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5,345자)

형님, 오셨소

회장님 유언은 앵무새 · 문들레

수요일 아침⁠, 안방에서 쇠가 쇠를 파는 소리가 났다⁠. 높고 가늘게 시작해서 점점 낮아지다가 한 번씩 덜컥 걸리는 소리였다⁠. 큰아들이 부른 금고 기술자가 회장 침대 머리맡의 금고에 드릴을 대고 있었다⁠. 기술자는 서재 문을 열어 놓은 채 연장 가방을 날랐다⁠. 나는 새장 문고리를 들어 올렸다⁠.

서재 문턱을 넘은 것은 회장이 집을 나간 뒤 처음이었다⁠. 혼자 넘은 것은 서른 해 만에 처음이었다⁠. 복도는 서재보다 찼고 소리가 길게 울렸다⁠. 나는 바닥을 걸었다⁠. 앵무새는 날기보다 걷기를 좋아한다⁠. 발톱이 마룻바닥에 닿을 때마다 똑⁠, 똑 소리가 났다⁠. 내 발소리를 내가 듣는 일이 낯설었다⁠.

안방 문은 반쯤 열려 있었다⁠. 침대는 반듯하게 정리돼 있었고⁠, 머리맡 협탁에는 틀니를 담그던 유리컵이 비어 있었다⁠. 침대 밑에 회장의 슬리퍼 한 켤레가 나란히 놓여 있었다⁠. 왼짝 뒤축이 납작하게 꺾여 있었다⁠. 오른발을 뒤꿈치로 밀어 벗던 버릇 때문에 꺾인 자국이었다⁠. 나는 슬리퍼 옆에 내려앉아 오래 서 있었다⁠. 슬리퍼에서는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다⁠.

마지막 석 달 동안 회장은 이 침대에서 잠들지 못했다⁠. 누우면 천장을 보고 내 이름을 불렀고⁠, 내가 대답하지 않으면 일어나 서재로 건너왔다⁠. 침대에서 서재까지 슬리퍼 끄는 소리가 스물두 번 났다⁠. 나는 슬리퍼 소리가 들리면 횃대 끝으로 나가 기다렸다⁠. 지금은 침대 밑 슬리퍼 옆에서 기다렸다⁠. 어디서 기다리든 스물두 번은 오지 않았다⁠.

기술자가 드릴을 멈추고 이마를 닦았다⁠. 나는 드릴 소리를 냈다⁠. 높고 가늘게⁠, 점점 낮게⁠, 덜컥⁠. 기술자가 손에 든 드릴을 내려다봤다⁠. 드릴은 꺼져 있었다⁠. 기술자가 드릴을 귀에 대고 흔들었다⁠.

“⁠…부회장님⁠, 이거 혼자 돌아요⁠.⁠”

“⁠무슨 소리예요⁠?⁠”

내가 한 번 더 돌렸다⁠. 기술자가 드릴을 침대 위에 던지고 뒷걸음질 쳤다⁠. 큰아들이 침대 밑의 나를 보고 이마를 짚었다⁠.

“⁠앵두야⁠, 제발⁠.⁠”

금고는 점심 전에 열렸다⁠. 안에는 도장 셋⁠, 오래된 금반지 하나⁠, 사진 몇 장⁠, 회장이 젊을 때 찬 시계가 있었다⁠. 큰아들이 한 칸씩 손을 넣어 바닥까지 더듬었다⁠. 녹음기는 없었다⁠. 큰아들은 금반지를 오래 들여다보다가 도로 넣었다⁠.

“⁠엄마 반지네⁠.⁠”

큰아들의 목소리가 처음으로 낮게 내려앉았다⁠. 반음이 아니라 한 음 넘게 내려간 소리였다⁠.

*

부엌에서 압력밥솥이 칙칙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나는 부엌으로 내려갔다⁠. 계단은 한 칸씩 뛰어 내려갔다⁠. 부엌 아주머니가 냉장고 앞에서 나를 보고 소리를 질렀다⁠.

“⁠아이고 깜짝이야⁠. 너 여기까지 어떻게 왔어⁠?⁠”

나는 식탁 의자 등받이에 올라앉아 압력밥솥 소리를 냈다⁠. 추가 돌아가며 내는 칙칙 소리 끝에 김이 한꺼번에 빠지는 긴 소리까지⁠. 아주머니가 가스레인지로 뛰어가 불을 줄였다⁠. 진짜 밥솥은 아직 추가 돌기 시작한 참이었다⁠. 아주머니가 나를 돌아봤다⁠.

