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5,378자)

서킷

재벌가 며느리가 운전기사와 도망칠 날을 정했다 · 예솔아

나는 아버지에게 열흘을 달라고 했다⁠.

“⁠열흘 안에 하청 해지가 보복이라는 걸 밝히겠습니다⁠. 변호사가 공정거래위원회에 신고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소송 낸 며느리 친정을 하청에서 자르는 건 법에 걸린답니다⁠.⁠”

아버지는 대답하지 않았다⁠. 사장실 창밖의 크레인을 보았다⁠. 대륭 깃발을 보았다⁠.

“⁠열흘이면 14일이다⁠. 15일에 월급이다⁠.⁠”

“⁠압니다⁠.⁠”

“⁠열흘 뒤에 안 되면⁠.⁠”

“⁠그때는 아버지 말씀대로 하겠습니다⁠.⁠”

거짓말이었다⁠. 아버지도 알았다⁠. 아버지는 고개를 끄덕였다⁠. 혈압약 봉투를 서랍에 넣었다⁠. 나는 사장실을 나왔다⁠. 계단을 내려가는 동안 경리 과장이 내 뒤에서 말했다⁠.

“⁠아가씨⁠.⁠”

결혼 전에 부르던 이름이었다⁠. 돌아보았다⁠. 과장이 계단 위에 서 있었다⁠. 손에 사탕 하나를 쥐고 있었다⁠. 사탕을 내게 내밀었다⁠.

“⁠사장님은 제가 지킬게요⁠. 아가씨는 아가씨를 지키세요⁠.⁠”

*

토요일 아침⁠, 노비호가 시어머니에게 말했다⁠. 나는 식탁에서 들었다⁠.

“⁠사모님⁠. 양평 용문사에 회장님 쾌유 기도를 올리기로 했습니다⁠. 큰며느님께서 직접 가셔서 백팔 배를 하시면 효험이 있다고 주지 스님이 그러셨습니다⁠. 오늘이 길일이라고 합니다⁠.⁠”

시어머니가 찻잔을 내려놓았다⁠. 나를 보았다⁠.

“⁠네가 간다고⁠?⁠”

“⁠네⁠, 어머님⁠.⁠”

“⁠소장을 낸 며느리가 시아버지 쾌유 기도를⁠.⁠”

“⁠그러니까 가야 합니다⁠. 기자들이 물으면 며느리가 기도하러 갔다고 하시면 됩니다⁠.⁠”

시어머니가 오래 나를 보았다⁠. 그리고 웃었다⁠. 낮고 느린 웃음이었다⁠.

“⁠그래⁠. 가라⁠. 기사 데리고⁠.⁠”

노비호가 시어머니 찻잔에 차를 따르며 엉뚱한 말을 했다⁠.

“⁠사모님⁠, 용문사 은행나무는 천백 살이랍니다⁠. 천백 살 먹은 나무 앞에서 절하면 사람 일은 다 작아 보인다고 합니다⁠.⁠”

“⁠집사는 언제부터 절에 다녔지⁠.⁠”

“⁠오늘 아침부터입니다⁠.⁠”

*

용문사에서 백팔 배는 하지 않았다⁠. 대웅전 앞에서 삼 배를 하고 나왔다⁠. 은행나무 앞에서 사진을 한 장 찍었다⁠. 시어머니에게 보냈다⁠. 「⁠도착했습니다⁠. 기도 올리고 있습니다⁠.⁠」 시어머니의 답장이 왔다⁠. 「⁠그래⁠.⁠」

주차장으로 돌아오자 은하가 운전석에서 휴대전화를 보고 있었다⁠. 위치 추적 앱 같은 것은 없었다⁠. 은하는 날씨를 보고 있었다⁠.

“⁠사모님⁠. 인제 오늘 맑아요⁠. 바람 없고⁠. 노면 온도 18도⁠.⁠”

“⁠노면 온도요⁠?⁠”

“⁠트랙 바닥이요⁠. 18도면 타이어가 딱 붙어요⁠.⁠”

나는 뒷자리에 앉았다⁠. 은하가 룸미러를 접었다⁠. 차가 서울양양고속도로에 올랐다⁠. 위치 추적기는 차가 양평에 있다고 알릴 것이었다⁠. 노비호가 오늘 아침 차고에서 추적기 선을 하나 뽑아 두었다⁠. 선 하나를 뽑으면 추적기는 마지막 자리에 멈춰 있다고⁠, 노비호가 은하에게 말했다⁠. 서른 해 동안 이 집 차를 고친 사람의 말이었다⁠.

