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화(5,706자)

정비소

재벌가 며느리가 운전기사와 도망칠 날을 정했다 · 예솔아

백초 모터스의 다락은 정비소 천장 아래에 있었다⁠. 철제 사다리 열두 칸을 올라가야 했다⁠. 다락에는 접이식 침대 하나⁠, 낡은 소파 하나⁠, 작은 창 하나가 있었다⁠. 창밖으로 성수동 뒷골목의 지붕들이 보였다⁠. 아래층에서 리프트가 오르내릴 때마다 다락 바닥이 조금씩 떨렸다⁠.

“⁠형이 정비소 처음 차렸을 때 여기서 삼 년 살았어요⁠.⁠”

은하가 침대 시트를 갈며 말했다⁠. 새 시트였다⁠. 포장 비닐이 바닥에 떨어져 있었다⁠. 오늘 아침 오는 길에 산 것이었다⁠.

“⁠엔진 소리 때문에 처음엔 잠 못 주무실 거예요⁠. 밤엔 안 돌리는데⁠, 낮엔 시끄러워요⁠.⁠”

“⁠청운당은 조용했어요⁠.⁠”

“⁠알아요⁠.⁠”

은하가 시트 귀퉁이를 매트리스 아래로 접어 넣었다⁠. 나는 소파에 앉아 은하의 손을 보았다⁠. 시트를 접는 손도 핸들을 쥐는 손처럼 정확했다⁠.

“⁠조용한 데서는 잠이 안 왔어요⁠. 여섯 해 동안⁠.⁠”

*

오전 열 시⁠, 탁은빈이 정비소에 왔다⁠. 서류 가방을 리프트 옆 공구대 위에 올려놓았다⁠. 기름 묻은 공구대였다⁠. 은빈은 신경 쓰지 않았다⁠.

“⁠대문 영상⁠, 제가 갖고 있어요⁠. 안 올렸어요⁠. 올리면 하루 동안은 사모님 편 여론이 생겨요⁠. 이틀째부터는 사모님이 대륭 집안 일을 밖에 판 며느리가 돼요⁠. 법정에서 쓸게요⁠.⁠”

“⁠시어머님은요⁠?⁠”

“⁠가만히 안 계실 거예요⁠. 오늘 아니면 내일⁠.⁠”

은빈이 백초가 내민 믹스 커피를 받아 마셨다⁠. 기름 자국 없는 쪽으로⁠. 백초가 미리 돌려 놓았다⁠.

“⁠그리고 사모님⁠. 차남 쪽에서 다시 연락 왔어요⁠. 이번엔 전무가 직접요⁠. 사모님 친정 회사를 차남 쪽 계열사가 인수하겠대요⁠. 빚까지 다⁠. 대신 그믐밤 카드 사본이요⁠.⁠”

“⁠거절해 주세요⁠.⁠”

“⁠거절했어요⁠. 이번엔 진짜로요⁠.⁠”

은빈이 커피 컵을 구겼다⁠.

“⁠사무실 키우는 거⁠, 다른 소송으로 할게요⁠. 이 소송은 이기기만 할게요⁠.⁠”

*

오후 내내 나는 정비소에서 일을 거들었다⁠. 할 줄 아는 일이 없었다⁠. 백초가 타이어 공기압 재는 법을 가르쳐 주었다⁠. 게이지를 밸브에 꽂고⁠, 숫자를 읽고⁠, 모자라면 넣는다⁠. 서른두⁠. 서른다섯⁠. 나는 숫자를 읽을 때마다 소리 내어 말했다⁠. 백초가 웃었다⁠.

“⁠사모님⁠, 숫자 읽는 목소리가 은행 지점장 같아요⁠.⁠”

“⁠친정이 건설 회사예요⁠. 숫자는 배웠어요⁠.⁠”

“⁠그럼 오늘부터 사장님 하세요⁠. 저는 손님 볼 테니까⁠.⁠”

은하는 정비소 구석에서 승합차 범퍼를 고치고 있었다⁠. 대문 앞에서 핸들을 끝까지 꺾느라 앞바퀴 정렬이 틀어졌다고 했다⁠. 은하는 차 밑에 들어가 누운 채로 말했다⁠.

“⁠형⁠. 사모님한테 이상한 거 가르치지 마⁠.⁠”

“⁠타이어 공기압이 이상한 거냐⁠?⁠”

“⁠사모님 손에 기름 묻히지 말라고⁠.⁠”

나는 손바닥을 보았다⁠. 검은 기름이 손금을 따라 번져 있었다⁠. 여섯 해 동안 내 손바닥은 하얬다⁠. 손목이 아니라 손바닥이 하얬다⁠. 기름 묻은 손바닥을 바지에 문질렀다⁠. 지워지지 않았다⁠. 나는 웃었다⁠. 우스워서 웃었다⁠.

