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화(5,426자)

상자 열세 개

십이지에서 빠진 고양이의 도전 · 오달래

원숭이 신령은 웃으면서 상자를 늘어놓았다⁠.

바퀴 전각 뒤편 돌마당이었다⁠. 깨진 자리를 본 지 한 식경도 지나지 않았다⁠. 앞마당에서는 아직 다들 말이 없었는데⁠, 원숭이 신령만 혼자 신이 나 있었다⁠. 원숭이 신령은 사과 상자 열세 개를 돌마당 끝 깃대까지 띄엄띄엄 놓았다⁠. 상자마다 뚜껑이 반쯤 열려 있었다⁠.

“⁠저 깃대에 먼저 손대면 이긴다⁠. 길은 아무 데로나 가도 돼⁠. 상자는 그냥 놓은 거야⁠. 그냥⁠.⁠”

원숭이 신령은 그냥⁠, 이라고 말할 때마다 이를 드러냈다⁠. 연탄은 상자를 보았다⁠. 첫 번째 상자가 바로 앞에 있었다⁠. 뚜껑 틈으로 안이 어둡고 아늑해 보였다⁠. 연탄의 몸이 저절로 상자 쪽으로 기울었다⁠.

“⁠안 들어가⁠.⁠”

연탄은 상자에게 말했다⁠.

쪼롬이 붉은 실이 풀린 꼬리를 들었다⁠. 실을 다시 감지 않은 채였다⁠.

“⁠시작입니다⁠.⁠”

원숭이 신령은 네 발로 뛰다가 두 손으로 뛰다가 재주를 넘으며 깃대로 갔다⁠. 연탄은 첫 번째 상자를 지나쳤다⁠. 지나치다가 돌아왔다⁠. 들어가 앉았다⁠. 상자 안은 연탄의 몸에 꼭 맞았다⁠. 연탄은 상자 안에서 눈을 감았다가 번쩍 떴다⁠.

“⁠아니야⁠!⁠”

연탄은 상자에서 뛰쳐나왔다⁠. 두 번째 상자 앞에서 또 몸이 기울었다⁠. 이번에는 들어가지 않고 상자 둘레를 세 바퀴 돌았다⁠. 마당 가에서 홍염이 소리를 질렀다⁠.

“⁠들어가지 마⁠! 이 몸도 그거 못 참는다⁠!⁠”

원숭이 신령은 깃대 절반쯤에서 배를 잡고 뒹굴고 있었다⁠. 너무 웃어서 앞으로 못 갔다⁠. 연탄은 세 번째 상자 앞에서 멈췄다⁠. 상자를 보았다⁠. 상자 사이를 보았다⁠. 상자는 깃대까지 띄엄띄엄 놓여 있었다⁠. 고양이 한 번 뛰는 거리였다⁠.

연탄은 세 번째 상자에 뛰어들었다⁠. 들어가자마자 뛰어나와 네 번째 상자로 뛰었다⁠. 들어갔다⁠, 나왔다⁠, 다섯 번째⁠. 상자에 들어가는 순간마다 몸이 조금 풀렸고⁠, 풀린 몸으로 다음 상자까지 뛰었다⁠. 상자가 디딤돌이었다⁠. 들어가고 싶은 마음이 다리 힘이었다⁠.

원숭이 신령이 웃음을 멈췄다⁠. 웃음을 멈추고 뛰기 시작했다⁠. 깃대 앞에 놓인 열세 번째 상자를 발로 차서 옆으로 밀었다⁠. 상자가 깃대에서 한 자 떨어졌다⁠. 연탄은 열두 번째 상자에서 뛰었다⁠. 열세 번째 상자로⁠. 상자가 밀린 자리에 착 내려앉으며⁠, 앉은 채로 앞발을 뻗어 깃대를 쳤다⁠.

원숭이 신령의 손이 깃대에 닿은 것은 연탄의 앞발이 깃대에서 떨어지고 나서였다⁠.

“⁠상자 밀면 반칙 아니에요⁠?⁠”

“⁠상자는 그냥 놓은 거라니까⁠. 밀어도 되고 차도 돼⁠. 그래서 너도 탔잖아⁠.⁠”

원숭이 신령은 다시 웃었다⁠. 이번에는 진 사람의 웃음이었다⁠. 여덟 번째 조각이 떨어지자 원숭이 신령이 조각을 공중에서 받아 연탄의 주머니에 넣어 주었다⁠.

“⁠재밌었으니까 네 편⁠.⁠”

“⁠정말요⁠?⁠”

“⁠재밌는 동안만⁠.⁠”

주머니가 여덟 조각의 무게로 연탄의 목을 끌어내렸다⁠. 연탄은 고개를 들 때마다 목에 힘을 줘야 했다⁠.