“⁠이 웬수야⁠. 밥 다 된 줄 알았잖아⁠.⁠”

아주머니는 나를 내쫓지 않았다⁠. 식탁에 앉아 삶은 밤을 까서 반으로 쪼개 주었다⁠. 부엌 라디오가 뉴스를 했다⁠. 그룹이 베트남에서 짓는 공장 이야기였다⁠. 현지 합작사가 돌아가신 회장의 마지막 결재를 다시 따져 보겠다고 했다는 소리였다⁠. 아주머니가 라디오를 껐다⁠.

“⁠다들 회장님 마지막 석 달을 붙들고 싸우네⁠. 살아 계실 땐 아무도 안 붙들더니⁠.⁠”

*

오후에 기철이 왔다⁠. 응접실 소파에 큰아들이 앉아 있었고⁠, 기철은 앉지 않았다⁠. 나는 응접실 커튼봉에 올라가 있었다⁠. 막내딸은 계단 중간에서 난간을 잡고 서 있었다⁠.

“⁠실장님⁠, 그룹에 물류 회사 하나 있잖아요⁠. 대표 자리가 내년 봄에 비어요⁠. 실장님 같은 분이 가셔야죠⁠.⁠”

“⁠부회장님⁠.⁠”

“⁠녹음이 있으면 나한테 먼저 들려주세요⁠. 아버지가 막내한테 주지 말라고 했으면⁠, 아버지 뜻대로 하는 거잖아요⁠. 실장님이 아버지 뜻 지키는 사람 아니에요⁠?⁠”

“⁠녹음이 있다면 법원으로 갑니다⁠. 부회장님한테 먼저 가지 않습니다⁠.⁠”

“⁠있다는 거네요⁠.⁠”

기철은 대답하지 않았다⁠. 큰아들이 소파에서 몸을 앞으로 뺐다⁠.

“⁠변호사가 그랬죠⁠. 녹음 유언 갖고 있으면 지체 없이 법원에 내야 한다고⁠. 안 내면 실장님이 죄인 되는 거예요⁠. 스물여덟 해 깨끗하게 산 사람이 아버지 녹음 하나 때문에⁠.⁠”

“⁠제가 죄인이 되는 일은 제가 정하겠습니다⁠.⁠”

“⁠실장님이 뭘 정해요⁠. 실장님은 비서예요⁠.⁠”

기철의 얼굴에 피가 올라왔다⁠. 스물여덟 해 동안 기철의 얼굴이 붉어지는 것을 나는 두 번 봤다⁠. 한 번은 회장이 기철의 생일을 잊지 않고 금일봉을 내밀었을 때였고⁠, 한 번은 지금이었다⁠.

기철이 숨을 고르고 목을 가다듬었다⁠. 흠⁠. 나는 커튼봉에서 날개를 폈다⁠. 해가 가장 길던 여름⁠, 첫 녹음을 하던 밤에 회장이 기철을 보고 한 소리가 있었다⁠. 기철이 서재에 들어오며 목을 가다듬었을 때⁠, 회장은 의자에서 반쯤 일어나 반가운 얼굴로 기철을 불렀다⁠. 기철은 대답을 못 하고 문턱에 서 있었다⁠.

“⁠형님⁠, 오셨소⁠.⁠”

회장의 목소리였다⁠. 반가운 목소리였다⁠. 응접실이 조용해졌다⁠. 계단의 막내딸이 난간을 놓았다⁠. 기철의 붉던 얼굴이 하얘졌다⁠. 큰아들은 소파에서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아버지가 실장님을 형님이라고 불렀어요⁠?⁠”

부엌 아주머니가 행주를 쥔 채 응접실 문간에 나와 있었다⁠.

“⁠회장님 형님은 피란 때 돌아가셨는데⁠. 회장님이 열 살 때⁠.⁠”

“⁠실장님⁠.⁠”

“⁠한 번 그러셨습니다⁠.⁠”

“⁠언제요⁠?⁠”

“⁠여름에요⁠.⁠”

“⁠칠월 전이에요⁠, 후예요⁠?⁠”

기철은 대답하지 않고 응접실을 나갔다⁠. 현관에서 굽 소리가 멈췄다⁠. 손목시계 태엽을 감는 소리가 났다⁠. 하루에 한 번만 감는 태엽을⁠, 기철은 현관에 선 채로 한 번 더 감았다⁠.

