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화(5,384자)

상자 속의 회장

회장님 유언은 앵무새 · 문들레

가정법원 복도는 싸우는 소리로 가득했다⁠. 의자마다 사람들이 둘씩⁠, 서로 멀찍이 떨어져 앉아 있었다⁠. 한 의자 끝에서는 젊은 여자가 전화기에 대고 아이 학교 이야기를 하며 울었고⁠, 다른 의자 끝에서는 남자가 변호사에게 “⁠집은 제가 가져야죠⁠” 하고 같은 말을 되풀이했다⁠. 천장 확성기에서 여자 목소리가 사건 번호와 법정 번호를 불렀다⁠. 사람들이 번호를 듣고 일어나 문 안으로 들어갔다⁠.

여기는 무리가 갈라지는 곳이었다⁠. 한 둥지에 살던 새들이 둥지를 두고 깃을 세우는 곳⁠. 큰아들과 막내딸도 복도 양 끝에 떨어져 앉아 있었다⁠. 둘 사이에 의자가 일곱 개 비어 있었다⁠.

나는 이동장 안에서 확성기 목소리를 냈다⁠. 사건 번호 대신 서재 전화벨을 붙여서⁠.

“⁠다음 사건 들어오세요⁠. 따르릉⁠, 따르릉⁠.⁠”

복도에 앉은 사람들이 한꺼번에 고개를 들었다가 서로를 봤다⁠. 울던 여자가 울음을 멈추고 이동장을 봤다⁠. 집을 가져야 한다던 남자가 입을 벌렸다⁠. 누군가 웃었고⁠, 웃음이 복도를 따라 번졌다⁠. 막내딸도 고개를 숙이고 웃었다⁠. 큰아들은 이동장을 무릎으로 끌어당기며 웃음을 참았다⁠. 의자 일곱 개를 건너 남매의 웃음소리가 같은 높이로 났다⁠.

왼쪽 굽이 복도에 들어왔다⁠. 기철은 남매 사이의 빈 의자 가운데쯤에 멈춰 섰다⁠. 어느 끝에도 가까이 가지 않았다⁠.

“⁠아가씨⁠. 부회장님⁠. 본 대로 말하겠습니다⁠.⁠”

남매가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둘 다 기철의 말을 제 편으로 들은 얼굴이었다⁠.

*

가정법원 삼 층 심문실은 서재보다 작았다⁠. 의자가 줄지어 있었고⁠, 맨 앞에 높은 책상이 있었다⁠. 높은 책상 뒤에 검은 옷을 입은 판사가 앉았다⁠. 방에서 가장 높은 자리였다⁠. 나는 큰아들 무릎 위 이동장 안에서 판사의 자리를 오래 봤다⁠. 높은 가지에 앉은 새는 날개를 쉽게 펴지 않는다⁠. 판사도 손을 쉽게 움직이지 않았다⁠.

큰아들은 이동장을 무릎에 올려놓고 두 손으로 감싸고 있었다⁠. 손바닥이 땀에 젖어 철망이 축축했다⁠. 큰아들 옆에 큰아들의 변호사가 앉았다⁠. 통로 건너에 막내딸이 혼자 앉았다⁠. 막내딸은 검은 원피스를 입었고 손톱 끝을 다 물어뜯은 손을 무릎에 모으고 있었다⁠. 맨 앞 증인 자리에 기철이 앉았다⁠. 기철의 양복 어깨에 기운 자리가 보였다⁠.

판사가 입을 열었다⁠. 목소리가 낮고 평평했다⁠. 높낮이가 없어서 나는 판사의 얼굴을 보고 판사의 마음을 읽을 수 없었다⁠.

“⁠오늘은 유언 녹음의 검인 기일입니다⁠. 녹음이 어떤 상태로 법원에 들어왔는지⁠, 무슨 내용이 들어 있는지 확인해서 기록으로 남기는 자리입니다⁠. 유언이 유효한지 아닌지는 오늘 정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다투실 분이 따로 소송으로 다투셔야 합니다⁠.⁠”

판사가 서류를 한 장 넘겼다⁠.

“⁠신청인이 앵무새 청취를 신청했습니다⁠. 녹음을 틀기 전에 먼저 듣겠습니다⁠. 녹음을 들은 뒤에 들으면⁠, 앵무새가 방금 들은 소리를 따라 한 것인지 가릴 수 없으니까요⁠.⁠”

큰아들이 이동장 걸쇠를 풀었다⁠. 쇠 걸쇠가 찰칵 소리를 냈다⁠. 큰아들이 손목을 이동장 안으로 넣었다⁠. 나는 큰아들 손목에 올라앉았다⁠. 큰아들이 나를 들고 일어섰다⁠.

