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화(5,483자)

증인

재벌가 며느리가 운전기사와 도망칠 날을 정했다 · 예솔아

사진은 발인 날 아침 신문 일면에 실렸다⁠. 국화 화환 사이⁠, 굴건을 벗은 남자가 검은 원피스를 입은 여자의 손목을 쥐고 있었다⁠. 사진 아래 한 줄이 있었다⁠. 「⁠대륭 장남⁠, 부친 빈소에서 아내 손목 잡아⁠」

「⁠잡아⁠」였다⁠. 「⁠때려⁠」가 아니었다⁠. 기사는 조심스러웠다⁠. 조심스러운 기사가 더 빨리 퍼졌다⁠. 점심때까지 댓글이 만 개를 넘었다⁠. 저녁 뉴스에 사진이 다시 나왔다⁠. 아나운서가 「⁠손목⁠」이라는 말을 할 때 화면이 내 손목을 확대했다⁠. 하얗게 올라온 손가락 자국 넷이 텔레비전 화면만큼 커졌다⁠.

백초가 정비소 사무실의 작은 텔레비전을 껐다⁠.

“⁠저거 자꾸 보면 손목이 아파요⁠. 내가 아는데⁠, 허리 다친 사람이 허리 다치는 영상 보면 허리가 아파요⁠.⁠”

“⁠사장님⁠, 그거 의학적으로 맞는 말이에요⁠?⁠”

“⁠정비학적으로 맞는 말이에요⁠.⁠”

은하가 커피 세 잔을 들고 들어왔다⁠. 정비소 커피는 쓴맛밖에 없었다⁠. 나는 쓴 커피를 마셨다⁠. 사흘 전보다 쓰지 않았다⁠.

*

오후 세 시에 탁은빈이 정비소로 왔다⁠. 택시에서 내려 기름 묻은 바닥을 구두 끝으로 피해 걸었다⁠. 사무실 문 앞에서 멈췄다⁠. 들어오지 않았다⁠.

“⁠세린 씨⁠. 들어가도 돼요⁠?⁠”

“⁠변호사님이 허락을 구하시는 건 처음이에요⁠.⁠”

탁은빈이 들어와 앉았다⁠. 서류 가방을 무릎에 올렸다⁠. 열지 않았다⁠.

“⁠차남 쪽 연락⁠, 끊었어요⁠. 어젯밤에⁠. 끊고 나니까 전화가 세 번 더 왔어요⁠. 다 안 받았어요⁠.⁠”

“⁠왜요⁠?⁠”

“⁠숫자를 다시 세 봤어요⁠.⁠” 탁은빈이 처음으로 웃었다⁠. 웃음이 어색했다⁠. “⁠기사 나가고 나서 상담 전화가 마흔한 통 왔어요⁠. 사무실 생기고 한 달에 받은 것보다 많아요⁠. 다 손목 얘기였어요⁠. 그 사람들한테 제가 차남 쪽이랑 통하던 변호사라는 게 알려지면 마흔한 통이 다 끊겨요⁠. 그러니까 이건 의리가 아니라 장사예요⁠. 그렇게 알아 두세요⁠.⁠”

“⁠알아 둘게요⁠. 장사 잘하세요⁠.⁠”

탁은빈이 그제야 가방을 열었다⁠. 서류 한 장을 꺼냈다⁠.

“⁠첫 변론 기일이 다음 주 목요일 오전 열 시예요⁠. 서울가정법원⁠. 저쪽은 세린 씨 진료 기록이랑 은하 씨 사고 기사로 나올 거예요⁠. 정신이 아픈 아내⁠, 위험한 운전기사⁠. 우리는 블랙박스로 가요⁠. 소리 없는 영상이랑 십이월 삼십일일 카드⁠. 그런데 영상만으로는 약해요⁠. 영상 속 사람이 같은 사람이라고⁠, 이 집에서 그런 일이 되풀이됐다고 말해 줄 사람이 필요해요⁠. 증인이요⁠.⁠”

“⁠누가 서요⁠? 그 집 사람은 아무도 안 서요⁠.⁠”

탁은빈의 말이 끝나기 전에 내 휴대전화가 울렸다⁠. 모르는 번호였다⁠. 받았다⁠.

“⁠사모님⁠. 노비호입니다⁠. 공중전화입니다⁠. 집 전화는 다 듣고 있어서요⁠.⁠”

“⁠집사님⁠.⁠”

“⁠증인 서겠습니다⁠. 목요일 열 시⁠.⁠”

노비호의 목소리는 낮고 느렸다⁠. 공중전화 너머로 버스 지나가는 소리가 들렸다⁠.

