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5,692자)
운전석
재벌가 며느리가 운전기사와 도망칠 날을 정했다 · 예솔아
3월 첫 주 화요일, 나는 긴소매를 입었다. 낮 기온이 14도였다. 긴소매를 입기에는 더운 날이었다. 나는 여섯 해 동안 날씨와 상관없이 긴소매를 입었다.
평창동 청운당의 차고에는 차가 일곱 대 있었다. 내 차는 맨 끝의 검은 세단이었다. 번호판 끝자리가 0101이었다. 시어머니가 골라 준 번호였다. 맏며느리니까 하나, 하나. 시어머니는 번호를 정해 주던 날 웃었고 나도 웃었다. 결혼 넉 달째, 나는 웃는 법을 이미 다 배운 뒤였다.
차은하가 운전석 문을 열고 내려 뒷문을 열어 주었다. 검은 정장에 흰 셔츠, 굽 없는 운동화. 기사들은 모두 구두를 신었는데 은하만 운동화를 신었다. 처음 왔을 때 집사 노비호가 구두로 바꾸라고 했다. 은하는 구두를 신고는 페달 감이 안 온다고 했다. 노비호는 은하의 말을 시어머니에게 그대로 전했고, 시어머니는 페달 감이 뭔지 몰라서 그냥 두었다.
“사모님. 오늘 행선지 강남 성모 검진센터. 열 시 반 예약. 맞으시죠.”
“네.”
은하는 물음표 없이 물었다. 나는 대답하고 뒷자리에 앉았다. 문이 닫혔다. 은하가 운전석에 올라 룸미러를 한 번 만졌다. 거울 속에서 눈이 한 번 마주쳤다. 은하의 눈은 금방 길로 돌아갔다.
차가 대문을 나섰다. 북악 스카이웨이 굽은 길을 내려가는 동안 은하는 한 번도 브레이크를 세게 밟지 않았다. 커브에서 몸이 쏠리지 않았다. 다른 기사들의 차에서는 커브마다 손잡이를 잡았다. 은하의 차에서는 잡을 필요가 없었다. 두 해 동안 은하의 차를 탔지만 나는 은하에 대해 아는 것이 거의 없었다. 전직 카레이서였다는 것, 서른네 살이라는 것, 운동화를 신는다는 것.
내부순환로에 올라서자 나는 핸드백에서 휴대전화를 꺼냈다. 문자 창을 열었다. 어젯밤 받은 문자가 있었다.
「탁은빈 법률사무소입니다. 내일 오전 열한 시 상담 확정되었습니다. 서초동 법원 앞 3번 출구, 정현빌딩 8층.」
검진센터 예약은 열 시 반이었다. 검진은 삼십 분이면 끝났다. 열한 시에 서초동까지 가려면 검진을 건너뛰어야 했다. 나는 휴대전화를 쥔 채 창밖을 보았다. 차들이 흘렀다.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몰랐다. 행선지를 바꾸면 보고가 간다고, 결혼 첫 달에 시어머니가 알려 주었다. 차마다 위치 추적기가 있다고. 걱정돼서 그러는 거라고.
“사모님.”
은하가 앞을 본 채 말했다.
“검진센터 앞이 오늘 공사라서요. 뒷길로 돌아갈게요. 서초동 쪽으로 빠져서 들어가는 게 빨라요.”
나는 거울을 보았다. 은하는 거울을 보지 않았다.
“서초동이요?”
“네. 법원 앞 지나서요. 거기 신호가 길어요. 한 이십 분 걸릴 거예요. 내리실 데 있으면 말씀하세요. 신호 기다리는 동안이면 저도 화장실 좀 다녀오고.”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휴대전화 화면을 끄고 무릎 위에 엎어 놓았다. 손바닥이 젖어 있었다. 은하가 변호사 사무실 문자를 보았을 리 없었다. 뒷자리 휴대전화 화면은 운전석에서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은하는 서초동이라고 했다.
*
정현빌딩 지하 주차장은 어두웠다. 은하가 기둥 옆에 차를 대고 시동을 껐다. 엔진 소리가 멎자 주차장이 조용해졌다. 은하는 운전석에서 내리지 않았다. 나도 내리지 않았다. 내릴지 말지 뒷자리에서 칠 분을 앉아 있었다. 나중에 세어 보니 칠 분이었다.
“사모님. 저 화장실 갑니다. 이십 분 걸려요. 이 주차장은 휴대전화가 잘 안 터져요. 위치도 잘 안 잡히고요.”
은하가 내려 엘리베이터 쪽으로 걸어갔다. 운동화 소리가 주차장 바닥에 울렸다. 은하는 돌아보지 않았다. 나는 은하가 엘리베이터에 타는 것을 보고 나서야 문을 열었다.
8층 사무실은 좁았다. 책상 두 개, 상자 쌓인 벽, 창밖으로 법원 건물이 보였다. 탁은빈은 서른여섯이라고 했다. 짧은 머리에 회색 정장. 손목시계를 두 번 보았다. 첫 상담은 삼십 분이라고 했다.
