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화(5,426자)

반소

재벌가 며느리가 운전기사와 도망칠 날을 정했다 · 예솔아

밤 아홉 시 칠 분⁠, 은하의 차가 청운당 대문을 지났다⁠. 칠 분 늦었다⁠. 서울양양고속도로 춘천 부근에서 사고가 나 길이 막혔다⁠. 은하는 갓길로 빠지지 않았다⁠. 빠질 수 있었지만 빠지지 않았다⁠. 오늘은 규칙을 어기지 않겠다고 했다⁠.

현관 앞에 시어머니가 서 있었다⁠. 혼자였다⁠. 노비호도 경호실장도 없었다⁠. 차가 멈추자 시어머니가 직접 뒷문을 열었다⁠. 여섯 해 동안 처음이었다⁠.

“⁠들어가자⁠.⁠”

나는 내렸다⁠. 은하가 운전석에서 내리려 하자 시어머니가 손바닥을 들었다⁠. 은하는 운전석에 그대로 앉았다⁠. 시어머니는 은하를 보지 않았다⁠. 나를 데리고 현관으로 들어갔다⁠.

거실 소파에 앉자 시어머니가 휴대전화를 내밀었다⁠. 사진이었다⁠. 피트 차고 바닥⁠, 경주차 옆⁠, 두 사람⁠. 시어머니는 사진을 키우지도 넘기지도 않았다⁠. 탁자 위에 휴대전화를 놓았다⁠.

“⁠용문사 은행나무가 천백 살이라더구나⁠. 천백 살 먹은 나무 앞에서는 사람 일이 다 작아 보인대⁠.⁠”

“⁠어머님⁠.⁠”

“⁠나는 작아 보이지가 않는다⁠.⁠”

시어머니가 일어났다⁠. 휴대전화를 집어 들었다⁠. 계단을 오르다가 멈췄다⁠. 돌아보지 않고 말했다⁠.

“⁠내일 아침에 태빈이 변호사들이 법원에 간다⁠. 너도 네 변호사한테 전화해 둬라⁠.⁠”

*

월요일 오후⁠, 탁은빈이 전화했다⁠. 신호가 한 번 가기도 전이었다⁠.

“⁠반소 들어왔어요⁠. 남편분 쪽에서요⁠. 사모님 유책 주장입니다⁠. 운전기사와 부정행위⁠. 사진 증거 첨부⁠. 위자료 오십억⁠. 그리고 사모님 정신 감정 신청⁠.⁠”

“⁠오십억이요⁠?⁠”

“⁠숫자는 의미 없어요⁠. 겁주려는 숫자예요⁠. 문제는 사진이에요⁠. 판례상 동성 사이도 부정행위가 됩니다⁠. 저쪽은 사모님이 먼저 운전기사를 유혹했고⁠, 셋째 해 우울증 병력 때문에 판단이 흐렸다고 쓸 거예요⁠. 블랙박스 영상은 부부 싸움이고요⁠.⁠”

나는 창가에 서서 정원을 내려다보았다⁠. 차고 앞에 은하의 차가 서 있었다⁠. 은하는 보이지 않았다⁠.

“⁠변호사님⁠. 그럼 어떻게 해요⁠?⁠”

은빈이 잠깐 말이 없었다⁠. 은빈이 말이 없는 것은 처음이었다⁠.

“⁠사모님⁠. 하나 말씀드려야 할 게 있어요⁠. 지난주에 대륭 차남 쪽 사람이 저를 찾아왔어요⁠. 이 소송 자료를 달라고요⁠. 장남 폭력 증거가 있으면 차남이 승계에서 이긴대요⁠. 대신 사모님 친정 하청은 차남 쪽 계열사로 다 받아 주겠대요⁠.⁠”

“⁠주셨어요⁠?⁠”

“⁠안 줬어요⁠. 거절도 안 했고요⁠.⁠”

은빈의 목소리가 처음으로 작았다⁠.

“⁠사모님⁠. 저는 이기고 싶다고 했잖아요⁠. 차남 쪽 손을 잡으면 이겨요⁠. 친정도 살아요⁠. 대신 사모님은 대륭 승계 싸움의 칼이 돼요⁠. 장남이 무너지면 시어머님도 무너지고⁠, 그다음은 차남 차례예요⁠. 사모님 영상이 차남의 기자 회견에 나올 거예요⁠.⁠”

나는 정원의 등나무를 보았다⁠. 서른 해 전에 시어머니도 거기 서 있었다고 노비호가 말했다⁠.

