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화(5,314자)

수료로 끝

마흔셋 경단녀, 동기는 스물넷 · 여시결

수요일 새벽 여섯 시 반⁠, 단희는 떡집에 갔다⁠. 가지 않을 이유를 밤새 찾았는데 하나도 찾지 못했다⁠. 춘례는 시루 뚜껑을 열다가 단희의 얼굴을 보고 손을 멈추었다⁠.

“⁠울었어⁠?⁠”

“⁠양파 썰었어요⁠.⁠”

“⁠떡집에 양파가 어딨어⁠.⁠”

“⁠집에서요⁠.⁠”

“⁠새벽 다섯 시에 집에서 양파를 왜 썰어⁠?⁠”

단희는 대답 대신 앞치마를 둘렀다⁠. 춘례는 더 묻지 않고 백설기 판을 넘겼다⁠. 칼이 도마에 닿는 소리가 오늘따라 크게 났다⁠. 시루의 김이 걷힐 때쯤 춘례가 지나가는 말처럼 했다⁠.

“⁠은행 그만둘 때도 그런 얼굴이었어⁠. 창구에서 내 서류 돌려줄 때⁠.⁠”

“⁠기억하세요⁠?⁠”

“⁠기억하지⁠. 자기가 고개를 너무 오래 숙이고 있어서 정수리만 봤어⁠.⁠”

단희는 칼을 쥔 채 웃었다⁠. 웃다가 콧날이 시큰했다⁠.

*

아홉 시⁠, 12층 실장실⁠. 단희는 그림 대본의 열두 번째 장을 엄여란의 책상에 펼쳤다⁠. 노란 포스트잇이 붙은 그대로였다⁠. 실장은 종이를 내려다보고⁠, 단희를 올려다보았다⁠. 놀란 얼굴이 아니었다⁠.

“⁠혜율 님이 보여 줬어요⁠?⁠”

“⁠제가 넘겼어요⁠. 탁자 위에 있었어요⁠.⁠”

“⁠그렇군요⁠.⁠”

실장은 포스트잇을 떼어 손가락 사이에 끼웠다⁠.

“⁠다 같은 출발선이라고 하셨어요⁠. 첫날 교육장에서요⁠.⁠”

“⁠출발선은 같아요⁠. 결승선이 다를 뿐이에요⁠.⁠”

실장의 목소리는 밝지 않았다⁠. 처음으로 낮았다⁠. 실장은 의자를 돌려 통유리 창밖을 보았다⁠. 구로디지털단지의 유리 건물들 사이로 아침 해가 들어와 책상 위 화분 그림자를 길게 늘였다⁠.

“⁠작년에 이사회는 이 트랙을 없애려고 했어요⁠. 정규직 하나 뽑는 데 일억이 든다고⁠, 마흔 넘은 인턴은 위험하다고요⁠. 제가 세 줄로 살렸어요⁠. 정규직 비용 안 든다⁠, 정부 장려금 나온다⁠, 광고에 쓸 수 있다⁠. 수료로 끝난다는 조건을 받지 않았으면 단희 님은 이 건물에 들어오지도 못했어요⁠.⁠”

“⁠그러니까 저는 들어온 걸 고마워해야 해요⁠?⁠”

“⁠아니요⁠. 알기만 하세요⁠.⁠”

실장은 다시 의자를 돌렸다⁠.

“⁠저는 첫아이 낳고 석 달 만에 돌아왔어요⁠. 그때 저한테는 이런 트랙 하나 없었어요⁠. 하원 시간 맞춰 줄 회사도 없었고요⁠. 그래서 만들었어요⁠. 수료증이라도 주는 자리를요⁠. 그것도 없는 것보다는 나아요⁠.⁠”

단희는 실장의 책상을 보았다⁠. 노트북과 화분 하나⁠. 열 해 동안 아이 사진 없는 책상을 단희는 본 적이 없었다⁠.

