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화(5,390자)

빈소

재벌가 며느리가 운전기사와 도망칠 날을 정했다 · 예솔아

아침 여섯 시⁠, 다락 아래에서 다리미 소리가 났다⁠. 다리미 소리라고 하기엔 쇳소리가 컸다⁠.

내려가 보니 백초가 작업대 위에 검은 정장 한 벌을 펴 놓고 있었다⁠. 다리미는 없었다⁠. 백초 손에 들린 것은 열풍기였다⁠. 도장 작업할 때 페인트를 말리는 기계였다⁠.

“⁠사장님⁠. 그거 옷에 써도 돼요⁠?⁠”

“⁠범퍼에도 쓰는데 양복에 못 쓰겠어요⁠? 온도만 낮추면 돼요⁠.⁠”

정장 소매 끝에서 연기가 한 줄 올라왔다⁠. 백초가 기계를 얼른 치웠다⁠. 은하가 계단에 앉아 웃음을 참다가 결국 웃었다⁠. 정장은 은하의 옷이었다⁠. 다섯 해 전 시상식에 입고 나간 뒤로 비닐에 싸여 있던 옷이었다⁠. 은하는 소매 끝을 손가락으로 문질러 보고 말했다⁠.

“⁠괜찮아요⁠. 탄 데는 손목 안쪽이에요⁠. 아무도 안 봐요⁠.⁠”

나는 은하의 손목을 보았다⁠. 은하도 제 말을 듣고 나서야 알았다⁠. 은하가 소매를 잡아당겨 탄 자리를 감췄다⁠. 손목을 감추는 사람이 하나 더 늘었다⁠. 이번에는 웃을 일이었다⁠.

나는 시어머니가 보낸 상복을 꺼내지 않았다⁠. 새벽 다섯 시에 퀵서비스 기사가 정비소 셔터 앞에 상자를 두고 갔다⁠. 상자 안에는 흰 리본과 검은 한복이 들어 있었다⁠. 맏며느리의 상복이었다⁠. 나는 상자를 열어 보기만 하고 닫았다⁠. 내 가방에는 검은 원피스 한 벌이 있었다⁠. 결혼 전에 산 옷이었다⁠. 소매가 짧았다⁠.

“⁠가요⁠?⁠” 은하가 물었다⁠.

“⁠가요⁠.⁠”

“⁠며느리로요⁠?⁠”

“⁠조문하러요⁠. 돌아가신 분은 나한테 잘해 주셨어요⁠. 칠순 잔치 날 우리 큰며느리 예쁘다고 하셨어요⁠. 그 말에는 절해야죠⁠.⁠”

은하가 고개를 끄덕이고 승합차 열쇠를 집었다⁠.

*

강변북로는 막히지 않았다⁠. 일요일 아침이었다⁠. 승합차는 세단처럼 미끄러지지 않았다⁠. 뒷자리의 공구 상자가 다리 이음새를 지날 때마다 덜컹거렸다⁠. 은하는 오른손으로 기어를 바꾸고 왼손으로 핸들을 잡았다⁠. 세단에서는 한 번도 본 적 없는 손이었다⁠. 기어가 있는 차에서 은하의 손은 바빴고 즐거워 보였다⁠.

나는 조수석 창문을 손가락 한 마디만큼 내렸다⁠. 강바람이 들어왔다⁠.

은하가 나를 흘끗 보았다⁠.

“⁠그거 「⁠오늘은 집에 가기 싫다⁠」 아니었어요⁠?⁠”

“⁠맞아요⁠.⁠”

“⁠사모님⁠, 지금 집이 없잖아요⁠.⁠”

“⁠그러니까요⁠. 가기 싫은 데를 가는 중이라고요⁠. 신호를 새로 만들 시간이 없어서 있는 걸 썼어요⁠.⁠”

은하가 웃음을 터뜨렸다⁠. 웃다가 깜빡이를 켜지 않은 채 핸들을 두 번 툭 쳤다⁠. 나는 뒤를 돌아보았다⁠. 뒤에 붙은 차는 없었다⁠. 텅 빈 강변북로였다⁠.

“⁠아무도 없는데요⁠?⁠”

“⁠알아요⁠. 그냥 해 봤어요⁠. 이제 사모님 뒤에 누가 붙으면⁠, 제가 붙은 거예요⁠.⁠”

은하가 앞을 보고 말했다⁠.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창문을 한 마디 더 내렸다⁠. 두 마디 신호는 정한 적이 없었다⁠. 은하도 묻지 않았다⁠.