큰아들이 커튼봉 위의 나를 올려다봤다⁠. 큰아들의 얼굴은 붉지도 하얗지도 않았다⁠. 계산하는 얼굴이었다⁠. 회장이 보고를 받으며 짓던 얼굴과 똑같았다⁠.

“⁠앵두야⁠. 너는 어느 편이냐⁠.⁠”

나는 큰아들의 라이터 소리를 냈다⁠. 딸깍⁠. 큰아들이 제 주머니를 더듬었다⁠.

*

막내딸이 맨발로 현관까지 뛰어 내려갔다⁠. 나는 막내딸 어깨에 내려앉았다⁠. 기철은 구두를 다 신고 현관문 손잡이를 잡고 있었다⁠. 대문 밖에서 사진기 소리가 몇 번 났다가 멎었다⁠. 기자들은 기철의 차가 나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실장님⁠.⁠”

기철이 손잡이를 놓지 않고 돌아봤다⁠.

“⁠아빠가 실장님을 형님이라고 부른 날⁠, 아빠는 뭘 하고 있었어요⁠?⁠”

“⁠말씀 연습을 하셨습니다⁠.⁠”

“⁠무슨 연습이요⁠?⁠”

기철이 내 얼굴을 봤다⁠. 내 연노랑 눈을 한참 들여다봤다⁠. 기철은 서른 해 동안 내 눈을 그렇게 오래 본 적이 없었다⁠.

“⁠녹음이죠⁠. 아빠가 녹음하려고 연습한 거죠⁠. 그리고 녹음한 날⁠, 실장님이 옆에 있었고요⁠.⁠”

“⁠아가씨⁠.⁠”

“⁠저 말 좀 해 주세요⁠. 아빠가 나한테 아무것도 주지 말라고 했어요⁠? 정말로⁠?⁠”

막내딸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높아지면서 끝이 갈라졌다⁠. 기철은 대답 대신 막내딸의 맨발을 내려다봤다⁠.

“⁠회장님은 아가씨 걱정을 가장 많이 하셨습니다⁠.⁠”

“⁠걱정해서 아무것도 주지 말라고요⁠?⁠”

“⁠신발 신으십시오⁠. 바닥이 찹니다⁠.⁠”

기철이 현관문을 열었다⁠. 찬바람이 들어와 내 꽁지깃을 들췄다⁠. 사진기 소리가 한꺼번에 쏟아졌다⁠. 기철은 고개를 숙이지 않고 대문까지 걸어갔다⁠. 왼쪽 굽이 돌계단마다 삐걱거렸다⁠. 막내딸은 문이 닫힌 뒤에도 맨발로 현관에 서 있었다⁠. 발가락이 대리석 위에서 하얘졌다⁠.

“⁠형님⁠, 오셨소⁠.⁠”

내가 한 번 더 했다⁠. 막내딸이 어깨 위의 나를 돌아봤다⁠.

“⁠그 말⁠, 잊지 마⁠. 앵두야⁠. 나중에 필요할지도 몰라⁠.⁠”

막내딸이 처음으로 나에게 소리를 넣어 달라고 하지 않고⁠, 갖고 있으라고 했다⁠. 나는 막내딸의 귓불을 부리로 한 번 물었다⁠. 알았다는 소리였다⁠.

*

해 질 녘⁠, 막내딸은 나를 데리고 이 층 제 방으로 올라갔다⁠. 창가 의자에 나를 앉히고 창문을 반쯤 열었다⁠. 감나무 가지가 창 앞까지 뻗어 있었다⁠. 까치가 길게 한 번 울었다⁠. 내 나무다⁠.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막내딸의 전화가 울렸다⁠. 화면을 보고 막내딸은 창가에서 멀리 떨어져 옷장 앞으로 갔다⁠. 그래도 전화기 속 쉰 목소리는 방을 건너왔다⁠.

“⁠아가씨⁠, 유언장 열었다면서요⁠. 신문에 났어요⁠. 집이 아가씨 앞으로 나왔다고⁠.⁠”

“⁠…네⁠.⁠”

“⁠그럼 이제 정리되는 거죠⁠?⁠”

막내딸이 옷장 문에 이마를 댔다⁠. 목소리를 낮췄지만 낮춘 소리가 더 또렷하게 들렸다⁠.