*

밤 열한 시⁠, 정비소 셔터가 내려갔다⁠. 백초는 근처 원룸으로 갔다⁠. 다락에 은하와 나만 남았다⁠. 창밖에서 골목 고양이가 울었다⁠. 아래층 리프트가 멈춘 정비소는 청운당보다 조용했다⁠. 조용한데 무섭지 않았다⁠.

은하는 소파에 앉아 있었다⁠. 침대는 내 자리라고 했다⁠. 나는 침대 끝에 앉아 은하를 보았다⁠. 은하는 손톱 밑의 기름을 칼끝으로 긁어내고 있었다⁠. 오래 긁었다⁠. 손톱 밑은 이미 깨끗했다⁠.

“⁠은하 씨⁠.⁠”

“⁠네⁠.⁠”

“⁠여기 앉아요⁠.⁠”

은하가 칼을 내려놓았다⁠. 침대 끝⁠, 내 옆에 앉았다⁠. 둘 사이에 한 뼘이 있었다⁠. 운전석과 조수석 사이의 거리였다⁠. 나는 은하의 손을 잡았다⁠. 손톱 밑이 빨갰다⁠. 너무 오래 긁은 손이었다⁠.

“⁠인제에서 열 번째 커브요⁠. 브레이크를 늦게 밟았잖아요⁠.⁠”

“⁠네⁠.⁠”

“⁠사람 앞에서는 일찍 밟는다면서요⁠.⁠”

은하가 나를 보았다⁠. 다락 전구 하나 아래에서 은하의 눈이 젖어 있었다⁠.

“⁠사모님⁠.⁠”

“⁠세린이요⁠. 사모님 말고⁠.⁠”

은하가 한참 입을 열지 못했다⁠. 두 해 동안 한 번도 부르지 않은 이름이었다⁠. 은하의 입술이 움직였다⁠. 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두 번째에 소리가 났다⁠. 아주 작게⁠.

“⁠세린 씨⁠.⁠”

나는 은하의 이름을 불렀다⁠. 은하야⁠. 존댓말이 아니었다⁠. 혼잣말로만 쓰던 반말이 처음으로 다른 사람에게 갔다⁠. 은하가 웃었다⁠. 웃다가 울었다⁠. 우는 얼굴로 내게 입을 맞췄다⁠.

은하의 손이 내 블라우스 단추를 하나씩 풀었다⁠. 천천히⁠. 하나를 풀 때마다 손이 멈추고 내 얼굴을 보았다⁠. 괜찮냐고 묻는 손이었다⁠. 나는 대답 대신 은하의 레이싱 재킷 지퍼를 내렸다⁠. 지퍼 소리가 다락에 길게 울렸다⁠. 재킷 안의 티셔츠는 정비소 기름 냄새가 났다⁠. 땀 냄새가 났다⁠. 은하의 냄새였다⁠.

은하의 손바닥이 내 등에 닿았다⁠. 굳은살이 등을 쓸었다⁠. 여섯 해 동안 이 등은 아픈 자리만 기억했다⁠. 은하의 손은 아픈 자리를 묻지 않고 피해 갔다⁠. 두 해 동안 계단을 내려오는 내 걸음을 본 손이었다⁠. 손이 어깨뼈를 지나 허리로 내려왔다⁠. 허리 오른쪽⁠, 남편의 손가락이 눌렀던 자리 앞에서 손이 멈췄다⁠. 나는 은하의 손을 잡아 허리 오른쪽에 올려놓았다⁠. 이제 아프지 않다고⁠. 은하의 손바닥이 따뜻했다⁠.

숨이 커브를 따라 쉬어졌다⁠. 인제의 열아홉 개 커브처럼⁠. 은하의 숨이 내 귓가에서 빨라졌다가 느려졌다⁠. 나는 은하의 등에 손가락을 세웠다⁠. 은하의 짧은 머리카락이 내 턱을 간질였다⁠. 접이식 침대가 삐걱거렸다⁠. 아래층 정비소의 리프트가 아주 조금 떨렸다⁠. 다락 바닥의 떨림이 침대 다리를 타고 올라왔다⁠. 우리는 웃었다⁠. 웃음이 숨에 섞였다⁠. 은하가 내 손목을 잡았다⁠. 쥐지 않았다⁠. 감쌌다⁠. 하얀 손목 위에 은하의 손가락이 하나씩 내려앉았다⁠. 다섯 개⁠. 다락의 밤에 내 손목에 닿은 손가락은 쥐는 손가락이 아니라 세는 손가락이었다⁠. 맥을 세었다⁠. 하나⁠, 둘⁠, 셋⁠.

