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5,373자)

먹물 씨

집사의 결혼식을 막으러 고양이가 간다 · 연가비

코트를 벗을 수는 없었다⁠. 나는 대신 사실을 말했다⁠.

“⁠안에 아무것도 없어요⁠.⁠”

새론의 눈이 커졌다⁠. 휴대전화를 쥔 엄지가 화면 위에서 굳었다⁠. 동쪽 하늘이 물에 탄 우유 색으로 묽어지고 있었다⁠. 발바닥이 다시 뜨거워졌다⁠. 해가 온다는 것을 몸이 먼저 알았다⁠.

나는 비상계단으로 뛰었다⁠. 두 발로 뛰는 법은 몰랐지만 도망치는 법은 알았다⁠. 철계단 세 번째 칸에서 무릎이 접혔고⁠, 다섯 번째 칸에서 손바닥이 바닥을 짚었고⁠, 일곱 번째 칸에서는 네 발이었다⁠. 코트가 나를 통째로 덮었다⁠. 모직 속은 어둡고 따뜻하고 원장님 냄새가 났다⁠. 나는 코트 소매 속으로 기어 들어가 숨을 죽였다⁠.

새론의 슬리퍼 소리가 계단을 내려왔다⁠. 코트 앞에서 멈췄다⁠. 새론이 코트를 들어 올렸을 때 나는 이미 소매 끝으로 빠져나와 화분 뒤에 있었다⁠. 새론은 코트를 털었다⁠. 주머니에서 청진기가 떨어져 철계단을 굴렀다⁠.

새론은 청진기를 주워 오래 들여다보았다⁠. 신고는 하지 않았다⁠.

*

“⁠어젯밤에 이상한 사람을 봤어⁠.⁠”

아침 여덟 시⁠, 새론은 소파에 앉아 내 등을 빗었다⁠. 빗질은 하루에 한 번⁠, 꼬리에서 목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나는 새론의 무릎 옆에 배를 깔고 엎드려 눈을 반쯤 감았다⁠. 밤새 사람으로 있었더니 털 한 올 한 올이 무거웠다⁠.

“⁠아빠 코트를 걸치고 맨발로⁠. 도둑인 줄 알았는데 코트를 두고 갔어⁠. 청진기도 넣어서⁠. 도둑이 그런 걸 왜 돌려줘⁠?⁠”

새론이 빗을 멈췄다⁠.

“⁠눈이 노랬어⁠. 먹물이 너처럼⁠.⁠”

나는 눈을 꼭 감았다⁠. 고양이는 들키면 자는 척을 한다⁠.

*

사흘 뒤 점심때 우겸이 둘둘 만 종이를 들고 살림집에 올라왔다⁠. 현관에서 알약을 삼키고 마스크를 쓰는 순서는 같았다⁠. 우겸은 식탁에 종이를 펼치고 네 귀퉁이에 새론의 머그잔과 간장병과 휴지 상자와 내 사료 그릇을 얹었다⁠. 내 사료 그릇이었다⁠. 나는 식탁 위로 뛰어올라 사료 그릇 옆에 앉았다⁠.

종이에는 키 큰 건물 세 동이 그려져 있었다⁠. 새로 지을 아파트였다⁠. 우겸이 볼펜 끝으로 큰길 모퉁이를 짚었다⁠.

“⁠여기⁠, 일층 모퉁이요⁠. 병원 자리로 비워 둘게요⁠. 지금보다 넓어요⁠. 입원실도 반지하 말고 볕 드는 데로 빼고요⁠.⁠”

새론이 볼펜 끝을 오래 보았다⁠.

“⁠계약서에 써 줄 수 있어요⁠?⁠”

“⁠아버지가 서류를 싫어하세요⁠. 서류 쓰자고 하면 사람을 못 믿는 거라고 생각하셔서⁠. 대신 제가 약속할게요⁠.⁠”

우겸의 목소리는 다정했다⁠. 다정한 목소리 밑에서 숨이 반 박자 늦게 나왔다⁠. 숨이 늦게 나오는 사람은 말과 속이 다르다⁠. 고양이는 귀보다 숨으로 먼저 안다⁠.

나는 앞발로 볼펜을 쳤다⁠. 볼펜이 식탁에서 굴러떨어져 냉장고 밑으로 들어갔다⁠. 우겸이 무릎을 꿇고 냉장고 밑을 들여다보다가 먼지를 들이마시고 재채기를 다섯 번 했다⁠. 새론이 웃었다⁠. 우겸도 눈물을 닦으며 웃었다⁠. 볼펜은 끝내 안 나왔다⁠. 약속을 적을 볼펜이 냉장고 밑에 굴러 들어가 있다는 것을 아는 식구는 나 하나였다⁠.

