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화(5,446자)

보리밟기

십이지에서 빠진 고양이의 도전 · 오달래

연탄은 사람 모습으로 사립문을 두드렸다⁠.

문을 연 며느리는 처음 보는 젊은 사내를 위아래로 훑었다⁠. 사내는 까만 털모자를 쓰고⁠, 목에 붉은 끈 주머니를 걸고 있었다⁠. 모자 밑으로 꿰맨 귀 한쪽이 비죽 나와 있었다⁠. 연탄은 모자를 눌러썼다⁠.

“⁠지나가다가요⁠. 밭에 서리가 앉아서⁠.⁠”

며느리는 대답하지 않고 밭을 보았다⁠. 연탄도 보았다⁠. 아침 해가 서리를 녹이기 시작했고⁠, 녹은 자리마다 들뜬 흙덩이가 드러났다⁠. 보리 싹들이 흙덩이에 매달려 기울어 있었다⁠. 며느리가 배를 받치며 말했다⁠.

“⁠아버님이 그랬어요⁠. 서릿발 서면 밟아야 된대요⁠. 발로 꾹꾹⁠. 뿌리가 땅에 다시 붙으라고⁠. 해 나서 흙 마르기 전에⁠.⁠”

서릿발에 들뜬 보리를 발로 밟아 뿌리를 흙에 도로 붙이는 일⁠, 보리밟기였다⁠. 며느리는 자기 부른 배를 내려다보았다⁠. 밭 한 뙈기를 다 밟을 수 있는 몸이 아니었다⁠. 연탄이 밭으로 걸어 들어갔다⁠.

“⁠제가 밟을게요⁠.⁠”

연탄은 첫 고랑에 발을 올렸다⁠. 꾹 밟았다⁠. 발을 떼고 내려다보았다⁠. 흙덩이가 그대로 떠 있었다⁠. 보리 싹도 그대로 기울어 있었다⁠. 연탄은 다시 밟았다⁠. 힘을 주었다⁠. 흙덩이가 아주 조금 내려앉았다가 발을 떼자 도로 올라왔다⁠.

고양이는 가볍다⁠. 사람 모습이 되어도 뼈가 가벼웠다⁠. 담장 위를 걷고 살얼음을 건너던 몸이 보리밭에서는 아무 쓸모가 없었다⁠. 연탄은 제자리에서 뛰어올랐다가 두 발로 쾅 내려앉았다⁠. 흙이 튀고 흙덩이 하나가 겨우 내려앉았다⁠. 다음 걸음에도 뛰고 다음다음 걸음에도 뛰었다⁠. 쾅⁠, 또 쾅⁠.

사립문 앞에서 웃음소리가 났다⁠. 며느리였다⁠. 어젯밤 이후 처음 듣는 웃음이었다⁠. 며느리는 웃다가 입을 가리고⁠, 가리다가 또 웃었다⁠.

“⁠토끼 같아요⁠. 그렇게 뛰면 해 질 때까지 한 고랑도 못 해요⁠.⁠”

연탄은 뛰다가 멈췄다⁠. 숨이 찼다⁠. 고랑 끝이 아득했다⁠.

*

밭둑 너머에서 큰 사내가 걸어왔다⁠.

어깨가 문짝만 했고⁠, 걸음이 느렸다⁠. 밭에 들어서자마자 발이 흙 속으로 깊게 들어갔다⁠. 사내가 발을 떼자 떠 있던 흙덩이가 납작하게 눌려 있었다⁠. 보리 싹 뿌리가 흙 속에 꼭 박혀 있었다⁠. 사람 모습의 묵돌이었다⁠. 묵돌은 고랑을 따라 한 걸음씩 걸었다⁠. 한 걸음에 숨 한 번⁠. 묵돌이 지나간 자리마다 보리가 똑바로 고개를 들었다⁠.

뒤에서 줄무늬 두건이 투덜거리며 따라왔다⁠.

“⁠이 몸이 흙을 밟아⁠? 신발 버리게⁠?⁠”

홍염은 투덜거리면서도 밭에 들어와 옆 고랑을 밟았다⁠. 밟을 때마다 발을 들어 흙 묻은 신발 바닥을 들여다보고 얼굴을 찡그렸다⁠. 그러고는 더 세게 밟았다⁠. 호랑이는 화가 나면 발에 힘이 들어갔다⁠. 홍염의 고랑은 묵돌의 고랑보다 빨리 눌렸다⁠.

맨 끝으로 하얀 저고리를 입은 여자가 왔다⁠. 토끼 신령이었다⁠. 토끼 신령은 밭둑에서 한참을 망설였다⁠.

