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화(5,334자)

밤의 세팅

클라이밍 짐 회원이 실종됐다 · 류시안

새벽 한 시⁠, 성수 플래그십의 유리문을 밀고 들어가자 세빈이 매트에 엎드려 자고 있었다⁠. 오버행 홀드 두 개를 양팔에 끌어안은 채였다⁠. 둘 다 노란색이었다⁠. 세빈의 볼에 매트 무늬가 찍혀 있었다⁠. 벽에는 홀드가 열두 개 붙어 있었다⁠. 스타트 두 개와 처음 몇 개였다⁠. 볼트 구멍 사천이백 개 가운데 열두 개⁠. 세빈은 열두 개를 박는 데 여섯 시간을 썼다고 했다⁠. 하나 박을 때마다 손바닥으로 누르고⁠, 못 미더워서 한 번 더 눌렀다고⁠.

태하가 가방을 내려놓자 「⁠유턴⁠」 홀드 여덟 개가 부딪치는 소리에 세빈이 벌떡 일어났다⁠.

“⁠죄송해요⁠. 안 잤어요⁠. 눈만 감았어요⁠.⁠”

“⁠삼 분 동안⁠?⁠”

“⁠한 시간이요⁠.⁠” 세빈은 볼의 매트 무늬를 문질렀다⁠. “⁠형⁠, 오버행 어떻게 됐어요⁠?⁠”

“⁠맨벽⁠.⁠”

세빈은 끌어안고 있던 노란 홀드를 내려다보았다⁠. 한참 말이 없었다⁠. 태하는 가방에서 「⁠유턴⁠」 홀드를 꺼내 매트에 늘어놓았다⁠. 여덟 개⁠. 가운데 하나가 빈 자리⁠.

“⁠이거 다 달 거예요⁠?⁠”

“⁠응⁠. 라운지에서 안 보이는 자리에⁠.⁠”

*

태하는 사다리 대신 로프를 탔다⁠. 18미터 벽 꼭대기의 쇠고리에 로프를 걸고⁠, 몸을 매달아 오르내리며 볼트를 박았다⁠. 세빈이 아래에서 홀드를 하나씩 줄에 묶어 올려 보냈다⁠. 유리 벽 바깥은 캄캄했고⁠, 가로등 아래로 이따금 택시가 지나갔다⁠. 바깥에서 보면 불 켜진 유리 상자 안에 사람 하나가 거미처럼 매달려 있을 것이었다⁠.

문제는 손이 먼저 알았다⁠. 태하는 볼트 구멍을 하나씩 손가락으로 짚어 가며 길을 그렸다⁠.

스타트는 두 손이었다⁠. 「⁠유턴⁠」과 같았다⁠. 첫 몇 홀드는 쉽게 갔다⁠. 축제에 온 사람들이 앰버서더가 가볍게 올라가는 것을 보고 박수를 치게⁠. 6미터부터 벽이 앞으로 기울었다⁠. 유리 너머 거리의 가로등이 발밑으로 내려갔다⁠. 거기서 얇은 크림프를 두 개 달았다⁠. 「⁠유턴⁠」의 크림프였다⁠. 손가락 첫 마디만 겨우 얹히는 홀드⁠. 9미터에 가운데 고비를 둘 자리를 비워 두었다⁠. 큰 홀드 하나가 들어갈 자리였다⁠.

12미터에서 태하는 분필 동그라미 앞에 멈췄다⁠. 고개를 돌리면 VIP 라운지 유리 난간이 바로 눈앞이었다⁠. 소파 팔걸이의 가죽 결까지 보였다⁠. 태하는 동그라미 자리에 한번그립의 작은 홀드를 박았다⁠. 로고가 보이게⁠. 한 손으로 잡으면 몸이 저절로 라운지를 향해 돌아가는 홀드였다⁠. 이 홀드 하나만 잡고 몸을 가로로 띄우면⁠, 라운지에 앉은 사람과 벽에 매달린 사람의 얼굴이 사람 키 하나 거리로 마주 본다⁠.

꼭대기는 18미터였다⁠. 마지막 홀드는 두 손으로 잡는 큰 홀드였다⁠.

그리고 내려오는 길이 있었다⁠.