*

백초의 승합차 옆구리에는 큰 글씨가 붙어 있었다⁠. 「⁠백초 모터스 · 엔진오일 교환 만구천 원 · 성수동⁠」 신촌 대학병원 장례식장 앞에서 주차 안내원이 승합차를 보고 손을 저었다⁠.

“⁠납품 차량은 뒤로 돌아가세요⁠.⁠”

“⁠조문 왔어요⁠.⁠” 은하가 창문을 내렸다⁠.

안내원이 「⁠엔진오일 교환⁠」을 한 번⁠, 검은 원피스를 입은 나를 한 번 보았다⁠. 안내원 뒤로 검은 세단들이 줄지어 들어왔다⁠. 대륭 계열사 사장단의 차였다⁠. 번호판 끝자리가 전부 같은 숫자였다⁠.

“⁠특실 조문이세요⁠?⁠”

“⁠네⁠.⁠”

안내원은 한참 망설이다가 세단 사이에 승합차를 세우게 했다⁠. 은하가 엔진을 끄며 중얼거렸다⁠.

“⁠오일 갈 때 됐다는 차들 사이에 오일 가는 차가 섰네요⁠.⁠”

나는 웃었다⁠. 웃고 나니 손이 덜 떨렸다⁠.

장례식장 로비에 노비호가 서 있었다⁠. 검은 양복에 흰 장갑을 끼고 조문객의 신발 정리를 지휘하고 있었다⁠. 나를 보고 허리를 굽혔다⁠. 허리를 펴면서 낮게 말했다⁠.

“⁠사모님⁠. 지하 주차장 출구는 둘입니다⁠. 하나는 정문⁠, 하나는 영안실 뒤⁠. 영안실 뒤 출구는 장의차만 씁니다만⁠, 장의차가 드나드는 길을 막는 사람은 없습니다⁠. 죽은 사람한테 길 비키라는 사람은 없으니까요⁠.⁠”

“⁠집사님⁠. 그건 속담이에요⁠?⁠”

“⁠방금 만들었습니다⁠.⁠”

노비호가 흰 장갑 낀 손으로 은하의 탄 소매 끝을 가리켰다⁠. 은하가 얼른 팔을 내렸다⁠. 노비호는 못 본 척 고개를 돌려 다음 조문객에게 허리를 굽혔다⁠. 모르는 척은 노비호가 이 집에서 가장 잘하는 일이었다⁠. 오늘은 노비호의 모르는 척이 우리 편이었다⁠.

*

특실 빈소는 꽃으로 가득했다⁠. 국화 화환이 복도 끝까지 줄지어 놓여 있었다⁠. 계열사⁠, 협력사⁠, 국회의원⁠, 은행장⁠. 화환 리본의 글자가 복도를 따라 하얗게 이어졌다⁠. 리본 사이에 「⁠권씨건설 임직원 일동⁠」이 있었다⁠. 아버지가 보낸 화환이었다⁠. 복도 맨 끝⁠, 화장실 앞이었다⁠.

상주 자리에 태빈이 서 있었다⁠. 굴건을 쓰고 두건 아래로 얼굴이 하얗게 질려 있었다⁠. 옆에 시동생이 섰다⁠. 두 형제 사이가 한 뼘 떨어져 있었다⁠. 영정 옆에 시어머니가 앉아 있었다⁠. 흰 소복 차림이었다⁠. 시어머니 옆자리가 비어 있었다⁠. 방석 하나⁠, 흰 리본 하나⁠. 맏며느리의 자리였다⁠.

조문객 줄이 빈소 문 앞에서 시작해 복도로 이어졌다⁠. 나는 줄 맨 끝에 섰다⁠. 앞에 선 협력사 사장이 나를 알아보고 두 번 돌아보았다⁠. 세 번째에는 몸을 돌려 인사했다⁠.

“⁠사모님⁠, 왜 여기 서 계세요⁠?⁠”

“⁠조문 왔어요⁠.⁠”

협력사 사장이 줄을 양보하려 했다⁠. 나는 사양했다⁠. 내 차례까지 이십 분이었다⁠. 이십 분 동안 빈소 안의 시어머니는 한 번도 줄을 보지 않았다⁠. 보지 않으면서 다 보고 있었다⁠. 시어머니의 손이 무릎 위에서 염주를 굴렸다⁠. 알이 하나 넘어갈 때마다 내가 한 걸음씩 다가갔다⁠.

