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5,558자)

반지 냄새

집사의 결혼식을 막으러 고양이가 간다 · 연가비

고백부터 하겠다⁠. 새론이 약혼반지를 끼고 온 밤⁠, 나는 반지를 핥았다⁠.

밤 아홉 시⁠, 이층 살림집 현관문이 열리고 새론의 손이 내 코앞으로 내려왔다⁠. 나는 늘 하던 대로 냄새를 맡았다⁠. 소독약⁠, 귤껍질⁠, 진료 장갑의 고무⁠. 여기까지는 아침에 나간 손과 같았다⁠. 약지에서 처음 맡는 냄새가 났다⁠. 차가운 쇠에 남자 향수가 묻어 있었고⁠, 향수 밑에 쓴 알약 냄새가 깔려 있었다⁠. 나는 혀를 내밀어 쇠를 한 번 쓸었다⁠. 맛도 썼다⁠.

“⁠먹물⁠, 그거 먹는 거 아니야⁠.⁠”

새론이 웃으며 손을 거뒀다⁠. 웃는 얼굴인데 눈 밑이 파랬다⁠. 새론 뒤에서 남자가 재채기를 했다⁠. 세 번⁠. 네 번째는 참다가 코로 터졌다⁠.

조우겸이었다⁠. 새론의 약혼자가 된 지 세 시간 된 남자⁠. 넉 달 전부터 일주일에 두 번 이 계단을 올라왔고⁠, 올라올 때마다 현관에서 알약 하나를 삼키고 마스크를 썼다⁠. 오늘도 썼다⁠. 우겸은 마스크 위로 눈을 꿈뻑이며 비닐봉지를 내밀었다⁠. 연어 맛 짜 먹는 간식 열 개 묶음이었다⁠.

“⁠먹물 씨⁠, 우리 화해하자⁠.⁠”

나는 봉지를 앞발로 밀어 신발장 밑으로 떨어뜨렸다⁠. 화해하려면 먼저 싸워야 한다⁠. 우리는 싸운 적이 없었다⁠. 나는 처음부터 우겸이 싫었을 뿐이다⁠.

*

사람 귀에 안 들리는 소리가 고양이 귀에는 들린다⁠. 냉장고 뒤에서 모터가 가늘게 우는 소리⁠, 벽 속 전선이 웅웅대는 소리⁠, 반지하 입원실에서 늙은 진돗개가 꿈을 꾸며 낑낑대는 소리⁠. 그리고 사람들이 작게 말한다고 믿는 말⁠.

새론과 우겸은 식탁에 마주 앉았다⁠. 나는 냉장고 위에 올라가 앞발을 배 밑에 접고 엎드렸다⁠. 텔레비전에서 밤 뉴스가 혼자 떠들었다⁠. 「⁠건설사 공사비 대출 부실 우려 … 정부⁠, 이달 안 대책 발표⁠」 화면 아래로 미국 금리 이야기가 흘러갔다⁠. 우겸이 리모컨을 들어 소리를 줄였다⁠.

“⁠아버지가 날을 받으신대요⁠. 아는 분한테⁠.⁠”

“⁠점 보는 분이요⁠?⁠”

“⁠역술인이요⁠. 아버지는 꼭 그렇게 불러 달래요⁠.⁠”

새론이 반지를 돌렸다⁠. 손가락에 아직 안 맞아서 반 바퀴씩 헛돌았다⁠.

“⁠우겸 씨⁠. 병원 얘기는 결혼 얘기에 안 섞기로 했잖아요⁠.⁠”

“⁠섞여 있잖아요⁠, 이미⁠.⁠”

우겸이 마스크를 턱까지 내렸다⁠. 코끝이 빨갰다⁠. 말을 고르는 동안 손가락으로 식탁 모서리를 두 번 쓸었다⁠. 우겸의 아버지는 대연 개발이라는 회사를 세운 사람이었다⁠. 땅을 사 모아 아파트를 짓는 회사였고⁠, 우겸은 이 회사의 대표이사였다⁠.

“⁠아버님이 병원 건물을 잡히고 은행에서 빌리신 사억⁠, 지난여름에 우리 회사가 은행에서 사 왔어요⁠. 이제 이 건물 담보는 대연이 쥐고 있어요⁠. 아버지 말로는 결혼하면 없던 일로 하신대요⁠. 며느리 집에 빚 받으러 가는 시아버지는 없다고⁠.⁠”

“⁠결혼 안 하면요⁠?⁠”

우겸이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재채기를 했다⁠. 이번 것은 진짜였다⁠. 나는 냉장고 위에서 꼬리를 한 번 내려쳤다⁠. 털이 날렸다⁠. 일부러 그랬다⁠.