새벽 세 시⁠, 은하는 내 옆에서 잠들었다⁠. 나는 잠들지 않았다⁠. 다락 창밖으로 성수동 지붕 위에 달이 떠 있었다⁠. 엔진 냄새와 은하의 숨소리가 다락에 가득했다⁠. 조용하지 않았다⁠. 나는 처음으로 조용하지 않은 방에서 졸음을 느꼈다⁠.

*

아침 일곱 시⁠, 은하의 휴대전화가 울렸다⁠. 백초였다⁠. 은하가 받았다⁠. 백초의 목소리가 전화기 밖으로 새어 나왔다⁠.

“⁠은하야⁠. 신문 봐라⁠. 사모님 거 말고 네 거⁠.⁠”

은하가 화면을 열었다⁠. 나도 옆에서 보았다⁠. 종합지 사회면 머리기사였다⁠.

「⁠대륭 장남 부인⁠, 정신과 치료 이력⁠… 여성 운전기사와 부적절한 관계⁠」

기사 첫머리에 인제 피트 차고 사진이 실려 있었다⁠. 얼굴은 흐리게 가려 있었다⁠. 경주차 옆구리의 숫자 7은 가려지지 않았다⁠. 기사 세 번째 문단에 내 병원 이름과 처방 약 이름이 적혀 있었다⁠. 결혼 셋째 해 겨울⁠, 석 달⁠. 다섯 번째 문단에 은하의 이름이 있었다⁠. 전직 투어링카 드라이버 차 모 씨⁠. 그리고 다섯 해 전 개막전 사고⁠. 같은 팀 동료의 척추 부상⁠. 기사 끝에 한 줄이 붙어 있었다⁠. 「⁠사고 이후 차 씨는 서킷을 떠났으며⁠, 이후 대륭 저택에 운전기사로 들어갔다⁠.⁠」

댓글이 이천 개였다⁠. 나는 첫 댓글을 읽지 않았다⁠. 은하가 휴대전화를 침대 위에 엎어 놓았다⁠.

“⁠동생이 이거 볼 거예요⁠. 지팡이 짚고 출근하는 동생이요⁠.⁠”

은하의 목소리가 평평했다⁠. 평평해서 더 아팠다⁠.

“⁠은하야⁠.⁠”

“⁠괜찮아요⁠. 아니⁠, 안 괜찮아요⁠. 안 괜찮다고 말할게요⁠. 세린 씨도 안 괜찮다고 말해요⁠. 괜찮다는 말은 어머님이 가르친 거잖아요⁠.⁠”

*

오전 열한 시⁠, 권씨 건설 사옥 일 층 로비에 직원들이 모여 있었다⁠. 서른 명쯤이었다⁠. 아버지가 계단 중간에 서 있었다⁠. 계단 아래에 낯선 양복 둘이 서 있었다⁠. 대륭 차남 쪽 전무와 비서였다⁠. 은하가 승합차를 사옥 앞에 대자 직원들이 돌아보았다⁠. 나는 조수석에서 내렸다⁠. 기름 자국이 남은 청바지를 입고⁠.

경리 과장이 나를 보았다⁠. 다음 달 결혼한다는 대리도 보았다⁠. 나는 대리의 얼굴을 처음 보았다⁠. 스물아홉쯤이었다⁠. 대리가 고개를 숙였다⁠. 나도 숙였다⁠.

“⁠세린아⁠.⁠”

아버지가 계단 중간에서 나를 불렀다⁠. 목소리가 갈라져 있었다⁠.

“⁠오늘 아침에 은행 둘이 등을 돌렸다⁠. 거래처 셋이 계약을 미뤘다⁠. 기사 때문이다⁠. 대륭 며느리 집안하고 일하기 싫단다⁠. 공정위가 대륭건설은 막아 줬는데 기사는 못 막는다⁠.⁠”

차남 쪽 전무가 한 걸음 나섰다⁠. 나를 보고 웃었다⁠. 예의 바른 웃음이었다⁠.

“⁠사모님⁠. 부사장님께서 권씨 건설을 저희 계열사로 받겠다고 하셨습니다⁠. 빚까지 전부요⁠. 직원분들 고용도 그대로 보장합니다⁠. 계약서 가져왔습니다⁠. 사장님 서명만 하시면 됩니다⁠. 저희가 부탁드리는 건 하나입니다⁠. 그믐밤 영상이요⁠. 회장님 장례가 끝나면 이사회가 열립니다⁠. 장남분이 아내를 때린 영상 하나면 이사회가 끝납니다⁠.⁠”

로비가 조용해졌다⁠. 직원들이 아버지를 보았다⁠. 나를 보았다⁠. 서른 명의 얼굴이었다⁠. 월급날이 다음 주인 얼굴들이었다⁠.