태하는 꼭대기 홀드 왼편에서 시작해 벽의 반대편 가장자리를 따라 아래로 내려가는 길을 짰다⁠. 오버행의 낡은 홀드로만 짰다⁠. 라운지에서는 기둥에 가려 보이지 않는 자리였다⁠. 올라오는 길과 한 번도 겹치지 않았다⁠. 내려오는 길의 홀드는 위에서 내려다볼 때 손에 잡히게⁠, 발 홀드는 벽에 배를 붙이면 발끝에 닿게 놓았다⁠. 「⁠유턴⁠」을 내려오던 주아가 발로 더듬던 자리를 생각하며 박았다⁠. 맨 아래 홀드는 벽 왼쪽 끝⁠, 맨 앞줄 객석 바로 앞이었다⁠. 휠체어석이 놓일 자리였다⁠.

맨 아래에서 두 번째 홀드는 철공소 사장의 초록 홀드였다⁠. 사장이 작업복 주머니에 넣었다가 밤에 퀵으로 보내 준 홀드였다⁠. 퀵 상자 안에 쪽지가 있었다⁠. 「⁠두 번째에서 떨어지면 매트가 가깝다⁠」

*

새벽 세 시⁠, 유리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해람이었다⁠. 운동화를 신고 있었다⁠. 한정판 다섯 달 치⁠. 손에 커다란 비닐 봉투를 들고 있었다⁠. 봉투 안에 누런 보라색이 비쳤다⁠.

세빈이 문을 열어 주자 해람은 매트 앞에서 운동화를 한 번 내려다보고 그대로 올라섰다⁠.

“⁠이거 매트용이니까 괜찮죠⁠?⁠”

“⁠형사님⁠, 그거 바깥에서 신고 오셨잖아요⁠.⁠” 세빈이 말했다⁠.

“⁠아⁠.⁠” 해람은 운동화를 벗었다⁠. 양말 바람으로 서서 봉투를 태하에게 내밀었다⁠. “⁠감식 끝났어요⁠. 급하다고 졸랐어요⁠. 안쪽 테이프 자국에서 지문 하나 떴어요⁠. 탁주아 씨 거 맞아요⁠. 사진이랑 감식 결과는 서류에 다 붙였고⁠, 홀드는 원래 주인한테 돌려주는 걸로 했어요⁠. 제 재량이라고 해 두죠⁠. 나중에 혼나면 공태하 씨가 훔쳐 갔다고 할게요⁠.⁠”

태하는 봉투를 받았다⁠. 비닐 너머로 손바닥이 홀드의 결을 알아보았다⁠. 맨들맨들한 바깥⁠, 가운데의 고운 결⁠.

“⁠영장은요⁠?⁠”

“⁠아침에 나와요⁠. 판사님이 밤새 고민하신대요⁠.⁠” 해람은 벽을 올려다보았다⁠. 18미터 꼭대기까지 목이 꺾였다⁠. “⁠이걸 따님이 오른다고요⁠? 저는 두 번째도 못 갔는데⁠.⁠”

“⁠한번 해 보실래요⁠? 스타트요⁠.⁠”

해람이 스타트 두 홀드를 두 손으로 잡았다⁠. 엉덩이가 매트에서 떴다⁠. 한 뼘이었다⁠. 해람은 엉덩이를 띄운 채 얼굴이 빨개지도록 버티다가 오른발을 첫 발 홀드에 올렸다⁠. 몸이 한 뼘 더 올라갔다⁠. 해람은 그대로 매트에 떨어졌다⁠. 엉덩방아를 찧고 누워서 천장을 보며 말했다⁠.

“⁠저 늘었어요⁠?⁠”

“⁠한 뼘이요⁠.⁠”

“⁠한 주에 한 뼘이면⁠, 18미터는 몇 년이에요⁠?⁠”

세빈이 손가락을 꼽다가 그만두었다⁠. 해람이 누운 채로 손바닥을 들어 보았다⁠. 손바닥 한가운데가 초크로 하얬다⁠.

*

새벽 네 시⁠, 로프에 매달려 15미터의 볼트를 조이고 있는데 주머니에서 휴대전화가 떨렸다⁠. 석빈이었다⁠. 태하는 한 손으로 로프를 쥐고 전화를 받았다⁠.

“⁠안 자냐⁠?⁠”

“⁠너도 안 자잖아⁠.⁠”

“⁠나는 앉아서 안 자는 거고⁠, 너는 매달려서 안 자는 거고⁠.⁠” 석빈의 목소리 뒤로 텔레비전 소리가 났다⁠. “⁠엄마가 어제 부동산 다녀왔다⁠. 집 내놨어⁠. 부동산 아저씨가 경사로 보고 값이 깎인대⁠. 엄마가 아저씨 등에 소금 뿌릴 뻔했다⁠.⁠”

태하는 웃었다⁠. 웃다가 로프가 흔들려서 벽을 짚었다⁠.