“⁠새론 씨⁠, 저 아래 몇 마리예요⁠?⁠”

“⁠마흔⁠. 오늘 하나 들어와서 마흔하나였다가⁠, 하나 보냈어요⁠.⁠”

“⁠보호자 연락 끊긴 애들은요⁠?⁠”

새론의 손가락에서 반지가 멈췄다⁠.

“⁠열여덟⁠.⁠”

“⁠병원 문 닫으면 열여덟은 보호소로 가요⁠. 공고 기간이 열흘이고요⁠. 열흘 지나면⁠…⁠”

“⁠알아요⁠. 제가 수의사예요⁠.⁠”

“⁠그러니까 저도 안 섞고 싶은데⁠, 섞여 있다고요⁠.⁠”

새론이 의자를 밀고 일어나 창가로 갔다⁠. 골목 건너 담벼락에서 현수막이 바람에 배를 불렸다⁠. 「⁠연남 철길 블록 주거 재개발 — 대연 개발이 함께합니다⁠」 새론은 현수막을 안 보려고 유리에 비친 자기 얼굴을 보았다⁠. 진료실에서 나쁜 엑스레이 사진을 들여다볼 때도 새론은 사진 말고 사진에 비친 자기 얼굴을 본다⁠. 아홉 해를 같이 살면 집사의 버릇은 다 안다⁠.

“⁠그래도 저는⁠, 건물 때문에 하는 결혼 아니에요⁠.⁠”

“⁠알아요⁠.⁠”

우겸의 대답이 너무 빨랐다⁠. 나는 귀를 뒤로 눕혔다⁠. 사람은 모르는 것에 대답할 때 빨라진다⁠.

*

자정이 조금 지나서였다⁠. 새론은 잠들었고⁠, 소리가 왔다⁠.

처음에는 냉장고 모터인 줄 알았다⁠. 낮고 길게⁠, 배 속에서 울리는 소리였다⁠. 냉장고 소리는 왼쪽 귀로 들어오는데 이 소리는 정수리로 들어왔다⁠. 창밖에 달이 꽉 차 있었다⁠. 고개를 들자 소리가 달에서 내려오고 있었다⁠.

다음은 몸이었다⁠. 발바닥이 먼저 뜨거워지더니 앞발이 냉장고 위를 짚은 채로 길어졌다⁠. 등뼈가 한 마디씩 늘어나는 동안 나는 소리를 지르려고 했는데⁠, 목에서 나온 것은 야옹이 아니었다⁠. “⁠아⁠.⁠” 내 목에서 사람 소리가 났다⁠. 꼬리를 흔들려고 했다⁠. 흔들 꼬리가 없어서 엉덩이만 바보같이 실룩였다⁠.

냉장고 위는 사람 하나를 얹을 만큼 넓지 않았다⁠. 나는 빨래 바구니 위로 떨어졌고⁠, 새론의 수술복과 양말이 나를 덮었다⁠.

한참 누워 있었다⁠. 늘 보던 천장인데 거리가 달랐다⁠. 손을 들어 보았다⁠. 털 없는 손가락 다섯 개가 달려 있었다⁠. 핥아 보니 짰다⁠. 발톱을 꺼내려고 힘을 주었더니 손가락 끝만 하얘졌다⁠.

추웠다⁠. 털이 없으면 이렇게 추운 줄 몰랐다⁠. 현관 옷걸이에 새론 아버지의 낡은 모직 코트가 있었다⁠. 원장님이 돌아가시고 두 해가 지났는데 새론은 코트를 옷걸이에서 내리지 않았다⁠. 나는 코트를 끌어 내려 몸에 감았다⁠. 단추는 못 잠갔다⁠. 단추는 구멍에 들어가기 싫어하는 물건이었다⁠. 앞섶을 두 손으로 여미고 살림집 안쪽 계단으로 내려갔다⁠. 두 발로 내려가는 계단은 네 발로 내려가는 계단보다 두 배는 무서웠다⁠.

*

반지하 입원실 문을 열자 마흔 칸이 한꺼번에 깼다⁠.

“⁠도둑이야⁠!⁠”

“⁠아니야⁠, 냄새가 먹물이야⁠!⁠”

“⁠먹물이 냉장고만 해졌어⁠!⁠”

깔때기를 쓴 시바가 깔때기째 철창에 머리를 박았다⁠. 회색 앵무새가 날개를 펴고 낮에 들은 사람 말을 아무거나 외웠다⁠. “⁠수납은 다음 달에요⁠! 다음 달에요⁠!⁠” 토끼는 기절한 척했다⁠. 저 토끼는 무슨 일만 나면 기절한 척을 한다⁠.

