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5,389자)

지워라

회장님 유언은 앵무새 · 문들레

아침 아홉 시⁠, 큰아들은 서재 문을 두드리지 않고 열었다⁠. 경첩이 반음 낮게 울기도 전에 문이 벽에 부딪혔다⁠. 막내딸은 회장 의자 옆 카펫에 앉아 내 횃대 받침에 옥수수를 꽂고 있었다⁠. 밤새 서재에서 잔 얼굴이었다⁠. 눈두덩이 부어 있었다⁠.

“⁠얼마야⁠?⁠”

막내딸이 옥수수를 꽂던 손을 멈췄다⁠.

“⁠어제 밤새 은행에 아는 사람 다 깨웠어⁠. 네 이름으로 보증 선 거 다 나오더라⁠. 전남편 식당⁠. 체인점 열한 개⁠. 네가 다 보증 섰어⁠?⁠”

“⁠…처음에 하나만 서 달라고 했어⁠. 하나가 둘 되고⁠.⁠”

“⁠얼마냐고⁠?⁠”

막내딸이 숫자를 말했다⁠. 나는 숫자를 모른다⁠. 큰아들의 얼굴에서 피가 빠지는 것으로 크기를 알았다⁠. 큰아들이 회장 의자 등받이를 손으로 짚었다⁠. 짚은 손에 힘이 들어가 가죽이 우는 소리가 났다⁠.

“⁠집 한 채 값이네⁠. 이 집⁠.⁠”

“⁠알아⁠.⁠”

“⁠아버지가 그래서 막내한테 주지 말라고 한 거야⁠. 이 집이 네 앞으로 가면 빚쟁이들이 가져가⁠. 사십구재 지나면 바로 경매야⁠. 엄마 반지까지⁠.⁠”

“⁠그럼 오빠가 팔아서 세금 내는 거랑 뭐가 달라⁠? 어차피 남의 집 되는 건 똑같잖아⁠.⁠”

“⁠다르지⁠. 판 돈은 회사를 지켜⁠. 사람 만이천 명 월급을 지켜⁠. 네 빚쟁이들은 아무것도 안 지켜⁠.⁠”

“⁠나는 내가 지켜⁠. 아빠 마지막 일 년⁠, 오빠가 몇 번 왔어⁠? 기저귀 갈고⁠, 밤새 서재 지키고⁠, 소리 지르시면 안아 드린 거 나야⁠. 회사 지키느라 바빴던 오빠가 아니고⁠.⁠”

큰아들이 입을 다물었다⁠. 라이터를 꺼내 뚜껑을 열었다⁠. 닫지 않았다⁠. 열린 뚜껑에서 기름 냄새가 아주 조금 올라왔다⁠.

“⁠…그거랑 이거는 다르다⁠.⁠”

“⁠뭐가 달라⁠. 아빠가 나 걱정해서 집 줬어⁠. 공증까지 했어⁠. 앵두가 떠드는 소리 말고⁠, 아빠가 손 성할 때 한 거⁠.⁠”

“⁠손 성할 때 한 게 여섯 해 전이야⁠. 여섯 해 전엔 네가 빚이 없었잖아⁠.⁠”

두 사람은 회장 의자를 사이에 두고 서 있었다⁠. 한 사람은 등받이를 짚고⁠, 한 사람은 팔걸이 옆에 무릎을 꿇은 채로⁠. 가장 높은 가지 하나에 새 두 마리가 양쪽에서 발을 걸치고 있었다⁠. 가지가 흔들렸다⁠. 나는 횃대에서 몸을 낮췄다⁠. 가지를 두고 싸우는 새들 사이에 끼면 깃이 뽑힌다⁠.

“⁠기철 실장 불러⁠. 오후에 변호사도 온다⁠. 녹음 들어 봐야겠어⁠.⁠”

큰아들이 나갔다⁠. 라이터 뚜껑은 끝내 닫히지 않았다⁠.

*

막내딸은 오래 카펫에 앉아 있다가 새장 앞으로 왔다⁠. 회색 덮개를 들었다⁠. 해가 서재 창 한가운데에 있었다⁠. 덮개는 밤에 내려오는 것이다⁠.

“⁠앵두야⁠. 오늘은 아무 말도 하지 마⁠.⁠”

덮개가 내려왔다⁠. 낮이 꺼졌다⁠. 덮개 밑은 회색이었다⁠. 빛이 천 올 사이로 조금씩 새어 들어와 점점이 박혀 있었다⁠. 회색 밤이었다⁠. 덮개 밖에서 막내딸이 새장 앞에 앉는 소리가 났다⁠. 무릎이 카펫에 닿는 소리⁠, 숨을 길게 내쉬는 소리⁠.