“⁠은하 씨⁠. 정말 괜찮아요⁠? 서킷이요⁠.⁠”

“⁠모르겠어요⁠.⁠”

은하가 앞을 본 채 말했다⁠.

“⁠다섯 해 동안 인제 쪽 고속도로도 안 탔어요⁠. 표지판만 봐도 손에 땀이 났어요⁠. 근데 오늘은 사모님이 뒤에 타고 계시잖아요⁠. 땀 나면 사모님 탓 할게요⁠.⁠”

차가 터널 하나를 빠져나왔다⁠. 햇빛이 쏟아졌다⁠. 강원도 산이 연두색이었다⁠. 봄이 서울보다 한 주 늦게 와 있었다⁠.

*

인제 서킷은 산 사이에 있었다⁠. 트랙이 산허리를 감고 돌았다⁠. 오르막과 내리막⁠, 커브가 열아홉 개라고 은하가 말했다⁠. 토요일 오후였고 일반인 주행 시간이었다⁠. 트랙 위로 차 몇 대가 돌고 있었다⁠. 엔진 소리가 산에 부딪혀 돌아왔다⁠.

피트 차고 한 칸 앞에 트럭 한 대가 서 있었다⁠. 「⁠백초 모터스⁠」 백초가 트럭 짐칸의 덮개를 걷고 있었다⁠. 덮개 아래에서 경주차 한 대가 나왔다⁠. 흰 바탕에 파란 줄⁠. 옆구리에 숫자 7이 칠해져 있었다⁠. 앞범퍼 한쪽이 새것으로 갈려 있었다⁠. 색이 조금 달랐다⁠.

은하가 차에서 내려 경주차 앞으로 갔다⁠. 한참 움직이지 않았다⁠. 손을 뻗어 앞범퍼의 새것과 헌것이 만나는 이음매를 손가락으로 쓸었다⁠.

“⁠형⁠. 이거 안 팔았어⁠?⁠”

“⁠팔면 네가 다시 안 오잖아⁠.⁠”

백초가 렌치로 바퀴 너트를 하나씩 조였다⁠. 조이면서 말했다⁠.

“⁠범퍼는 내가 갈았다⁠. 다섯 해 전에⁠. 엔진은 지난주에 깨웠어⁠. 네가 전화로 인제 간다고 했을 때⁠.⁠”

“⁠나 탄다고 안 했어⁠.⁠”

“⁠알아⁠. 그래서 조수석 시트도 달아 놨다⁠.⁠”

은하가 조수석을 보았다⁠. 경주차의 조수석에는 원래 시트가 없었다⁠. 몸을 감싸는 버킷 시트 하나가 새로 달려 있었다⁠. 다섯 점짜리 안전띠가 시트 위에 늘어져 있었다⁠. 은하가 나를 보았다⁠.

나는 경주차 앞으로 걸어갔다⁠. 긴소매를 걷었다⁠. 손목의 멍은 이제 연한 노란색이었다⁠. 백초가 내미는 헬멧을 받았다⁠. 무거웠다⁠.

“⁠제가 옆에 타겠습니다⁠.⁠”

“⁠사모님⁠.⁠”

“⁠은하 씨가 땀 나면 제 탓 하기로 했잖아요⁠. 그럼 제가 옆에 있어야죠⁠.⁠”

*

경주차 조수석은 낮았다⁠. 엉덩이가 땅에 닿을 듯 낮았다⁠. 백초가 안전띠 다섯 개를 하나씩 채웠다⁠. 어깨 두 개⁠, 허리 두 개⁠, 다리 사이 하나⁠. 버클이 철컥 소리를 냈다⁠. 몸이 시트에 묶였다⁠. 움직일 수 없었다⁠. 이상하게 무섭지 않았다⁠.

은하가 운전석에 앉았다⁠. 헬멧을 썼다⁠. 장갑을 꼈다⁠. 핸들을 두 손으로 잡았다⁠. 시동 버튼 위에 엄지를 올리고 한참 누르지 않았다⁠. 헬멧 안에서 은하의 숨소리가 들렸다⁠. 빨랐다⁠.

나는 손을 뻗어 은하의 장갑 낀 손등 위에 내 손을 얹었다⁠. 처음이었다⁠. 한 뼘을 넘은 것이⁠.

은하가 시동 버튼을 눌렀다⁠. 엔진이 깨어났다⁠. 시트가 떨렸다⁠. 몸 전체가 떨렸다⁠. 은하가 피트 레인을 천천히 빠져나가 트랙에 올랐다⁠.