맨 위 칸에서 누룽지가 내려다보았다⁠. 열여섯 살 먹은 치즈 고양이⁠. 털이 솥 바닥에 눌은 밥 색이라 원장님이 누룽지라고 불렀다⁠. 누룽지는 하악질을 하려다 말고 코를 벌름거렸다⁠.

“⁠꼬맹이⁠?⁠”

“⁠응⁠.⁠”

내 입에서 사람 말이 나왔는데 누룽지는 알아들었다⁠. 나도 누룽지의 말을 알아들었다⁠. 동물끼리는 종이 달라도 말이 통한다⁠. 사람 귀에는 우리 말이 울음일 뿐이다⁠. 새론은 아홉 해 동안 내 말을 한 번도 못 알아들었다⁠. “⁠배고파⁠”도 “⁠거기 앉지 마⁠”도 “⁠그 남자 싫어⁠”도 새론에게는 다 야옹이었다⁠. 사람이 된 내 귀에는 아직 누룽지의 말이 들렸다⁠.

누룽지는 오래 나를 보다가 철창에 이마를 댔다⁠.

“⁠떡집 검은 고양이 꼴이 났구나⁠.⁠”

“⁠떡집⁠?⁠”

“⁠철길 건너 시장⁠. 내가 새끼였을 때야⁠. 떡집에 검은 수고양이가 살았지⁠. 달이 꽉 찬 밤하고 텅 빈 밤마다 사람이 됐어⁠. 처음엔 하룻밤⁠, 다음엔 이틀 밤⁠. 보름마다 하룻밤씩 늘더라⁠. 이레째 밤을 사람으로 나고 나서는 아침에 털이 안 돌아왔어⁠.⁠”

“⁠그래서⁠?⁠”

“⁠그래서 사람이 됐지⁠. 그러고는 우리를 잊었어⁠. 다시는 골목에 안 왔어⁠.⁠”

누룽지가 꼬리로 철창을 쳤다⁠.

“⁠사람이 되면 우리를 잊는다⁠, 꼬맹이⁠. 다들 그래⁠.⁠”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입원실 창문은 골목 바닥에 붙어 있었다⁠. 창틀 너머로 바퀴 네 개와 검은 차 문이 보였다⁠. 차 안에서 우겸의 목소리가 났다⁠. 사람 귀로는 못 들을 거리였다⁠. 내 귀는 아직 고양이 귀였다⁠.

*

우겸은 운전석에서 휴대전화를 귀에 대고 있었다⁠.

“⁠…새론 씨는 건물 때문에 결혼하는 사람 아니에요⁠, 아버지⁠.⁠”

전화기 너머에서 늙은 남자가 거칠게 웃었다⁠.

“⁠때문이든 덕분이든 날만 잡아⁠. 그 땅 하나가 빠지면 블록이 안 묶여⁠.⁠”

“⁠사람하고 날 잡는 거예요⁠, 아버지⁠. 땅하고 잡는 게 아니라⁠.⁠”

전화가 끊겼다⁠. 우겸은 휴대전화를 조수석에 엎어 놓고 이마를 핸들에 댔다⁠. 나는 코트 앞섶을 여미고 맨발로 골목 돌바닥을 건너가 운전석 창문을 두드렸다⁠. 손가락 마디로 두드리는 법을 몰라서 손바닥으로 문질렀다⁠. 유리에 손바닥 자국이 김으로 남았다⁠.

우겸이 창문을 반만 내렸다⁠.

“⁠…누구세요⁠?⁠”

“⁠새론이랑 결혼하지 마세요⁠.⁠”

우겸이 나를 위아래로 훑었다⁠. 모직 코트⁠, 맨발⁠, 앞섶을 쥔 두 손⁠. 코가 먼저 반응했다⁠. 우겸은 재채기를 세 번 하고 창문을 다시 올리려다 말았다⁠.

“⁠고양이 키우세요⁠?⁠”

“⁠제가⁠… 고양이를 잘 알아요⁠.⁠”

“⁠새론 씨는 아세요⁠?⁠”

“⁠아홉 해요⁠.⁠”

우겸의 눈이 가늘어졌다⁠. 질투하는 눈이 아니었다⁠. 계산하는 눈이었다⁠. 이 남자는 무엇이든 먼저 센다⁠.

“⁠아홉 해 아신 분이면 아시겠네요⁠. 저 아래 열여덟 마리⁠. 이 결혼 깨지면 걔들이 어디로 가는지⁠.⁠”

나는 대답을 찾지 못했다⁠. 고양이는 할 말이 없으면 앞발을 핥는다⁠. 사람 손을 핥을 수는 없어서 그냥 쥐었다⁠.

