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화(5,304자)

맨벽

클라이밍 짐 회원이 실종됐다 · 류시안

목요일 아침 일곱 시⁠, 태하가 셔터를 올리자 계단 아래에서 문호가 올라오고 있었다⁠. 무릎을 끄는 소리가 한 칸에 두 번씩 났다⁠. 문호는 패딩 대신 오래된 국가대표 운동복을 입고 있었다⁠. 가슴의 태극기 자수가 보풀에 덮여 희미했다⁠.

“⁠이거 아직 맞더라⁠. 배가 나와서 지퍼는 안 올라가⁠.⁠”

문호는 신발장 앞에 앉아 낡은 암벽화를 꺼냈다⁠. 은퇴하고 열 해 동안 신발장 맨 아래 칸에 넣어 두기만 한 신발이었다⁠. 고무가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문호는 신발에 발을 밀어 넣다가 얼굴을 찡그렸다⁠.

“⁠발이 컸네⁠. 나이 먹으면 발도 크냐⁠?⁠”

“⁠발이 부은 거예요⁠.⁠”

“⁠그게 그거지⁠.⁠”

둘은 「⁠유턴⁠」 앞에 섰다⁠. 채광창으로 들어온 아침 해가 벽을 비스듬히 갈랐다⁠. 보라 홀드 여덟 개와⁠, 가운데 빈 볼트 구멍 하나⁠. 해람이 원래 슬로퍼를 증거물로 떼어 간 자리였다⁠.

“⁠먼저 해 봐⁠.⁠” 문호가 말했다⁠.

“⁠같이 해요⁠.⁠”

문호는 웃었다⁠. 두 손으로 스타트 홀드를 잡았다⁠. 태하가 옆에서 문호의 허리 뒤에 손을 대고 섰다⁠. 떨어지면 받을 손이었다⁠. 문호는 왼발을 들어 첫 발 홀드에 올렸다⁠. 오른발이 매트에서 떨어졌다⁠. 무릎이 펴지지 않아서 몸이 벽에 바짝 붙지 못했다⁠. 엉덩이가 뒤로 빠졌다⁠. 문호는 엉거주춤한 자세로 숨을 몰아쉬었다⁠.

“⁠크림프⁠.⁠” 문호가 말했다⁠. “⁠크림프 어디 있냐⁠?⁠”

“⁠왼손 위로 한 뼘이요⁠.⁠”

문호가 왼손을 뻗었다⁠. 손가락 첫 마디가 얇은 크림프에 겨우 얹혔다⁠. 열 해 동안 펜과 계산기만 쥔 손가락이 하얗게 질렸다⁠. 문호의 팔이 떨렸다⁠. 태하는 허리 뒤의 손에 힘을 주지 않았다⁠. 문호의 몸무게는 아직 문호의 손에 있었다⁠.

크림프 위가 빈 구멍이었다⁠. 손을 뻗으면 닿을 거리였다⁠. 문호는 오른손을 뻗었다⁠. 손가락을 펴서 빈 구멍 둘레의 합판에 손바닥을 댔다⁠. 잡을 것이 없는 자리였다⁠. 손바닥이 합판에 붙었다가 미끄러졌다⁠. 문호는 손을 떼지 않고 다시 눌렀다⁠. 손가락을 다 펴고⁠, 꾹⁠.

태하의 손바닥이 저릿했다⁠. 문호는 홀드가 도는지 보는 법을 몰랐다⁠. 홀드를 손으로 고를 줄도 몰랐다⁠. 열 해 전 상비군 훈련장에서 문호는 태하와 석빈에게 소리를 지르며 웃었고⁠, 둘이 손바닥으로 홀드를 누르는 것을 그저 보기만 했다⁠.

“⁠이렇게 하는 거냐⁠?⁠”

“⁠네⁠.⁠”

“⁠아가씨도 이렇게 했냐⁠?⁠”

“⁠네⁠. 사십 초요⁠.⁠”

문호는 십 초를 버티지 못했다⁠. 크림프에서 손가락이 빠졌고 몸이 뒤로 떨어졌다⁠. 태하가 등을 받아 매트에 눕혔다⁠. 문호는 누운 채로 천장을 보았다⁠. 채광창 너머로 겨울 하늘이 하얗게 비었다⁠.

