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화(5,314자)

김치냉장고

클라이밍 짐 회원이 실종됐다 · 류시안

수요일 새벽⁠, 태하는 첫 KTX를 탔다⁠. 세빈에게는 성수 벽의 볼트 구멍을 다 닦아 두라고 했다⁠. 세빈은 문자로 답했다⁠. 「⁠구멍이 사천이백 개예요⁠. 형 돌아올 때쯤 제 손가락이 볼트가 돼 있을 거예요⁠」 태하는 답 대신 바나나 사진을 보냈다⁠. 세빈에게서 하트가 하나 돌아왔다⁠.

열차 안은 따뜻했고⁠, 앞자리 사람의 휴대전화에서 한번 광고가 작게 흘러나왔다⁠. 「⁠당신의 한 번을 위한 벽⁠」 창밖이 밝아 오는 동안 태하는 휴대전화로 해람의 문자를 다시 읽었다⁠. 어젯밤 열한 시에 온 문자였다⁠. 「⁠지 대표님 진술 받았어요⁠. 뒷문 번호⁠, 카드⁠, 다요⁠. 평창동 수색영장 신청했어요⁠. 판사님 기분이 좋으시길 빌어 주세요⁠」

*

석빈의 아파트 경사로 아래에 처음 보는 은색 차가 서 있었다⁠. 태하는 경사로를 올라 초인종을 눌렀다⁠. 문이 열리기도 전에 안에서 석빈 어머니의 목소리가 들렸다⁠.

“⁠소금 어디 뒀어⁠! 굵은소금⁠!⁠”

문을 연 것은 석빈이었다⁠. 휠체어를 문틀에 바짝 대고 있었다⁠. 석빈은 태하를 보고 한숨을 쉬었다⁠.

“⁠타이밍 좋다⁠. 안에 정장이 하나 있어⁠. 이번엔 우편함에 안 넣고 들어왔어⁠.⁠”

부엌 식탁에 남자가 앉아 있었다⁠. 월요일 오버행 리뉴얼 회의에서 세빈에게 확인서를 내밀던 변호사였다⁠. 식탁 위에 서류철과 봉투가 놓여 있었다⁠. 석빈의 어머니가 개수대 앞에서 소금 봉지를 쥐고 서 있었다⁠. 고무장갑을 끼고 있었다⁠.

변호사가 태하를 보고 눈썹을 올렸다⁠.

“⁠헤드 세터님이 여기는 웬일이세요⁠. 성수에 계셔야 하는 분이⁠.⁠”

“⁠홀드 사러 왔어요⁠.⁠”

“⁠대전까지요⁠?⁠”

“⁠좋은 홀드는 멀리 있어요⁠.⁠”

석빈이 휠체어를 밀어 식탁 끝에 붙었다⁠. 태하는 석빈 옆에 섰다⁠. 변호사가 서류를 석빈 앞으로 돌렸다⁠.

“⁠말씀드린 대로입니다⁠. 회장님은 석빈 씨가 일 년 동안 고생하신 걸 알고 계십니다⁠. 위로금으로 일억을 더 드리겠다고 하셨어요⁠. 대신 이 확인서에 서명해 주시면 됩니다⁠. 작년 사고 원인을 다시 한번 확인한다는 내용입니다⁠. 볼트 고정 불량⁠.⁠”

“⁠다시 한번요⁠.⁠”

“⁠네⁠. 다른 분들이 자꾸 묻고 다녀서요⁠.⁠” 변호사가 태하를 흘끗 보았다⁠. “⁠서명 안 하시고 다른 데 가서 다른 말씀을 하시면⁠, 처음 받으신 이억은 돌려주셔야 합니다⁠. 합의서 육 조입니다⁠. 위약금도 따로 있고요⁠.⁠”

석빈은 서류를 보지 않았다⁠. 식탁 가장자리를 손바닥으로 쓸었다⁠. 손바닥 밑에서 오래된 식탁의 니스가 갈라진 자리가 거칠게 닿았다⁠.

“⁠변호사님은 홀드 잡아 보셨어요⁠?⁠”

“⁠네⁠?⁠”

“⁠벽에 매달려서요⁠. 손에 쥔 게 깨지면서 떨어져 보셨냐고요⁠.⁠” 석빈의 목소리는 차분했다⁠. 화날수록 부드러워지는 목소리였다⁠. “⁠나는 해 봤어요⁠. 떨어지는 동안 손에서 깨진 게 안 놓아져요⁠. 놓으면 진짜 떨어지는 것 같아서요⁠. 이미 떨어지는 중인데도⁠.⁠”

변호사는 대답하지 않았다⁠. 펜을 서류 위에 내려놓았다⁠.