“⁠문제 다 짰냐⁠?⁠”

“⁠반⁠.⁠”

“⁠어떻게 내려와⁠? 꼭대기에서⁠.⁠”

“⁠왼쪽 가장자리로⁠. 거꾸로 짚으면서⁠. 맨 아래 홀드가 맨 앞줄 앞이야⁠. 휠체어석⁠.⁠”

전화 너머가 한참 조용했다⁠. 텔레비전 소리만 났다⁠.

“⁠내 앞으로 내려오라고⁠?⁠” 석빈이 말했다⁠. “⁠내가 받아 주냐⁠? 앉아서⁠?⁠”

“⁠앉아서 받으면 돼⁠. 손은 니가 나보다 일 초 더 버티잖아⁠.⁠”

“⁠그건 「⁠국기 게양⁠」이고⁠.⁠” 석빈이 코를 훌쩍였다⁠. “⁠토요일에 홀드 반쪽 무릎에 올려놓고 앉아 있을게⁠. 형사한테 주고⁠, 그 애 내려오면 그 애 손에도 한 번 쥐여 줄 거다⁠. 그 애가 반쪽 떼어 갔잖아⁠. 반쪽이 다시 붙는 거 보여 줘야지⁠.⁠”

“⁠김치 냄새 나⁠.⁠”

“⁠그것도 증거야⁠.⁠”

석빈이 전화를 끊었다⁠. 태하는 로프에 매달린 채 15미터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세빈이 매트에 누워 있었고⁠, 해람이 매트 끝에 양말 바람으로 앉아 휴대전화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왼쪽 가장자리의 낡은 홀드 줄이 아래로 이어졌다⁠. 맨 아래 홀드 앞의 빈 바닥에 토요일이면 휠체어 하나가 놓일 것이었다⁠.

새벽 다섯 시⁠, 태하는 9미터 고비 자리에 원래 슬로퍼를 박았다⁠. 손으로 먼저 돌리고⁠, 렌치로 마지막을 조였다⁠. 로프에 매달린 채 손바닥을 펴서 눌렀다⁠. 홀드는 돌지 않았다⁠. 안쪽의 하얀 네모는 벽을 향해 있어서 아무에게도 보이지 않았다⁠. 바깥은 색이 바랜 보라색이었다⁠. 한번그립 로고는 없었다⁠.

아래에서 유리문 열리는 소리가 났다⁠.

휘준이었다⁠. 남색 코트에 목도리를 둘렀다⁠. 엄팔용이 뒤에 섰다⁠. 휘준은 이른 새벽에도 머리를 단정하게 넘기고 있었다⁠. 매트 앞에서 멈춰 벽을 올려다보았다⁠. 시선이 스타트에서 크림프로⁠, 크림프에서 9미터로 천천히 올라왔다⁠. 태하의 손이 아직 슬로퍼 위에 있었다⁠.

“⁠잠이 안 와서 와 봤습니다⁠.⁠” 휘준이 말했다⁠. 목소리가 유리 상자 안에 울렸다⁠. “⁠좋은 문제가 되겠군요⁠. 로프 위에서 내려오시겠어요⁠?⁠”

태하는 로프를 타고 내려왔다⁠. 세빈이 매트 끝으로 물러났다⁠. 해람은 매트 가장자리에 양말 바람으로 앉아 있었다⁠. 휘준이 해람을 보고 고개를 숙였다⁠.

“⁠형사님도 계셨군요⁠. 새벽 세 시에 오셨다고 실장이 그러더군요⁠.⁠”

엄팔용이 9미터의 슬로퍼를 올려다보았다⁠. 휘준에게 다가가 귓가에 무언가 말했다⁠. 휘준이 고개를 끄덕였다⁠.

“⁠저 홀드⁠, 우리 로고가 없군요⁠.⁠”

“⁠제 홀드예요⁠. 주아 씨가 좋아한 홀드요⁠.⁠”

“⁠실장 말로는⁠, 딸이 무언가를 붙여 두었던 그 홀드라고요⁠.⁠” 휘준이 웃었다⁠. “⁠다세요⁠. 저는 홀드에 무슨 의미가 있는지 모릅니다⁠. 저기 붙어 있던 건 이미 제 손에 있고요⁠. 딸이 좋아한 홀드라면 됐지요⁠.⁠”

휘준은 시선을 꼭대기로 올렸다가⁠, 벽 왼편 가장자리를 따라 내려오는 낡은 홀드 줄을 보았다⁠. 라운지에서는 보이지 않는 줄이었다⁠. 바닥에서는 보였다⁠.