“⁠앵두야⁠. 해 봐⁠.⁠”

심문실이 조용했다⁠. 판사가 나를 봤다⁠. 판사 옆 작은 책상의 법원 직원이 펜을 들었다⁠. 기철이 증인석에서 고개를 돌렸다⁠. 막내딸이 숨을 참았다⁠.

넣어 달라는 소리에는 얼굴이 미리 준비돼 있다⁠. 방 안 얼굴이 전부 준비돼 있었다⁠. 나는 아무 소리도 내지 않았다⁠. 큰아들의 손목에서 발을 한 번 바꿔 디뎠다⁠.

“⁠…앵두야⁠. 막내한테⁠.⁠”

큰아들이 작게 앞소리를 넣어 주었다⁠. 판사가 손바닥을 들었다⁠.

“⁠신청인⁠, 가르쳐 주시면 안 됩니다⁠.⁠”

큰아들이 입을 다물었다⁠. 얼굴이 붉어졌다⁠. 판사가 시계를 봤다⁠.

“⁠없으면 넘어가겠습니다⁠.⁠”

판사의 목소리 끝이 처음으로 반음 내려갔다⁠. 그만하자는 소리였다⁠. 회장도 회의를 끝낼 때 끝을 내렸다⁠. 나는 끝이 내려가는 소리에 대답했다⁠. 기철의 목소리가 서재에 들어서며 목을 가다듬던⁠, 해가 가장 길던 여름의 첫날 밤으로⁠.

“⁠형님⁠, 오셨소⁠.⁠”

큰아들이 눈을 감았다⁠. 막내딸이 고개를 들었다⁠. 증인석의 기철은 움직이지 않았다⁠. 큰아들의 변호사가 펜을 떨어뜨렸다⁠. 나는 이어서 회장이 마지막 석 달 불 꺼진 서재에서 되뇌던 소리를 냈다⁠.

“⁠막내한테 주지 마라⁠. 기철이가 다 안다⁠.⁠”

판사가 법원 직원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두 마디 다 기록에 남기겠습니다⁠. 증거로는 쓰지 않습니다⁠. 앵무새는 신청인이 다시 안고 계십시오⁠. 녹음을 틀겠습니다⁠.⁠”

*

법원 직원이 봉투에서 검은 녹음기를 꺼냈다⁠. 기철의 안주머니에서 열흘 동안 지우라는 소리를 들은 녹음기였다⁠. 직원이 녹음기를 판사 책상 위 작은 확성기에 이었다⁠. 단추를 눌렀다⁠.

삐⁠.

“⁠나는⁠…⁠.⁠”

회장이 이름 석 자를 말했다⁠. 또박또박⁠, 한 글자씩 끊어서⁠. 회장은 서류에 이름을 쓸 때도 그렇게 한 획씩 끊어서 썼다⁠.

“⁠2027년 6월 21일⁠, 성북동 내 집 서재에서 유언한다⁠.⁠”

목소리는 맑았다⁠. 숨이 길었고⁠, 끝이 떨리지 않았다⁠. 칠월의 회장은 숨을 반쯤 들이쉬고 끝을 떨었다⁠. 유월의 회장은 숨을 끝까지 채우고 말했다⁠.

“⁠성북동 집은 막내한테 주지 마라⁠. 막내 앞으로 가면 남의 손에 넘어간다⁠. 집은 큰애 앞으로 한다⁠. 큰애는 막내가 이 집에 사는 동안⁠, 앵두가 이 서재에 사는 동안 집을 팔지 마라⁠. 막내가 진 빚은 내 몫에서 갚아라⁠. 갚고 나서 막내한테 말하지 마라⁠. 회사는 큰애가 맡아라⁠. 큰애는 나를 닮아서 잘한다⁠. 나보다 잘한다⁠. 기철이가 다 안다⁠.⁠”

“⁠증인 문기철⁠. 회장님 말씀 그대로입니다⁠.⁠”

기철의 목소리였다⁠. 상자 속 기철은 지금 증인석의 기철보다 젊었다⁠. 넉 달 만에 기철의 목소리가 한 음 낮아져 있었다⁠.

