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화(5,495자)
천 년 전의 길
십이지에서 빠진 고양이의 도전 · 오달래
섣달 그믐밤에 잠들면 눈썹이 하얗게 센다고 했다.
장터 사람들은 눈썹 핑계로 밤을 새웠다. 하역 마당에 모닥불을 피우고, 두꺼비 떡장수가 가래떡을 구웠고, 너구리 엿장수가 엿판을 돌렸다. 졸다가 걸린 이의 눈썹에는 밀가루를 발랐다. 홍염이 맨 먼저 당했다. 모닥불 옆에서 고개를 떨군 지 숨 몇 번 만에 양쪽 눈썹이 하얘졌다. 홍염은 깨어나서 누가 그랬느냐고 소리쳤고, 토끼 신령이 하얀 손을 등 뒤로 감췄다.
연탄은 쥐 문 앞에 있었다. 짐승 모습이었다. 목에 방울과 주머니가 함께 매달려 있었다. 주머니 안의 열한 조각이 한데 몰려 목을 아래로 끌었다. 서 있기만 해도 앞발에 무게가 실렸다. 연탄은 앞발로 바닥을 몇 번 디뎌 보았다. 이 무게를 지고 달려야 했다.
장터 사람들이 갑자기 조용해졌다. 모닥불 둘레가 아니라 바람구멍 앞이었다. 사람들이 양옆으로 갈라졌다.
할머니가 걸어오고 있었다.
사람 모습이었다. 허리가 굽었고, 한쪽 눈이 희었고, 화로를 안고 있지 않았다. 지팡이도 없이 장터 바닥을 한 걸음씩 걸었다. 천 년 동안 상자 밖으로 나온 적이 없는 고양이가 열두 문 장터를 가로질렀다. 장터 사람들이 숨을 죽이고 길을 텄다. 두꺼비 떡장수가 떡판 앞에서 머뭇거리다가, 구운 가래떡 한 가래를 종이에 싸서 할머니에게 내밀었다. 할머니는 떡을 받았다.
“다 팔렸다더니.”
“한 가래 남았습니다.”
할머니는 떡을 들고 쥐 문 앞까지 왔다. 연탄 곁에 멈췄다. 연탄을 내려다보지 않고 쥐 문을 보았다. 쥐 문 문턱에 자미가 앉아 있었다. 잿빛 작은 쥐 한 마리였다. 할머니와 자미가 서로를 보았다. 천 년 만이었다. 둘 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자미가 먼저 고개를 아주 조금 숙였다. 할머니는 숙이지 않았다. 대신 가래떡을 한 입 베어 물었다.
“천천히 뛰어라.”
할머니가 연탄에게 말했다.
“천 년 전엔 내가 너무 늦었고, 저놈은 너무 빨랐다. 둘 다 잘못 뛰었다.”
*
쪼롬이 출발선 가운데로 나왔다. 짐승 모습이었고, 꼬리에 실 대신 하늘 궁 붉은 띠를 감았다. 저울추는 없었다.
“지키는 쥐 집안이 고른 판입니다. 쥐 문에서 하늘 궁 바퀴 전각 문지방까지. 어느 길로 가도 됩니다. 남의 등에 타면 안 됩니다. 먼저 문지방을 넘는 분이 이깁니다.”
남의 등에 타면 안 된다는 말에 묵돌이 모닥불 옆에서 고개를 숙였다. 자미가 문턱에서 내려와 연탄 옆에 나란히 자리를 잡았다. 자미의 앞발이 장터 바닥에 깊게 눌렸다.
“천 년 전에도 이렇게 나란히 서고 싶었습니다.”
자미가 연탄에게만 들리게 말했다.
“나란히 서면 질 것 같아서 날짜를 바꿨지요.”
“지금은요?”
“지금은 나란히 섰습니다.”
하늘 문 너머에서 종이 울렸다. 자정 전 마지막 종이었다. 쪼롬이 꼬리를 내렸다.