“⁠드릴 것이 있습니다⁠. 내일 새벽 다섯 시⁠, 청운당 부엌 뒷문⁠. 식자재 들어오는 문입니다⁠. 그 시간엔 경비가 교대합니다⁠. 교대는 칠 분 걸립니다⁠. 경비들이 칠 분 동안 커피를 마십니다⁠. 서른 해 동안 한 번도 안 바뀐 습관입니다⁠.⁠”

“⁠집사님⁠, 위험해요⁠.⁠”

“⁠위험한 건 서른 해 동안 했습니다⁠. 이번엔 다른 걸 해 보겠습니다⁠.⁠”

전화가 끊겼다⁠. 끊기자마자 다시 울렸다⁠. 이번에는 아버지였다⁠. 아버지는 인사도 없이 말했다⁠.

“⁠은행 둘이 돌아왔다⁠.⁠”

“⁠어머님이 살려 주셨어요⁠?⁠”

“⁠아니⁠. 아무도 안 살려 줬다⁠. 아침에 신문 보고 은행 지점장이 전화했더라⁠. 대륭 눈치 보다가 이번엔 사람들 눈치를 보는 거지⁠. 대출 회수 통보⁠, 없던 일로 하자고⁠. 거래처 하나는 안 돌아왔다⁠. 거기는 대륭 하청이 칠 할이라⁠.⁠”

아버지가 잠깐 말을 멈췄다⁠. 사무실 전화벨 소리가 났다⁠.

“⁠세린아⁠. 열하나가 손 들었던 거⁠, 그 열하나가 오늘 아침에 다 출근했다⁠. 열아홉 중에 열넷도 나왔다⁠. 나는 그 숫자를 오늘 처음 세 봤다⁠. 사장 노릇 서른 해에⁠.⁠”

나는 전화를 끊고 백초에게 물었다⁠.

“⁠사장님⁠. 정비학적으로⁠, 손목 아픈 사람이 남의 출근 소식 들으면 손목이 덜 아파요⁠?⁠”

“⁠그건 모르겠고⁠, 커피는 덜 써요⁠.⁠”

*

탁은빈이 돌아간 뒤 정비소 앞에 낡은 소형차 한 대가 멈췄다⁠. 운전석 문이 열렸다⁠. 지팡이 끝이 먼저 나왔다⁠. 그다음에 다리가⁠, 그다음에 사람이 나왔다⁠. 서른 중반의 남자였다⁠. 남자가 지팡이를 짚고 정비소 셔터 앞까지 걸었다⁠. 왼쪽 다리가 늦게 따라왔다⁠.

은하가 리프트 아래에서 나오다가 멈췄다⁠. 손에 든 렌치가 바닥에 떨어졌다⁠. 쇳소리가 정비소 안을 한 바퀴 돌았다⁠.

“⁠형⁠.⁠”

백초가 내 옆에서 아주 작게 말했다⁠.

“⁠같은 팀이었어요⁠. 다섯 해 전 인제⁠. 은하가 뒤에서 들어가다 둘이 엉켰어요⁠. 쟤는 서킷을 떠나고⁠, 형은 다리를 잃었어요⁠. 반쯤⁠.⁠”

남자가 은하 앞에 섰다⁠. 은하보다 머리 하나가 컸다⁠. 지팡이를 짚은 손등에 수술 자국이 길게 나 있었다⁠.

“⁠기사 봤다⁠. 너 운전기사 했다며⁠. 재벌 집에서⁠.⁠”

“⁠응⁠.⁠”

“⁠다섯 해 동안 전화 한 통 안 하고⁠.⁠”

“⁠할 말이 없었어⁠.⁠”

“⁠할 말이 없어⁠? 나는 할 말이 많았어⁠. 너한테 욕하고 싶었고⁠, 너 보고 싶었고⁠, 너 다시 차 타는 거 보고 싶었어⁠. 근데 너는 숨었잖아⁠. 다리는 수술하면 반은 돌아와⁠. 숨은 사람은 안 돌아와⁠.⁠”

은하가 고개를 숙였다⁠. 나는 은하가 고개를 숙이는 것을 처음 보았다⁠. 대문 앞에서 경호원 넷 앞에서도 숙이지 않던 고개였다⁠.

“⁠형⁠. 미안해⁠.⁠”

“⁠늦었어⁠. 미안한 건 됐고⁠.⁠” 남자가 외투 주머니에서 봉투 하나를 꺼냈다⁠. “⁠경기 위원회 사고 조사 보고서⁠. 사본이야⁠. 내 브레이크가 먼저 잠겼어⁠. 네가 뒤에서 들이받은 게 아니라 내가 앞에서 멈춘 거야⁠. 위원회도 그렇게 썼어⁠. 너는 이거 한 번도 안 읽었지⁠?⁠”

은하가 봉투를 받았다⁠. 손이 떨렸다⁠.

