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화(5,360자)

긴 횃대

회장님 유언은 앵무새 · 문들레

기사 아저씨가 회장보다 먼저 일을 그만둔 뒤로 회장의 차는 기철이 몰았다⁠. 기철은 차 문을 닫을 때 두 번 닫는다⁠. 한 번 닫고⁠, 손바닥으로 문을 한 번 더 민다⁠. 이동장을 조수석에 놓고 안전띠를 이동장에 둘러 채울 때도 띠를 두 번 당겼다⁠.

수의사가 몸무게를 한 번 더 보자고 했다⁠. 막내딸은 아침부터 빚쟁이를 만나러 나가야 했고⁠, 동물병원에 데려갈 사람이 기철밖에 없었다⁠. 막내딸은 현관에서 기철에게 이동장을 건네며 세 번 말했다⁠. 씨는 주지 마세요⁠, 창문은 열지 마세요⁠, 무슨 말을 해도 대답하지 마세요⁠.

차 안 라디오가 뉴스를 했다⁠. 기철은 끄지 않았다⁠.

“⁠그룹 주가가 사흘째 내렸습니다⁠. 베트남 합작사는 고인이 된 회장이 팔월에 결재한 공장 증설을 다시 검토하겠다고 밝혔고⁠, 금융 당국은 그룹에 경영권 관련 사항을 공시하라고 요구했습니다⁠. 한편 회장 저택의 앵무새가 회장의 유언을 안다는 소문이⁠…⁠.⁠”

기철이 라디오를 껐다⁠. 나는 꺼진 라디오 소리를 냈다⁠. 아나운서 목소리 끝에 붙던 짧은 음악까지⁠.

“⁠…하지 마라⁠.⁠”

빨간불에 차가 멈췄을 때 기철의 전화가 울렸다⁠. 기철은 귀에 대지 않고 차에 연결해 받았다⁠. 남자 목소리가 차 안을 채웠다⁠.

“⁠실장님⁠, 이사회가 두 시로 당겨졌습니다⁠. 사외이사님들이 오늘 소견서를 직접 보셔야겠답니다⁠. 베트남 건 때문에요⁠. 부회장님 선임 안건도 오늘 그대로 갑니다⁠.⁠”

“⁠알겠습니다⁠. 바로 가겠습니다⁠.⁠”

기철은 전화를 끊고 이동장을 봤다⁠. 나는 철망 사이로 기철을 봤다⁠. 기철이 핸들을 돌렸다⁠. 동물병원 간판이 창밖으로 지나갔다⁠.

*

본사 승강기는 사람을 가득 태우고 이십 층까지 올라갔다⁠. 기철은 이동장을 가슴에 안고 맨 안쪽에 섰다⁠. 사람들이 이동장을 흘끔흘끔 봤다⁠. 승강기가 멈출 때마다 여자 목소리가 났다⁠.

“⁠문이 닫힙니다⁠.⁠”

승강기가 멈추지 않았을 때 내가 냈다⁠. 문 앞에 있던 젊은 직원이 몸을 움츠렸다⁠. 문은 닫혀 있었다⁠. 다음 층에서 진짜 목소리가 나자 직원들이 서로 얼굴을 봤다⁠. 누군가 웃음을 참다 콧소리를 냈다⁠. 기철은 이동장 위에 손바닥을 얹었다⁠. 손바닥이 철망 위에서 따뜻했다⁠.

비서실은 이사회실 옆에 있었다⁠. 기철은 이동장을 제 책상 위에 놓고 비서실 막내 직원에게 말했다⁠.

“⁠한 시간이면 끝나네⁠. 문 열지 말고⁠, 무슨 소리를 해도 대답하지 말고⁠.⁠”

“⁠네⁠, 실장님⁠.⁠”

기철이 서류를 들고 나갔다⁠. 직원은 기철이 나가자마자 이동장 앞에 쪼그려 앉았다⁠.

“⁠네가 그 앵무새구나⁠. 뉴스에 나온⁠.⁠”

직원이 책상 서랍에서 쿠키를 꺼내 철망 사이로 부스러기를 넣어 주었다⁠. 나는 부스러기를 받아먹으며 이동장 문의 걸쇠를 봤다⁠. 이동장 문은 위아래 두 군데를 플라스틱 걸쇠로 끼운다⁠. 회장은 동물병원에 갈 때마다 걸쇠를 끼우며 “⁠앵두가 이건 못 연다⁠” 했다⁠. 회장이 모르는 일이 있었다⁠. 나는 서른 해 동안 동물병원 대기실에서 걸쇠를 혼자 연습했다⁠.