“시작입니다.”
*
자미는 빨랐다. 작은 몸이 장터 바닥에 붙어 미끄러지듯 갔다. 쌀가마 더미 사이로, 떡판 밑으로, 소원 바구니가 쌓인 틈으로. 장터에서 천 년을 산 쥐만 아는 길이었다. 연탄은 장터 한가운데를 곧장 가로질렀다. 주머니가 가슴을 칠 때마다 숨이 하나씩 빠져나갔다. 고양이는 짧게 빨리 뛰는 짐승이었다. 길게 무겁게 뛰는 짐승이 아니었다.
하역 마당에서 둘이 다시 만났다. 구름 계단 첫 칸이었다. 계단은 아침보다 더 기울어 있었다. 오른편이 왼편보다 무릎 높이만큼 낮았다. 열한 조각이 떨어져 나가고 쥐 자리 하나만 무거워, 바퀴가 쥐 자리로 끌려 내려가 있었다. 칸마다 발 디딜 데가 비탈이었다.
연탄은 발톱을 세워 계단을 찍으며 올랐다. 비탈진 칸에서 미끄러질 때마다 주머니가 연탄을 더 아래로 끌었다. 자미는 낮은 쪽 가장자리를 따라 올랐다. 무거운 짐승은 비탈에서 덜 미끄러졌다. 자미가 디딘 칸이 깊게 꺼졌다가 천천히 돌아왔다.
백 칸쯤에서 연탄이 자미를 앞질렀다. 이백 칸쯤에서 연탄의 숨이 턱턱 막혔다. 삼백 칸에서 자미가 다시 앞으로 나갔다. 쥐는 쉬지 않았다.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게, 한 칸에 한 번씩, 천 년 동안 장터를 오간 걸음 그대로 갔다.
궁 문에서 학 문지기가 한쪽 다리로 서서 부리를 비켜 주었다. 자미가 먼저 지나갔고 연탄이 뒤따랐다. 문지방을 넘자 방울이 울었다. 이번에는 멈추지 않고 계속 울었다.
*
연못이 나왔다. 바퀴 전각으로 가는 가장 짧은 길은 연못을 건너는 길이었다. 얼음이 그믐 추위에 다시 얼어 있었다. 자미는 연못가에서 멈추지도 않고 오른쪽으로 꺾었다. 연못을 돌아 구름 다리로 가는 먼 길이었다.
연탄은 연못가에서 한 번 멈췄다. 얼음은 고양이 한 마리의 무게까지만 견딘다. 지금 연탄은 고양이 한 마리에 조각 열하나였다. 연탄은 주머니를 내려다보았다. 벗어서 던지면 가벼웠다. 던진 조각은 얼음 밑으로 가라앉을 것이었다.
연못가 바위 위에 양 신령이 앉아 있었다. 구름처럼 부푼 털이 그믐 바람에 흔들렸다. 양 신령은 앞을 가로막지 않았다. 남의 경주를 막으면 규칙을 어기는 것이었다. 대신 연탄이 얼음 앞에서 멈추자 입을 열었다.
“얼음이 깨지면, 내 해 첫날에 고양이 하나가 연못에 빠져 죽는다.”
양 신령의 목소리가 떨렸다. 떨리면서도 또박또박했다.
“나는 내 해를 그렇게 시작하고 싶지 않다. 돌아가라. 쥐는 돌아갔다.”
“쥐는 무거워서 돌아간 거예요.”
“너도 무겁다. 목에 열한 개를 달았잖아.”
연탄은 양 신령을 보았다. 박치기에서 진 뒤로도 네 편은 안 된다던 양이었다. 편이 안 되는 짐승이 고양이의 목숨을 걱정하고 있었다. 연탄은 고개를 숙여 보였다. 양 신령은 고개를 돌려 버렸다.
연탄은 얼음 위로 올라갔다.