*

구름 계단 꼭대기에 연탄의 편들이 모여 있었다⁠. 묵돌은 계단 첫 칸 옆에 엎드려 있었고⁠, 홍염은 난간에 엉덩이를 걸치고 앉았고⁠, 토끼 신령은 묵돌의 배 밑에 반쯤 들어가 있었다⁠. 아무도 먼저 말을 꺼내지 않았다⁠. 아까 앞마당에서 들은 말이 아직 다들 목구멍에 남아 있었다⁠.

홍염이 먼저 꼬리를 탁 쳤다⁠.

“⁠흉년이든 뭐든⁠. 이 몸은 졌다⁠. 졌으면 네 편이다⁠. 호랑이는 한 입으로 두말 안 한다⁠.⁠”

“⁠나는⁠.⁠”

토끼 신령이 묵돌의 배 밑에서 귀만 내밀었다⁠.

“⁠나는 모르겠어⁠. 아니⁠, 네 편이야⁠. 아니⁠, 아이들이 먼저 죽었다잖아⁠. 나는 모르겠어⁠.⁠”

토끼 신령의 귀가 접혔다가 펴졌다⁠. 홍염이 토끼를 노려보았다⁠. 토끼는 귀를 도로 접었다⁠. 연탄은 토끼를 탓할 수 없었다⁠. 연탄도 모르기는 마찬가지였다⁠.

묵돌은 오래 씹었다⁠. 다들 묵돌을 기다렸다⁠. 묵돌은 다 씹고 나서 고개를 들어 연탄의 주머니를 보았다⁠.

“⁠무겁나⁠.⁠”

“⁠네⁠.⁠”

“⁠내려놓을 데를⁠. 찾아라⁠.⁠”

묵돌은 한마디만 하고 다시 씹었다⁠. 연탄은 계단을 내려가며 묵돌의 말을 입속으로 되뇌었다⁠. 내려놓을 데⁠. 주머니가 가슴뼈를 한 칸 내려갈 때마다 툭툭 쳤다⁠.

*

장터는 밤인데도 시끄러웠다⁠.

연탄은 사람 모습으로 구름 계단을 내려왔다⁠. 계단은 아침보다 더 비스듬했다⁠. 마지막 몇 칸에서는 난간을 붙잡아야 했다⁠. 장터 바닥에 발이 닿자마자 소리가 들렸다⁠. 하늘 궁에서 있었던 일이 벌써 내려와 있었다⁠. 까치들이 날라 온 말이었다⁠.

“⁠천 년 전에 흉년이 고양이 자리 때문이었대⁠.⁠”

“⁠아이들이 먼저 죽었대⁠.⁠”

두꺼비 떡장수가 가래떡 판을 정리하다가 연탄을 보았다⁠. 연탄은 떡판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할머니는 가래떡을 좋아했다⁠. 화로에 구운 것을⁠.

“⁠한 가래만 주세요⁠.⁠”

두꺼비는 떡판을 덮었다⁠.

“⁠다 팔렸다⁠.⁠”

떡판 덮개 밑으로 가래떡 끝이 비죽 나와 있었다⁠. 연탄은 떡 끝을 보았고⁠, 두꺼비도 연탄이 보는 것을 보았다⁠. 두꺼비는 덮개를 한 번 더 끌어당겼다⁠.

바람구멍의 상자 더미는 그대로였다⁠. 홍염이 고친 상자 셋도 그대로였다⁠. 맨 아래 큰 상자 앞에 할머니가 나와 앉아 있었다⁠. 연탄은 할머니가 상자 밖에 나와 앉은 것을 처음 보았다⁠. 화로를 무릎 위에 끌어안고 있었다⁠. 사람 모습이었다⁠. 머리가 하얗고 허리가 굽었고⁠, 한쪽 눈이 희었다⁠.

“⁠왔냐⁠?⁠”

“⁠네⁠.⁠”

“⁠봤냐⁠?⁠”

연탄은 대답하지 않고 목에서 방울을 들어 올렸다⁠. 장터에 내려온 뒤로 방울은 울지 않았다⁠. 할머니가 방울을 보았다⁠. 흰 눈과 검은 눈으로 같이 보았다⁠.

“⁠한 해 앉았다⁠.⁠”

할머니가 말했다⁠.