나는 큰아들의 손목을 차고 날았다⁠. 큰아들이 붙잡으려다 놓쳤다⁠. 법원 직원이 “⁠어⁠, 어⁠!⁠” 하고 일어섰다⁠. 나는 판사의 높은 책상에 내려앉았다⁠. 녹음기 옆이었다⁠. 회장의 목소리가 나는 작은 확성기 옆이었다⁠.

어깨가 없었다⁠. 귀가 없었다⁠. 털이 길고 늘 따뜻하던 귀⁠. 확성기는 차가웠다⁠. 나는 확성기에 머리를 댔다⁠. 소리가 머리를 울렸다⁠. 숨이 없었다⁠. 회장이 말할 때 어깨가 오르내리던 것이 없었다⁠. 목소리만 있었다⁠. 몸은 두고 소리만⁠.

판사가 손을 들어 직원을 말렸다⁠. 판사는 나를 쫓지 않았다⁠. 상자 속 회장이 계속 말했다⁠.

“⁠앵두야⁠, 됐지⁠?⁠”

회장은 녹음을 마칠 때마다 나에게 물었다⁠. 나는 늘 “⁠됐다⁠” 하고 대답했다⁠. 회장이 웃었다⁠. 상자 속에서 허허⁠, 하고⁠.

“⁠막내가 밤마다 해바라기씨 주는 거⁠, 나 다 안다⁠. 모른 척해라⁠. 허허⁠.⁠”

“⁠네⁠, 회장님⁠. 녹음 끝났습니다⁠.⁠”

삐⁠.

심문실이 조용했다⁠. 나는 판사 책상 위에서 확성기를 봤다⁠. 다음 소리를 기다렸다⁠. 회장은 녹음을 끝내면 의자에서 일어나 나를 어깨에 올렸다⁠. 일어나는 소리가 나야 했다⁠. 가죽이 길게 울고⁠, 슬리퍼가 끌리고⁠, 왼발부터⁠.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다⁠. 상자는 회장의 목소리를 다 내놓고 조용해졌다⁠.

돌아가신 분은 안 오는데⁠.

보호소 직원의 목소리가 내 안에서 났다⁠. 밖으로는 내지 않았다⁠. 나는 판사 책상 위에서 날개를 접었다⁠. 처음으로 회장을 기다리지 않고 날개를 접었다⁠.

*

막내딸이 울고 있었다⁠. 소리를 내지 않고 울었다⁠. 어깨만 떨렸다⁠. 막내딸은 두 손으로 입을 막고⁠, 손등 위로 눈물이 흘렀다⁠. 해바라기씨라는 소리에서 막내딸의 얼굴이 무너졌다⁠. 서른 해 동안 몰래 주었다⁠. 회장은 서른 해 동안 모른 척했다⁠.

“⁠…아빠가 알았어⁠.⁠”

막내딸이 혼잣말을 했다⁠.

“⁠다 알았어⁠. 씨도⁠, 빚도⁠. 나한테 말하지 말라고⁠. 창피할까 봐⁠.⁠”

큰아들은 이동장을 무릎에 놓은 채 굳어 있었다⁠. 큰아들의 얼굴은 붉지도 하얗지도 않았다⁠. 계산하는 얼굴이었다⁠. 회장과 똑같은 얼굴로⁠, 회장이 남긴 숫자를 세고 있었다⁠. 집은 내 앞으로⁠. 팔지 마라⁠. 막내가 사는 동안⁠. 앵두가 서재에 사는 동안⁠. 막내 빚은 아버지 몫에서⁠. 아버지 몫이 줄면 큰아들 몫도 준다⁠.

판사가 기록을 마치고 고개를 들었다⁠.

“⁠녹음의 상태와 내용을 확인했습니다⁠. 다투실 분은 따로 하십시오⁠. 오늘은 여기까지입니다⁠. 신청인⁠, 앵무새를 데려가십시오⁠.⁠”

큰아들의 변호사가 손을 들었다⁠.

“⁠재판장님⁠, 증인에게 한 가지만 확인하고 싶습니다⁠. 기록을 위해서요⁠.⁠”

판사가 기철을 봤다⁠. 기철이 일어났다⁠.