배를 깔지 않았다. 배를 깔면 느렸다. 발끝으로, 무게를 죽이고, 숨을 들이쉬고, 빨리. 발밑에서 얼음이 울었다. 끼익. 발을 뗀 자리마다 금이 갔다. 금이 연탄의 뒤를 쫓아왔다. 쩍, 쩍. 연탄은 뒤를 보지 않았다. 앞만 보고 뛰었다. 박치기하는 양처럼. 연못 한가운데서 얼음 밑으로 노래가 올라왔다. 남쪽 나라의 고양이 해 노래였다. 이번에는 기도가 하나 더 섞여 있었다. 낮고 느린 목소리. 연탄은 목소리의 주인을 알았다. 절기만 맞으면 보리는 알아서 큰다던 목소리였다.
맞은편 기슭에 앞발이 닿는 순간 뒤에서 얼음이 무너졌다. 연탄은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연못에서 바퀴 전각까지는 돌마당 하나였다. 원숭이 신령의 상자가 아직 몇 개 흩어져 있었다. 연탄은 상자를 보지 않았다. 보지 않으려고 애쓸 필요도 없었다. 몸이 상자 쪽으로 기울지 않았다. 처음이었다.
구름 다리 끝에서 자미가 나왔다. 자미는 다리를 천천히 건너왔다. 묵돌처럼. 다리는 출렁이지 않았다. 자미가 연탄보다 열 걸음 앞에 있었다. 둘 다 바퀴 전각을 향해 뛰었다.
*
바퀴 전각에서 소리가 났다.
돌이 돌을 긁는 소리였다. 낮고 길었다. 기둥 열두 개가 같이 울었다. 연탄은 뛰면서 고개를 들었다. 허공의 바퀴가 크게 기울어 있었다. 쥐 자리가 맨 아래로 처져 있었고, 테의 반대편이 하늘을 향해 들려 있었다. 바퀴는 설날 새벽에 섣달에서 정월로 한 자리를 넘어가야 했다. 자정부터 바퀴가 넘어갈 채비를 했고, 기운 바퀴가 몸을 틀 때마다 테가 기둥에 긁혔다.
석수가 다림추 옆에서 소리를 질렀다.
“넘어가오! 바퀴가 넘어가오!”
다림추가 실 끝에서 그네를 탔다. 크게, 더 크게. 실이 기둥 꼭대기에서 끊어질 듯 팽팽했다.
자미가 문지방 한 걸음 앞에 있었다. 앞발 하나만 내밀면 넘는 거리였다. 자미가 멈췄다.
연탄은 자미의 등을 보았다. 작은 쥐가 문지방 앞에서 고개를 들어 바퀴를 보고 있었다. 한 숨, 두 숨. 그러고는 몸을 돌렸다.
자미는 문지방을 넘지 않고 옆으로 뛰었다. 기둥을 탔다. 쥐도 오른다. 기둥을 차고 허공으로 뛰어, 하늘로 들린 테에 매달렸다. 쥐 자리의 맞은편, 말 자리 옆이었다. 자미는 테 위에 네 다리를 쩍 벌리고 배를 붙였다. 발톱을 돌 틈에 박았다. 작은 몸이 테 위에서 납작해졌다. 처음 해 보는 몸짓이 아니었다.
바퀴의 들린 테가 아주 조금 내려왔다. 긁는 소리가 잦아들었다. 다림추의 그네가 작아졌다. 작은 쥐 한 마리의 무게가 바퀴의 반대편을 누르고 있었다. 한 섬 반이었다.
연탄은 문지방 앞에서 멈췄다. 숨이 가빠 말이 나오지 않았다. 자미가 테 위에서 연탄을 내려다보았다. 돌 틈에 박힌 자미의 앞발 끝이 떨렸다.
“넘으시지요.”
자미가 말했다.