“⁠열세 번째 자리에⁠. 한 해⁠. 궁 연못에 엎드려 사람 세상을 내려다봤다⁠. 동짓달에 땅이 녹더라⁠. 개구리가 섣달에 나왔다가 얼어 죽더라⁠. 봄에는 보리밭이 하얗게 말라붙더라⁠. 그러고는 사람들이 산으로 가더라⁠. 풀뿌리 캐러⁠.⁠”

할머니는 화로를 쓰다듬었다⁠. 불이 거의 꺼져 있었다⁠.

“⁠쥐가 사흘 밤낮을 갉았다⁠. 이로⁠. 나는 옆에서 봤다⁠. 말리지 않았다⁠.⁠”

“⁠왜요⁠?⁠”

“⁠말리면 내가 계속 앉아 있어야 하니까⁠.⁠”

할머니가 웃었다⁠. 쇳소리 섞인 웃음이었다⁠.

“⁠조각 하나는 주웠다⁠. 앉았던 자리 무게를 손에 쥐고 있으려고⁠. 방울을 만들었다⁠. 소리가 안 났지⁠. 돌이니까⁠. 네가 처음 걸음마 떼던 날 걸어 줬다⁠. 상자에서 떨어지지 말라고⁠. 무거운 거 하나 달고 있으면 고양이는 덜 떨어진다⁠.⁠”

연탄은 방울을 손에 쥐었다⁠. 따뜻했다⁠. 이백 년 동안 체온이 배어 따뜻한 줄로만 알았다⁠.

“⁠그만둬라⁠.⁠”

할머니가 말했다⁠. 눈을 똑바로 뜨고 있었다⁠.

*

“⁠그만두라고 할 거면⁠, 왜 그 종이 오던 밤에 저 안 깨웠어요⁠?⁠”

연탄이 물었다⁠. 할머니는 대답하지 않고 화로를 들여다보았다⁠. 한참 뒤에 입을 열었다⁠.

“⁠쥐 집 딸이 왔었다⁠. 그 밤에⁠. 네 상자 앞에 한참 서 있다가 갔다⁠. 손에 뭘 들고 왔다가 빈손으로 갔다⁠.⁠”

연탄의 손에서 방울이 미끄러졌다⁠. 끈에 매달려 가슴께에 떨어졌다⁠. 둔한 소리가 한 번 났다⁠.

“⁠알고 있었어요⁠?⁠”

“⁠나는 늙어서 잠이 없다⁠. 너는 젊어서 잠이 많고⁠.⁠”

할머니는 화로를 안고 상자 안으로 들어갔다⁠. 들어가기 전에 말했다⁠.

“⁠천 년 동안 그 애 아비만 미워했다⁠. 그 애는 안 미웠다⁠. 그 애는 상자를 걷어차지 않더라⁠.⁠”

*

쪼롬은 장터 지붕 위에 있었다⁠. 저울 위 지붕⁠, 장터에서 제일 높은 데였다⁠. 연탄은 사람 모습 그대로 기둥을 타고 올라갔다⁠. 쪼롬은 기와 위에 무릎을 세우고 앉아 장터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하늘 궁의 붉은 띠는 벗어서 무릎에 올려놓았다⁠.

연탄은 쪼롬 곁에 앉지 않았다⁠. 지붕 끝에 쪼그려 앉았다⁠.

“⁠네가 넣었어⁠?⁠”

쪼롬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하지 않는 것이 대답이었다⁠.

“⁠아버지 궤짝에서⁠. 사흘 전 밤에⁠.⁠”

“⁠왜⁠?⁠”

“⁠네가 꺼내 보라고⁠.⁠”

“⁠나 이기라고 넣은 거야⁠? 지라고 넣은 거야⁠?⁠”

쪼롬이 고개를 돌려 연탄을 보았다⁠. 귀 끝이 빨갰다⁠. 화가 났을 때의 빨강이었다⁠.

“⁠이기라고 넣었으면 저울을 아버지 고개 보고 읽었겠지⁠.⁠”

“⁠그럼 왜⁠?⁠”

쪼롬은 무릎 위의 붉은 띠를 손가락에 감았다⁠. 감았다가 풀었다⁠.

“⁠아버지가 너무 무거워⁠.⁠”

“⁠뭐⁠?⁠”

“⁠저울에 올라가면 한 섬 반이야⁠. 쥐 한 마리가⁠. 아침마다 재⁠. 천 년째⁠. 나는 어릴 때부터 그게 이상했어⁠.⁠”

쪼롬은 더 말하지 않았다⁠. 연탄은 쪼롬의 손을 보았다⁠. 붉은 띠를 감은 손가락 마디가 하얬다⁠. 소 문 앞에서 저울추를 쥐던 손이었다⁠.

