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화(5,451자)

유턴

클라이밍 짐 회원이 실종됐다 · 류시안

13미터에서 왼쪽 가장자리까지는 몸 하나 반 거리였다⁠. 주아는 오른발을 내려 발끝으로 벽을 더듬다가 다시 올렸다⁠. 위에서는 발 홀드가 보이지 않았다⁠. 앞으로 기운 벽이 주아의 배와 벽 사이에 그늘을 만들었다⁠. 주아는 그늘 속을 내려다보았다⁠. 객석의 휴대전화 수백 개가 주아를 향해 들려 있었다⁠. 아무도 소리를 내지 않았다⁠.

태하는 매트에 서서 주아의 발을 보았다⁠. 분홍 암벽화의 앞코가 허공을 두 번 긁었다⁠. 세 번째에 태하가 입을 열었다⁠.

“⁠왼발⁠. 배꼽 아래 한 뼘⁠.⁠”

주아의 왼발이 내려갔다⁠. 낡은 노란 홀드에 앞코가 닿았다⁠. 세빈이 박은 홀드였다⁠. 열두 개를 박는 데 여섯 시간을 쓰던 손이 박은 홀드였다⁠. 주아는 몸무게를 발에 옮겼다⁠. 오른손을 13미터의 보라 홀드에서 떼어 왼쪽 가장자리의 색 바랜 홀드로 건너 뻗었다⁠. 손바닥이 결을 찾았다⁠. 맨들했다⁠. 회원 몇백 명의 손이 닳게 만든 결이었다⁠.

주아가 건너갔다⁠. 객석 어디선가 참았던 숨이 한꺼번에 새어 나왔다⁠.

이후로 태하는 입을 다물었다⁠. 내려오는 길은 주아의 것이었다⁠.

주아는 거꾸로 짚으며 내려왔다⁠. 손 하나를 놓고⁠, 아래 홀드를 찾고⁠, 발을 내리고⁠, 몸무게를 옮기고⁠. 「⁠유턴⁠」을 내려오던 새벽처럼 느렸다⁠. 12미터⁠, 라운지 기둥 뒤⁠. 휘준이 앉아 있던 소파가 비어 있었다⁠. 증권사 손님들이 난간에 붙어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10미터에서 주아는 초크를 찍으려고 손을 허리 뒤로 돌리다 멈췄다⁠. 하네스 고리에 끼운 깨진 핀치 반쪽이 손에 닿았다⁠. 주아는 깨진 반쪽에 손바닥을 한 번 대고⁠, 초크를 찍었다⁠.

8미터에서 주아가 멈췄다⁠. 오래 멈췄다⁠. 어깨가 떨렸다⁠. 벽에 부딪힌 자리였다⁠. 주아는 이마를 벽에 댔다⁠.

휘준이 매트 맨 끝⁠, 왼쪽 가장자리의 맨 아래 홀드 앞으로 걸어갔다⁠. 아무도 휘준을 막지 않았다⁠. 엄팔용이 몇 걸음 뒤에서 따라오다 멈췄다⁠. 휘준은 맨 아래 홀드 앞에 서서 딸을 올려다보았다⁠. 손을 코트 주머니에서 꺼냈다⁠. 무엇을 할지 모르는 손이었다⁠. 휘준은 손바닥을 맨 아래 홀드에 댔다⁠. 오버행의 낡은 파란 홀드였다⁠. 굳은살 없는 마른 손바닥이 닳은 결 위에 얹혔다⁠.

주아가 이마를 떼고 다시 내려오기 시작했다⁠.

*

맨 아래에서 두 번째 홀드는 초록이었다⁠. 주아의 오른발이 초록 홀드에 닿았다⁠. 주아가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매트가 가까웠다⁠. 주아가 웃었다⁠. 이번에는 숨을 들이켜지 않았다⁠.

객석 뒤편에서 철공소 사장이 목이 쉰 소리로 외쳤다⁠.

“⁠두 번째다⁠! 거기서 떨어지면 매트가 가깝다⁠!⁠”

웃음이 터졌다⁠. 수백 명이 한꺼번에 웃었다⁠. 웃음 끝에 박수가 따라왔다⁠. 주아는 초록 홀드를 딛고 맨 아래 파란 홀드를 잡았다⁠. 휘준의 손이 아직 홀드 위에 있었다⁠. 주아의 손이 아버지의 손 바로 옆에 내려앉았다⁠. 닿지는 않았다⁠.