“⁠읽으면 내 잘못 없다고 써 있을까 봐 안 읽었어⁠.⁠”

“⁠바보야⁠. 그래서 읽어야지⁠.⁠” 남자가 지팡이로 은하의 운동화 끝을 툭 쳤다⁠. “⁠재판에서 저쪽이 위험한 운전기사라고 하면⁠, 나 불러⁠. 지팡이 짚고 나가서 말해 줄게⁠. 위험한 건 내 브레이크였다고⁠.⁠”

남자가 돌아서 소형차로 걸어갔다⁠. 왼쪽 다리가 늦게 따라갔다⁠. 운전석에 앉아 손으로 조작하는 레버를 당겼다⁠. 차가 출발했다⁠. 은하는 정비소 셔터 앞에 서서 봉투를 열지 못하고 있었다⁠.

나는 은하 옆에 섰다⁠. 봉투를 같이 열었다⁠. 은하가 첫 장을 읽었다⁠. 둘째 장에서 은하가 웃었다⁠. 울면서 웃었다⁠. 백초가 사무실로 들어가 텔레비전을 다시 켰다⁠. 소리를 크게 틀었다⁠. 우리 둘이 울 때 들리지 않게⁠.

*

새벽 다섯 시⁠, 청운당 언덕 아래에 승합차를 세웠다⁠. 은하가 운전석에서 시계를 보았다⁠.

“⁠칠 분이에요⁠. 육 분 지나면 깜빡이 두 번 칠게요⁠. 그럼 무조건 나와요⁠.⁠”

“⁠무조건이요⁠?⁠”

“⁠무조건⁠. 사모님 뒤에 누가 붙으면 제가 붙은 거라고 했죠⁠? 칠 분 넘으면 제가 들어가요⁠. 문 부수고⁠.⁠”

“⁠백초 사장님 차예요⁠.⁠”

“⁠그러니까 부수기 전에 나와요⁠.⁠”

부엌 뒷문은 열려 있었다⁠. 노비호가 문 안쪽에 서 있었다⁠. 양복 대신 회색 카디건 차림이었다⁠. 여섯 해 동안 나는 노비호가 양복을 벗은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 부엌 조리대 위에 누런 서류 봉투가 하나 놓여 있었다⁠.

“⁠사모님⁠. 서른 해 전 의정부 병원 응급실 영수증입니다⁠. 수납자 이름이 제 이름이고⁠, 환자 이름이 사모님⁠, 아니 회장님 사모님 이름입니다⁠. 코뼈 골절⁠, 갈비뼈 금 두 개⁠. 영수증 뒤에 제가 날짜와 시각과 차 번호를 적어 두었습니다⁠. 그날 밤 회장님이 쓰시던 차 번호입니다⁠.⁠”

노비호가 봉투를 내게 밀었다⁠. 내가 봉투를 집었다⁠. 봉투 끝이 손바닥에 닿자마자 부엌 안쪽 문이 열렸다⁠.

시어머니였다⁠. 흰 소복 위에 검은 숄을 걸치고 있었다⁠. 삼우제를 앞둔 새벽이었다⁠. 시어머니는 부엌 불을 켜지 않았다⁠. 냉장고 문틈의 불빛만으로 우리를 보았다⁠.

“⁠비호야⁠.⁠”

시어머니가 노비호의 이름을 불렀다⁠. 나는 시어머니가 집사를 이름으로 부르는 것을 처음 들었다⁠.

“⁠서른 해 동안 입 다문 사람이 이제 와서 뭘 하겠다는 거냐⁠.⁠”

“⁠서른 해 동안 입 다물어서⁠, 사모님이 그 긴소매를 며느님께 물려주셨습니다⁠.⁠”

시어머니의 얼굴이 냉장고 불빛 속에서 굳었다⁠.

