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화(5,473자)

기자 회견장

재벌가 며느리가 운전기사와 도망칠 날을 정했다 · 예솔아

목요일 아침 일곱 시⁠, 백초가 승합차 보닛을 열어 놓고 있었다⁠.

“⁠이 차 최고 속도가 시속 백이십이에요⁠. 백이십에서 핸들이 떨려요⁠. 백삼십에서는 차가 떨리고⁠, 백사십에서는 내가 떨려요⁠.⁠”

“⁠사장님은 안 타시잖아요⁠.⁠” 은하가 말했다⁠.

“⁠그러니까 떨리지⁠. 내 차잖아⁠.⁠”

백초가 엔진오일을 새로 갈고 타이어 공기압을 쟀다⁠. 앞바퀴 두 개⁠, 뒷바퀴 두 개⁠. 바퀴마다 손바닥으로 두 번씩 두드렸다⁠. 서킷에서 은하의 차를 내보낼 때 하던 손버릇이라고 했다⁠. 다섯 해 만이라고 했다⁠.

나는 다락에서 옷을 골랐다⁠. 고를 옷이 세 벌밖에 없었다⁠. 검은 원피스⁠, 은하의 탄 정장⁠, 결혼 전에 산 하늘색 블라우스⁠. 블라우스는 반소매였다⁠. 나는 블라우스를 입었다⁠. 거울 앞에서 손목을 보았다⁠. 빈소에서 올라온 자국은 노랗게 빠지는 중이었다⁠. 아주 옅게⁠, 아직 남아 있었다⁠.

탁은빈이 전화로 시간을 셌다⁠.

“⁠첫 기일은 짧아요⁠. 이십 분이요⁠. 길어야 삼십 분⁠. 열 시에 들어가면 열 시 이십 분에 나와요⁠. 회견은 열 시에 시작해서 한 시간⁠. 서초동에서 광화문까지 평일 오전이면 사십 분⁠. 회견 끝나기 전에 못 가요⁠.⁠”

“⁠은하 씨가 이십오 분이래요⁠.⁠”

“⁠은하 씨가 뭐라든⁠, 교통 법규는 지키세요⁠. 과속 딱지 한 장이면 저쪽이 위험한 운전기사라고 재판에 들고 와요⁠.⁠”

나는 전화기를 은하에게 넘겼다⁠. 은하가 받았다⁠.

“⁠변호사님⁠. 과속 안 해요⁠. 길을 아는 거예요⁠. 서울에서 신호가 제일 잘 맞는 길이 따로 있어요⁠. 기사 두 해 동안 사모님 태우고 백화점 가는 길 마흔 가지를 외웠어요⁠. 오늘 써먹을 거예요⁠.⁠”

*

서울가정법원 복도는 조용했다⁠. 복도 의자에 낯익은 사람 둘이 나란히 앉아 있었다⁠. 노비호와 은하의 옛 동료였다⁠. 노비호는 다시 검은 양복을 입었다⁠. 옛 동료는 지팡이를 무릎 사이에 세우고 있었다⁠. 둘은 서로 모르는 사이였다⁠. 내가 다가갔을 때 둘은 이미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러니까 집사님⁠, 옛말에 브레이크가 먼저 잠기면 차가 운다고 했습니다⁠.⁠”

“⁠처음 듣는 말씀입니다⁠.⁠”

“⁠방금 만들었어요⁠. 집사님이 하시는 거 보고 따라 해 봤어요⁠.⁠”

노비호가 아주 조금 웃었다⁠. 노비호가 웃는 얼굴을 나는 처음 보았다⁠.

복도 건너편에 대륭 법무팀이 서 있었다⁠. 검은 양복 열넷⁠. 탁은빈의 말대로 열넷이었다⁠. 태빈은 없었다⁠. 대리인만 나와도 되는 날이었다⁠. 태빈은 지금 광화문에서 넥타이를 고르고 있을 것이었다⁠.

열 시 정각에 법정 문이 열렸다⁠. 판사가 이름을 불렀다⁠.

“⁠원고 권세린 씨⁠, 나오셨습니까⁠?⁠”

“⁠네⁠. 제가 왔습니다⁠.⁠”

내 목소리가 법정 안에 울렸다⁠. 크지 않았다⁠. 작지도 않았다⁠. 결혼식장에서 「⁠네⁠」 하던 목소리와 달랐다⁠. 여섯 해 만에 처음으로 내가 나를 대신해 대답했다⁠.