“⁠볼트 고정 불량⁠.⁠” 석빈이 서류 맨 위 줄을 손가락으로 짚었다⁠. “⁠제가 일 년 동안 이 말을 제 입으로 했어요⁠. 엄마한테도 했고⁠, 병원 사람들한테도 했고⁠, 거울 보고도 했어요⁠. 제 손이 볼트를 덜 조였다고요⁠.⁠”

“⁠석빈 씨가 직접 서명하신 내용입니다⁠.⁠”

“⁠알아요⁠. 제가 서명했어요⁠. 엄마 대출 갚으려고요⁠.⁠”

어머니의 고무장갑이 소금 봉지를 구겼다⁠. 봉지가 바스락 소리를 냈다⁠.

*

태하가 입을 열었다⁠.

“⁠주아 씨가 평창동 집에 갇혀 있어요⁠. 밖에서 잠기는 방에요⁠. 축제 끝나면 스위스 요양 병원으로 보낸대요⁠. 사라지기 직전에 벽에서 「⁠국기 게양⁠」을 했어요⁠. 너를 가리킨 거야⁠.⁠”

“⁠지난번에 들었어⁠.⁠”

“⁠그리고 이억⁠.⁠” 태하는 숨을 골랐다⁠. 말을 꺼내기 전부터 손바닥에 땀이 찼다⁠. “⁠같이 갚자⁠. 헤드 세터 받는 돈이 오버행 월급 세 배야⁠. 축제 끝나면 잘리겠지만⁠, 그 전까지 받는 거 다 넣을게⁠. 모자란 건 다음 짐 가서 갚고⁠. 그다음 짐에서도 갚고⁠.⁠”

“⁠니가 다음 짐에 갈 수 있을 거 같냐⁠? 회장님한테 찍혀서⁠.⁠” 석빈이 웃었다⁠. “⁠그리고 그걸로 이억이 돼⁠? 니 어깨가 열 번 빠져도 안 돼⁠.⁠”

“⁠알아⁠.⁠”

“⁠아는데 왜 해⁠?⁠”

“⁠문호 대표님이 내 수술비 낸 거⁠, 나 아직 한 푼도 못 갚았어⁠. 갚는 법을 몰라서⁠. 갚을 데가 생기니까 이제 좀 알겠어⁠.⁠”

변호사가 서류철을 덮고 일어서려 했다⁠. 개수대 앞의 어머니가 먼저 고무장갑을 벗었다⁠. 장갑을 개수대에 던지고 식탁으로 걸어왔다⁠. 변호사 앞의 봉투를 집어 변호사의 서류 가방 위에 올려놓았다⁠.

“⁠집 팔면 돼⁠.⁠”

모두가 어머니를 보았다⁠. 석빈이 휠체어 바퀴를 잡았다⁠.

“⁠엄마⁠.⁠”

“⁠집 팔면 이억 돼⁠. 대출 다 갚은 집이니까⁠.⁠” 어머니가 말했다⁠. 손이 떨렸지만 목소리는 떨리지 않았다⁠. “⁠경사로는 또 깔면 되고⁠, 철봉은 떼서 가져가면 되지⁠. 문틀은 어느 집에나 있어⁠.⁠”

“⁠엄마⁠, 엄마가 평생 갚은 집이야⁠.⁠”

“⁠그래서 내 집이야⁠. 내 집이니까 내가 팔아⁠.⁠” 어머니는 석빈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석빈아⁠. 너 일 년 동안 거울 보고 그 말 할 때마다 엄마가 문밖에서 다 들었어⁠. 니 손이 볼트를 덜 조였다고⁠. 상비군 때 니가 손바닥에 물집 잡혀서 밤새 운 것도 엄마는 알아⁠. 그런 손이 볼트를 덜 조여⁠? 엄마가 이 집 팔고 니 손 찾을 거야⁠.⁠”

변호사가 서류 가방을 들었다⁠. 가방 위의 봉투가 미끄러져 바닥에 떨어졌다⁠. 변호사는 봉투를 줍고 현관으로 걸어가며 말했다⁠.

“⁠회장님께 그대로 전하겠습니다⁠. 다들 후회하실 겁니다⁠.⁠”

어머니가 소금 봉지를 들고 현관까지 따라갔다⁠. 변호사가 구두를 신는 동안 등 뒤에 굵은소금을 한 줌 뿌렸다⁠. 남색 정장 어깨에 소금 알갱이가 하얗게 박혔다⁠. 변호사는 털지도 못하고 경사로를 내려갔다⁠.