“대륭그룹 장남 부인이시죠. 기사에서 뵀습니다.”
“네.”
“이혼 사유부터 말씀해 주세요. 숫자로 말씀해 주시면 좋습니다. 몇 년, 몇 번, 언제부터.”
나는 웃었다. 화가 나면 웃는 버릇이 있었다. 웃고 나서 소매를 걷었다. 왼쪽 손목에 누렇게 바랜 멍과 새 멍이 겹쳐 있었다. 은빈은 손목을 보았다. 손목시계를 다시 보지 않았다.
“여섯 해 동안 몇 번인지는 모릅니다. 세지 않았습니다. 처음은 결혼 첫해 가을이었습니다. 시아버님 칠순 잔치가 끝난 밤이었습니다.”
나는 거기까지만 말했다. 칠순 잔치 뒤의 일은 말하지 않았다. 은빈도 묻지 않았다. 은빈은 수첩에 무언가를 적다가 펜을 내려놓았다.
“사진 있으세요? 병원 기록은요? 진단서요.”
“없습니다. 병원에 간 적이 없습니다. 집에 주치의가 옵니다. 시어머니가 부르는 의사입니다.”
“증인은요? 집안 사람 중에.”
“저택 사람이 스무 명입니다. 다 압니다. 아무도 말하지 않을 겁니다.”
은빈은 한참 창밖의 법원을 보았다. 그리고 내게 물었다. 숫자로 묻지 않았다.
“사모님. 정말 하실 거예요? 대륭이에요. 회장님 넉 달째 병원에 계시고요. 지금 장남 이혼 소송이 들어가면 그룹 승계 구도가 뒤집힙니다. 시어머님은 사모님을 그냥 두지 않으실 거예요.”
“알고 있습니다.”
“어떻게요?”
“저도 결혼할 때 그룹 승계 구도에 들어간 사람입니다. 저희 친정 회사 빚을 대륭이 떠안는 조건이었습니다.”
은빈이 처음으로 웃었다. 사람을 비웃는 웃음은 아니었다. 계산이 끝난 사람의 웃음이었다.
“그럼 시간이 얼마 없어요. 증거를 모으세요. 사진이든 녹음이든, 집 밖에서 남은 거요. 집 안에서 남은 건 다 지워질 거예요.”
상담은 두 시간이 걸렸다. 지하 주차장으로 내려가자 은하가 운전석에 앉아 있었다. 이십 분이라고 했던 화장실은 두 시간이 되어 있었다. 은하는 묻지 않았다. 내가 뒷자리에 타자 시동을 걸었다.
“검진센터 들렀다 갈게요. 접수만 하고 나오시면 돼요. 오늘 검진은 다음 주로 미뤘다고 하시면 되고요.”
*
검진센터 접수대에서 다음 주로 예약을 미루고 나왔다. 은하는 정문 앞에 차를 대고 서 있었다. 집으로 가는 길에 은하가 강변북로를 탔다. 평소에는 내부순환로로 갔다. 강변북로는 오 분이 더 걸렸다.
“왜 이쪽으로 가요?”
“한강이 보이잖아요.”
은하는 한강 말고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창밖을 보았다. 3월의 한강이 회색이었다. 물 위에 햇빛이 조각조각 깨져 있었다. 차는 커브를 돌 때마다 내 몸을 한쪽으로 기울였다가 천천히 바로 세웠다. 처음으로 차의 움직임이 몸에 느껴졌다. 두 해 동안 몸이 쏠리지 않았던 이유가 있었다. 은하는 내 몸이 쏠리기 전에 핸들을 먼저 돌리고 있었다.
라디오에서 경제 뉴스가 흘렀다. 대륭그룹 회장의 병세가 위중하다는 보도에 대륭전자 주가가 사흘째 내렸다고 했다. 해외 신용평가사가 대륭의 지배 구조를 두고 보고서를 냈다고 했다. 승계가 정리되지 않으면 등급을 내릴 수 있다고. 은하가 라디오를 껐다.
“사모님. 오늘 다녀오신 데요.”
나는 숨을 멈췄다.
“저는 화장실 다녀왔습니다. 두 시간이요. 배탈이 나서요.”
“네.”
“네.”
*
저녁 식탁은 열두 자리였다. 회장이 병원에 누운 뒤로 상석은 비어 있었다. 시어머니 설정희가 상석 오른쪽에 앉았다. 남편 태빈은 출장 중이었다. 시동생 부부는 오지 않았다. 식탁에 시어머니와 나, 둘이었다.
노비호가 국을 날랐다. 예순이고 서른 해째 이 집 집사였다. 국그릇을 놓는 손이 늘 같은 각도였다. 노비호가 내 국그릇을 놓으며 엉뚱한 말을 했다.
“사모님, 오늘 냉이가 좋습니다. 봄 냉이는 사돈집 소식보다 빨리 온다고 합니다.”
시어머니가 수저를 들었다. 국을 한 숟가락 떠먹었다. 그리고 수저를 내려놓았다.
“세린아. 오늘 검진은 잘 받았니?”
“다음 주로 미뤘습니다. 오늘 센터 앞이 공사라서요.”