“⁠그 영수증⁠, 내 거다⁠. 내 코뼈고 내 갈비뼈다⁠. 네가 증인석에서 내 뼈를 꺼내 놓겠다는 거냐⁠? 남들 앞에서⁠?⁠”

“⁠사모님 뼈를 꺼내는 게 아닙니다⁠. 회장님 손을 꺼내는 겁니다⁠. 그리고 태빈 도련님 손이 아버님 손을 닮았다고 말하는 겁니다⁠. 저는 두 손을 다 보았습니다⁠.⁠”

“⁠너는 이 집에서 나가면 갈 데가 없다⁠. 식구도 없고⁠, 집도 없고⁠, 퇴직금은 내가 정한다⁠.⁠”

“⁠압니다⁠.⁠”

“⁠가평에 별장이 있다⁠. 네 이름으로 해 주마⁠. 죽을 때까지 지금 받는 월급도 주마⁠. 목요일에 법원에만 안 가면 된다⁠. 감기에 걸려라⁠. 그 나이에 감기 걸리는 거⁠, 아무도 탓 안 한다⁠.⁠”

노비호가 잠깐 생각하는 얼굴을 했다⁠. 정말로 생각하는 얼굴이었다⁠. 나는 숨을 멈췄다⁠.

“⁠사모님⁠. 옛말에 공짜 별장에는 모기가 많다고 했습니다⁠.⁠”

“⁠그런 말이 어디 있어⁠?⁠”

“⁠지금 만들었습니다⁠. 저는 모기에 잘 물립니다⁠.⁠” 노비호가 고개를 숙였다⁠. “⁠그래서 서른 해를 있었습니다⁠. 갈 데가 없어서⁠. 이제 보니 갈 데가 없는 건 사모님도 같으셨습니다⁠.⁠”

시어머니가 한 걸음 다가왔다⁠. 손을 들었다⁠. 노비호의 뺨을 칠 손이었다⁠. 손이 공중에서 멈췄다⁠. 시어머니가 제 손을 보았다⁠. 냉장고 불빛 아래서 손이 떨렸다⁠. 시어머니는 손을 내렸다⁠.

나는 봉투를 가슴에 안고 시어머니를 보았다⁠.

“⁠어머님⁠. 서른 해 전에 어머님 손목은 누가 봐 줬어요⁠?⁠”

시어머니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웃었다⁠. 낮고 느린⁠, 내가 아는 웃음이었다⁠.

“⁠세린아⁠. 나는 맞고 서른 해를 얻었다⁠. 이 집⁠, 이 그룹⁠, 내 아들 자리⁠. 너는 무엇을 얻겠다고 다 버리느냐⁠?⁠”

“⁠제 손목이요⁠.⁠”

밖에서 깜빡이 소리가 났다⁠. 두 번⁠. 육 분이 지나 있었다⁠.

시어머니가 숄을 여미며 돌아섰다⁠. 부엌 안쪽 문 앞에서 멈췄다⁠. 등을 보인 채 말했다⁠.

“⁠목요일 오전 열 시⁠. 재판이라고 했지⁠. 나도 같은 시각에 일이 있다⁠. 대륭 본사 대강당에서 기자 회견을 연다⁠. 가족으로서 며느리의 병에 대해 말하겠다⁠. 태빈이도 나와서 사과할 거다⁠. 아픈 아내를 지키지 못한 남편으로서⁠.⁠”

시어머니가 고개를 조금 돌렸다⁠. 냉장고 불빛이 옆얼굴에 닿았다⁠.

“⁠법정에 앉아 있으면 회견장에서 네 이야기를 우리가 한다⁠. 회견장에 오면 법정의 네 자리가 빈다⁠. 하나만 골라라⁠. 너는 늘 하나만 고르는 아이였지⁠.⁠”

문이 닫혔다⁠. 나는 봉투를 안고 뒷문으로 뛰었다⁠. 언덕 아래에서 은하가 운전석 문을 반쯤 열고 한쪽 발을 땅에 내리고 있었다⁠. 정말로 문을 부수러 올라올 참이었다⁠.

나는 조수석에 올라탔다⁠. 봉투를 무릎에 올렸다⁠. 은하가 발을 거둬들이고 문을 닫았다⁠.

“⁠칠 분 넘었어요⁠.⁠” 은하가 말했다⁠.

“⁠육 분 오십 초예요⁠.⁠”

“⁠제 시계로는 칠 분이었어요⁠.⁠”

“⁠은하 씨 시계는 늘 빨라요⁠.⁠”

은하가 시동을 걸었다⁠. 승합차가 언덕을 내려갔다⁠. 룸미러 속 청운당의 지붕이 작아졌다⁠. 은하가 룸미러를 위로 접었다⁠. 말해도 된다는 신호였다⁠. 나는 한참 말하지 않았다⁠. 내부순환로에 올라서야 입을 열었다⁠.

“⁠목요일에 어디로 갈지⁠, 아직 모르겠어요⁠.⁠”

“⁠괜찮아요⁠. 어디든 제일 빠른 길로 갈게요⁠. 둘 다면 둘 다⁠.⁠”

11화는 어땠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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