연탄은 넘지 않았다. 넘으면 이겼다. 이긴 연탄에게는 열두 번째 조각이 떨어질 것이었다. 쥐 자리에서. 쥐 자리가 가벼워지면, 바퀴가 어떻게 될지 연탄은 몰랐다. 반대편에 자미가 매달려 있었다.
“넘어!”
전각 기둥 밑에서 쪼롬이 소리쳤다. 심판의 존댓말이 아니었다.
“아버지 자리만 남아서 기운 거야! 열한 자리는 다 한 조각씩 가벼워졌는데 쥐 자리만 그대로라서! 열두 조각이 다 나와야 바퀴가 고르게 서! 저울지기가 읽은 거야, 넘어!”
연탄은 쪼롬을 보았다. 쪼롬의 꼬리에서 붉은 띠가 흔들렸다. 저울추도 없는 앞치마 대신 띠 하나만 감은 꼬리였다.
연탄은 문지방을 넘었다.
*
쪼롬이 꼬리를 들었다. 목소리가 다시 심판의 것으로 돌아와 있었다. 조금 떨렸다.
“고양이 집안이 먼저 문지방을 넘었습니다.”
장터에서 따라 올라온 사람들이 전각 둘레로 몰려들었다. 묵돌, 홍염, 토끼 신령, 원숭이 신령, 개 신령, 말 신령. 양 신령과 닭 신령도 있었다. 다들 바퀴를 올려다보았다. 들린 바퀴 테 위에 쥐 한 마리가 납작하게 엎드려 있었다. 반대편 아래, 비단이 벗겨진 구덩이는 비어 있었다. 반들반들한 바닥이 쥐 한 마리 엎드린 모양으로 닳아 있었다.
“아버지는 천 년 동안 윤달마다 저기 있었어요.”
쪼롬이 빈 구덩이를 가리키며 말했다. 띠 신령들에게 하는 말이었다.
“윤달이 들면 바퀴는 자리 없이 한 달을 돌아요. 깨진 틈이 한 달 내내 흔들려요. 아버지가 와서 몸으로 눌렀어요. 한 달 내내. 그래서 윤달 끝나는 날 새벽에 무릎이 다 까져서 왔어요. 그래서 무거워요. 쥐 한 마리가 한 섬 반이나 나가요.”
석수가 등딱지 밖으로 고개를 다 내밀었다.
“맞소. 깨진 틈은 윤달마다 흔들렸소. 바퀴가 넘어갈 뻔한 걸 쥐 영감이 와서 막았소. 처음 몇 해는 이로 테를 물고 버텼소. 나한테 입을 다물어 달라고 하더이다. 천 년을 다물었소.”
홍염의 하얀 눈썹이 꿈틀했다. 말 신령이 처음으로 아무 소문도 보태지 않았다. 양 신령은 바퀴 테의 쥐를 오래 올려다보다가 고개를 떨궜다. 늙은 고양이 한 마리가 전각 기둥에 기대 앉아 있었다. 짐승 모습으로 구름 계단을 다 올라온 할머니였다. 할머니의 흰 눈과 검은 눈이 함께 빈 구덩이를 보았다. 쥐 모양으로 닳은 바닥을.
테 위에서 자미가 고개를 들었다. 앞발 끝에서 피가 배어 나와 돌 틈을 적셨다.
“아직 열두 번째 조각을 안 드렸습니다.”
자미의 목소리는 여전히 크지 않았다.
석수가 앞발에 쇠정과 망치를 쥐었다. 등딱지를 끌고 바퀴 밑으로 걸어왔다. 다림추가 아직 작게 흔들리고 있었다. 석수가 정을 들었다. 정 끝이 열두 자리를 한 바퀴 돌고, 돼지 자리와 쥐 자리 사이의 빈 구덩이에서 한 번 멈췄다가, 연탄에게 왔다.
“규칙대로라면, 조각이 열둘이 되면 열세 번째 자리를 파야 하오.”
석수가 연탄을 내려다보았다.
“어디에 파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