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화(5,323자)

대문

재벌가 며느리가 운전기사와 도망칠 날을 정했다 · 예솔아

새벽 다섯 시⁠, 나는 옷을 입었다⁠. 긴소매를 입지 않았다⁠. 반소매 블라우스에 청바지⁠. 결혼하고 처음 입는 청바지였다⁠. 친정에서 가져온 옷장 맨 아래에 여섯 해 동안 개켜져 있었다⁠. 허리가 조금 헐거웠다⁠.

손목의 멍은 다 빠졌다⁠. 누런 자국도 없었다⁠. 손목 안쪽의 피부가 하얗게 드러났다⁠. 나는 손목을 오래 보았다⁠. 여섯 해 동안 이 자리가 하얀 날이 드물었다⁠.

작은 가방 하나를 쌌다⁠. 휴대전화 충전기⁠, 그믐밤 카드가 든 비닐봉지⁠, 손목 사진을 인화한 봉투⁠, 지갑⁠. 옷은 넣지 않았다⁠. 옷은 대륭 사람들이 사 준 것이었다⁠.

여섯 시 반⁠, 노비호가 문을 두드렸다⁠. 쟁반이 없었다⁠. 빈손이었다⁠.

“⁠사모님⁠. 아침 죽은 오늘 안 끓였습니다⁠.⁠”

“⁠네⁠.⁠”

“⁠구급차는 일곱 시에 옵니다⁠. 원장님도 같이 오신답니다⁠. 경호원은 넷입니다⁠. 대문에 둘⁠, 현관에 둘⁠. 회장 사모님은 여섯 시 사십오 분에 내려오십니다⁠.⁠”

노비호는 경호원 숫자만 말하고 돌아섰다⁠. 계단을 내려가다가 멈췄다⁠. 돌아보지 않았다⁠.

“⁠사모님⁠. 경비실 대문 버튼은 빨간색입니다⁠. 오른쪽 맨 아래⁠.⁠”

*

여섯 시 십 분⁠, 휴대전화가 울렸다⁠. 은하였다⁠. 문자가 아니라 전화였다⁠. 해고된 뒤 처음 거는 전화였다⁠.

“⁠사모님⁠. 지금 출발해요⁠. 노면 온도 7도⁠. 안개 꼈어요⁠. 타이어가 덜 붙어요⁠.⁠”

“⁠오늘도 노면 온도예요⁠?⁠”

“⁠버릇이에요⁠. 출발 전에 노면 온도를 안 들으면 손이 안 풀려요⁠.⁠”

은하가 잠깐 말을 멈췄다⁠. 전화기 너머로 엔진 소리가 들렸다⁠. 낡은 엔진이었다⁠. 백초가 옆에서 무언가 투덜거렸다⁠. 클러치가 어떻다고⁠.

“⁠사모님⁠. 하나만요⁠. 저는 대문 안으로 못 들어가요⁠. 들어가면 주거 침입이래요⁠. 변호사님이 그랬어요⁠. 대문 안은 사모님 길이에요⁠. 대문 밖은 제 길이고요⁠.⁠”

“⁠알아요⁠.⁠”

“⁠현관에서 대문까지 몇 걸음이에요⁠?⁠”

“⁠서른 걸음이요⁠. 어제 세어 봤어요⁠.⁠”

“⁠사모님 다리로 이십 초예요⁠. 이십 초만 걸어 나오세요⁠. 그다음은 제가 몰게요⁠.⁠”

전화가 끊겼다⁠. 나는 휴대전화를 가방에 넣었다⁠. 이십 초⁠. 여섯 해를 이십 초로 걸어 나가야 했다⁠.

*

여섯 시 오십 분⁠, 나는 이 층 창가에 서 있었다⁠. 대문 밖 언덕길에 안개가 끼어 있었다⁠. 4월 초였다⁠. 북악산 아래로 벚꽃이 반쯤 피어 있었다⁠. 안개 속에서 엔진 소리가 올라왔다⁠. 낮고 거친 소리였다⁠. 대륭 차들의 소리가 아니었다⁠.

낡은 승합차 한 대가 안개를 뚫고 언덕을 올라왔다⁠. 흰색이었는데 흰색이 아니었다⁠. 옆구리에 「⁠백초 모터스⁠」라고 적혀 있었다⁠. 페인트가 반쯤 벗겨진 글씨였다⁠. 승합차가 대문 앞에서 멈췄다⁠. 멈추고 나서 핸들을 끝까지 꺾었다⁠. 앞바퀴가 돌며 승합차가 대문 앞을 옆으로 가로막았다⁠. 대문 폭과 승합차 길이가 거의 같았다⁠. 한 뼘이 남았다⁠.