첫 바퀴는 느렸다⁠. 은하는 커브마다 브레이크를 일찍 밟았다⁠. 나는 은하의 오른발을 보았다⁠. 페달 위에서 발목이 굳어 있었다⁠. 열 번째 커브는 내리막 끝의 왼쪽 커브였다⁠. 은하가 열 번째 커브 앞에서 속도를 더 줄였다⁠. 백초가 무전으로 말했다⁠. 다섯 해 전 사고 자리라고⁠. 은하는 커브를 기어가듯 지났다⁠.

두 번째 바퀴⁠. 은하의 발목이 풀렸다⁠. 직선에서 가속하자 등이 시트에 붙었다⁠. 누가 등을 손바닥으로 밀었다⁠. 커브 앞에서 은하가 브레이크를 밟았다⁠. 몸이 안전띠에 걸려 앞으로 쏠렸다⁠. 가슴이 눌렸다⁠. 은하가 핸들을 돌렸다⁠. 몸이 옆으로 기울었다⁠. 바깥쪽으로 밀렸다가⁠, 커브 끝에서 은하가 액셀을 밟자 몸이 다시 바로 섰다⁠.

나는 숨을 멈췄다⁠. 숨을 쉬었다⁠. 멈췄다⁠. 쉬었다⁠. 커브 하나가 숨 하나였다⁠. 열아홉 개의 커브가 열아홉 개의 숨이었다⁠. 여섯 해 동안 나는 숨을 참는 법만 배웠다⁠. 은하의 차 안에서 처음으로 숨이 커브를 따라 쉬어졌다⁠.

세 번째 바퀴⁠, 열 번째 커브⁠. 내리막이 끝나는 자리⁠. 은하가 브레이크를 밟지 않았다⁠. 아주 짧게⁠, 아주 늦게 밟았다⁠. 핸들이 돌았다⁠. 차가 커브 안쪽 연석을 스치고 지나갔다⁠. 바퀴가 연석을 밟는 소리가 드르륵 났다⁠. 차는 미끄러지지 않았다⁠.

커브를 빠져나오는 순간⁠, 은하의 오른손이 핸들에서 떨어졌다⁠. 기어를 바꾸는 손이 아니었다⁠. 은하의 손이 내 왼손을 잡았다⁠. 장갑 낀 손이 내 손목을 감쌌다⁠. 멍든 자리였다⁠. 은하는 손목을 쥐지 않았다⁠. 감쌌다⁠. 손바닥 하나만큼만 힘을 주었다⁠. 백초의 말이 맞았다⁠. 쥐는 손과 잡는 손은 달랐다⁠.

직선 끝에서 은하가 다시 핸들을 잡았다⁠.

*

피트 차고 안은 조용했다⁠. 백초는 트럭으로 연료를 가지러 갔다⁠. 경주차 엔진이 식으며 딸깍딸깍 소리를 냈다⁠. 은하가 헬멧을 벗었다⁠. 머리카락이 땀에 젖어 이마에 붙어 있었다⁠. 은하는 차고 벽에 등을 대고 바닥에 주저앉았다⁠.

나는 은하 옆에 앉았다⁠. 긴 치마가 차고 바닥의 기름 자국 위에 펼쳐졌다⁠. 상관없었다⁠.

“⁠열 번째 커브요⁠.⁠”

은하가 말했다⁠.

“⁠비 오는 날이었어요⁠. 앞차가 미끄러졌어요⁠. 피하려고 핸들을 꺾었는데⁠, 꺾은 자리에 동생 차가 있었어요⁠. 동생이 제 차를 피하려고 브레이크를 밟았는데⁠. 다 기억나요⁠. 무전에서 동생 목소리가 끊기던 소리까지⁠.⁠”

“⁠은하 씨 잘못 아니라고 백초 씨가⁠.⁠”

“⁠알아요⁠. 다들 그래요⁠. 근데 제 손이 꺾었어요⁠. 이 손이요⁠.⁠”

은하가 오른손을 들어 보았다⁠. 장갑을 벗은 손이었다⁠. 손바닥에 굳은살이 박여 있었다⁠. 나는 은하의 손을 잡았다⁠. 내 손바닥을 은하의 손바닥에 포갰다⁠. 굳은살이 내 손바닥을 긁었다⁠.