탁은빈이 증거를 냈다⁠. 블랙박스 영상⁠, 십이월 삼십일일 메모리 카드⁠, 서른 해 전 의정부 병원 응급실 영수증⁠, 인제 서킷 경기 위원회의 사고 조사 보고서⁠. 증인 신청 두 사람⁠. 노비호⁠, 그리고 은하의 옛 동료⁠.

대륭 쪽 대리인이 일어섰다⁠.

“⁠재판장님⁠. 원고의 정신과 진료 기록을 제출하겠습니다⁠. 원고는 결혼 셋째 해부터⁠…⁠…⁠.⁠”

“⁠제출하세요⁠.⁠” 내가 말했다⁠. 판사가 나를 보았다⁠. 대리인도 나를 보았다⁠. “⁠제출하세요⁠. 제가 왜 아팠는지⁠, 다음 기일에 제가 말하겠습니다⁠. 진료 기록에 다 있어요⁠. 남편이 손목을 비튼 다음 날마다 병원에 갔어요⁠. 날짜를 맞춰 보시면 돼요⁠.⁠”

법정이 조용해졌다⁠. 판사가 서류를 넘기고 다음 기일을 잡았다⁠. 한 달 뒤였다⁠. 시계는 열 시 십육 분이었다⁠.

법정을 나오자 노비호가 복도에서 일어섰다⁠. 양복 안주머니에서 쇠고리 하나를 꺼냈다⁠. 열쇠가 스무 개 넘게 꿰어 있었다⁠. 청운당 대문⁠, 현관⁠, 차고⁠, 금고⁠, 이 층 동쪽 끝 방⁠.

“⁠사모님⁠. 오늘 아침에 사직서를 냈습니다⁠. 서른한 해 만에요⁠. 이건 돌려드리려고 들고 나왔습니다⁠.⁠”

“⁠저한테 주시면 안 돼요⁠. 저는 이제 그 집 사람이 아니에요⁠.⁠”

“⁠그래서 드리는 겁니다⁠. 그 집 사람한테 주면 다시 문을 잠그니까요⁠.⁠” 노비호가 열쇠 꾸러미를 내 손에 쥐여 주었다⁠. 묵직했다⁠. “⁠이 층 동쪽 끝 방 열쇠는 따로 빼 두었습니다⁠. 그 방은 다시는 아무도 안 잠갔으면 합니다⁠. 열쇠가 없으면 못 잠그지요⁠.⁠”

옛 동료가 지팡이로 바닥을 짚고 일어섰다⁠.

“⁠집사님⁠, 그것도 속담이에요⁠?⁠”

“⁠아닙니다⁠. 그건 그냥 사실입니다⁠.⁠”

나는 열쇠 꾸러미를 가방에 넣었다⁠. 가방 끈이 어깨에서 한쪽으로 기울었다⁠. 서른한 해의 무게였다⁠.

*

법원 주차장에서 은하가 운전석 문을 열어 놓고 기다리고 있었다⁠. 은하는 시동을 미리 걸어 두었다⁠. 내가 조수석 문을 닫기도 전에 차가 움직였다⁠.

“⁠열 시 십칠 분⁠.⁠” 은하가 말했다⁠. “⁠이십오 분이면 열 시 사십이 분⁠. 회견은 열한 시까지예요⁠.⁠”

승합차가 법원 앞 골목을 빠져나갔다⁠. 은하는 큰길로 가지 않았다⁠. 아파트 단지 뒷길로 꺾었다⁠. 신호등 하나를 초록불에 지나고⁠, 다음 신호등도 초록불에 지났다⁠. 세 번째 신호등 앞에서 은하가 속도를 늦췄다⁠. 늦추는 사이 불이 바뀌었다⁠. 초록불이었다⁠. 은하는 브레이크를 한 번도 세게 밟지 않았다⁠. 차가 빨라진 게 아니었다⁠. 멈추지 않았다⁠.

“⁠백화점 가는 길이에요⁠?⁠”

“⁠신세계 본점 가는 길⁠. 사모님이 제일 싫어하던 길이요⁠. 시어머님 심부름 가는 길이었잖아요⁠.⁠”

나는 휴대전화로 회견 생중계를 켰다⁠. 대륭 본사 대강당⁠. 단상 위에 태빈과 시어머니가 앉아 있었다⁠. 태빈이 일어서서 고개를 숙였다⁠. 기자들의 카메라가 일제히 터졌다⁠. 셔터 소리가 빗소리처럼 쏟아졌다⁠.