“⁠저도 좋아서만 하는 결혼은 아니에요⁠. 좋아하는 사람한테 빚 얘기 꺼내 보셨어요⁠? 저는 오늘 했어요⁠. 반지 끼워 주고 삼십 분 뒤에⁠.⁠”

우겸이 창문을 올렸다⁠. 엔진이 돌았고⁠, 차가 골목을 빠져나가는 동안 배기구에서 나온 더운 바람이 내 맨발등에 내려앉았다⁠. 사람 발은 차가웠다⁠. 발바닥에 털이 없는 짐승이 겨울 돌바닥을 어떻게 걷는지⁠, 나는 아홉 해를 살고도 몰랐다⁠.

*

옥상으로 가는 길에 1층 진료실을 지났다⁠. 고양이일 때는 들어가기 싫은 방이었다⁠. 체온계가 엉덩이로 들어오는 방이니까⁠. 사람이 되니 진료실은 그냥 소독약 냄새가 나는 작은 방이었다⁠.

책상 서랍 맨 아래 칸에서 원장님 냄새가 났다⁠. 두 해가 지났는데 아직 났다⁠. 서랍을 당기는 법을 몰라 손톱 없는 손가락으로 틈을 긁다가⁠, 손잡이를 쥐고 잡아당겨야 한다는 것을 세 번 만에 알았다⁠. 서랍 안에 고무관이 늘어진 낡은 청진기가 있었다⁠. 원장님은 저것을 내 가슴에 대고 늘 혼잣말을 했다⁠. “⁠먹물이 심장은 북이네⁠, 북⁠.⁠”

나는 새론이 하던 대로 귀꽂이를 양쪽 귀에 꽂고 쇠 판을 내 가슴에 대 보았다⁠.

쿵⁠, 쿵⁠, 쿵⁠.

너무 컸다⁠. 고양이 심장은 빠르고 가볍게 뛰는데 사람 심장은 무겁게 천천히 뛰었다⁠. 한 번 뛸 때마다 귓속이 울렸다⁠. 나는 놀라서 청진기를 빼고 책상 밑으로 들어가려 했다⁠. 어깨가 걸려서 머리만 들어갔다⁠. 진료실 바닥에 엎드려 엉덩이를 하늘로 쳐든 채⁠, 나는 사람 몸이 책상 밑에 안 들어간다는 것을 배웠다⁠. 아침이 오기 전에 배울 것이 너무 많았다⁠.

청진기는 코트 주머니에 넣었다⁠. 원장님 냄새를 그냥 두고 갈 수가 없었다⁠.

*

해 뜨기 전에 옥상에 올라간 것은 하늘을 한 번 보고 싶어서였다⁠. 사람 눈으로 보는 달은 고양이 눈으로 보는 달보다 노랬다⁠.

옥상 문이 열려 있었다⁠. 물탱크 옆⁠, 원장님이 키우던 고무나무 화분 곁에 새론이 쪼그려 앉아 있었다⁠. 잠옷 위에 패딩을 걸치고 반지 낀 손을 무릎에 얹은 채였다⁠. 반지 밑의 살을 엄지로 자꾸 문질렀다⁠.

새론이 고개를 들었다⁠. 나를 보았다⁠. 나도 새론을 보았다⁠. 아홉 해 동안 날마다 올려다보던 얼굴을 처음으로 내려다보았다⁠. 새론의 정수리에 흰 머리카락이 하나 있었다⁠. 아래에서는 안 보이던 것이었다⁠.

새론이 천천히 일어났다⁠. 휴대전화를 쥔 엄지가 화면 위에서 멈칫거렸다⁠. 새론의 눈이 내 몸에 감긴 코트로 갔다⁠.

“⁠그 코트⁠.⁠”

나는 코트 깃을 턱밑으로 끌어 올렸다⁠.

“⁠우리 아빠 코트예요⁠.⁠”

새론의 목소리는 떨리지 않았다⁠. 진료실에서 이빨을 드러낸 개 앞에 쪼그려 앉을 때 내는 목소리였다⁠. 낮고 고르고⁠, 한 뼘도 물러나지 않는 목소리⁠.

“⁠벗어요⁠.⁠”

나는 앞섶을 더 꽉 쥐었다⁠. 코트 안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1화는 어땠나요?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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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귤까는중2026.10.31· 1화

    반지를 핥았다는 고백으로 시작하는 게 너무 고양이다워요. 쓴 알약 냄새가 계속 걸려요.

    • 연가비작가2026.10.31

      먹물 코는 거짓말을 안 해요. 쓴 알약 냄새를 기억해 두시면 좋습니다.

반지 냄새 · 집사의 결혼식을 막으러 고양이가 간다 · 나오늘 책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