“⁠나도 해⁠? 아니⁠, 해야지⁠. 아니⁠, 내가 하면 더 망가지면 어떡해⁠?⁠”

“⁠발 구르세요⁠.⁠”

연탄이 말했다⁠. 토끼 신령의 귀가 털모자 속에서 쫑긋 솟았다⁠.

“⁠겁날 때 하는 거 있잖아요⁠. 얼음 깼던 거⁠.⁠”

토끼 신령은 연탄을 보았다가 밭을 보았다가⁠, 눈을 질끈 감고 두 발로 흙을 쾅쾅 굴렀다⁠. 흙덩이 서너 개가 한꺼번에 눌렸다⁠. 토끼 신령이 눈을 떴다⁠. 눌린 보리를 보고 또 굴렀다⁠. 쾅쾅⁠. 또 쾅쾅⁠. 토끼 신령은 굴리면서 웃었다⁠. 하늘 궁 연못을 깨뜨린 발이 보리를 땅에 붙이고 있었다⁠.

며느리가 사립문 앞에서 입을 벌리고 서 있었다⁠. 처음 보는 사내 셋과 여자 하나가 남의 밭을 밟고 있었다⁠. 며느리는 한참을 보다가 부엌으로 들어가 식혜 한 주전자와 그릇 다섯 개를 들고 나왔다⁠.

연탄은 이제 뛰지 않았다⁠. 묵돌의 뒤를 따라 걸었다⁠. 묵돌이 밟은 발자국 안에 제 발을 넣었다⁠. 묵돌의 무게가 흙을 누르고⁠, 연탄의 가벼운 발이 덜 눌린 귀퉁이를 마저 눌렀다⁠. 무거운 발 하나와 가벼운 발 하나가 한 고랑을 같이 갔다⁠.

*

한낮에 며느리가 밭둑에 식혜를 내려놓았다⁠. 다들 둑에 걸터앉았다⁠. 홍염은 식혜를 한 그릇에 비우고 그릇을 내밀었다⁠. 묵돌은 한 모금을 오래 씹었다⁠. 식혜를 씹는 소를 며느리는 신기한 얼굴로 보았다⁠.

부엌 창턱에서 라디오가 또 떠들었다⁠.

“⁠어젯밤 전국에 갑작스러운 된서리가 내려 보리와 마늘 피해가 잇따르고 있습니다⁠. 남부 지방에서는 일찍 핀 매화와 개나리가 얼어⁠…⁠”

며느리가 라디오 소리를 등지고 연탄 곁에 앉았다⁠. 연탄의 그릇에 식혜를 더 따랐다⁠.

“⁠혹시 오면서 회색 줄무늬 고양이 못 봤어요⁠? 우리 집에 자주 오는 고양이⁠. 어젯밤부터 안 보여요⁠.⁠”

연탄은 그릇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식혜 위에 밥알 몇 개가 떠서 돌았다⁠.

“⁠못 봤어요⁠.⁠”

“⁠어젯밤에 아버님 쓰러졌을 때 헛간에 있었어요⁠. 내가 울어 달라고 했는데⁠, 안 울었어요⁠. 고양이니까 그렇지⁠, 알아요⁠. 고양이가 뭘 알아요⁠.⁠”

며느리는 자기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끄덕이다 말고 덧붙였다⁠.

“⁠그래도 화났어요⁠. 그런데 오면 밥은 줄 거예요⁠. 멸치도⁠.⁠”

연탄은 식혜를 마셨다⁠. 단맛이 목을 잘 넘어가지 않았다⁠. 며느리는 배를 쓸면서 밭을 보았다⁠.

“⁠아버님이 병원에서 그래요⁠. 양띠는 순하대요⁠. 순한 애 낳으래요⁠. 고양이띠 아니어도 괜찮대요⁠. 손가락 붕대 감고 그 얘기만 해요⁠.⁠”

*

해가 높이 올랐을 때 밭머리에 자미가 와 있었다⁠.

잿빛 외투에 동그란 안경이었다⁠. 외투 어깨의 서리는 다 녹아 젖은 자국만 남아 있었다⁠. 자미는 밭에 들어오지 않고 밭머리 둑에 서서 보리를 내려다보았다⁠. 연탄은 고랑 끝에서 걸음을 멈췄다⁠. 흙 묻은 발로 둑까지 걸어갔다⁠.

“⁠읍내 병원에 다녀왔습니다⁠.⁠”

자미가 먼저 말했다⁠.