“⁠국민 여러분께 죄송합니다⁠. 아버님 빈소에서 제가 아내의 손을 잡은 것은⁠, 아픈 아내를 붙잡으려는 남편의 마음이었습니다⁠. 제 아내는 오래 아팠습니다⁠. 제가 더 잘 돌봤어야 했습니다⁠.⁠”

태빈의 목소리는 떨렸다⁠. 잘 떨렸다⁠. 리허설을 한 떨림이었다⁠. 시어머니는 태빈 옆에서 손수건을 눈가에 대고 있었다⁠. 손수건은 젖지 않았다⁠.

은하가 핸들을 꽉 쥐었다⁠. 손등의 힘줄이 솟았다⁠. 은하가 액셀에 발을 올렸다⁠. 그리고 떼었다⁠. 숨을 한 번 쉬고 다시 올렸다⁠. 아까와 같은 힘이었다⁠.

“⁠안 밟아요⁠.⁠” 은하가 말했다⁠. “⁠밟으면 저 사람이 맞는 말 하는 거예요⁠. 위험한 운전기사⁠.⁠”

깜빡이를 켜지 않은 채 은하가 핸들을 두 번 툭 쳤다⁠. 나는 사이드미러를 보았다⁠. 검은 세단 한 대가 두 차선 뒤에 붙어 있었다⁠. 번호판 끝자리가 대륭 계열사의 숫자였다⁠.

“⁠경호실장 차예요⁠. 인제에서 본 차⁠.⁠”

“⁠어떡해요⁠?⁠”

“⁠아무것도 안 해요⁠. 신호만 지켜요⁠. 저 차는 우리 뒤에 붙으려면 신호를 어겨야 해요⁠. 저 차가 어기는지 블랙박스가 다 봐요⁠. 이번엔 블랙박스가 우리 편이에요⁠.⁠”

삼각지 교차로에서 노란불이 들어왔다⁠. 은하는 멈췄다⁠. 뒤에 붙은 세단도 멈췄다⁠. 초록불로 바뀌었다⁠. 은하는 출발했다⁠. 다음 교차로에서 다시 노란불⁠. 은하가 멈췄다⁠. 세단은 멈추지 않으려다 멈췄다⁠. 앞 범퍼가 정지선을 넘었다⁠. 은하가 룸미러를 보며 혼잣말을 했다⁠.

“⁠정지선 위반⁠. 벌점 십오 점⁠. 저 아저씨 오늘 면허 반성문 써야겠네요⁠.⁠”

나는 웃었다⁠. 생중계 속 태빈은 여전히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한강 다리를 건널 때 은하의 휴대전화가 울렸다⁠. 은하는 받지 않았다⁠. 핸들의 버튼을 눌러 스피커로 돌렸다⁠. 백초의 목소리가 차 안에 울렸다⁠.

“⁠은하야⁠. 인제에서 전화 왔다⁠. 내년 시즌 팀 하나가 시트 비었대⁠. 테스트 주행 다음 달⁠. 네 이름 대니까 저쪽에서 한참 말이 없더라⁠. 그러더니 사고 보고서 읽었다고⁠, 오라고⁠.⁠”

은하가 대답하지 않았다⁠. 다리 이음새를 지날 때 공구 상자가 덜컹거렸다⁠.

“⁠은하야⁠, 듣고 있어⁠?⁠”

“⁠듣고 있어요⁠. 지금 운전 중이에요⁠. 이따 전화해요⁠.⁠”

“⁠지금 서울 한복판에서 내 차로 뭐 하는데⁠?⁠”

“⁠사모님 모셔다드리는 중이에요⁠. 마지막으로⁠.⁠”

전화가 끊겼다⁠. 나는 은하를 보았다⁠. 은하가 앞을 보았다⁠.

“⁠마지막이요⁠?⁠”

“⁠기사로는 마지막이요⁠. 다음부터는 제가 모는 차에 사모님이 그냥 타세요⁠. 기사 말고⁠, 저로⁠.⁠”

*

열 시 사십일 분⁠, 승합차가 대륭 본사 정문 앞에 멈췄다⁠. 「⁠백초 모터스 · 엔진오일 교환 만구천 원⁠」 글씨가 대륭 본사 유리벽에 비쳤다⁠. 은하가 비상등을 켰다⁠.