“⁠저건 뭡니까⁠?⁠”

“⁠내려오는 길이요⁠.⁠”

“⁠필요 없습니다⁠.⁠” 휘준이 말했다⁠. 처음으로 말끝을 내리지 않았다⁠. “⁠딸은 꼭대기를 잡고 자동 확보기로 내려옵니다⁠. 한번 자동 확보기요⁠. 손을 놓으면 줄이 천천히 감기면서 내려 주지요⁠. 광고의 마지막 장면입니다⁠. 꼭대기에서 웃으며 손을 놓고⁠, 날개처럼 내려오는 딸⁠. 박수⁠. 그리고 차⁠.⁠”

“⁠주아 씨가 내려오는 길을 짜 달라고 했어요⁠.⁠”

“⁠딸은 원하는 게 많다고 말씀드렸지요⁠.⁠” 휘준이 엄팔용을 돌아보았다⁠. “⁠축제 끝나고 저 홀드들은 떼어 주세요⁠. 오늘 밤 안에⁠.⁠”

“⁠리허설 전에는 안 돼요⁠.⁠” 태하가 말했다⁠. “⁠문제 전체 무게가 바뀌어요⁠. 헤드 세터가 정해요⁠.⁠”

휘준이 태하를 보았다⁠. 한참 보았다⁠.

“⁠그럼 리허설 끝나고 떼지요⁠.⁠”

*

일곱 시⁠, 유리 벽 바깥이 밝아 왔다⁠. 출근하는 사람들이 유리 상자 안의 18미터 벽을 올려다보았다⁠. 벽은 아직 반밖에 차지 않았지만⁠, 보라색과 색 바랜 홀드들이 아래부터 위까지 한 줄로 이어져 있었다⁠.

세빈의 휴대전화가 울렸다⁠. 나롱이었다⁠. 세빈이 화면을 태하에게 보여 주었다⁠. 나롱이 부계정에 올린 사진 한 장이었다⁠. 오버행의 맨벽⁠. 구멍마다 남은 하얀 초크 그림자⁠. 글은 한 줄이었다⁠. 「⁠여기 벽이 있었어요⁠」 하룻밤 새 조회수가 팔만이었다⁠. 댓글 맨 위에 누군가 달아 두었다⁠. 「⁠구멍 둘레 하얀 거 다 손자국이에요⁠? 소름⁠」 몇 줄 아래에 철공소 사장의 댓글이 있었다⁠. 「⁠초록 구멍 두 번째는 내 거다⁠. 십 년 치 손자국이다⁠」 사장은 댓글에 하트를 받아 본 것이 처음이라며 나롱에게 새벽부터 전화를 세 번 했다고 했다⁠.

해람의 휴대전화가 울렸다⁠. 해람은 양말 바람으로 매트 끝에서 일어나 전화를 받았다⁠. 짧은 통화였다⁠. 해람은 전화를 끊고 한동안 화면을 내려다보았다⁠.

“⁠기각이에요⁠.⁠” 해람이 말했다⁠. “⁠성인 딸이 아버지 집에서 지내는 건 본인 의사 문제래요⁠. 영상으로 의사도 확인됐고⁠. 뒷문 번호는 아버지가 딸을 데리러 간 정황으로 볼 수 있대요⁠.⁠”

매트 앞에 서 있던 휘준이 해람의 말을 다 들었다⁠. 휘준은 벽 아래 한쪽에 설치된 자동 확보기 앞으로 걸어갔다⁠. 보라색 기계 몸통에 한번 로고가 박혀 있었다⁠. 휘준은 기계에서 늘어진 줄 끝의 고리를 손에 쥐고 해람을 돌아보았다⁠.

“⁠형사님도 한번 체험해 보시지요⁠. 무료로 해 드리겠습니다⁠. 손을 놓으면 천천히 내려 줍니다⁠. 아무도 안 다쳐요⁠.⁠”

휘준은 웃었다⁠. 줄 끝의 고리가 휘준의 마른 손바닥 위에서 가볍게 흔들렸다⁠.

12화는 어땠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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