운전석 문이 열렸다⁠. 운동화가 먼저 내려왔다⁠. 은하였다⁠. 검은 정장이 아니었다⁠. 낡은 레이싱 재킷에 청바지⁠. 재킷 등에 숫자 7이 박혀 있었다⁠. 조수석에서 백초가 내렸다⁠. 작업복 차림에 렌치 대신 보온병을 들고 있었다⁠.

대문 앞 경호원 둘이 경비실에서 뛰어나왔다⁠.

“⁠차 빼세요⁠. 여기 주정차 금지입니다⁠.⁠”

“⁠고장 났어요⁠.⁠”

은하가 말했다⁠. 승합차 보닛에 손바닥을 올렸다⁠.

“⁠시동이 안 걸려요⁠. 정비소 사장님이 여기 계신데 지금 보온병밖에 안 가져왔대요⁠. 렌치를 놓고 오셨대요⁠.⁠”

백초가 보온병을 들어 보였다⁠.

“⁠커피는 있습니다⁠. 드릴까요⁠?⁠”

경호원 하나가 승합차 운전석 문을 열려고 했다⁠. 잠겨 있었다⁠. 다른 하나가 무전기로 경비실을 불렀다⁠. 견인차를 부르라고 했다⁠. 백초가 경호원에게 친절하게 알려 주었다⁠.

“⁠견인차는 이 언덕까지 이십오 분 걸려요⁠. 평창동은 길이 좁아서⁠. 제가 정비소 하면서 견인차 기사들하고 스무 해를 일했거든요⁠. 평창동 언덕은 견인차 기사들이 제일 싫어하는 동네예요⁠. 그리고 이 차는 사륜이라 견인 고리가 뒤에 있어요⁠. 앞에서 당기면 범퍼만 빠져요⁠. 범퍼값은 대륭에서 물어 주실 거죠⁠?⁠”

*

일곱 시 정각⁠, 언덕 아래에서 사이렌 없는 구급차가 올라왔다⁠. 흰 차체에 병원 이름이 작게 적혀 있었다⁠. 구급차 뒤에 검은 세단 한 대가 따라왔다⁠. 구급차가 승합차 앞에서 멈췄다⁠. 대문까지 들어갈 길이 없었다⁠.

현관문이 열렸다⁠. 시어머니가 나왔다⁠. 회색 정장에 진주 귀걸이⁠. 화장을 다 한 얼굴이었다⁠. 어젯밤 문턱 앞의 예순의 얼굴이 아니었다⁠. 시어머니 뒤로 경호실장이 따라 나왔다⁠. 시어머니가 대문 앞까지 걸어갔다⁠. 대문 창살 너머로 은하를 보았다⁠.

나는 방을 나왔다⁠. 계단을 내려갔다⁠. 한 칸씩⁠. 한 칸에 한 번씩 딛었다⁠. 다리가 아프지 않았다⁠. 현관 앞의 경호원 둘이 나를 보고 앞을 막았다⁠.

“⁠사모님⁠. 잠시만 안에 계십시오⁠.⁠”

“⁠비키세요⁠.⁠”

내 목소리가 현관에 울렸다⁠. 정중했다⁠. 한 칸도 올리지 않았다⁠. 경호원은 비키지 않았다⁠. 나는 현관 계단에 섰다⁠. 대문까지 정원 길이 서른 걸음이었다⁠. 경호원 둘⁠, 정원 길⁠, 대문⁠, 시어머니⁠, 은하⁠.

*

“⁠차 기사⁠.⁠”

시어머니가 대문 창살 너머로 말했다⁠. 은하는 더 이상 이 집 기사가 아니었다⁠. 시어머니는 그렇게 불렀다⁠.

“⁠차 빼라⁠. 지금 빼면 성수동 정비소는 그대로 둔다⁠. 안 빼면 오늘 오후에 경매 들어간다⁠. 사장 양반도 들었지⁠?⁠”

백초가 보온병 뚜껑을 열었다⁠. 커피를 한 잔 따랐다⁠. 김이 안개 속으로 올라갔다⁠.