“⁠늙은이는 살았습니다⁠. 왼손 손가락 두 개를 다시 못 굽힐 수도 있답니다⁠. 오른손은 괜찮고요⁠. 낫은 오른손으로 쥐니까 내년에도 보리는 벨 겁니다⁠.⁠”

연탄은 흙 묻은 손을 바지에 닦았다⁠. 닦아도 손바닥이 깨끗해지지 않았다⁠.

“⁠왜 할머니를 속였어요⁠?⁠”

자미가 안경을 밀어 올렸다⁠. 주판알을 튕기려는 손가락이 빈손 위에서 한 번 움직였다⁠. 주판은 외투 주머니에 있었다⁠.

“⁠첫 번째가 되고 싶었습니다⁠.⁠”

“⁠그게 다예요⁠?⁠”

“⁠그게 다입니다⁠. 큰 뜻이 있었다고 말씀드리면 듣기에 좋겠지요⁠. 없었습니다⁠. 쥐는 작습니다⁠. 작은 짐승이 열두 띠 맨 앞에 서고 싶었습니다⁠. 소 등에 올라타고⁠, 고양이에게 날짜를 하루 늦게 일렀습니다⁠.⁠”

자미는 밭을 보았다⁠. 묵돌과 홍염과 토끼 신령이 고랑을 따라 움직이고 있었다⁠.

“⁠그래서 깨진 자리를 압니다⁠. 제가 만든 자리니까요⁠. 옥황상제께서 자리를 파게 하신 것도⁠, 그해 사람 세상이 굶은 것도⁠, 시작은 하루 늦은 날짜였습니다⁠.⁠”

연탄은 대답하지 않았다⁠. 할머니의 쇳소리 섞인 웃음을 떠올렸다⁠. 천 년 동안 쥐 아비만 미워했다는 목소리를⁠.

자미가 외투 주머니에서 저울추 두 개를 꺼냈다⁠. 쪼롬의 것이었다⁠. 자미는 저울추를 손바닥에 올려 연탄에게 보였다⁠.

“⁠오늘 밤이 그믐입니다⁠. 남은 판은 저 하나입니다⁠. 지금 그만두시면 바람구멍에 문을 달아 드리고⁠, 이 저울추를 쪼롬에게 돌려주겠습니다⁠. 쥐 문도 다시 열어 주지요⁠. 열한 조각은 제가 하나씩 바퀴에 도로 붙이겠습니다⁠. 오늘 밤 안에 붙이면 설날 아침 바퀴는 바로 섭니다⁠.⁠”

자미의 손바닥 위에서 저울추가 햇빛을 받았다⁠. 쪼롬이 저울 옆에서 바늘을 읽던 아침이 저울추 안에 다 들어 있었다⁠.

“⁠쪼롬이 내보낸 거⁠, 나 때문이에요⁠?⁠”

“⁠바늘을 읽는 아이가 바늘대로 읽었습니다⁠. 제가 그렇게 가르쳤지요⁠. 그러니 제 탓입니다⁠.⁠”

자미는 저울추를 거두지 않았다⁠. 연탄은 저울추를 보았다⁠. 밭을 보았다⁠. 묵돌의 발자국 안에 연탄의 발자국이 겹쳐 있었다⁠.

“⁠자리는 낼 거예요⁠.⁠”

연탄이 말했다⁠.

“⁠어디에 낼지는 이기고 나서 정해요⁠.⁠”

자미의 손가락이 저울추 위에서 멈췄다⁠.

“⁠규칙에 어디라는 말은 없습니다⁠. 석수 어른은 열두 자리 사이에 팝니다⁠. 천 년 전에도 그랬지요⁠.⁠”

“⁠규칙은 아저씨가 썼잖아요⁠. 어디라는 말 안 쓴 것도 아저씨고⁠.⁠”

자미는 오래 연탄을 보았다⁠. 그러고는 저울추를 도로 외투 주머니에 넣었다⁠. 넣으면서 아주 작게 웃었다⁠. 연탄은 자미가 웃는 것을 처음 보았다⁠. 계산을 잘못한 줄 알았던 장사꾼이 주판을 다시 놓아 보고 웃는 얼굴이었다⁠.

“⁠오늘 밤 자정입니다⁠.⁠”

*

해 질 녘에 밭이 끝났다⁠.

고랑마다 보리가 흙에 붙어 있었다⁠. 아침에 기울어 있던 싹들이 똑바로 서서 저녁 해를 받았다⁠. 묵돌은 밭둑에 엎드렸다⁠. 사람 모습으로 엎드려도 둑이 낮아 보였다⁠. 홍염은 신발을 벗어 거꾸로 들고 흙을 털었다⁠. 토끼 신령은 식혜 그릇을 핥고 있었다⁠. 며느리가 그릇을 하나씩 거두며 고개를 숙였다⁠. 누구에게 인사를 하는지 몰라 다섯 번을 숙였다⁠.