밤이 아닌데 밤이 오면 몸이 헷갈린다⁠. 눈꺼풀이 내려오다 말고 떨렸다⁠. 나는 귀를 덮개에 댔다⁠. 눈이 쓸모없어지면 귀가 커진다⁠. 서재의 소리가 하나하나 또렷해졌다⁠. 벽시계 초침⁠, 감나무 가지가 창을 긁는 소리⁠, 아래층 부엌의 물 끓는 소리⁠, 대문 밖 기자들의 발 구르는 소리⁠. 그리고 계단을 오르는 왼쪽 굽⁠.

“⁠흠⁠. 아가씨⁠, 부르셨다고요⁠.⁠”

“⁠오빠가 불렀어요⁠. 저는 그 전에 여쭤볼 게 있어서요⁠.⁠”

막내딸의 목소리가 덮개 바로 앞에서 났다⁠. 기철의 굽은 문턱에서 멈췄다⁠.

“⁠아빠가 제 빚 알았어요⁠?⁠”

시계 초침이 여러 번 돌았다⁠.

“⁠다 아셨습니다⁠.⁠”

“⁠언제부터요⁠?⁠”

“⁠작년 봄에 아가씨 전남편 되시는 분이 회사로 찾아왔습니다⁠. 회장님을 뵙겠다고요⁠. 제가 막았습니다⁠. 막고 나서 회장님께 말씀드렸습니다⁠.⁠”

“⁠실장님이 말했어요⁠?⁠”

“⁠말씀드려야 하는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기철이가 다 안다예요⁠?⁠”

기철은 대답하지 않았다⁠. 덮개 너머로 막내딸의 숨이 빨라졌다⁠.

“⁠녹음에 제 빚 이야기도 있어요⁠?⁠”

“⁠검인 전에는 말씀 못 드립니다⁠.⁠”

“⁠있네요⁠. 녹음이 있네요⁠. 있으니까 검인 이야기를 하시죠⁠.⁠”

기철은 또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하지 않는 소리에도 높낮이가 있다⁠. 기철의 숨은 낮게 깔려 있었다⁠.

“⁠아빠가 제 빚을 오빠 앞에서 다 까 놓으라고 녹음했어요⁠? 막내한테 주지 말라고⁠? 그걸 법원에서 틀면 저는 어떻게 돼요⁠? 신문에 다 나요⁠. 회장 막내딸 빚더미⁠. 아빠가 막내딸한테 집 안 준 이유⁠.⁠”

“⁠아가씨⁠.⁠”

“⁠저 그거 듣기 싫어요⁠. 아빠 목소리로 그거 듣기 싫어요⁠.⁠”

막내딸의 목소리가 덮개에 부딪혀 흩어졌다⁠. 나는 덮개 안에서 날개를 폈다⁠. 날개 끝이 천에 닿았다⁠. 천이 출렁였다⁠. 밤을 걷어 내는 방법은 하나다⁠. 나는 새장 문고리를 부리로 들어 올렸고⁠, 열린 문으로 머리를 내밀어 덮개 자락을 부리로 물고 아래로 당겼다⁠. 덮개가 새장 모서리에서 미끄러지며 바닥으로 떨어졌다⁠.

낮이 한꺼번에 쏟아졌다⁠. 막내딸과 기철이 동시에 나를 봤다⁠. 막내딸은 울던 얼굴이었고 기철은 하얀 얼굴이었다⁠. 나는 둘의 얼굴을 보고 기철의 굽 소리를 냈다⁠. 삐걱⁠, 삐걱⁠. 기철이 제 구두를 내려다봤다⁠. 막내딸이 우는 얼굴로 웃음을 터뜨렸다⁠.

“⁠…이 새를 어떻게 덮어⁠.⁠”

기철이 바닥의 덮개를 주워 새장 위에 반만 걸쳐 두었다⁠. 손이 덮개 귀퉁이를 오래 만졌다⁠.