*

현관문이 닫히자 석빈이 휠체어를 돌려 부엌 구석으로 갔다⁠. 김치냉장고 앞이었다⁠.

“⁠태하야⁠. 맨 아래 칸 열어⁠. 내 팔이 거기까지 안 닿아⁠.⁠”

태하는 김치냉장고 맨 아래 칸을 열었다⁠. 찬 기운과 함께 묵은지 냄새가 훅 올라왔다⁠. 김장 비닐에 싼 통이 줄줄이 들어 있었다⁠. 석빈이 손가락으로 맨 안쪽을 가리켰다⁠.

“⁠제일 시어 빠진 통⁠. 그 밑에⁠.⁠”

태하는 시큼한 냄새가 가장 센 통을 들어냈다⁠. 통 밑에 김장 비닐로 세 겹 싼 납작한 꾸러미가 있었다⁠. 꺼내자 손이 시렸다⁠. 비닐을 벗겼다⁠.

보라색 홀드 반쪽이었다⁠. 손바닥 하나 크기였다⁠. 깨진 단면이 희끗하고 거칠었다⁠. 단면 한쪽 귀퉁이가 조금 더 떨어져 나가 있었다⁠. 「⁠대전 1022⁠」 조각이 떨어져 나간 자리였다⁠. 태하는 주머니에서 조각을 꺼내 귀퉁이에 맞추었다⁠. 꼭 들어맞았다⁠.

“⁠병원에서 깨어 보니까 손에 쥐고 있었다고 했잖아⁠.⁠” 석빈이 말했다⁠. “⁠간호사가 빼 주려고 해도 안 놔서⁠, 엄마가 집에 가져왔어⁠. 회사 사람들이 다 가져간다는데 이것만 엄마가 앞치마 속에 넣고 나왔대⁠. 일 년 동안 묵은지 밑에 있었어⁠. 회사 사람들은 김치냉장고는 안 열어 보더라⁠.⁠”

“⁠냄새 나⁠.⁠”

“⁠증거가 원래 냄새가 나⁠. 일 년 묵었는데⁠.⁠”

어머니가 부엌으로 돌아와 홀드를 보고⁠, 고개를 돌렸다⁠. 개수대에 손을 짚고 오래 서 있었다⁠.

“⁠토요일에 성수로 갈게⁠.⁠” 석빈이 말했다⁠. “⁠축제에⁠. 형사한테 직접 줄 거야⁠. 앞줄에 앉을 거다⁠. 휠체어석은 맨 앞이잖아⁠. 장애인 할인도 되나 몰라⁠.⁠”

“⁠VIP 체험은 오십만 원이야⁠.⁠”

“⁠니가 헤드 세터라며⁠. 표 한 장 못 빼 줘⁠?⁠”

태하는 홀드 반쪽을 비닐에 다시 쌌다⁠. 석빈이 손을 내밀었다⁠. 태하는 꾸러미를 석빈의 손에 쥐여 주었다⁠. 석빈은 꾸러미를 무릎 위에 올려놓고 두 손으로 덮었다⁠. 무릎은 차가운 꾸러미를 느끼지 못했다⁠. 손바닥이 대신 느꼈다⁠.

*

저녁 여섯 시⁠, 태하는 서울역에서 성수로 가지 않고 문래동에 내렸다⁠. 철공소 골목은 퇴근 시간이라 셔터 내리는 소리로 시끄러웠다⁠. 오버행 계단을 올라가자 데스크에 나롱이 없었다⁠. 코치 하나가 대신 앉아 있었다⁠. 허리 나간 코치였다⁠. 코치는 태하를 보고 일어나지 않았다⁠.

“⁠헤드 세터님이 여기는 웬일이세요⁠.⁠”

“⁠대표님 계세요⁠?⁠”

코치는 턱으로 45도 벽을 가리켰다⁠. 문호가 「⁠유턴⁠」 앞 매트에 앉아 있었다⁠. 무릎을 펴지 못해 한쪽 다리를 옆으로 뻗은 채였다⁠. 원래 슬로퍼는 해람이 떼어 갔고⁠, 가운데 자리에는 볼트 구멍만 비어 있었다⁠. 문호는 빈 구멍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태하가 옆에 앉자 문호가 말했다⁠.