*

시월 그믐 날⁠, 오후 세 시에 조 회장이 왔다⁠.

진료실 문이 열리기 전에 냄새가 먼저 왔다⁠. 톱밥⁠, 담배⁠, 구두약⁠. 문이 열리고 키 작은 노인이 들어왔다⁠. 머리가 하얗고 손이 컸다⁠. 손가락 마디가 굵고 엄지손톱이 반쯤 깨져 있었다⁠. 나는 약장 꼭대기에 올라가 몸을 낮췄다⁠. 간호 실장이 문밖 복도에서 걸레질하는 척을 했다⁠. 걸레가 같은 자리만 닦았다⁠.

조 회장은 인사보다 먼저 벽을 손바닥으로 두드렸다⁠. 퉁⁠, 퉁⁠. 귀를 벽에 댔다가 뗐다⁠.

“⁠구사 년 벽돌이네⁠. 좋은 놈 썼어⁠. 너희 아버지가 돈을 아낄 데를 몰랐지⁠.⁠”

“⁠앉으세요⁠, 회장님⁠.⁠”

“⁠안 앉는다⁠. 치수만 보고 간다⁠.⁠”

조 회장은 줄자를 꺼내 진료실 창문 폭을 쟀다⁠. 새론은 진료대 옆에 서서 팔짱을 꼈다⁠. 팔짱 낀 손끝이 반지를 만지고 있었다⁠.

“⁠날 받아 왔다⁠. 정월 대보름 지나고 이레째 아침 열한 시⁠. 평일이라고 친척들이 투덜대는데⁠, 날은 날이야⁠.⁠”

“⁠우겸 씨랑 먼저 얘기하셨어요⁠?⁠”

“⁠걔는 내가 정한 걸 듣는 애야⁠.⁠”

조 회장이 줄자를 감았다⁠. 촤르륵⁠, 쇠 혀가 집으로 들어가는 소리가 진료실을 긁었다⁠. 나는 수염을 뒤로 눕혔다⁠.

“⁠빚 얘기는 들었지⁠? 사억에 이자 넉 달 밀렸다⁠. 결혼하면 내가 다 없애 준다⁠. 결혼 선물이야⁠. 대신 이 땅은 집안 땅이 되는 거고⁠, 집안 땅은 집안 일에 쓰는 거지⁠.⁠”

“⁠결혼 안 하면요⁠?⁠”

“⁠은행이 하던 일을 내가 하지⁠. 넉 달 연체면 경매 넣을 수 있어⁠.⁠”

새론의 팔짱이 풀렸다⁠.

“⁠입원한 애들은요⁠? 마흔 마리예요⁠.⁠”

“⁠나는 사람 사는 집을 짓는 사람이야⁠. 개는 몰라⁠.⁠”

조 회장은 진료대 위에 놓인 체온계를 집어 들었다가 무엇인지 알고는 얼른 내려놓았다⁠. 손을 바지에 문질렀다⁠.

“⁠요새 금리가 미쳤다⁠. 미국이 올리면 우리가 운다⁠. 공사비 빌린 데서 매일 전화가 와⁠. 너 하나 때문에 열세 집이 이주비를 못 받고 있어⁠. 세탁소 영감은 벌써 짐 싸 놨다⁠.⁠”

“⁠저 하나 때문이 아니라⁠, 회장님 사업 때문이죠⁠.⁠”

“⁠그게 그거야⁠.⁠”

조 회장은 문을 열다 말고 약장 꼭대기의 나를 올려다보았다⁠. 눈이 마주쳤다⁠. 사람 눈 중에 이렇게 무게를 재는 눈은 처음이었다⁠. 나를 고양이로 보는 것이 아니라 몇 킬로그램으로 보는 눈이었다⁠.

“⁠고양이도 이사 가면 집 잃는다더라⁠. 미리 정 떼라⁠.⁠”

구두 소리가 대기실을 지나 골목으로 사라지자마자 간호 실장이 걸레를 든 채 진료실로 들어왔다⁠. 실장은 마흔여섯 살이고⁠, 원장님 때부터 이 병원에 있었고⁠, 궁금한 것을 하루 넘게 참은 적이 없었다⁠.