“⁠앵무새가 낸 소리⁠, 형님 오셨소⁠. 회장님이 증인을 형님이라고 부르신 적이 있습니까⁠?⁠”

“⁠있습니다⁠. 유월 열아흐레⁠, 첫 녹음을 하던 밤입니다⁠. 녹음 도중에 부르셨습니다⁠. 회장님 형님은 회장님이 열 살 때 돌아가셨습니다⁠.⁠”

“⁠그 녹음은요⁠?⁠”

“⁠회장님 말씀에 따라 지웠습니다⁠. 스무날 녹음도 기침 때문에 지웠습니다⁠. 스무하루에 끝까지 하셨습니다⁠. 오늘 들으신 녹음입니다⁠.⁠”

“⁠스무하루에는 증인을 알아보셨습니까⁠?⁠”

“⁠알아보셨습니다⁠. 날짜도⁠, 이름도⁠, 앵두 씨 이야기도 회장님이 먼저 하셨습니다⁠. 그날은 맑으셨습니다⁠.⁠”

“⁠칠월에는 지우라고 하셨다고요⁠.⁠”

“⁠예⁠. 칠월부터는 판단을 못 하셨습니다⁠. 주치의 소견서가 있습니다⁠. 진짜입니다⁠.⁠”

기철은 한 마디도 끝을 낮추지 않았다⁠. 판사가 기철의 대답을 기록에 넣으라고 했다⁠.

*

법원 계단은 넓고 차가웠다⁠. 기자들이 계단 아래에서 사진기를 들었다⁠. 찰칵⁠, 찰칵⁠. 까마귀 떼였다⁠. 큰아들이 이동장을 들고 계단을 내려갔다⁠. 막내딸이 뒤따라 내려와 큰아들의 팔을 잡았다⁠.

“⁠오빠⁠. 앵두 줘⁠. 아빠가 서재에 두라고 했잖아⁠.⁠”

“⁠아버지가 집 팔지 말라고 했지⁠. 앵두를 너 주라고는 안 했어⁠.⁠”

“⁠아빠 마지막 말이야⁠. 유월 이십일일⁠, 아빠 멀쩡했어⁠. 씨 얘기 들었잖아⁠. 오빠도 들었잖아⁠.⁠”

“⁠어제까지는 유월도 아팠다며⁠. 형님이라고 불렀다며⁠.⁠”

막내딸이 입을 다물었다⁠. 큰아들이 웃었다⁠. 웃음이 아니었다⁠. 숨을 한 번 짧게 내뱉는 소리였다⁠.

“⁠하루 만에 자리 바꿨네⁠. 너도⁠, 나도⁠.⁠”

남매는 계단 가운데서 서로를 봤다⁠. 어제 막내딸이 앉던 가지에 오늘은 큰아들이 앉아 있었다⁠. 큰아들이 앉던 가지에 막내딸이⁠.

“⁠막내야⁠, 앵두가 몇 살이야⁠? 서른하나야⁠. 회색앵무는 육십 년도 산대⁠. 내가 여든 넘어서도 그 집 못 판다는 거야⁠. 상속세는 내년 삼월이야⁠. 외국 펀드는 다음 달에 주총 열자고 해⁠. 공장은 멈췄고⁠. 아버지는 집 팔지 말라는 말을 회사 맡으라는 말이랑 같이 했어⁠. 둘을 같이 지킬 방법은 안 알려 주고⁠.⁠”

“⁠오빠⁠.⁠”

“⁠소송할 거야⁠. 소견서로⁠. 실장님이 방금 말했지⁠. 유월에도 형님이라고 불렀다고⁠.⁠”

기철이 계단 위에 서 있었다⁠. 내려오지 않았다⁠. 큰아들이 이동장을 들어 철망 너머 나를 봤다⁠.

“⁠앵두가 서재에 사는 동안이라고 했지⁠.⁠”

큰아들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계산이 끝난 목소리였다⁠.

“⁠그럼 서재에 안 살면 되는 거네⁠.⁠”

큰아들이 차 뒷문을 열고 이동장을 넣었다⁠. 문을 닫았다⁠. 손바닥으로 한 번 더 밀지 않았다⁠. 막내딸이 차 창문을 두드렸다⁠. 차가 움직였다⁠. 막내딸의 손바닥이 유리에서 미끄러졌다⁠. 뒷유리 너머로 계단 가운데 선 막내딸이 작아졌고⁠, 계단 위에 선 기철은 더 작아졌다⁠. 기자들의 찰칵 소리가 차를 따라오다가 끊겼다⁠.

9화는 어땠나요?

댓글 0

로그인하면 댓글을 남길 수 있습니다.

첫 번째 댓글을 남겨 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