“⁠태하야⁠. 수술비는 이걸로 됐다⁠.⁠”

“⁠저 아직 한 푼도 안 갚았어요⁠.⁠”

“⁠니가 나를 경찰서에 보냈잖아⁠. 그걸로 갚은 거다⁠.⁠” 문호는 손바닥을 눈앞에 들어 보았다⁠. 합판의 먼지가 하얗게 묻어 있었다⁠. “⁠석빈이 엄마가 집을 판다며⁠. 그 집 대출을 이억으로 갚은 건 회장님 돈이고⁠, 그 돈 받으라고 석빈이 등을 민 것도 나다⁠. 니 수술비 낸 것보다 그게 더 크다⁠.⁠”

태하는 대답하지 않았다⁠. 문호도 대답을 기다리지 않았다⁠. 문호는 한참 누워 있다가 일어나 앉아 딱딱한 암벽화를 벗었다⁠.

*

여덟 시⁠, 코치 셋이 출근하자 문호는 데스크 앞에 셋을 세웠다⁠. 나롱도 불렀다⁠. 태하는 리드벽 아래에 떨어져 섰다⁠.

문호는 말했다⁠. 새벽 두 시 이십 분의 전화⁠, 뒷문 번호⁠, 삭제한 화면⁠, 세빈에게 준 삼백만 원⁠, 휘준에게 넘긴 카드⁠, 아침 여섯 시 반에 찍은 도장⁠. 문호는 하나도 빼지 않았다⁠. 말하는 동안 존댓말이 점점 많아졌다⁠. 마지막에는 처음부터 끝까지 존댓말이었다⁠.

“⁠그래서 여러분 월급 봉투는 이달까지만 제가 채웁니다⁠. 다음 달은 모르겠습니다⁠. 죄송합니다⁠.⁠”

아무도 말이 없었다⁠. 냉장고 모터 소리만 났다⁠. 손가락 굽은 코치가 먼저 입을 열었다⁠. 굽은 검지로 데스크를 두드렸다⁠.

“⁠그 카드 하나 안 넘겼으면⁠, 우리 그달에 망했어요⁠?⁠”

“⁠네⁠.⁠”

“⁠망하면 우리 어디 가요⁠?⁠”

“⁠모르겠습니다⁠.⁠”

“⁠그럼 대표님은 우리 살리려고 아가씨를 판 거네요⁠.⁠”

문호가 고개를 숙였다⁠. 굽은 코치는 한참 문호를 내려다보다가 데스크에서 손을 뗐다⁠.

“⁠나는 손가락 끊어지고 이 짐 아니면 갈 데가 없었어요⁠. 대표님이 받아 줬고요⁠. 그건 잊어버릴 수가 없어요⁠.⁠” 코치의 목소리가 떨렸다⁠. “⁠근데 내가 아가씨였으면⁠, 대표님을 평생 용서 안 할 거예요⁠.⁠”

“⁠네⁠.⁠”

“⁠경찰서 혼자 가요⁠?⁠”

문호가 고개를 들었다⁠. 허리 나간 코치가 이미 패딩을 입고 있었다⁠. 발목 나간 코치가 문호의 패딩을 대표실에서 들고 나왔다⁠. 셋 다 오늘 오전 수업이 있었다⁠. 셋 다 데스크에 「⁠오전 수업 휴강⁠」을 써 붙였다⁠.

나롱이 데스크 아래에서 휴대전화를 꺼냈다⁠. 부계정이었다⁠. 회사 계정이 된 본계정 말고⁠, 고양이 사진만 올리던 계정이었다⁠. 나롱은 카메라를 켜지 않고 화면만 쥐었다⁠.

“⁠쌤⁠.⁠” 나롱이 태하에게 말했다⁠. “⁠저 이거 찍어도 돼요⁠? 대표님이랑 코치님들 계단 내려가는 거⁠. 조회수 안 나와도요⁠.⁠”

“⁠대표님한테 물어봐⁠.⁠”

나롱이 문호를 보았다⁠. 문호가 고개를 저었다⁠. 나롱은 휴대전화를 내렸다⁠. 대신 계단 꼭대기까지 따라가 문호의 등에 대고 말했다⁠.

“⁠대표님⁠, 경찰서 의자 편하면 저도 하나 사 주세요⁠. 데스크 의자가 다섯 해 됐어요⁠.⁠”

문호는 돌아보지 않았다⁠. 계단 중간에서 손을 들어 흔들었다⁠.