“⁠원장님⁠, 경매요⁠? 지금 경매라고 했어요⁠?⁠”

“⁠실장님⁠, 걸레 물 떨어져요⁠.⁠”

“⁠걸레가 문제예요⁠? 넉 달째 적자인 거 제가 원장님보다 먼저 셌어요⁠. 사료 외상값만 이백이에요⁠. 그래서 결혼하는 거예요⁠? 아니죠⁠? 원장님 그 사람 좋아서 하는 거죠⁠?⁠”

새론은 대답 대신 진료대를 소독약으로 닦았다⁠. 조 회장이 손바닥으로 두드린 벽까지 닦았다⁠. 실장은 걸레를 쥐고 새론의 등을 한참 보다가⁠, 약장 꼭대기의 나에게 말했다⁠.

“⁠얘⁠, 먹물아⁠. 너는 알지⁠? 너는 다 듣잖아⁠.⁠”

나는 다 들었다⁠. 대답을 못 할 뿐이었다⁠.

*

입원실 맨 위 칸에서 누룽지가 날을 꼽았다⁠. 고양이는 숫자를 몰라도 달은 센다⁠.

“⁠시월 보름에 하나⁠. 오늘 그믐에 둘⁠. 동짓달 보름에 셋⁠, 그믐에 넷⁠. 섣달 보름에 다섯⁠, 그믐에 여섯⁠.⁠”

누룽지는 거기서 꼬리를 멈췄다⁠.

“⁠정월 대보름에 일곱⁠.⁠”

“⁠이레째 아침⁠.⁠”

“⁠날도 고약하게 잡았다⁠, 영감이⁠.⁠”

나는 누룽지 옆 칸 철창에 등을 대고 앉았다⁠. 대보름 밤부터 이레를 사람으로 나면⁠, 결혼식 날 아침에 나는 털이 없는 채로 깬다⁠. 새론이 하얀 옷을 입고 남의 집 사람이 되는 아침에⁠, 나는 다시는 고양이로 못 돌아온다⁠.

누룽지가 내 귀를 핥았다⁠. 핥고 나서 물었다⁠. 살짝⁠.

“⁠꼬맹이⁠, 무슨 생각하는지 안다⁠. 하지 마⁠.⁠”

*

자정⁠, 소리가 왔다⁠. 두 번째라서 덜 무서웠다⁠. 이번에는 바닥에 엎드려 기다렸다가 사람이 되었다⁠. 냉장고에서는 안 떨어졌다⁠.

아빠 코트는 새론이 옷장에 넣고 잠가 버렸다⁠. 나는 1층 대기실의 분실물 상자를 뒤졌다⁠. 보호자들이 놓고 간 옷이 한가득이었다⁠. 형광 연두색 등산 조끼⁠, 붉은 체크무늬 잠옷 바지⁠, 한 짝은 곰돌이고 한 짝은 줄무늬인 양말⁠, 앞코가 구멍 뚫린 고무 슬리퍼⁠. 바지에 다리를 넣는 데 세 번 실패했다⁠. 처음에는 한 구멍에 두 다리를 다 넣었고⁠, 다음에는 뒤를 앞으로 입었고⁠, 마지막에는 조끼 팔 구멍에 머리를 넣었다⁠. 대기실 유리문에 비친 나는 길 잃은 등산객이었다⁠.

반지하 입원실에서 비명 같은 소리가 났다⁠. 늙은 진돗개였다⁠. 보호자가 석 달 전에 맡기고 전화를 끊은 개⁠. 다리가 뻣뻣해지고 턱이 덜덜 떨렸다⁠. 발작이었다⁠.

“⁠어두워⁠. 어두워⁠. 아무도 없어⁠.⁠”

진돗개의 말이 내 귀에 또렷이 들어왔다⁠. 나는 철창을 열고 들어가 개의 머리를 무릎에 받쳤다⁠. 고양이는 무서운 친구 옆에 몸을 붙이고 목으로 그르렁 소리를 낸다⁠. 나도 그르렁거리려 했다⁠. 사람 목에서는 녹슨 경첩 소리가 났다⁠. 진돗개가 눈을 굴려 나를 보았다⁠.

“⁠너 목 고장 났어⁠?⁠”

“⁠응⁠. 오늘만⁠.⁠”

“⁠…웃기네⁠.⁠”

턱 떨림이 조금 느려졌다⁠.

입원실 불이 켜졌다⁠. 마흔 칸이 동시에 떠들었다⁠.