“⁠변호사님⁠. 저는 누구의 칼도 안 될 거예요⁠.⁠”

“⁠그럼 지금은 지는 판이에요⁠.⁠”

“⁠알아요⁠.⁠”

*

화요일 아침⁠, 나는 친정 회사 경리 과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아버지는 받지 않았다⁠. 과장이 받았다⁠. 과장은 목소리를 낮췄다⁠.

“⁠아가씨⁠. 공정거래위원회에 서류 들어갔어요⁠. 변호사님이 보내신 거요⁠. 하청 해지 통보서랑 날짜요⁠. 소장 들어간 날이랑 해지 통보 날이 사흘 차이예요⁠. 담당 조사관이 전화 왔어요⁠. 이런 건 처음 본대요⁠. 너무 노골적이라서⁠.⁠”

“⁠아버지는요⁠?⁠”

“⁠사장님은 은행에 가셨어요⁠. 대출 만기 연장해 달라고⁠. 대륭캐피털 말고 다른 은행들 돌고 계세요⁠. 세 군데 거절당하셨어요⁠.⁠”

과장이 잠깐 말을 멈췄다⁠. 전화기 너머로 사무실 전화벨이 울렸다⁠.

“⁠아가씨⁠. 직원들이 다 알아요⁠. 아가씨 일이요⁠. 대리 하나가 그러더라고요⁠. 결혼식 축의금 덜 받아도 되니까 아가씨 편 들라고 사장님한테 말하라고⁠. 사장님한테는 아직 못 했어요⁠.⁠”

나는 전화를 끊고 오래 앉아 있었다⁠. 다음 달에 결혼하는 대리였다⁠. 나는 대리의 얼굴을 몰랐다⁠. 대리는 내 손목을 알았다⁠.

*

화요일 밤⁠, 남편이 집에 들어왔다⁠. 송달 받고 열흘 만이었다⁠. 접근 금지 신청은 아직 결정이 나지 않았다⁠. 나는 이 층 동쪽 끝 방에서 남편의 차 소리를 들었다⁠. 남편의 차는 엔진 소리가 컸다⁠. 대문에서 현관까지 일 분⁠. 일 분 동안 나는 방문을 잠그고 화장대 의자를 문 앞에 옮겼다⁠. 의자 하나로 막을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도 옮겼다⁠.

계단을 오르는 소리⁠. 복도를 걷는 소리⁠. 내 방 문손잡이가 돌아갔다⁠. 잠겨 있었다⁠. 손잡이가 두 번 더 돌았다⁠.

“⁠문 열어⁠.⁠”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운전기사⁠? 여자⁠? 너 미쳤구나⁠. 어머니 말이 맞네⁠. 미쳤어⁠.⁠”

남편의 목소리가 다정하지 않았다⁠. 사람들 앞에서 쓰는 목소리가 아니었다⁠. 문이 한 번 크게 울렸다⁠. 손바닥으로 친 소리였다⁠. 화장대 의자가 조금 밀렸다⁠.

복도 끝에서 바퀴 소리가 났다⁠. 찻잔 수레를 미는 소리였다⁠. 노비호였다⁠. 수레 위에서 찻잔들이 달그락거렸다⁠. 노비호는 복도 한가운데서 수레를 멈추고 남편에게 고개를 숙였다⁠.

“⁠부사장님⁠. 늦은 시간에 죄송합니다⁠. 회장 사모님께서 부사장님 들어오시면 서재로 모시라고 하셨습니다⁠. 지금 바로요⁠. 차가 식는다고 하셨습니다⁠.⁠”

“⁠나중에⁠.⁠”

“⁠사모님께서 지금이라고 하셨습니다⁠. 차가 식으면 사모님이 더 뜨거워지신다고⁠.⁠”

남편이 한참 문 앞에 서 있었다⁠. 그리고 복도를 걸어갔다⁠. 바퀴 소리가 남편을 따라 멀어졌다⁠. 노비호는 수레를 밀며 혼잣말처럼 말했다⁠. 문 너머로 들리게⁠.

“⁠차는 식으면 다시 데우면 되는데⁠, 사람은 데우기가 어렵습니다⁠.⁠”

나는 밀려난 화장대 의자를 다시 문 앞으로 밀었다⁠. 의자 다리가 카펫을 긁었다⁠. 의자에 등을 기대고 바닥에 앉았다⁠. 문 너머 복도가 조용했다⁠. 아래층 서재에서 남편의 목소리가 한 번 크게 올라왔다가 시어머니의 낮은 목소리에 눌려 가라앉았다⁠.