쪼롬은 헛간 지붕에 앉아 있었다⁠. 연탄은 지붕으로 올라갔다⁠. 사람 모습으로 처마를 잡고 몸을 끌어 올렸다⁠. 쪼롬 곁에 앉았다⁠. 이번에는 지붕 끝에 앉지 않았다⁠.

“⁠눈 안 뜬 거⁠. 잘못했어⁠.⁠”

“⁠잘못했다고 하면 보리가 일어나⁠?⁠”

“⁠일어났잖아⁠. 밟아서⁠.⁠”

쪼롬이 연탄을 보았다⁠. 귀 끝이 빨갰는데 화난 빨강이 아니었다⁠. 쪼롬이 밭을 내려다보며 무릎을 끌어안았다⁠.

“⁠아버지는 윤달마다 집에 없었어⁠.⁠”

연탄은 말 신령의 수다를 떠올렸다⁠. 장가가는 줄 알았다던⁠.

“⁠한 달 내내⁠. 아무 말도 없이 나갔다가 윤달 끝나는 날 새벽에 와⁠. 올 때마다 무릎이 다 까져 있었어⁠. 앞발도⁠. 저울에 올라가면 한 섬 반이던 게 두 섬이 돼 있었어⁠. 쥐 한 마리가 한 달 만에 반 섬이 무거워져서 와⁠. 그러고는 다시 서서히 줄어⁠. 한 섬 반까지만⁠.⁠”

“⁠어디 가는데⁠?⁠”

“⁠몰라⁠. 안 물어봤어⁠. 물어보면 아버지가 거짓말할 거 같아서⁠.⁠”

쪼롬이 손을 뻗어 연탄의 손을 잡았다⁠. 차가운 손이었다⁠. 연탄의 손바닥에 흙이 아직 묻어 있었는데 쪼롬은 개의치 않았다⁠.

“⁠궤짝에서 그 종이 꺼낸 날⁠, 생각했어⁠. 열세 번째 자리가 생기면 아버지가 덜 무거워지지 않을까⁠. 왜 그렇게 생각했는지는 몰라⁠. 그냥 바퀴가 무겁고 아버지가 무거우니까⁠.⁠”

연탄은 쪼롬의 손을 마주 쥐었다⁠. 흙 묻은 손과 찬 손이 맞붙자 둘 다 조금 따뜻해졌다⁠. 보리밭에서 젖은 흙 냄새가 올라왔다⁠. 쪼롬이 고개를 기울였다⁠. 연탄도 기울였다⁠. 이마가 먼저 닿았고⁠, 코끝이 닿았고⁠, 숨이 섞였다⁠. 쪼롬의 입술은 차가웠다가 금방 따뜻해졌다⁠. 연탄은 눈을 감았다⁠. 이번에는 감은 줄 알았다⁠.

연탄의 바지 뒤로 꼬리가 튀어나왔다⁠. 놀라면 꼬리부터 나온다⁠. 쪼롬이 입술을 떼고 꼬리를 내려다보았다⁠. 쪼롬의 치마 밑으로도 잿빛 꼬리 하나가 삐져나와 있었다⁠.

둘은 꼬리를 숨기지 않았다⁠.

*

까치가 날아왔다⁠. 해가 산 너머로 넘어간 뒤였다⁠. 까치는 헛간 지붕 끝에 내려앉아 부리에 문 종이를 떨어뜨렸다⁠. 붉은 도장이 찍힌 하늘 궁의 방이었다⁠. 쪼롬이 종이를 펴서 읽었다⁠.

“⁠「⁠그믐 자정⁠, 쥐 집안 겨루기⁠. 쥐가 고른 판은 천 년 전의 길이다⁠. 장터 쥐 문에서 하늘 궁 바퀴 전각 문지방까지⁠, 먼저 넘는 자가 이긴다⁠.⁠」⁠”

까치가 지붕 위에서 꽁지를 흔들며 투덜거렸다⁠.

“⁠오늘이 까치설날이야⁠. 그믐날⁠. 내 날인데 나는 하루 종일 심부름만 하네⁠.⁠”

연탄은 주머니를 손으로 받쳤다⁠. 열한 조각이 안에서 무거웠다⁠. 장터 쥐 문에서 하늘 궁까지⁠. 천 년 전 할머니가 하루 늦게 달려간 길이었다⁠.

10화는 어땠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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