장님⁠, 내일 트럭 좀 빌려주세요⁠. 사장님도 같이요⁠.⁠”

“⁠트럭은 왜⁠?⁠”

“⁠배달이요⁠. 쇠 배달⁠.⁠”

전화 너머에서 선반 소리가 멎었다⁠. 사장이 마스크를 올리는 소리가 났다⁠.

“⁠몇 시냐⁠?⁠”

9미터에서 팀장이 원래 슬로퍼를 떼어 냈다⁠. 팀장은 슬로퍼를 마대에 넣지 않았다⁠. 잠깐 들고 있다가 하네스에 매단 제 가방에 넣었다⁠. 그리고 유리 너머 보도의 태하를 내려다보았다⁠.

창고 앞의 보라색 더미가 한 아름씩 줄어들고 있었다⁠.

13화는 어땠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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