내 차례가 왔다⁠. 나는 영정 앞에 섰다⁠. 향을 꽂고 두 번 절했다⁠. 일어서서 상주에게 맞절을 했다⁠. 태빈이 절을 받았다⁠. 시동생이 받았다⁠. 시어머니에게 고개를 숙였다⁠. 시어머니가 나를 올려다보았다⁠.

“⁠상복은⁠.⁠”

“⁠조문객은 상복을 안 입어요⁠, 어머님⁠.⁠”

“⁠네 자리는 여기다⁠.⁠”

시어머니의 손이 빈 방석을 가리켰다⁠. 손가락에 염주가 감겨 있었다⁠.

“⁠제 자리는 줄 끝이었어요⁠. 이십 분 서 있었어요⁠. 다리가 아파요⁠. 그래도 제 발로 선 자리예요⁠.⁠”

시어머니의 입가가 아주 조금 움직였다⁠. 웃음인지 경련인지 몰랐다⁠. 시어머니가 염주를 한 알 넘겼다⁠.

“⁠접객실에 가 있어라⁠. 시동생이 너를 보자고 한다⁠.⁠”

*

접객실 구석 자리에서 시동생이 육개장을 앞에 두고 앉아 있었다⁠. 숟가락은 들지 않았다⁠. 나를 보고 일어섰다⁠.

“⁠형수님⁠. 앉으세요⁠.⁠”

“⁠형수님이라고 부르시는 건 오늘이 마지막일 거예요⁠.⁠”

“⁠그래서 부르는 겁니다⁠. 오늘까지는 형수님이 우리 집 사람이니까요⁠.⁠”

시동생은 형보다 다섯 살 어렸다⁠. 형보다 말이 느렸고 형보다 계산이 빨랐다⁠. 시동생이 휴대전화 화면을 내 앞에 밀었다⁠. 화면에 은행 이름 둘이 떠 있었다⁠. 아버지 회사의 대출을 회수하겠다고 통보한 은행들이었다⁠.

“⁠이 두 은행⁠, 제가 오늘 오후에 막을 수 있습니다⁠. 아버님 회사⁠, 다음 주 부도 안 납니다⁠. 형수님 이혼 소송⁠, 우리 쪽 변호인단이 붙습니다⁠. 형수님 변호사 사무실 혼자서는 대륭 법무팀 못 이깁니다⁠.⁠”

“⁠대신요⁠?⁠”

“⁠발인 다음 날 임시 이사회가 열립니다⁠. 영종대교 블랙박스 영상과 십이월 삼십일일 카드⁠, 이사회 자료로 내 주세요⁠. 형이 아내를 때리는 사람이라는 게 이사들 앞에서 확인되면 승계는 끝납니다⁠.⁠”

시동생은 「⁠때리는⁠」이라는 말을 아무렇지 않게 했다⁠. 회의 자료의 항목을 읽는 목소리였다⁠.

“⁠도련님은 그 영상⁠, 언제부터 알았어요⁠?⁠”

시동생이 대답하지 않았다⁠. 숟가락을 집어 들었다가 내려놓았다⁠. 대답 대신 내 뒤를 보았다⁠. 은하가 접객실 문간에 서 있었다⁠.

내 가방에서 휴대전화가 울렸다⁠. 탁은빈이었다⁠.

“⁠세린 씨⁠. 차남 쪽 제안 들으셨죠⁠? 받으세요⁠.⁠”

나는 전화기를 귀에서 조금 뗐다⁠. 시동생이 나를 보고 있었다⁠. 탁은빈의 목소리는 빨랐다⁠.

“⁠숫자로 말씀드릴게요⁠. 대륭 법무팀 변호사 열넷⁠, 우리 사무실 셋⁠. 은행 대출 이백사십억⁠, 다음 주 만기⁠. 차남 쪽이 붙으면 이혼 판결까지 넉 달⁠, 혼자면 이 년⁠. 받으세요⁠.⁠”

“⁠변호사님⁠. 차남 쪽이 제안할 걸 어떻게 아셨어요⁠?⁠”

전화기 너머가 조용해졌다⁠. 탁은빈은 숫자를 먼저 말하는 사람이었다⁠. 숫자가 안 나왔다⁠.