“그래.”
시어머니가 냅킨으로 입가를 눌렀다. 아주 천천히 눌렀다. 냅킨을 접어 접시 옆에 놓았다.
“서초동 공사도 길더구나.”
식탁이 조용해졌다. 노비호가 반찬 접시를 놓다가 손을 멈췄다. 멈춘 것은 아주 짧았다. 노비호는 접시를 놓고 한 걸음 물러섰다.
“어머님.”
“변호사는 만나 봐도 돼. 젊은 사람들은 다 그래. 한 번씩 만나 보고, 겁먹고, 돌아오지. 나도 그랬다.”
시어머니가 웃었다. 낮고 느린 웃음이었다. 시어머니는 식탁 위로 봉투 하나를 밀었다. 하얀 봉투에 병원 이름이 찍혀 있었다. 압구정동의 정신건강의학과였다. 시어머니의 대학 동창이 원장인 병원이라고, 나는 결혼 첫해에 들었다.
“목요일 오후 세 시. 예약해 놨다. 너 요즘 이상하다. 잠도 못 자고, 밥도 안 먹고. 결혼 셋째 해에도 그랬잖니. 그때 다녔던 병원보다 여기가 좋아. 원장이 내 친구야.”
봉투가 내 국그릇 옆에 멈췄다. 결혼 셋째 해. 나는 셋째 해 겨울 석 달 동안 혼자 병원에 다녔다. 잠을 자지 못해서였다.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시어머니는 알고 있었다.
“어머님. 저는 이상하지 않습니다.”
“이상한 사람은 다 그렇게 말해.”
시어머니가 다시 수저를 들었다. 국을 마저 떠먹었다. 나는 봉투를 보았다. 손이 소매 안에서 떨렸다. 떨리는 손을 무릎 위에 놓고 웃었다.
“감사합니다, 어머님.”
“그래. 목요일엔 차 기사가 데려다줄 거야.”
*
밤 열 시, 내 방 화장대 위에 하얀 봉투가 놓여 있었다. 나는 봉투를 열지 않았다. 열지 않아도 안에 무엇이 있는지 알았다. 예약 확인증과 병원 약도, 그리고 원장의 명함.
휴대전화가 울렸다. 남편이었다. 싱가포르 출장 사흘째였다. 나는 세 번 울릴 때까지 기다렸다가 받았다. 두 번 만에 받으면 기다렸냐고 물었고, 네 번 넘으면 왜 늦게 받냐고 물었다.
“어머니한테 들었어. 병원 예약했다며.”
“네.”
“잘했어. 너 요즘 이상하잖아. 금요일에 들어가. 들어가면 얘기 좀 하자.”
남편의 목소리는 다정했다. 사람들 앞에서 쓰는 목소리였다. 전화 너머로 호텔 라운지의 피아노 소리가 들렸다. 남편이 누군가에게 웃으며 인사했다. 웃음소리가 전화기에서 멀어졌다가 돌아왔다.
“세린아. 금요일에 들어가면.”
남편은 말을 끝맺지 않았다. 끝맺지 않는 말은 문이 닫힌 뒤에 끝났다. 여섯 해 동안 그랬다. 전화가 끊겼다. 나는 왼쪽 손목을 오른손으로 감쌌다. 금요일까지 사흘이 남아 있었다.
*
밤 열한 시, 나는 차고로 내려갔다. 핸드백을 차에 두고 왔다는 핑계였다. 핸드백은 방에 있었다. 차고 불은 꺼져 있었다. 내 차 운전석 쪽 창문 너머로 휴대전화 불빛이 보였다. 은하가 차 안에 있었다.
나는 차 옆으로 다가갔다. 은하는 휴대전화를 보고 있었다. 나를 보지 못했다. 운전석 창문이 손가락 두 마디쯤 내려가 있었다. 화면이 보였다.
문자 창이었다. 받는 사람은 「사모님(회장)」 시어머니였다. 위로 올라가며 문자가 줄지어 있었다. 오늘 날짜 아래에 한 줄씩.
「09:52 출발. 행선지 강남 성모 검진센터.」 「10:40 서초동 정현빌딩 지하 주차장 도착.」 「12:45 출발.」
위에는 어제, 더 위에는 그저께. 두 해 치의 문자가 화면 위로 끝없이 올라가 있었다. 친정에 간 날, 백화점에 간 날, 혼자 한강에 가 달라고 했던 날. 맨 아래에 은하가 쓰다 만 문자가 하나 있었다. 아직 보내지 않은 문자였다.
「사모님 동선 보고드립니다. 오늘 서초동은」
은하의 엄지가 쓰다 만 문자 위에서 멈춰 있었다. 보낼지 지울지 정하지 못한 손가락이었다. 나는 운전석 문손잡이를 잡았다. 은하가 고개를 들었다. 창문 너머로 눈이 마주쳤다. 은하는 휴대전화를 감추지 않았다.
“오늘 서초동은, 뭐요?”
내 목소리가 차고에 울렸다. 존댓말이 아니었다. 여섯 해 만에 처음으로 존댓말이 나오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