“⁠들었습니다⁠. 근데 회장 사모님⁠, 정비소는 원래 제 것도 아니었어요⁠. 은행 거였죠⁠. 이제 대륭 거고⁠. 제 건 렌치 몇 개랑 은하 차 하나예요⁠. 그건 경매에 안 나와요⁠.⁠”

원장이 세단에서 내렸다⁠. 흰 가운을 입지 않았다⁠. 양복 차림이었다⁠. 원장이 시어머니에게 다가가 낮게 말했다⁠.

“⁠정희야⁠. 사람들이 보는데⁠.⁠”

언덕길 아래에서 탁은빈이 걸어 올라왔다⁠. 회색 정장⁠, 서류 가방⁠, 그리고 손에 든 휴대전화⁠. 카메라가 켜져 있었다⁠. 은빈은 구급차 옆에 서서 휴대전화를 높이 들었다⁠.

“⁠안녕하세요⁠. 권세린 씨 법률 대리인 탁은빈입니다⁠. 지금 시각 오전 일곱 시 삼 분⁠, 평창동 청운당 대문 앞입니다⁠. 권세린 씨는 본인 의사로 입원을 거부하고 있습니다⁠. 지금 이 장면은 녹화되고 있습니다⁠.⁠”

원장이 은빈의 카메라를 보았다⁠. 한 걸음 물러섰다⁠. 구급차 운전석에서 기사가 창문을 내리고 원장을 보았다⁠. 원장이 기사에게 손을 들었다⁠. 기다리라는 손이었다⁠. 기사는 시동을 끄지 않았다⁠.

시어머니는 카메라를 보지 않았다⁠. 은하만 보았다⁠.

“⁠너는 왜 여기 있니⁠. 해고됐잖아⁠. 돈도 못 받고 증언도 안 하고⁠. 너한테 남는 게 뭐냐⁠.⁠”

은하가 승합차 보닛에서 손을 뗐다⁠. 대문 창살 앞까지 걸어갔다⁠. 창살 사이로 시어머니와 은하의 얼굴이 한 뼘 떨어져 있었다⁠.

“⁠회장 사모님⁠. 서른한 해 전 섣달 그믐이요⁠.⁠”

시어머니의 얼굴이 굳었다⁠. 화장 아래에서 무언가가 멈췄다⁠.

“⁠의정부 병원 주차장이요⁠. 동이 틀 때까지 차 안에 앉아 계셨다면서요⁠. 강원도로 가자고 하셨다면서요⁠.⁠”

“⁠그 얘기를 네가 어떻게⁠.⁠”

“⁠그때 시동 걸 사람이 없었죠⁠.⁠”

은하가 창살을 손으로 잡았다⁠. 굳은살 박인 손이었다⁠.

“⁠오늘은 있어요⁠.⁠”

*

정원이 조용해졌다⁠. 안개 속에서 벚꽃잎이 하나 떨어졌다⁠. 경호실장이 시어머니를 보았다⁠. 지시를 기다리는 눈이었다⁠. 시어머니는 지시를 내리지 않았다⁠. 창살 너머의 은하를 보고 있었다⁠. 그리고 은하 너머의 승합차를 보았다⁠. 낡은 승합차의 운전석 문이 열려 있었다⁠.

나는 현관 계단을 내려갔다⁠. 경호원 하나가 내 팔을 잡았다⁠. 맨살의 팔이었다⁠. 긴소매가 없었다⁠. 경호원의 손가락이 내 팔뚝에 닿았다⁠. 나는 걸음을 멈추고 경호원을 보았다⁠.

“⁠제 몸에 손대지 마세요⁠. 지금 녹화되고 있어요⁠.⁠”

경호원이 대문 앞 은빈의 휴대전화를 보았다⁠. 손을 놓았다⁠. 나는 정원 길을 걸었다⁠. 서른 걸음⁠. 하나⁠, 둘⁠, 셋⁠. 걸음을 셌다⁠. 다리가 떨리지 않았다⁠. 열⁠, 열하나⁠. 시어머니가 돌아보았다⁠. 나를 보았다⁠. 반소매 블라우스와 청바지와 하얀 손목을 보았다⁠.

“⁠세린아⁠. 들어가라⁠.⁠”

“⁠어머님⁠.⁠”

스물⁠, 스물하나⁠. 경호실장이 내 앞으로 한 걸음 나왔다⁠. 대문까지 일곱 걸음이 남아 있었다⁠.