나는 휴대전화를 꺼내 녹음 버튼을 눌렀다⁠. 문을 친 소리는 이미 지나갔다⁠. 남편의 목소리도 지나갔다⁠. 녹음기에는 복도의 고요만 담겼다⁠. 나는 녹음을 멈추지 않았다⁠. 삼십 분 동안 고요를 녹음했다⁠. 은빈에게 보냈다⁠. 「⁠화요일 밤 열한 시 사십 분부터⁠. 문을 친 뒤입니다⁠. 앞은 못 담았습니다⁠.⁠」

은빈의 답장은 일 분 만에 왔다⁠. 「⁠고요도 증거예요⁠. 날짜와 시각이 있으니까⁠. 다음엔 앞부터 담으세요⁠. 다음이 없으면 더 좋고요⁠.⁠」

*

수요일 오후 세 시⁠, 노비호가 내 방 문을 두드렸다⁠. 손에 무선 전화기 하나를 들고 있었다⁠. 저택 인터폰과 연결된 집안 전화였다⁠.

“⁠사모님⁠. 지금 회장 사모님께서 서재에서 차 기사를 만나십니다⁠. 서재 인터폰이 고장이 났는지 켜진 채로 꺼지지가 않습니다⁠. 고치러 가야 하는데 제가 오늘 허리가 아파서요⁠. 사모님 방에 잠깐 두겠습니다⁠. 전화기가 시끄러우면 버튼을 누르지 마십시오⁠.⁠”

노비호는 전화기를 화장대 위에 놓고 나갔다⁠. 전화기에서 소리가 흘러나왔다⁠. 찻잔을 내려놓는 소리⁠, 의자가 바닥을 긁는 소리⁠. 그리고 시어머니의 목소리⁠.

“⁠앉아라⁠.⁠”

“⁠서 있겠습니다⁠.⁠”

은하의 목소리였다⁠. 짧았다⁠.

“⁠두 해 동안 수고했다⁠. 삼백씩 받으면서 보고를 잘했지⁠. 지난달부터는 잘 안 했고⁠.⁠”

“⁠네⁠.⁠”

“⁠인제에서 사진 찍힌 거 알지⁠. 태빈이 변호사들이 그 사진으로 반소를 냈다⁠. 네가 법정에 나가서 한마디만 해 주면 된다⁠. 사모님이 먼저 손을 잡았다고⁠. 사모님이 약을 먹고 이상한 말을 했다고⁠. 사모님이 불안해 보였다고⁠. 다 사실이잖아⁠. 불안해 보였잖아⁠.⁠”

은하가 대답하지 않았다⁠. 종이가 탁자 위에서 미끄러지는 소리가 났다⁠.

“⁠성수동 정비소 채권⁠, 대륭캐피털이 갖고 있다⁠. 네가 증언하면 소멸시킨다⁠. 백초라는 사람 이름으로 깨끗하게⁠. 그리고 대륭자동차가 내년부터 레이싱팀을 만든다⁠. 투어링카 클래스⁠. 드라이버 자리가 하나 비어 있어⁠. 네 이름 적어 놨다⁠.⁠”

전화기 너머가 조용해졌다⁠. 종이를 집어 드는 소리가 났다⁠. 한 장⁠, 두 장⁠. 은하가 읽고 있었다⁠. 오래 읽었다⁠. 종이가 다시 탁자 위에 내려앉는 소리가 났다⁠. 나는 화장대 앞에서 숨을 멈췄다⁠. 은하의 숨소리가 전화기로 들렸다⁠. 인제 피트 차고에서 들었던 숨소리였다⁠. 빨랐다⁠.

서킷⁠. 은하가 다섯 해 동안 표지판만 봐도 손에 땀이 났다던 곳⁠. 열 번째 커브를 브레이크 없이 지난 손⁠. 은하의 손이 다시 경주차 핸들을 잡을 수 있었다⁠. 증언 한 줄이면⁠.

“⁠그리고 하나 더⁠.⁠”

시어머니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네가 안 하면 사진이 신문에 나간다⁠. 대륭 며느리와 여자 운전기사⁠. 사람들은 대륭 주가보다 그 사진을 더 좋아할 거야⁠. 네 얼굴이 실린다⁠. 네 동료 다쳤던 사고 기사도 같이 실리겠지⁠. 사람들은 이야기를 좋아하니까⁠.⁠”

은하가 웃었다⁠. 전화기 너머에서⁠. 짧은 웃음이었다⁠.