“⁠회장님도 못 덮으셨습니다⁠. 회의 중에 앵두가 떠들면 덮개를 씌우셨는데⁠, 앵두가 금방 걷어 냈습니다⁠. 그러면 회장님은 회의를 그만하셨습니다⁠. 앵두가 걷으면 회의 끝이다⁠, 하시면서요⁠.⁠”

“⁠아빠가요⁠?⁠”

“⁠임원들이 앵두를 무서워했습니다⁠. 보고가 길어지면 앵두가 덮개를 걷을까 봐서요⁠.⁠”

막내딸이 코를 훌쩍이며 다시 웃었다⁠. 기철은 웃지 않았지만 덮개 귀퉁이를 놓을 때 손끝이 가벼웠다⁠.

*

점심 무렵 감나무 밑 평상에서 큰아들이 소리를 질렀다⁠. 서재 창으로 다 들렸다⁠.

“⁠아줌마⁠, 내 라이터 못 봤어요⁠? 여기 놔뒀는데⁠.⁠”

라이터는 감나무 꼭대기에 있었다⁠. 까치가 물어 갔다⁠. 까치는 빛나는 것을 보면 둥지로 가져간다⁠. 나는 창틀에서 까치 소리로 목 안을 낮게 굴렸다⁠. 먹을 것이 있다⁠. 감나무 꼭대기에서 까치가 대답했다⁠. 짧게 한 번⁠, 길게 한 번⁠. 먹을 것이 아니다⁠, 내 것이다⁠.

큰아들이 감나무를 올려다봤다⁠. 둥지 가장자리에서 은빛이 반짝였다⁠. 큰아들이 감나무를 발로 한 번 찼다⁠. 까치 둘이 둥지에서 튀어나와 큰아들 머리 위를 낮게 돌았다⁠. 큰아들이 두 팔로 머리를 감싸고 평상 밑으로 들어갔다⁠.

“⁠아줌마⁠! 아줌마⁠, 까치가⁠!⁠”

부엌 아주머니가 빗자루를 들고 뛰어나왔다가 평상 밑의 큰아들을 보고 빗자루를 내렸다⁠. 아주머니가 입을 막고 웃었다⁠. 대문 밖에서 사진기 소리가 몇 번 났다⁠. 다음 날 아침 신문에는 평상 밑에 숨은 그룹 부회장의 엉덩이가 실렸다⁠. 부엌 아주머니가 신문을 서재로 들고 와서 나에게 보여 주었다⁠. 나는 신문에서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아 고개를 돌렸다⁠.

신문 한 귀퉁이에는 다른 기사도 있었다⁠. 아주머니가 소리 내어 읽었다⁠.

“⁠「⁠외국계 펀드⁠, 지분 칠 퍼센트 넘겨⁠… 상속 분쟁 길어지면 경영권 노린다⁠」 아이고⁠, 까치 때문에 회사 넘어가겠네⁠.⁠”

*

오후 세 시⁠, 서재에 다섯이 모였다⁠. 큰아들⁠, 막내딸⁠, 기철⁠, 변호사⁠, 그리고 나⁠. 부엌 아주머니는 문밖에 있었다⁠. 아주머니의 슬리퍼가 문밖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변호사는 이번에는 회장 의자에 앉지 않았다⁠. 의자 옆에 서서 넥타이핀을 손으로 가렸다⁠.

“⁠실장님⁠,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녹음 유언을 갖고 계시면 지체 없이 가정법원에 내셔야 합니다⁠. 법이 정한 의무입니다⁠. 내지 않고 숨기시면 법적인 책임을 지실 수 있습니다⁠.⁠”

“⁠알고 있습니다⁠.⁠”

“⁠아신다면 내세요⁠.⁠”

큰아들이 기철 앞으로 한 걸음 나섰다⁠.

“⁠실장님⁠, 이제 다 알잖아요⁠. 막내 빚⁠. 아버지가 왜 막내한테 주지 말라고 했는지⁠. 녹음 들으면 끝나요⁠. 내가 아버지 뜻대로 집 정리하고⁠, 막내 빚도 내가 은행이랑 어떻게든 맞춰 볼게요⁠. 내가 그 정도는 해요⁠.⁠”

“⁠부회장님⁠.⁠”

기철이 안주머니에서 종이를 꺼냈다⁠. 소견서였다⁠. 기철은 종이를 펴서 큰아들과 막내딸이 다 보이게 들었다⁠.

“⁠회장님은 칠월부터 판단을 못 하셨습니다⁠. 이것은 사실입니다⁠. 주치의가 석 달 동안 일주일에 두 번 집에 와서 본 것입니다⁠. 회장님이 마지막에 하신 말씀을 다 뜻으로 받으면⁠, 회장님 병을 회장님 뜻으로 받는 것입니다⁠. 저는 그렇게 못 합니다⁠.⁠”

“⁠녹음이 칠월 전이면요⁠?⁠”

큰아들이 바로 받았다⁠.