*

오후 세 시⁠, 철공소 골목에 한번 탑차 두 대가 들어왔다⁠. 보라색 바람막이를 입은 세팅 팀 여섯이 내렸다⁠. 맨 앞에 마케팅 직원이 태블릿을 들고 있었다⁠. 데스크 앞에 종이 한 장을 붙였다⁠. 「⁠오버행 by 한번 리뉴얼 — 금일 18시부터 임시 휴관⁠」

회원들이 웅성거렸다⁠. 리드벽에 매달려 있던 대학생 회원이 줄에 매달린 채로 물었다⁠.

“⁠금요일이라면서요⁠?⁠”

“⁠일정이 당겨졌습니다⁠.⁠”

태하는 성수에서 세빈에게 벽을 맡기고 문래동으로 달려와 있었다⁠. 마케팅 직원에게 다가갔다⁠.

“⁠누가 당겼어요⁠?⁠”

“⁠회장님이요⁠. 헤드 세터님은 성수에 계셔야 하는 거 아니에요⁠?⁠”

여섯 시⁠, 회원들이 쫓겨나듯 짐을 나갔다⁠. 여섯 시 십 분⁠, 드릴 소리가 짐을 채웠다⁠. 세팅 팀은 빠르게 일했다⁠. 볼트를 풀고⁠, 홀드를 마대에 던지고⁠, 다음 볼트를 풀었다⁠. 홀드가 마대 안에서 부딪치는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마대가 차면 계단 아래로 끌고 내려가 탑차에 실었다⁠. 드릴 소리 사이로 아래층 철공소의 선반 소리가 올라왔다⁠. 두 소리가 섞여서⁠, 누가 무엇을 깎는지 귀로는 가릴 수 없었다⁠.

태하는 45도 벽 앞을 막아섰다⁠. 세팅 팀 한 명이 「⁠유턴⁠」의 꼭대기 홀드에 드릴을 댔다⁠.

“⁠이건 제가 뗄게요⁠.⁠”

“⁠헤드 세터님이요⁠?⁠”

“⁠제 문제예요⁠. 제 손으로 뗄게요⁠.⁠”

세팅 팀원이 드릴을 내렸다⁠. 태하는 사다리에 올라가 「⁠유턴⁠」의 보라 홀드 여덟 개를 하나씩 손으로 풀었다⁠. 드릴을 쓰지 않았다⁠. 손으로 먼저 돌리고⁠, 렌치로 마지막을 풀었다⁠. 떼어 낸 홀드를 하나씩 손바닥에 올려 무게를 느꼈다⁠. 마대에 넣지 않고 제 가방에 넣었다⁠. 세팅 팀원은 말리지 않았다⁠.

*

여덟 시⁠, 검은 차가 골목에 들어왔다⁠. 탑차 두 대에 막혀 차는 골목 입구에서 멈췄다⁠. 휘준이 걸어서 들어왔다⁠. 엄팔용이 뒤를 따랐다⁠. 같은 시각에 큰길에서 문호와 코치 셋이 골목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경찰서에서 돌아오는 길이었다⁠.

철공소 앞에서 둘이 마주쳤다⁠. 철공소 셔터가 반쯤 내려와 있었고⁠, 셔터 아래로 용접 불빛이 새어 나왔다⁠.

“⁠지 대표님⁠.⁠” 휘준이 정중하게 말했다⁠. “⁠오늘 오후 이사회에서 대표님을 대표에서 내리기로 했습니다⁠. 서류는 내일 받으실 겁니다⁠. 경찰서는 편하셨습니까⁠?⁠”

“⁠의자가 편했습니다⁠.⁠”

“⁠다행입니다⁠.⁠” 휘준이 웃었다⁠. “⁠뒷문 번호 이야기를 하셨다고요⁠. 아버지가 딸 데리러 간다고 문 열어 달라고 한 이야기요⁠. 판사님이 그걸 어떻게 들으실지 궁금하군요⁠. 저는 아버지로서 딸을 데리러 갔습니다⁠. 지 대표님은 그걸 아시고 문을 열어 주셨고요⁠.⁠”

“⁠저는 데리러 가신다고 들었습니다⁠. 그런데 아가씨는 신발을 벗어 놓고 갔습니다⁠.⁠”

“⁠신발이 증거입니까⁠?⁠”

“⁠네⁠.⁠” 문호가 말했다⁠. “⁠제 증거는 그것뿐입니다⁠.⁠”

계단 위에서 마대 하나가 끌려 내려왔다⁠. 마대 입구로 초록 홀드 하나가 굴러 나와 골목 바닥에 떨어졌다⁠. 철공소 사장의 두 번째 홀드였다⁠. 철공소 셔터가 끝까지 올라갔다⁠. 사장이 용접 마스크를 쓴 채 나왔다⁠. 불붙은 용접봉을 든 손은 아래로 내리고⁠, 다른 손으로 초록 홀드를 주웠다⁠.