“⁠회장 사모님⁠. 서킷 커브는 브레이크를 늦게 밟을수록 빨라요⁠. 근데 사람 앞에서는 일찍 밟아야 돼요⁠. 늦게 밟으면 사람이 다쳐요⁠. 저는 그거 다섯 해 전에 배웠어요⁠.⁠”

“⁠무슨 소리냐⁠.⁠”

“⁠증언 안 합니다⁠. 사모님은 불안해 보인 적 없어요⁠. 아파 보였어요⁠. 계단을 한 칸에 두 번씩 내려오셨어요⁠. 그게 불안해 보이는 걸로 보이시면⁠, 회장 사모님은 계단을 안 보신 거예요⁠.⁠”

전화기 너머가 다시 조용해졌다⁠. 한참 뒤에 시어머니가 말했다⁠.

“⁠차 열쇠 내려놓고 나가라⁠.⁠”

탁자 위에 쇠붙이가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작고 짧은 소리였다⁠. 가정법원 민원실 창구의 도장 소리처럼 작았다⁠. 서재 문이 열리고 닫혔다⁠.

*

창밖으로 은하가 보였다⁠. 차고 앞에서 상자 하나를 들고 있었다⁠. 운동화 한 켤레⁠, 장갑 한 켤레⁠, 머그잔 하나⁠. 두 해 치 짐이 상자 하나였다⁠. 은하는 차고 앞에서 내 차를 오래 보았다⁠. 검은 세단⁠, 번호 끝 0101⁠. 손바닥으로 차 지붕을 한 번 쓸었다⁠.

은하는 대문 쪽으로 걸어갔다⁠. 차를 타지 않고⁠. 대문에서 평창동 언덕 아래까지 걸어서 이십 분이었다⁠. 은하는 이 집에서 두 해 동안 언덕길을 차로만 다녔다⁠. 나는 창문을 열었다⁠. 손가락 한 마디만큼⁠. 은하는 돌아보지 않았다⁠. 대문이 열렸다가 닫혔다⁠.

*

휴대전화가 울렸다⁠. 은하였다⁠. 해고된 사람의 첫 문자였다⁠.

「⁠언덕 아래 정류장⁠. 7022번 기다려요⁠. 서킷보다 느리네요⁠.⁠」

나는 답장을 썼다가 지웠다⁠. 다시 썼다⁠.

「⁠미안해요⁠.⁠」

「⁠사모님 탓 하기로 했잖아요⁠. 땀 나면⁠.⁠」

「⁠땀 나요⁠?⁠」

「⁠많이요⁠.⁠」

한참 뒤에 한 줄이 더 왔다⁠.

「⁠열쇠 없어도 운전은 할 수 있어요⁠. 기억해 두세요⁠.⁠」

*

복도에서 발소리가 났다⁠. 노비호였다⁠. 노비호는 내 방 문을 두드리지 않고 문 앞에서 말했다⁠.

“⁠사모님⁠. 회장 사모님 지시입니다⁠. 사모님 차 열쇠를 제 금고에 넣으라고 하셨습니다⁠. 사모님 외출은 당분간 없습니다⁠.⁠”

노비호의 발소리가 계단 아래로 내려갔다⁠. 집사실 문이 열렸다⁠. 나는 방문을 열고 계단 난간에 섰다⁠. 아래층 집사실 문틈으로 노비호의 등이 보였다⁠. 벽에 붙은 작은 금고 앞이었다⁠. 노비호가 다이얼을 돌렸다⁠. 한 번⁠, 두 번⁠, 세 번⁠. 금고 문이 열렸다⁠. 노비호가 열쇠를 넣었다⁠. 검은 세단의 열쇠⁠, 0101 숫자가 새겨진 열쇠고리⁠.

금고 문이 닫혔다⁠. 철컥⁠. 다이얼이 돌아갔다⁠. 노비호가 금고 문에 손바닥을 대고 한참 서 있었다⁠. 혼잣말이 계단 위까지 올라왔다⁠.

“⁠서른 해 전에도 이 금고였지⁠.⁠”

6화는 어땠나요?

댓글 0

로그인하면 댓글을 남길 수 있습니다.

첫 번째 댓글을 남겨 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