주아가 매트에 내려섰다⁠. 다리가 풀려 무릎이 꺾였다⁠. 맨 앞줄의 석빈이 휠체어 바퀴를 밀어 매트 끝까지 나왔다⁠. 손을 뻗었다⁠. 주아가 석빈의 손을 잡고 몸을 세웠다⁠.

“⁠「⁠국기 게양⁠」보다 어렵네요⁠.⁠” 주아가 말했다⁠.

“⁠내려오는 게 원래 더 어려워⁠.⁠” 석빈이 말했다⁠. 석빈은 무릎 위의 김장 비닐 꾸러미를 풀었다⁠. 깨진 홀드 반쪽이 나왔다⁠. 귀퉁이에 「⁠대전 1022⁠」 조각이 맞물려 있었다⁠. 묵은지 냄새가 매트 위에 퍼졌다⁠. 석빈은 반쪽을 주아의 손바닥에 올렸다⁠. “⁠니가 떼어 간 거⁠, 다시 붙었다⁠.⁠”

주아는 하네스 고리에서 오늘 깨진 핀치 반쪽을 빼냈다⁠. 두 조각을 나란히 손바닥에 올려 보았다⁠. 다른 해⁠, 다른 벽에서 깨진 홀드였다⁠. 단면은 같았다⁠. 희끗하고 거칠었다⁠.

해람이 다가왔다⁠. 증거물 봉투를 두 개 펼쳤다⁠. 주아는 조각 둘을 하나씩 봉투에 넣었다⁠. 넣기 전에 손바닥으로 한 번씩 눌렀다⁠.

*

휘준이 맨 아래 홀드에서 손을 떼고 딸 앞으로 왔다⁠. 손바닥에 파란 홀드의 초크가 묻어 있었다⁠.

“⁠어깨는 괜찮니⁠?⁠”

“⁠아파요⁠.⁠”

“⁠병원 가자⁠. 차가 있다⁠.⁠”

“⁠아빠⁠.⁠” 주아가 말했다⁠. 귀의 마이크는 아직 켜져 있었다⁠. 유리 상자 안의 스피커가 주아의 목소리를 실어 날랐다⁠. “⁠나 오늘 밤 비행기 안 타요⁠.⁠”

“⁠주아야⁠.⁠”

“⁠그리고 형사님하고 갈 거예요⁠. 아빠 차 말고⁠.⁠” 주아는 해람을 보았다⁠. “⁠형사님⁠. 저 평창동 방에 열이틀 있었어요⁠. 문은 밖에서 잠겼어요⁠. 아홉 시가 아니라 하루 종일요⁠. 제 발로 나간 적 없어요⁠. 영상도 실장님 앞에서 찍었어요⁠. 무릎은 제가 일부러 눌렀고요⁠.⁠”

해람이 수첩을 폈다⁠. 펜이 빠르게 움직였다⁠.

“⁠카드에 뭐가 있었는지도 다 말할게요⁠. 공장에서 굳히는 시간을 반으로 줄인 거⁠, 시험에서 금 간 거⁠, 대전점이랑 다른 두 군데서 깨진 거⁠, 석빈 씨 합의서⁠. 아빠 서재 파쇄기에 들어갔어도⁠, 제가 다 읽고 넣은 거예요⁠. 제 머리는 파쇄기가 못 갈아요⁠.⁠”

휘준은 딸을 보았다⁠. 오래 보았다⁠. 객석의 휴대전화들이 내려가지 않았다⁠. 나롱이 휴대전화를 머리 위로 든 채 숨을 참고 있었다⁠.

“⁠나는 너를 지킨 거다⁠.⁠” 휘준이 말했다⁠. 목소리가 낮았다⁠. 정중함이 다 빠진 목소리였다⁠. “⁠네가 터뜨리면 직원 팔백 명이 다친다⁠. 체인 열두 곳이 흔들려⁠. 그 사람들 밥줄이 네 손에 있어⁠.⁠”

“⁠알아요⁠.⁠” 주아가 말했다⁠. “⁠그 사람들한테도 말할게요⁠. 석빈 씨한테 먼저 했고요⁠. 다음은 저 위에서 매일 벽 탈 팀장님네 팀이에요⁠. 그 사람들도 매달리잖아요⁠. 아빠 홀드에⁠.⁠”

세팅 팀장이 객석 옆 통로에 서 있었다⁠. 「⁠HEAD OF SETTING⁠」 자수 위로 팔짱을 끼고 있다가⁠, 주아의 말에 팔짱을 풀었다⁠.