“⁠형님이라고 부른 게 여름이라면서요⁠. 여름이 칠월 전이에요⁠, 후예요⁠? 녹음한 날이 언제예요⁠?⁠”

기철의 입술이 붙었다⁠. 손에 든 소견서 끝이 떨렸다⁠. 종이 떠는 소리는 아주 작았고⁠, 나에게는 크게 들렸다⁠.

나는 횃대를 차고 날았다⁠. 회장 의자 등받이로 가지 않았다⁠. 처음으로 기철의 어깨에 내려앉았다⁠. 기철의 어깨는 회장 어깨보다 높고 단단했다⁠. 양복 천 밑에서 심장이 빨리 뛰는 것이 발바닥으로 올라왔다⁠. 기철이 몸을 굳혔다⁠. 내가 어깨에 앉는 동안 기철은 숨을 쉬지 않았다⁠.

칠월부터 회장은 밤마다 이렇게 했다⁠. 복도 의자에서 졸던 기철을 불러 서재로 들이고⁠, 기철의 소매를 두 손으로 붙들고⁠, 숨을 몰아쉬며 같은 소리를 냈다⁠. 해가 짧아지는 동안 내내⁠. 기철은 처음에는 “⁠네⁠, 회장님⁠” 했고⁠, 나중에는 대답을 하지 못했다⁠. 나는 소리를 기철의 귀에 그대로 돌려주었다⁠. 숨이 차오르는 데까지⁠, 끝에 무언가 더 붙으려다 끊어지는 데까지⁠.

“⁠지워라⁠, 기철아⁠. 지워라⁠. 다시⁠…⁠.⁠”

삐⁠.

기철의 무릎이 꺾였다⁠. 기철은 카펫에 한쪽 무릎을 대고 앉았다⁠. 내가 어깨에서 미끄러지지 않으려고 발톱을 세웠다⁠. 양복 천이 발톱에 찢어지는 소리가 났다⁠. 기철은 나를 털어 내지 않았다⁠.

막내딸이 입을 막았다⁠. 큰아들이 한 걸음 물러섰다⁠. 변호사의 손이 넥타이핀에서 떨어졌다⁠. 얼굴 넷이 다 기철에게 갔고⁠, 기철의 얼굴은 바닥을 보고 있었다⁠. 이번에는 피가 어디로도 가지 않았다⁠. 기철의 얼굴은 늙어 있었다⁠. 이레 전에도⁠, 어제도 늙어 있지 않았다⁠.

기철이 안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단단한 것을 꺼냈다⁠. 손바닥만 한 검은 녹음기였다⁠. 해가 가장 길던 여름에 서재 책상 위에서 빨간 불을 켜고 있던 물건이었다⁠.

“⁠…지우지 못했습니다⁠.⁠”

기철의 목소리는 쉬어 있었다⁠.

“⁠유월 이십일일 밤⁠, 회장님이 이 서재에서 녹음으로 유언을 남기셨습니다⁠. 제가 증인을 섰습니다⁠. 칠월에 회장님이 지우라고 하셨습니다⁠. 열흘 동안 밤마다 지우라고 하셨습니다⁠. 저는 지우겠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리고 지우지 못했습니다⁠.⁠”

“⁠왜요⁠?⁠”

막내딸이 물었다⁠. 목소리가 갈라져 있었다⁠.

“⁠어느 회장님 말씀을 들어야 할지 몰랐습니다⁠. 유월의 회장님인지⁠, 칠월의 회장님인지⁠.⁠”

기철이 녹음기를 두 손으로 쥐었다⁠. 큰아들이 손을 내밀었다⁠. 기철은 녹음기를 가슴에 붙였다⁠.

“⁠검인 전에는 아무도 못 듣습니다⁠. 부회장님도⁠, 아가씨도⁠, 저도⁠. 회장님 목소리는 법원에서 처음 나가야 합니다⁠.⁠”

어깨 위에서 나는 기철의 심장 소리를 들었다⁠. 빨랐다가 천천히 느려졌다⁠. 오래 들고 있던 무거운 것을 내려놓은 새의 심장이 그렇게 느려진다⁠. 기철이 무릎을 짚고 일어났다⁠. 나는 어깨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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