“⁠집 받으면 갚을게요⁠. 사십구재만 지나면 바로요⁠. 그러니까 저희 오빠한테는 연락하지 말아 주세요⁠. 제발요⁠.⁠”

전화가 끊겼다⁠. 막내딸은 옷장 문에 이마를 댄 채 오래 서 있었다⁠.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목덜미가 붉었다⁠. 막내딸이 입을 막고 숨을 한 번 크게 쉬었다⁠. 울음을 삼키는 소리였다⁠. 나는 창가 의자 위에서 막내딸의 소리를 처음부터 끝까지 귀에 넣었다⁠. 높이도⁠, 떨림도⁠, 제발요 끝의 갈라짐도⁠.

*

저녁에 막내딸이 된장찌개를 끓였다⁠. 회장이 좋아하던 국이었다⁠. 막내딸이 큰아들에게 전화를 걸어 저녁을 먹고 가라고 했고⁠, 큰아들은 망설이다 왔다⁠. 장례 뒤로 둘이 한 상에 앉은 것은 처음이었다⁠. 기철은 부르지 않았다⁠. 부엌 아주머니가 밥을 푸며 둘 사이에 수저를 하나씩 놓았다⁠.

식탁 머리에는 회장 의자가 비어 있었다⁠. 나는 등받이에 앉았다⁠. 큰아들이 찌개를 한 숟갈 떠서 입에 넣고 한참 씹었다⁠.

“⁠…엄마 맛 나네⁠.⁠”

“⁠엄마한테 배운 건 아빠가 다 가르쳐 줬어⁠. 엄마 가고 나서⁠. 아빠가 기억하는 대로⁠.⁠”

큰아들이 웃었다⁠. 막내딸도 웃었다⁠. 두 사람 웃음 사이로 숟가락이 국그릇에 부딪치는 소리가 몇 번 났다⁠. 싸우던 새들도 먹을 때는 같은 그릇에 고개를 박는다⁠. 부리가 부딪쳐도 쪼지 않는다⁠.

큰아들이 숟가락을 내려놓고 말했다⁠.

“⁠막내야⁠. 집⁠, 팔자는 말 안 할게⁠. 대신 네 몫 세금은 어떻게 낼 건지만 말해 줘⁠. 나도 은행이랑 이야기해 볼게⁠.⁠”

막내딸의 얼굴에 피가 돌았다⁠. 고마운 붉음이었다⁠. 막내딸이 입을 열었다⁠. 무슨 말을 할지 고르는 동안 입술이 한 번 떨렸다⁠. 나는 막내딸이 고르는 사이에 막내딸의 소리를 냈다⁠. 옷장 문에 이마를 대고 낸⁠, 낮춰서 더 또렷한 소리⁠.

“⁠집 받으면 갚을게요⁠. 사십구재만 지나면 바로요⁠. 그러니까 저희 오빠한테는 연락하지 말아 주세요⁠. 제발요⁠.⁠”

큰아들의 숟가락이 국그릇 위에서 멈췄다⁠.

막내딸의 얼굴이 목부터 붉어졌다가⁠, 이마에 닿기도 전에 하얘졌다⁠. 부엌 아주머니가 밥주걱을 든 채 돌아섰다⁠. 찌개 끓는 소리만 가스레인지 위에서 났다⁠. 보글⁠, 보글⁠.

“⁠…누구한테 갚는데⁠?⁠”

큰아들의 목소리는 크지 않았다⁠. 크지 않아서 막내딸이 더 움츠러들었다⁠. 막내딸이 숟가락을 내려놓았다⁠. 손이 떨려 숟가락이 상 위에서 한 번 굴렀다⁠.

“⁠막내야⁠. 누구한테⁠, 얼마를 갚는데⁠?⁠”

나는 회장 의자 등받이 위에서 두 사람의 얼굴을 번갈아 봤다⁠. 얼굴색을 바꾸는 소리가 하나 더 늘었다⁠. 이번 소리는 막내딸의 얼굴에서 피를 가장 많이 빼냈다⁠. 소리 하나가 늘어난 일이 좋은 일인지는 몰랐다⁠. 큰아들이 의자를 뒤로 밀며 일어났다⁠. 회장 의자는 아무도 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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