“⁠아빠는 나를 샀어요⁠. 열 살 때 벽 방부터요⁠. 나는 그 방이 좋았어요⁠. 진짜로요⁠. 근데 아빠가 밖에 자물쇠를 다는 순간부터 그 방은 아빠 거였어요⁠.⁠” 주아가 분홍 신발 끝으로 매트를 한 번 구르고 마이크를 껐다⁠. 마지막 말은 스피커를 타지 않았다⁠. 휘준만 들었다⁠. 태하는 입 모양으로 읽었다⁠. “⁠이번에는 내 손으로 내려왔어요⁠.⁠”

휘준은 대답하지 않았다⁠. 손바닥을 내려다보았다⁠. 파란 홀드의 초크가 손금 사이에 하얗게 끼어 있었다⁠. 휘준은 손을 코트에 닦지 않았다⁠.

해람이 휘준 곁으로 갔다⁠.

“⁠탁휘준 씨⁠. 같이 가시죠⁠. 지금은 동행 요청이에요⁠. 거절하셔도 되는데⁠, 거절하시면 저는 오늘 판사님을 다시 깨워야 해요⁠. 판사님이 토요일엔 기분이 좋으시대요⁠.⁠”

휘준은 엄팔용을 돌아보았다⁠. 엄팔용은 귀의 꼬불꼬불한 줄을 손가락으로 빼냈다⁠. 줄을 손바닥에 감아 쥐고⁠, 휘준을 따라오지 않았다⁠. 휘준은 한참 엄팔용을 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해람을 따라 출입문으로 걸었다⁠. 유리문이 열리고⁠, 바깥 보도에 몰려 있던 사람들이 길을 텄다⁠. 휘준은 차가 기다리는 쪽으로 가지 않았다⁠. 해람의 낡은 차가 서 있는 길모퉁이로 걸어갔다⁠.

*

1월 둘째 주⁠, 문래동 철공소 골목에 눈이 조금 왔다가 녹았다⁠.

오버행 셔터는 내려가 있었다⁠. 셔터에 종이 두 장이 붙어 있었다⁠. 은행의 경매 안내문과⁠, 나롱이 매직으로 쓴 쪽지였다⁠. 「⁠여기 벽이 있었어요⁠. 지금은 아래층에 있어요⁠」

신문과 화면은 몇 주째 같은 이름을 돌렸다⁠. 「⁠한번컴퍼니 상장 신청 철회⁠」 「⁠한번그립 전 제품 회수⁠… 협회 안전 인증 전면 재검사⁠」 「⁠탁휘준 대표⁠, 감금 혐의로 구속 기소⁠」 기사 몇 줄 아래에는 다른 이름들도 있었다⁠. 지문호 전 오버행 대표⁠, 증거 인멸 혐의로 불구속 재판⁠. 하석빈 씨⁠, 합의금 반환 소송 중⁠. 편세빈 씨에 대한 횡령 고소는 취하되지 않았다⁠. 한번 쪽 변호사가 바뀌었고⁠, 새 변호사는 소금을 맞지 않았다⁠.

석빈의 어머니는 대전 집을 팔았다⁠. 같은 동네 1층 작은 집으로 옮겼다⁠. 태하와 철공소 사장이 대전에 내려가 경사로를 새로 깔았다⁠. 사장이 공장 철판을 잘라 와서 깔았다⁠. 녹슬지 말라고 칠까지 했다⁠. 철봉은 떼어 와 새집 문틀에 끼웠다⁠. 문틀이 조금 넓어서⁠, 사장이 양 끝에 쇠를 덧대 용접했다⁠. 태하가 헤드 세터로 받은 돈은 첫 달 치 반환금이 되었다⁠. 남은 것은 태하가 다음 짐에서 갚기로 했다⁠. 다음 짐은 아직 없었다⁠.

주아는 평창동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어머니의 일산 꽃집 위층에 방을 하나 얻었다⁠. 카드는 다 정지됐다⁠. 분홍 암벽화 말고는 들고 나온 것이 없었다⁠. 주아는 낮에는 꽃집에서 꽃대를 다듬고⁠, 저녁에는 문래동에 왔다⁠. 손톱 끝이 초록 물에 들었다⁠.

*

토요일 오후⁠, 철공소 셔터가 끝까지 올라가 있었다⁠.