직원이 커피 쟁반을 들고 이사회실로 갔다⁠. 이사회실 문이 열렸다⁠. 나는 위 걸쇠를 부리로 밀어 올리고⁠, 아래 걸쇠를 비틀었다⁠. 문이 열렸다⁠. 쟁반이 들어가는 문틈으로 나도 들어갔다⁠.

*

이사회실 탁자는 내가 본 가장 긴 횃대였다⁠. 반들반들한 나무 위에 사람들이 양쪽으로 줄지어 앉아 있었다⁠. 맨 끝 가장 높은 자리⁠, 등받이가 가장 높은 의자 하나가 비어 있었다⁠. 의자 뒤 벽에 회장의 사진이 있었다⁠. 사진 속 회장의 어깨에는 내가 없었다⁠.

나는 빈 의자 등받이에 내려앉았다⁠.

“⁠어⁠, 어어⁠.⁠”

탁자 양쪽에서 의자 바퀴가 한꺼번에 뒤로 밀렸다⁠. 흰머리를 짧게 자른 여자가 서류로 얼굴을 가렸고⁠, 배가 나온 남자는 커피 잔을 쥔 채 그대로 굳었다⁠. 큰아들은 빈 의자 오른쪽 첫 자리에 앉아 있었다⁠. 큰아들이 눈을 감았다⁠.

“⁠…앵두야⁠.⁠”

기철은 탁자 가운데 서서 종이를 나눠 주고 있었다⁠. 종이가 손에서 반쯤 미끄러졌다⁠. 기철은 나를 보고 나서 종이를 마저 나눠 주었다⁠. 손이 떨리지 않았다⁠. 떨지 않으려고 힘을 준 손가락 마디가 하얬다⁠.

흰머리 여자가 서류를 내리고 나를 봤다⁠. 여자는 그룹 밖에서 온 사외이사였고⁠, 법을 가르치던 사람이라고 했다⁠. 여자의 목소리는 낮고 마른 소리였다⁠.

“⁠회장님 앵무새군요⁠. 신문에서 봤습니다⁠. 실장님⁠, 데리고 오신 겁니까⁠?⁠”

“⁠제 잘못입니다⁠. 곧 내보내겠습니다⁠.⁠”

“⁠아니요⁠. 두세요⁠. 지금 우리가 보는 소견서도 회장님 거니까요⁠.⁠”

여자가 종이를 들었다⁠.

“⁠주치의 소견서⁠. 회장님이 칠월 초부터 판단 능력이 크게 떨어지셨다⁠. 실장님⁠, 이걸 왜 이사회에 내셨습니까⁠?⁠”

“⁠베트남 합작사가 회장님 팔월 결재를 문제 삼고 있습니다⁠. 숨기고 가면 나중에 더 큰 일이 됩니다⁠. 회장님 칠월 이후 결재는 전부 다시 보셔야 합니다⁠.⁠”

배 나온 남자가 커피 잔을 내려놓았다⁠. 재무를 맡은 사장이었다⁠.

“⁠실장님⁠, 그러면 칠월 이후 결재가 다 무효가 될 수 있다는 겁니까⁠? 베트남 증설 하나가 이천 명 일자리예요⁠. 공장 짓는 사람들까지 치면 더 되고⁠.⁠”

“⁠무효가 될지는 제가 정하지 못합니다⁠. 판단을 못 하셨다는 것은 사실입니다⁠.⁠”

큰아들이 의자를 밀고 일어났다⁠.

“⁠실장님⁠, 그 종이를 왜 여기서 꺼내요⁠? 집에서 꺼낸 걸로 충분하잖아요⁠. 그 종이 한 장으로 공장 하나가 날아가요⁠. 외국 펀드가 지금 그거 기다리고 있어요⁠.⁠”

“⁠사실을 덮고 한 결재가 날리는 공장이 더 많습니다⁠.⁠”

“⁠실장님이 사실을 덮은 건요⁠? 아버지 녹음은요⁠?⁠”

이사회실이 조용해졌다⁠. 사외이사 여자가 안경을 벗었다⁠.