“⁠지난달에 연락이 왔어요⁠. 끊지 않았어요⁠. 끊으면 정보가 안 들어오니까요⁠. 세린 씨한테 해로운 건 하나도 안 넘겼어요⁠. 맹세할게요⁠.⁠”

“⁠해로운 거 말고는 넘기셨네요⁠.⁠”

“⁠세린 씨⁠.⁠”

“⁠제가 소장을 냈을 때⁠, 변호사님이 이 소송으로 사무실을 키우실 거라는 거 알았어요⁠. 그건 괜찮았어요⁠. 저도 변호사님을 써서 집을 나가려고 했으니까요⁠. 그런데 저는 이제 누구의 칼도 안 할 거예요⁠. 남편의 손에 맞던 손목이 도련님 손에서 칼이 되면⁠, 손만 바뀐 거예요⁠.⁠”

나는 전화를 끊었다⁠. 시동생을 보았다⁠.

“⁠도련님⁠. 영상은 법정에 나가요⁠. 이사회에는 안 나가요⁠. 은행은 안 막아 주셔도 돼요⁠.⁠”

시동생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실망한 얼굴이 아니었다⁠. 다음 수를 세는 얼굴이었다⁠.

“⁠형수님⁠. 형은 오늘 형수님을 그냥 보내지 않을 겁니다⁠. 어머니가 형한테 무슨 말을 했는지 저도 압니다⁠.⁠”

*

빈소 앞 복도로 나왔을 때 태빈이 굴건을 벗고 서 있었다⁠. 조문객 줄 한가운데였다⁠. 줄에 선 사람들이 숨을 죽였다⁠. 은하가 내 왼쪽 반걸음 뒤에 섰다⁠.

“⁠어머니 옆에 앉아⁠.⁠” 태빈이 낮게 말했다⁠.

“⁠조문은 했어요⁠.⁠”

“⁠앉으라고⁠. 사흘만⁠. 사흘만 앉아 있으면 기자들이 조용해져⁠. 어머니가 네 친정 살린대⁠. 네 기사도 내린대⁠. 너 정신과 다닌 기사⁠, 내리면 끝이야⁠.⁠”

“⁠태빈 씨가 사흘 동안 할 일은요⁠?⁠”

“⁠나는 상주야⁠.⁠”

“⁠상주는 조문을 받는 사람이에요⁠. 저도 받으세요⁠. 조문객 하나로⁠.⁠”

태빈의 눈이 내 왼쪽 뒤로 갔다⁠. 은하를 보았다⁠. 은하는 고개를 숙이지 않았다⁠. 태빈이 웃었다⁠. 결혼식 날 사진 속의 웃음이었다⁠.

“⁠그 여자 데리고 아버지 빈소에 왔어⁠? 사람들 다 보는데⁠?⁠”

“⁠사람들이 다 보니까 데리고 왔어요⁠.⁠”

태빈의 손이 올라왔다⁠. 빨랐다⁠. 내 왼손 손목을 쥐었다⁠. 짧은 소매 아래 손목이 그대로 드러났다⁠. 태빈의 엄지가 늘 누르던 자리를 찾아 눌렀다⁠. 몸이 먼저 알았다⁠. 나는 숨을 멈췄다⁠. 여섯 해 동안 멈춰 온 숨이었다⁠.

조문객들이 보았다⁠. 협력사 사장이 보았다⁠. 국화 화환 사이의 계열사 사장단이 보았다⁠. 노비호가 신발장 앞에서 흰 장갑을 낀 손을 멈췄다⁠.

은하가 한 걸음 나섰다⁠. 나는 오른손을 들어 은하를 막았다⁠. 은하가 멈췄다⁠. 이번에는 은하가 액셀을 밟지 않았다⁠.

“⁠태빈 씨⁠. 놓으세요⁠.⁠”

“⁠들어가서 앉으면 놔⁠.⁠”

“⁠지금 놓으세요⁠. 사람들이 보고 있어요⁠.⁠”

빈소 입구에서 빛이 터졌다⁠. 하얀 빛이었다⁠. 한 번⁠, 다시 한 번⁠. 상조회사 조끼를 입은 젊은 남자가 휴대전화 대신 카메라를 들고 있었다⁠. 기자였다⁠. 장례식장 직원 사이에 섞여 들어와 있었다⁠.

태빈이 손을 놓았다⁠. 늦었다⁠. 플래시가 세 번째 터졌을 때 태빈의 손가락 자국이 내 손목에 하얗게⁠, 그다음 붉게 올라왔다⁠.

시어머니가 빈소 안에서 일어서 있었다⁠. 염주가 바닥에 떨어져 굴렀다⁠.

10화는 어땠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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