“⁠그게 다야⁠?⁠”

“⁠지금은⁠.⁠”

“⁠너도 다 이기고 말할 거야⁠?⁠”

쪼롬이 피식 웃었다⁠. 웃다가 그쳤다⁠. 쪼롬이 손을 뻗어 연탄의 꿰맨 귀를 톡 건드렸다⁠. 연탄은 움찔하지 않았다⁠. 쪼롬의 손가락이 귀에서 내려와 연탄의 목⁠, 방울 끈에 잠깐 머물렀다⁠. 손가락 끝이 차가웠다⁠.

“⁠심판은 끝까지 볼 거야⁠. 바늘대로⁠.⁠”

“⁠알아⁠.⁠”

“⁠넌 끝까지 갈 거야⁠?⁠”

연탄은 대답하지 않았다⁠. 지붕 아래로 바람구멍이 보였다⁠. 돼지 문과 쥐 문 사이⁠, 담이 끊긴 자리⁠. 상자 더미가 달빛에 하얗게 보였다⁠. 할머니가 천 년 동안 잔 자리였다⁠.

*

자미는 바람구멍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사람 모습이었고⁠, 주판을 들고 있었다⁠. 연탄이 지붕에서 내려오자 자미는 상자 더미를 손으로 가리켰다⁠.

“⁠여기 담을 쌓지요⁠.⁠”

연탄은 걸음을 멈췄다⁠.

“⁠돼지 문과 쥐 문 사이에 담을 쌓고⁠, 문을 하나 다는 겁니다⁠. 장터 열세 번째 문입니다⁠. 바퀴에는 자리를 안 내고⁠, 장터에만 문을 냅니다⁠. 고양이 집안은 상자 말고 방에서 주무시게 됩니다⁠. 바람도 안 새고요⁠.⁠”

자미가 주판알 하나를 튕겼다⁠.

“⁠어른께서 천 년 동안 상자에서 주무셨지요⁠. 마지막 몇백 년이라도 방에서 주무시게 해 드리는 겁니다⁠. 그만두시면요⁠. 여덟 조각은 제가 다시 바퀴에 붙여 놓겠습니다⁠.⁠”

연탄은 상자 더미를 보았다⁠. 맨 아래 큰 상자에서 할머니의 코 고는 소리가 났다⁠. 상자 판자 틈으로 찬바람이 들어가는 소리도 났다⁠. 천 이백 살 고양이의 허리가 굽은 까닭을 연탄은 처음 생각했다⁠.

“⁠문이요⁠.⁠”

“⁠문입니다⁠. 문패도 달지요⁠.⁠”

연탄은 목에 매단 주머니를 손으로 받쳤다⁠. 무거웠다⁠. 자미가 말하는 문은 이 주머니보다 가벼웠다⁠. 가벼운 것을 들면 어깨가 펴질 것이었다⁠. 연탄은 주머니를 받친 손에 힘을 주었다⁠.

“⁠지금 대답해야 돼요⁠?⁠”

“⁠새벽 전까지만요⁠.⁠”

자미의 말이 끝나자마자 닭 울음이 터졌다⁠.

꼬끼오⁠. 한밤중이었다⁠. 장터 사람들이 놀라 문을 열고 내다보았다⁠. 닭 문 지붕 위에 닭 신령이 볏을 세우고 서 있었다⁠. 닭 신령은 울고 나서 스스로 놀란 얼굴로 날개를 퍼덕였다⁠.

“⁠아니⁠, 이건 아니다⁠. 이건 그냥 놀라서 운 거다⁠.⁠”

닭 신령은 헛기침을 하고 다시 볏을 세웠다⁠.

“⁠고양이⁠, 내 겨루기를 알린다⁠. 새벽 겨루기다⁠. 첫 홰보다 먼저 깨어 있으면 이긴다⁠.⁠”

닭이 새벽에 처음 우는 것을 첫 홰라고 했다⁠. 닭 신령은 날개 하나로 하늘 문 아래⁠, 구름 밑을 가리켰다⁠.

“⁠하늘 궁에는 새벽이 없다⁠. 새벽은 사람 세상에서 시작한다⁠. 내 첫 홰는 고창 보리밭 마을 닭장에서 운다⁠. 거기 와서 깨어 있어 봐라⁠. 고양이 집안은 잠이 많다며⁠?⁠”

자미가 연탄을 보았다⁠. 연탄은 자미를 보지 않았다⁠. 구름 밑⁠, 사람 세상 쪽 어둠을 보았다⁠. 연탄의 주머니 속 크레파스 고양이가 구름 아래 어딘가에서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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