“⁠이봐요⁠, 회장님⁠. 이거 내 짱돌이야⁠. 십 년 동안 두 번째에서 떨어진 짱돌⁠.⁠”

“⁠회사 물건입니다⁠.⁠” 엄팔용이 말했다⁠.

“⁠회사가 십 년 동안 이걸 잡아 봤어⁠?⁠” 사장은 마스크를 올렸다⁠. 땀에 젖은 얼굴이 불빛에 번들거렸다⁠. “⁠나는 쇠 깎아서 먹고살아⁠. 니들은 뭘 깎아서 먹고사냐⁠? 사람을 깎냐⁠?⁠”

휘준은 사장을 보지 않았다⁠. 사장 말고 태하를 보았다⁠. 태하는 계단 아래에 「⁠유턴⁠」 홀드가 든 가방을 메고 서 있었다⁠.

“⁠공태하 씨는 축제까지는 헤드 세터입니다⁠.⁠” 휘준이 모두에게 들리게 말했다⁠. “⁠딸이 원하니까요⁠. 토요일까지 문제를 마치시면 됩니다⁠. 그 뒤로는 자유고요⁠.⁠”

코치 셋이 태하를 보았다⁠. 굽은 검지의 코치가 무언가 말하려다 그만두었다⁠. 문호만 태하를 보지 않았다⁠. 문호는 사장 손의 초록 홀드를 보고 있었다⁠.

휘준은 골목을 걸어 나갔다⁠. 엄팔용이 뒤따랐다⁠. 사장은 초록 홀드를 작업복 주머니에 넣고 셔터 안으로 들어갔다⁠. 용접 불빛이 다시 셔터 아래로 새어 나왔다⁠.

*

자정⁠, 마지막 탑차가 골목을 빠져나갔다⁠. 오버행에는 불이 다 켜져 있었다⁠. 형광등 불빛 아래 벽이 하얗게 드러났다⁠.

맨벽이었다⁠.

45도 벽도⁠, 리드벽도⁠, 볼더 구역의 벽들도 볼트 구멍만 남았다⁠. 구멍마다 둘레에 초크 자국이 동그랗게 남아 있었다⁠. 홀드가 붙어 있던 모양대로였다⁠. 열 해 동안 회원들 손이 닿은 자리마다 하얀 그림자가 찍혀 있었다⁠. 큰 홀드가 있던 자리는 그림자가 컸고⁠, 작은 크림프가 있던 자리는 손가락 한 마디만 했다⁠.

코치 셋이 매트에 서서 벽을 올려다보았다⁠. 손가락 굽은 코치가 리드벽 앞으로 갔다⁠. 제가 짜던 문제의 홀드 그림자를 손가락으로 짚어 가며 올려다보았다⁠. 허리 나간 코치는 볼더 구역 매트에 앉았다⁠. 발목 나간 코치는 신발도 벗지 않고 매트 가장자리에 서 있었다⁠. 나롱이 데스크에서 휴대전화를 들었다가 내렸다가⁠, 결국 들었다⁠. 카메라는 켜지 않았다⁠.

문호는 「⁠유턴⁠」이 있던 45도 벽 앞으로 걸어갔다⁠. 아침에 손바닥을 댔던 빈 구멍 둘레에 문호의 손자국이 아직 남아 있었다⁠. 손가락을 다 편⁠, 큰 손바닥이었다⁠.

태하는 계단 꼭대기에서 휴대전화를 보았다⁠. 세빈의 문자였다⁠. 「⁠형 언제 와요⁠. 벽이 넓어요⁠. 혼자 박으니까 무서워요⁠」 태하는 가방끈을 고쳐 멨다⁠. 가방 안에서 「⁠유턴⁠」 홀드 여덟 개가 서로 부딪쳤다⁠.

계단을 내려가기 전에 태하는 한 번 돌아보았다⁠. 맨벽 앞에 은퇴한 선수 넷이 서 있었다⁠. 아무도 벽에 손을 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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