“⁠녹음이라뇨⁠.⁠”

기철이 큰아들을 봤다⁠. 큰아들은 기철을 보지 않았다⁠. 사람들 얼굴이 기철에게서 큰아들에게로⁠, 큰아들에게서 기철에게로 오갔다⁠. 얼굴이 오가는 소리는 없다⁠. 숨소리만 바뀐다⁠. 이사회실의 숨소리가 한꺼번에 짧아졌다⁠.

긴 횃대에서 무리가 시끄러워지면 우두머리는 한 소리로 무리를 가라앉힌다⁠. 나는 빈 의자 등받이를 부리로 한 번 쳤다⁠.

“⁠됐다⁠, 그만 읽어⁠.⁠”

재무 사장이 저도 모르게 서류철을 덮었다⁠. 탁자 건너편의 남자 둘도 서류를 덮었다⁠. 덮고 나서 서로를 봤다⁠. 서른 해 동안 회장의 보고 자리에서 길든 손들이었다⁠. 누군가 먼저 웃음을 터뜨렸고⁠, 웃음이 탁자를 따라 번졌다⁠. 사외이사 여자만 웃지 않고 나를 오래 봤다⁠.

“⁠더 해 봐⁠. 회장님이 하시던 말⁠.⁠”

여자는 나에게 말했다⁠. 사람들이 나에게 소리를 넣어 달라고 할 때 나는 넣지 않는다⁠. 넣어 달라는 소리에는 얼굴이 미리 준비돼 있다⁠. 나는 여자의 안경을 봤다⁠. 그리고 큰아들의 귀를 봤다⁠. 붉었다⁠. 귀가 붉은 사람에게 넣는 소리는 정해져 있었다⁠.

“⁠막내한테 주지 마라⁠. 기철이가 다 안다⁠.⁠”

이번에는 아무도 웃지 않았다⁠.

*

이사회는 한 시간 넘게 이어졌다⁠. 나는 빈 의자 등받이에서 내려가지 않았다⁠. 사외이사 여자가 마지막에 손을 들었다⁠.

“⁠회장 선임 안건은 미루겠습니다⁠. 회장님 유언이 법원에서 정리되고⁠, 칠월 이후 결재를 다시 본 다음에 하지요⁠. 실장님⁠, 녹음이 있다면 바로 법원에 내세요⁠. 이사회도 기다리겠습니다⁠.⁠”

“⁠네⁠.⁠”

기철이 대답했다⁠. 큰아들은 대답하지 않았다⁠. 큰아들은 회의가 끝나자 가장 먼저 나갔다⁠. 복도에서 기철을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기철의 팔에 안겨 나왔다⁠.

“⁠만족해요⁠?⁠”

“⁠부회장님⁠.⁠”

“⁠나 회장 못 됐어요⁠. 실장님 종이 한 장 때문에⁠. 외국 펀드가 내일 아침에 지분 더 살 거예요⁠. 신문에 뭐라고 나올지 알아요⁠? 앵무새가 회장 자리에 앉았다⁠. 실장님은 아버지 회사를 지킨 거예요⁠, 아버지 새를 지킨 거예요⁠?⁠”

“⁠둘 다 못 지켰습니다⁠.⁠”

기철이 대답하고 나를 이동장에 넣었다⁠. 이번에는 걸쇠 위에 테이프를 붙였다⁠.

내려가는 승강기에는 기철과 나뿐이었다⁠. 기철은 이동장을 바닥에 내려놓지 않았다⁠. 숫자가 하나씩 줄어드는 동안 기철이 철망에 대고 말했다⁠.

“⁠회장님은 이사회에 너를 한 번도 안 데려오셨다⁠. 집에서 하는 회의는 너한테 다 들려주시고⁠, 여기는 안 데려오셨어⁠. 여기서 하는 말은 너한테 배우게 하기 싫다고 하셨다⁠.⁠”

승강기가 멈췄다⁠. 문이 열리기 전에 내가 먼저 냈다⁠.

“⁠문이 열립니다⁠.⁠”

문이 열렸다⁠. 기철이 이동장을 들고 내리다 말고 한 번 웃었다⁠. 소리 없는 웃음이었다⁠. 어깨만 한 번 내려갔다⁠.