“⁠사십일 분이에요⁠. 일 분 남았어요⁠.⁠”

“⁠그 일 분 어디에 써요⁠?⁠”

“⁠사모님 내리는 데 쓰세요⁠. 천천히⁠.⁠”

나는 문을 열고 내렸다⁠. 은하가 창문을 내렸다⁠. 은하는 따라 내리지 않았다⁠. 처음부터 그렇게 정했다⁠. 회견장에는 나 혼자 들어간다⁠. 은하가 옆에 있으면 사람들은 은하를 볼 것이었다⁠. 오늘은 내 얼굴을 보게 하고 싶었다⁠.

“⁠기다릴게요⁠. 여기서⁠.⁠” 은하가 말했다⁠. “⁠주차 단속 오면 엔진오일 갈아 주고 버틸게요⁠.⁠”

로비 출입문 앞에서 경비원 둘이 나를 알아보았다⁠. 한 사람이 무전기를 들었다⁠. 다른 한 사람이 동료의 무전기 든 손을 내리게 했다⁠.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출입문 옆 쪽문을 열어 주었다⁠. 경비원의 손목에 낡은 시계가 채워져 있었다⁠. 나는 경비원의 이름을 몰랐다⁠.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엘리베이터는 십오 층에서 열렸다⁠. 대강당 앞 복도에 카메라 가방이 줄지어 놓여 있었다⁠. 문 안에서 태빈의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대강당 문 앞에 시어머니가 서 있었다⁠.

회견 도중에 단상에서 내려와 있었다⁠. 생중계 화면에서 사라진 지 몇 분 되지 않았을 것이었다⁠. 비서가 귀띔했겠지⁠. 경호실장이 무전을 쳤겠지⁠. 시어머니는 흰 소복이 아니라 검은 정장 차림이었다⁠. 긴소매였다⁠.

“⁠법정에 갔다 왔구나⁠.⁠”

“⁠네⁠.⁠”

“⁠둘 다 고르는 아이는 아니었는데⁠.⁠”

“⁠어머님이 하나만 고르라고 하셨잖아요⁠. 그래서 하나만 골랐어요⁠. 제 입이요⁠. 제 입은 법정에도 가고 여기도 와요⁠.⁠”

시어머니가 문 앞에서 비키지 않았다⁠. 손이 문고리에 올라가 있었다⁠.

“⁠들어가면 네 병 이야기를 네 입으로 해야 한다⁠. 카메라 백 대 앞에서⁠. 정신과를 다녔다고⁠. 약을 먹었다고⁠. 한번 나오면 평생 따라다닌다⁠.⁠”

“⁠할게요⁠. 아팠다고⁠. 왜 아팠는지도요⁠.⁠”

“⁠너는 그게 무섭지 않으냐⁠?⁠”

“⁠무서워요⁠.⁠” 나는 시어머니의 긴소매를 보았다⁠. “⁠어머님은 서른 해 동안 무서우셨죠⁠. 저는 여섯 해 무서웠어요⁠. 오늘 하루 더 무서우면 끝나요⁠. 어머님도 오늘 끝내실 수 있어요⁠.⁠”

시어머니의 손이 문고리 위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문 안에서 태빈이 마지막 말을 하고 있었다⁠. 「⁠제 아내가 돌아오기를 기다리겠습니다⁠」 기자들의 셔터 소리가 다시 쏟아졌다⁠.

시어머니가 내 손목을 보았다⁠. 반소매 아래 손목⁠. 노랗게 빠지는 중인 자국⁠. 시어머니의 눈이 오래 머물렀다⁠. 서른 해 전 의정부 병원에서 시어머니 손목에도 같은 색이 있었을 것이었다⁠. 노비호는 노랗게 빠지던 손목을 보았을 것이었다⁠.

시어머니가 문고리에서 손을 떼었다⁠. 비켜서지는 않았다⁠. 문고리 하나만큼의 자리를 비웠다⁠. 사람 하나가 손을 뻗을 만큼⁠.

나는 손을 뻗었다⁠. 문고리가 차가웠다⁠. 손바닥에 쇠의 결이 닿았다⁠. 은하의 핸들을 처음 잡던 날과 같은 차가움이었다⁠.

문을 열었다⁠.

카메라 백 대가 한꺼번에 내게로 돌았다⁠. 단상 위에서 태빈이 마이크를 쥔 채 굳었다⁠. 플래시가 터졌다⁠. 빈소에서처럼 하얗게⁠. 이번에는 아무도 내 손목을 쥐고 있지 않았다⁠.

나는 반소매 차림 그대로 단상을 향해 걸어 들어갔다⁠.

여기까지가 지금까지 나온 이야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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