경비실에서 소리가 났다⁠. 철컥⁠. 대문의 잠금장치가 풀리는 소리였다⁠. 모터가 돌았다⁠. 대문이 천천히 열리기 시작했다⁠. 경호실장이 돌아보았다⁠. 시어머니가 돌아보았다⁠.

경비실 창문 너머에 노비호가 서 있었다⁠. 오른손 검지가 오른쪽 맨 아래 빨간 버튼 위에 있었다⁠. 노비호는 버튼에서 손을 떼지 않았다⁠. 경비실 경호원이 노비호의 어깨를 잡았다⁠. 노비호는 꿈쩍하지 않았다⁠. 예순 살의 손가락이었다⁠. 서른 해 동안 시동을 걸지 않은 손가락이었다⁠.

“⁠노 집사⁠!⁠”

시어머니가 처음으로 소리를 질렀다⁠. 노비호가 경비실 창문을 열었다⁠. 고개를 숙였다⁠. 언제나처럼 정중하게⁠.

“⁠회장 사모님⁠. 서른한 해 전에 못 건 시동입니다⁠. 오늘 겁니다⁠. 해고는 내일 해 주십시오⁠. 오늘은 바쁩니다⁠.⁠”

*

대문이 다 열렸다⁠. 승합차와 대문 사이에 한 뼘이 남아 있었다⁠. 사람 하나가 지나갈 수 있는 틈이었다⁠. 경호실장이 나를 막으려다 멈췄다⁠. 은빈의 카메라가 경호실장의 얼굴을 비추고 있었다⁠. 구급차 기사가 시동을 껐다⁠. 원장이 세단 쪽으로 물러섰다⁠.

스물아홉⁠, 서른⁠. 나는 대문을 지났다⁠. 시어머니 옆을 지났다⁠. 시어머니는 나를 잡지 않았다⁠. 잡을 수 있었다⁠. 손을 뻗으면 닿는 자리였다⁠. 시어머니의 손은 진주 귀걸이 아래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세린아⁠.⁠”

시어머니가 내 등 뒤에서 말했다⁠. 나는 멈추었다⁠. 돌아보지 않았다⁠.

“⁠강원도는 멀다⁠.⁠”

“⁠알아요⁠, 어머님⁠. 저는 서초동까지만 가요⁠.⁠”

나는 승합차와 대문 사이의 한 뼘을 지났다⁠. 은하가 승합차 옆에 서 있었다⁠. 은하가 문을 열었다⁠. 뒷문이 아니었다⁠. 조수석 문이었다⁠.

두 해 동안 은하는 내게 뒷문만 열어 주었다⁠. 나는 두 해 동안 뒷자리에만 앉았다⁠. 운전석과 뒷자리 사이는 한 뼘이었고⁠, 여섯 해 동안 한 뼘은 신분이었다⁠. 은하가 조수석 문을 잡고 나를 보았다⁠. 타라는 말을 하지 않았다⁠. 괜찮냐고 묻지 않았다⁠.

나는 조수석에 앉았다⁠. 시트가 낡아서 스프링이 엉덩이를 찔렀다⁠. 안전띠는 다섯 점짜리가 아니라 하나였다⁠. 나는 안전띠를 당겨 채웠다⁠. 철컥⁠. 은하가 문을 닫고 운전석으로 돌아왔다⁠. 백초가 짐칸 문을 열고 뒤에 탔다⁠. 보온병을 꼭 쥐고⁠.

“⁠시동 안 걸린다면서요⁠.⁠”

내가 말했다⁠. 은하가 키를 돌렸다⁠. 엔진이 한 번에 깨어났다⁠.

“⁠방금 고쳤어요⁠.⁠”

승합차가 대문 앞을 빠져나와 언덕길을 내려갔다⁠. 첫 커브에서 몸이 쏠리지 않았다⁠. 은하가 핸들을 먼저 돌렸다⁠. 나는 룸미러를 보았다⁠. 접혀 있지 않았다⁠. 거울 속에 청운당 대문이 작아지고 있었다⁠. 대문 앞에 회색 정장 하나가 서 있었다⁠. 움직이지 않았다⁠.

은하가 오른손을 핸들에서 뗐다⁠. 기어를 바꾸는 손이 아니었다⁠. 손바닥을 위로 해서 기어봉과 조수석 사이에 내려놓았다⁠. 나는 은하의 손 위에 내 손을 얹었다⁠. 하얀 손목이 굳은살 위에 놓였다⁠. 한 뼘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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