*

막내딸은 지하 주차장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기철이 전화를 해서 불렀다⁠. 막내딸의 옷에서 바깥 냄새가 났다⁠. 담배 연기와 젖은 아스팔트와 낯선 남자들의 향수⁠. 빚쟁이를 만나고 온 냄새였다⁠. 막내딸은 이동장을 받아 들고 철망 사이로 내 얼굴을 들여다봤다⁠.

“⁠이사회에서 무슨 말 했어⁠?⁠”

“⁠회장님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 말이요⁠?⁠”

“⁠예⁠.⁠”

막내딸이 이동장을 차 뒷자리에 넣고 문을 닫았다⁠. 문을 닫고 나서 손을 문에 붙인 채 서 있었다⁠. 주차장 천장에서 물방울이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실장님⁠. 법원에 녹음 내시면⁠, 판사 앞에서 말하시죠⁠. 증인이니까⁠.⁠”

“⁠예⁠.⁠”

“⁠그때 말해 주세요⁠. 아빠가 유월에도 아팠다고⁠. 실장님을 형님이라고 불렀다고⁠. 녹음한 날도 아빠는 제정신이 아니었다고⁠.⁠”

기철이 막내딸을 봤다⁠. 오래 봤다⁠.

“⁠아가씨⁠, 녹음 안에 무엇이 있는지 모르시잖습니까⁠?⁠”

“⁠막내한테 주지 마라⁠. 그거면 충분해요⁠. 앵두가 백 번은 했어요⁠.⁠”

“⁠아가씨⁠.⁠”

“⁠실장님도 지우려고 했잖아요⁠. 아빠가 지우라고 했잖아요⁠. 열흘 동안⁠. 그게 아빠 마지막 말이잖아요⁠. 마지막 말을 들어 주는 게 맞잖아요⁠.⁠”

“⁠칠월의 말씀은 병환이었다고⁠, 제가 말씀드렸습니다⁠.⁠”

“⁠그럼 유월도 병이었다고 해 주세요⁠. 형님이라고 부른 날은 유월이잖아요⁠.⁠”

기철은 대답하지 않고 손목시계를 봤다⁠. 시계를 보는 척하며 눈을 내렸다⁠. 막내딸이 한 걸음 다가갔다⁠.

“⁠저 이 집 지켜야 돼요⁠. 앵두 때문에라도⁠. 오빠가 받으면 팔아요⁠. 대사관에⁠. 앵두는 오빠 집에 못 가요⁠. 언니가 새를 싫어해요⁠. 저한테 오면 앵두는 이 집에서 살아요⁠.⁠”

“⁠빚은요⁠.⁠”

“⁠제가 갚아요⁠. 어떻게든⁠.⁠”

어떻게든이라는 소리는 이 집에서 여러 번 났다⁠. 날 때마다 아무도 믿지 않았다⁠. 기철도 믿지 않는 얼굴이었다⁠. 그래도 기철은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법정에서 제가 본 대로 말하겠습니다⁠.⁠”

막내딸은 끄덕임 하나를 대답으로 받았다⁠. 고맙다고 하지 않고 차에 탔다⁠.

*

집에 돌아오는 길에 막내딸은 큰길가 가게에 차를 세우고 혼자 들어갔다 나왔다⁠. 손에 커다란 비닐 꾸러미가 들려 있었다⁠.

서재에서 막내딸이 꾸러미를 풀었다⁠. 검은 천이었다⁠. 회색 덮개보다 두껍고 무거웠다⁠. 막내딸이 검은 천을 새장 위에 펼치자 천이 새장 모서리까지 흘러내렸다⁠. 빛이 한 올도 새어 들지 않았다⁠.

막내딸은 새장 문고리에 가느다란 플라스틱 띠를 감아 조였다⁠. 띠 끝이 짧게 잘려 나가는 소리가 났다⁠. 문고리가 움직이지 않았다⁠.

“⁠미안해⁠, 앵두야⁠. 오늘부터는 낮에도 덮을 거야⁠. 검인 끝날 때까지만⁠.⁠”

막내딸이 검은 천을 내렸다⁠. 밤도 아닌데 밤보다 깊은 것이 내려왔다⁠. 나는 회장의 기침을 했다⁠. 두 번 짧게⁠, 한 번 길게⁠. 천 밖에서 막내딸의 발소리가 멈췄다가⁠, 다시 걸어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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