아버지가 계단을 내려왔다⁠. 전무 앞에 섰다⁠. 계약서를 받았다⁠. 펜을 받았다⁠. 펜을 쥔 손이 떨렸다⁠.

“⁠아버지⁠.⁠”

내 목소리가 로비에 울렸다⁠. 정중했다⁠. 한 칸도 올리지 않았다⁠.

“⁠그 영상은 제 손목이에요⁠. 제 손목을 차남 부사장님 이사회 책상에 올려놓으시겠어요⁠?⁠”

아버지의 펜이 계약서 위에서 멈췄다⁠. 전무가 웃음을 거두지 않았다⁠.

“⁠사모님⁠. 어차피 법정에 나올 영상입니다⁠. 법정에 나오나 이사회에 나오나⁠.⁠”

“⁠법정에서는 제가 증인석에 앉아요⁠. 이사회에서는 제가 안 앉아요⁠. 다른 사람이 제 손목을 틀어요⁠.⁠”

나는 직원들을 돌아보았다⁠. 경리 과장⁠, 대리⁠, 서른 명⁠.

“⁠여러분⁠. 다음 주 월급이 걸린 걸 압니다⁠. 제가 그 월급을 걸고 있다는 것도 압니다⁠. 미안하다고 말하지 않겠습니다⁠. 미안하다고 하면 제가 잘못한 게 되니까요⁠. 저는 맞았고⁠, 맞은 걸 말했어요⁠. 그게 다예요⁠. 다른 회사의 칼이 되면 월급은 나오겠죠⁠. 그 대신 다음에 누가 맞으면 그 사람도 누군가의 칼이 돼야 해요⁠.⁠”

로비가 조용했다⁠. 아무도 박수를 치지 않았다⁠. 박수를 칠 자리가 아니었다⁠. 대리가 한 걸음 앞으로 나왔다⁠. 손을 들었다⁠. 회의 시간에 발언권을 얻는 손이었다⁠.

“⁠사장님⁠. 저 결혼식 축의금 덜 받아도 돼요⁠. 다음 달 월급 한 달 늦게 받아도 돼요⁠. 대신 아가씨 손목은 팔지 마세요⁠.⁠”

경리 과장이 손을 들었다⁠. 과장 옆의 직원이 들었다⁠. 다 들지는 않았다⁠. 서른 명 가운데 열하나였다⁠. 열아홉은 들지 않았다⁠. 들지 않은 사람들도 나를 노려보지는 않았다⁠. 바닥을 보았다⁠.

아버지가 펜을 전무에게 돌려주었다⁠. 계약서를 반으로 접어 전무의 가슴께에 내밀었다⁠.

“⁠전무님⁠. 우리 회사는 열하나가 들었소⁠. 열아홉이 안 들었고⁠. 그래도 이 회사 사장은 나요⁠. 다음 주에 부도가 나면 부도가 나는 거요⁠.⁠”

*

밤 열 시⁠, 다락에서 은하의 휴대전화가 울렸다⁠. 백초가 아니었다⁠. 모르는 번호였다⁠. 은하가 받았다가 나를 보았다⁠. 내게 전화기를 건넸다⁠.

“⁠세린아⁠.⁠”

시어머니였다⁠. 낮고 느린 목소리가 아니었다⁠. 목소리가 쉬어 있었다⁠.

“⁠회장님 가셨다⁠. 아홉 시 사십 분에⁠.⁠”

나는 다락 창밖을 보았다⁠. 성수동 지붕 위에 달이 떠 있었다⁠. 시아버지의 얼굴이 떠올랐다⁠. 칠순 잔치 날⁠, 나를 보고 우리 큰며느리 예쁘다고 웃던 얼굴⁠. 칠순 잔치 날 밤이 첫 번째 밤이었다⁠.

“⁠장례식에 와라⁠. 며느리로⁠. 상복 입고⁠. 빈소에 서 있어라⁠. 사흘 동안⁠.⁠”

“⁠어머님⁠.⁠”

“⁠오면 네 친정 살려 주마⁠. 은행 둘⁠, 거래처 셋⁠, 내일 아침에 다 돌아온다⁠. 안 오면 기자들이 묻겠지⁠. 시아버지 빈소에 안 온 며느리⁠. 정신과 다니는 며느리⁠. 여자 기사랑 사는 며느리⁠.⁠”

시어머니가 잠깐 숨을 골랐다⁠. 전화기 너머로 사람들 소리가 들렸다⁠. 병원 복도의 소리였다⁠.

“⁠내일 아침 아홉 시⁠. 신촌 대학병원 장례식장 특실⁠. 기사 데리고 와라⁠. 그 기사로⁠.⁠”

9화는 어땠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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