“⁠원장님이다⁠! 숨어⁠, 먹물⁠!⁠”

“⁠숨을 데가 없잖아⁠, 저 덩치에⁠!⁠”

“⁠다음 달에요⁠! 다음 달에요⁠!⁠”

토끼는 또 기절한 척을 했다⁠. 새론이 수액 펌프 경보를 듣고 내려온 것이었다⁠. 잠옷 위에 진료 가운을 걸치고⁠, 손에는 주사기를 들고 있었다⁠. 새론은 철창 안에 앉은 형광 연두색 남자를 보고 주사기를 쥔 손을 가슴 높이로 들었다⁠. 찌를 수 있는 자세였다⁠.

“⁠움직이지 마요⁠.⁠”

“⁠얘가 어둡대요⁠.⁠”

새론의 눈이 개와 나를 오갔다⁠. 진돗개는 내 무릎에서 꼬리를 한 번 쳤다⁠. 이 개는 석 달 동안 새론의 손도 물려고 했다⁠.

새론은 무릎을 꿇고 진돗개의 앞다리 털을 밀어 혈관을 찾았다⁠. 발작을 멎게 하는 주사였다⁠. 주사가 들어가는 동안 새론의 어깨가 내 어깨에 닿았다⁠. 새론에게서 귤 냄새와 잠 냄새가 났다⁠. 진돗개의 다리가 하나씩 풀렸다⁠.

*

새벽 세 시⁠, 진료실 탁자에 컵라면 두 개가 놓였다⁠. 새론이 끓는 물을 부었다⁠. 김이 올라왔다⁠. 나는 김을 보고 의자째 뒤로 물러났다⁠.

“⁠안 먹어요⁠?⁠”

“⁠뜨거워서요⁠.⁠”

“⁠삼 분 기다리면 돼요⁠.⁠”

삼 분이 지났다⁠. 나는 면을 젓가락으로 집으려 했다⁠. 젓가락은 두 개가 서로 다른 쪽으로 도망치는 물건이었다⁠. 결국 숟가락으로 면을 떠서 오 분 동안 불었다⁠. 새론이 라면 국물을 마시다가 웃음을 참지 못하고 기침을 했다⁠. 반지 낀 손으로 입을 막고 웃었다⁠. 아홉 해 동안 이 웃음을 아래에서만 들었다⁠.

나는 국물이 튄 입가를 닦으려고 손등을 핥아 얼굴을 문질렀다⁠. 한 번⁠, 두 번⁠, 귀 뒤까지⁠. 새론이 웃다 말고 나를 빤히 보았다⁠. 사람은 손등을 핥아 세수하지 않는다는 것을 나는 새론의 얼굴을 보고 알았다⁠. 손을 무릎 밑에 깔고 앉았다⁠.

웃음이 그치자 새론의 목소리가 진료할 때의 목소리로 돌아왔다⁠.

“⁠누구예요⁠? 옥상에 있던 사람 맞죠⁠? 왜 우리 병원에 있어요⁠?⁠”

“⁠여기 애들이 좋아서요⁠.⁠”

“⁠밤에⁠, 남의 병원에⁠, 분실물 상자 옷을 입고요⁠? 그 조끼 지난달에 길고양이 주워 온 등산객 아저씨 거예요⁠.⁠”

나는 조끼 단추를 내려다보았다⁠. 하나도 못 잠근 단추였다⁠.

“⁠결혼해요⁠?⁠”

새론의 숟가락이 멈췄다⁠.

“⁠그걸 왜 물어요⁠?⁠”

“⁠반지에서 약 냄새가 나요⁠. 재채기 약⁠.⁠”

새론이 반지를 내려다보았다⁠. 엄지로 반지를 한 바퀴 돌렸다⁠. 대답은 하지 않았다⁠. 창밖 골목에서 첫 배달 오토바이가 지나갔다⁠. 해가 오기까지 두 시간이 남아 있었다⁠.

“⁠이름이 뭐예요⁠?⁠”

“⁠먹물이요⁠.⁠”

새론이 숟가락을 내려놓고 나를 보았다⁠. 그러다 소리 내어 웃었다⁠.

“⁠우리 고양이 이름인데⁠.⁠”

“⁠고양이가 제 이름을 따라 한 거예요⁠.⁠”

“⁠거짓말⁠.⁠”

새론은 웃으며 나를 먹물 씨라고 불렀다⁠. 먹물 씨⁠, 라면 다 불었어요⁠. 나는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 내가 새론에게 한 첫 거짓말은 거짓이 한 마디도 없는 거짓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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