공장 안쪽 벽 한 면을 사장이 비웠다⁠. 선반 기계 두 대를 옮기고⁠, 녹슨 쇠벽에 두꺼운 철판을 덧댔다⁠. 철판에 구멍을 뚫고 뒤에서 너트를 용접했다⁠. 너트 마흔 개⁠. 볼트가 들어갈 구멍이었다⁠. 벽 높이는 3미터⁠. 성수의 유리 벽에 대면 사다리 하나 높이였다⁠. 벽 아래에 오버행에서 나온 낡은 매트 두 장이 깔렸다⁠. 경매 목록에 없는 매트였다⁠. 나롱이 데스크 의자와 함께 몰래 빼 왔다고 했다⁠.

세빈이 사다리에 올라 볼트를 손으로 돌려 끼웠다⁠. 석빈이 휠체어에 앉아 아래에서 홀드를 하나씩 위로 건넸다⁠. 석빈은 이번 주에도 대전에서 KTX를 타고 왔다⁠. 휠체어석 할인이 된다며 표를 자랑했다⁠. 문호는 매트 끝 플라스틱 의자에 앉아 무릎을 문지르고 있었다⁠. 국가대표 운동복은 이제 입지 않았다⁠. 문호의 손에 초크 주머니가 들려 있었다⁠. 코치 셋이 공장 문간에 서서 담배 대신 귤을 까먹었다⁠. 손가락 굽은 코치는 성수 플래그십에서 일자리를 얻었다⁠. 세팅 팀장이 불렀다⁠. 다른 둘은 아직 일자리를 찾는 중이었다⁠.

나롱이 휴대전화를 들었다⁠. 부계정이었다⁠. 구독자가 이만이 되었다고 했다⁠. 회사 계정이 된 본계정은 지난주에 사라졌다⁠.

“⁠쌤⁠, 이 문제 이름 뭐예요⁠? 제목 써야 돼요⁠.⁠”

“⁠「⁠유턴⁠」⁠”

“⁠또요⁠? 그거 저번 거잖아요⁠.⁠”

“⁠홀드가 같아⁠.⁠”

태하는 가방에서 보라 홀드 여덟 개를 꺼냈다⁠. 「⁠유턴⁠」을 맨벽으로 만들던 밤에 제 손으로 떼어 온 홀드들이었다⁠. 철판의 구멍마다 하나씩 대고 볼트를 손으로 돌렸다⁠. 렌치로 마지막을 조였다⁠. 가운데 자리에는 색 바랜 큰 슬로퍼를 달았다⁠. 세팅 팀장이 하역장에서 돌려준 홀드였다⁠. 누런 안쪽의 하얀 네모가 철판을 향했다⁠.

손바닥을 펴서 눌렀다⁠. 홀드는 돌지 않았다⁠. 철판 뒤의 너트가 단단했다⁠. 사장이 용접한 너트였다⁠.

맨 아래⁠, 두 손 스타트 옆에 사장이 초록 홀드 하나를 따로 달았다⁠. 문제와 상관없는 홀드였다⁠. 사장은 초록 홀드를 손바닥으로 툭 쳤다⁠.

“⁠두 번째다⁠. 내 거⁠.⁠”

주아가 신발장 대신 쇳조각 상자 위에 앉아 분홍 암벽화의 끈을 조였다⁠. 오른발 앞코의 초크는 이제 다 지워졌다⁠. 새 초크를 찍은 손이 하얬다⁠. 주아는 스타트 두 홀드를 두 손으로 잡았다⁠. 셔터 너머로 겨울 해가 낮게 들어와 쇠벽을 비스듬히 갈랐다⁠. 철판이 햇빛을 받아 따뜻한 색으로 빛났다⁠.

주아는 3미터를 올랐다⁠. 꼭대기 홀드를 두 손으로 잡았다⁠. 뛰어내리지 않았다⁠. 잠깐 매달려 숨을 고르고⁠, 오른발을 내려 올라온 길을 거꾸로 짚었다⁠. 가운데의 큰 슬로퍼에서 멈췄다⁠. 두 손바닥을 펴서 눌렀다⁠. 사십 초까지 가지 않았다⁠. 손을 떼고 다음 홀드로 내려갔다⁠.

태하는 매트 끝에 서서 손을 들지 않았다⁠. 받을 손이 필요 없는 높이였다⁠.

분홍 암벽화가 초록 홀드 하나를 지나 매트에 닿았다⁠. 철판 위 큰 슬로퍼에 작은 손바닥 두 개가 하얗게 남아⁠, 셔터로 들어오는 햇빛 속에서 천천히 말라 갔다⁠.

여기까지가 지금까지 나온 이야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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