“⁠아까 열 번째 커브에서 이 손이 제 손을 잡았어요⁠.⁠”

은하가 나를 보았다⁠. 땀에 젖은 얼굴이었다⁠. 눈이 빨갰다⁠. 은하가 무언가 말하려다 그만두었다⁠. 말보다 손이 먼저였다⁠. 은하의 손이 내 뺨으로 왔다⁠. 손바닥이 뺨을 감쌌다⁠. 엔진 냄새와 땀 냄새가 났다⁠.

입술이 닿았다⁠. 짧았다⁠. 은하가 먼저 떨어졌다⁠. 떨어져서 나를 보았다⁠. 괜찮냐고 묻는 눈이었다⁠. 나는 대답 대신 은하의 젖은 머리카락을 이마에서 걷어 주었다⁠. 그리고 다시 입을 맞췄다⁠. 이번에는 내가 먼저였다⁠. 길었다⁠. 엔진이 식는 소리가 딸깍딸깍 박자를 맞췄다⁠. 은하의 손이 내 등을 감쌌다⁠. 등의 멍든 자리를 피해서⁠. 어디가 멍들었는지 묻지 않고도 피해 갔다⁠. 은하는 두 해 동안 계단을 내려오는 내 걸음을 보아 왔다⁠.

*

피트 레인에서 구두 소리가 났다⁠. 운동화가 아니었다⁠. 딱딱한 구두 굽이 시멘트를 때리는 소리였다⁠. 나는 은하에게서 몸을 뗐다⁠. 차고 입구에 남자가 서 있었다⁠. 검은 양복⁠, 짧은 머리⁠, 귀에 무선 이어폰⁠. 시어머니의 경호실장이었다⁠. 마흔다섯⁠, 군 출신이라고 들었다⁠. 손에 휴대전화를 들고 있었다⁠. 화면이 우리를 향해 있었다⁠.

“⁠사모님⁠. 양평 용문사가 인제에 있는 줄 몰랐습니다⁠.⁠”

경호실장이 휴대전화를 내렸다⁠. 화면을 자기 쪽으로 돌려 무언가를 확인했다⁠. 고개를 끄덕였다⁠. 잘 찍혔다는 끄덕임이었다⁠.

은하가 일어났다⁠. 경호실장 앞으로 걸어갔다⁠. 경호실장보다 머리 하나가 작았다⁠.

“⁠지워요⁠.⁠”

“⁠차 기사⁠. 차 기사는 해고 통보를 기다리는 게 좋겠어⁠. 회장 사모님께는 방금 보냈어⁠.⁠”

“⁠지우라고⁠.⁠”

은하의 손이 경호실장의 휴대전화로 갔다⁠. 경호실장이 은하의 손목을 잡았다⁠. 쉽게 잡았다⁠. 은하의 손목이 꺾였다⁠. 은하가 이를 악물었다⁠. 차고 뒤에서 백초가 연료통을 들고 들어왔다⁠. 연료통을 바닥에 내려놓았다⁠. 렌치를 들었다⁠.

“⁠여보세요⁠. 남의 차고에서 남의 드라이버 손목을 잡으시면 곤란한데요⁠. 여기 트랙 규정상 피트 차고는 팀 허가 없이 못 들어옵니다⁠. 관리실 부를까요⁠?⁠”

경호실장이 은하의 손목을 놓았다⁠. 백초를 보고⁠, 렌치를 보고⁠, 나를 보았다⁠.

“⁠사모님⁠. 회장 사모님께서 오늘 밤 아홉 시까지 들어오시랍니다⁠. 차 기사 차는 타지 마시고 제 차로⁠.⁠”

“⁠차 기사 차를 타고 가겠습니다⁠.⁠”

내 목소리가 차고에 울렸다⁠. 정중했다⁠. 한 칸도 올리지 않았다⁠.

“⁠실장님 휴대전화의 사진은 어머님이 이미 보셨겠죠⁠. 그럼 이제 지워도 소용없겠네요⁠. 지우지 마세요⁠. 저도 봐야겠어요⁠. 제가 어떤 얼굴이었는지⁠.⁠”

경호실장이 잠깐 망설였다⁠. 휴대전화를 내 앞에 내밀었다⁠. 화면 속에 피트 차고가 있었다⁠. 경주차 옆 바닥에 두 사람이 앉아 있었다⁠. 입을 맞추고 있었다⁠. 긴 치마가 기름 자국 위에 펼쳐져 있었다⁠. 화면 속의 나는 웃고 있지 않았다⁠. 여섯 해 만에 처음으로 웃지 않는 얼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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