“⁠경찰서 의자가 생각보다 편하더라⁠. 무릎이 안 아파⁠.⁠”

“⁠대표님⁠.⁠”

“⁠형사 양반이 나를 입건했다⁠. 증거 없앤 거⁠. 뒷문 번호 알려 준 건 아직 따지는 중이고⁠.⁠” 문호는 손바닥으로 무릎을 문질렀다⁠. “⁠내일 회장님 사람들이 온단다⁠. 리뉴얼을 금요일에서 내일 밤으로 당긴대⁠. 내가 경찰서에 다녀온 대가지⁠. 코치들은 아직 몰라⁠.⁠”

“⁠제가 말할까요⁠?⁠”

“⁠니가 말하면 니가 미움받는다⁠. 지금도 충분히 미움받잖아⁠.⁠” 문호가 웃었다⁠. 데스크의 코치를 돌아보지 않았다⁠. “⁠내가 할게⁠. 내일 아침에⁠. 니 문제 한 번 같이 오르고 나서⁠.⁠”

“⁠슬로퍼 없어요⁠.⁠”

“⁠알아⁠. 구멍이 있잖아⁠. 구멍을 잡지 뭐⁠.⁠” 문호는 천천히 일어났다⁠. 무릎이 소리를 냈다⁠. “⁠석빈이는 어떻디⁠?⁠”

“⁠토요일에 성수 온대요⁠. 앞줄에요⁠.⁠”

문호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표실로 걸어가다가 문 앞에서 멈췄다⁠.

“⁠태하야⁠. 내일 아침 일곱 시⁠. 셔터 니가 올려라⁠.⁠”

밤 아홉 시⁠, 성수 플래그십의 유리 벽 앞에서 세빈이 매트에 누워 있었다⁠. 손가락을 하늘로 펴고 있었다⁠.

“⁠사천이백 개 닦았어요⁠. 손가락이 이제 제 손가락 같지 않아요⁠.⁠”

“⁠수고했어⁠.⁠”

“⁠형⁠, 대전 어땠어요⁠?⁠”

태하가 대답하기 전에 출입문이 열렸다⁠. 휘준이었다⁠. 엄팔용이 뒤따랐다⁠. 휘준은 이번에는 신발을 벗지 않고 매트 앞에 멈췄다⁠. 세빈이 벌떡 일어났다⁠. 휘준은 세빈을 보지 않았다⁠. 세빈이 여기 있다는 것을 이미 아는 얼굴이었다⁠.

“⁠대전에 다녀오셨더군요⁠.⁠” 휘준이 태하에게 말했다⁠. “⁠석빈 씨 어머님이 우리 변호사를 소금으로 씻겨 주셨다고요⁠.⁠”

“⁠집 팔고 돈 돌려드린대요⁠.⁠”

“⁠압니다⁠. 다 압니다⁠.⁠” 휘준은 유리 벽을 올려다보았다⁠. 아직 홀드가 하나도 없는 벽이었다⁠. “⁠공태하 씨⁠. 나는 딸한테 마지막으로 좋은 날을 하나 주고 싶었어요⁠. 좋아하는 세터가 짠 문제를 18미터 벽에서 오르는 날이요⁠. 수많은 사람 앞에서요⁠. 그래서 축제 다음 날 보내려고 했어요⁠.⁠”

휘준이 태하를 보았다⁠.

“⁠딸이 오늘 짐을 쌌습니다⁠. 축제 끝나는 밤⁠, 김포에서 전세기가 뜹니다⁠. 개막 등반 마치면 바로 차에 탑니다⁠. 박수 소리가 끝나기 전에요⁠.⁠”

“⁠주아 씨가 원했어요⁠?⁠”

“⁠딸은 원하는 게 많았지요⁠. 이번에는 아빠가 원하는 걸로 합니다⁠.⁠” 휘준은 돌아섰다⁠. “⁠좋은 문제 부탁합니다⁠, 헤드 세터님⁠. 딸이 한국에서 오르는 마지막 벽이니까요⁠.⁠”

휘준과 엄팔용이 나갔다⁠. 유리문이 닫히고⁠, 바깥 거리의 불빛이 빈 벽에 비쳤다⁠. 세빈이 태하 옆에 와서 섰다⁠. 둘 다 한참 말이 없었다⁠.

“⁠형⁠.⁠” 세빈이 말했다⁠. “⁠구멍 사천이백 개 중에⁠, 어디부터 박아요⁠?⁠”

태하는 12미터 높이의 분필 동그라미를 올려다보았다⁠.

10화는 어땠나요?

댓글 0

로그인하면 댓글을 남길 수 있습니다.

첫 번째 댓글을 남겨 보세요.

김치냉장고 · 클라이밍 짐 회원이 실종됐다 · 나오늘 책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