“⁠사진이 없네요⁠.⁠”

“⁠아이 사진 두면 사람들이 아이 얘기를 해요⁠. 아이 얘기 하는 팀장은 승진 못 해요⁠. 저는 이사가 돼야 해요⁠. 그래야 이 트랙을 이사회에서 지켜요⁠.⁠”

“⁠그 트랙은 저한테는 광고로 끝나는 트랙이에요⁠.⁠”

“⁠알아요⁠.⁠”

“⁠그럼 저를 심사해 주세요⁠. 진짜로요⁠.⁠”

실장은 포스트잇을 휴지통에 넣지 않고 서랍에 넣었다⁠. 그리고 노트북을 열어 화면을 돌렸다⁠. 「⁠신규 기능 해커톤 — 5월 7일 금요일 저녁 일곱 시부터 8일 토요일 저녁 일곱 시까지⁠, 15층 라운지⁠」

“⁠밤새 붙어 앉아 기능 하나를 만들어 내는 대회예요⁠. 일반 인턴은 선택⁠, 다시봄 인턴은 필수⁠. 거기서 일등 하시면 최종 발표에 올려 드릴게요⁠. 이사회에도 그림이 하나 필요해요⁠. 다시봄 인턴이 일반 인턴처럼 밤을 새울 수 있다는 그림이요⁠.⁠”

“⁠5월 8일은 어버이날이에요⁠.⁠”

“⁠알아요⁠.⁠”

“⁠아이들 주말이에요⁠.⁠”

“⁠그것도 알아요⁠.⁠”

실장의 대답은 다시 밝아져 있었다⁠. 단희는 화면 속 날짜를 손가락으로 짚었다⁠. 토요일 저녁 일곱 시⁠. 스물네 시간이었다⁠.

“⁠나올게요⁠.⁠”

“⁠단희 님⁠.⁠”

“⁠일등 하면 최종이죠⁠. 아까 말씀하셨어요⁠.⁠”

실장은 대답하지 않았다⁠. 단희가 문을 닫고 나간 뒤에도 실장은 서랍을 한참 열어 두었다⁠.

*

3층 교육장⁠, 단희는 의자를 민성의 책상에서 가장 먼 창가로 끌어다 놓았다⁠. 민성은 의자 끄는 소리를 들으며 키보드를 쳤다⁠. 둘 사이로 블라인드 빛줄기 세 개가 가로놓였다⁠. 표 선생이 두 사람을 번갈아 보더니 혼잣말을 했다⁠.

“⁠평행선이네⁠. 수학에서 평행선은 안 만나요⁠. 근데 교육장은 수학이 아니잖아⁠.⁠”

열한 시⁠, 길영두가 종이컵 커피 두 잔을 들고 단희의 창가로 왔다⁠. 운동화가 아니라 구두였다⁠. 영두는 커피를 내려놓고 헛기침을 했다⁠.

“⁠킹⁠… 아니⁠, 미안해⁠.⁠”

“⁠이번엔 맞게 쓰셨네요⁠.⁠”

“⁠민성이가 말했어⁠. 그림 대본 봤다며⁠.⁠”

“⁠팀장님은 왜 민성 씨한테만 말했어요⁠?⁠”

영두는 구두코로 바닥을 문질렀다⁠.

“⁠단희 님한테 말하면 그만둘까 봐⁠. 그럼 우리 팀 기능은 누가 해⁠? 떡집 사장님은 단희 님만 본다며⁠.⁠”

“⁠다들 같은 이유네요⁠.⁠”

“⁠어⁠?⁠”

“⁠민성 씨도 그랬어요⁠. 제가 그만둘까 봐 말 안 했대요⁠. 다들 제가 그만둘까 봐 걱정만 하고⁠, 그만두지 않으면 어떻게 될지는 아무도 말을 안 해 줘요⁠.⁠”

영두는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뜨거웠는지 얼굴을 찡그렸다⁠. 단희는 영두의 구두를 보았다⁠.

“⁠팀장님⁠, 해커톤 때 운동화 신고 오세요⁠. 밤새우려면 발이 편해야 해요⁠.⁠”

영두가 돌아간 뒤⁠, 오후 네 시쯤 민성이 의자를 굴려 빛줄기 세 개를 건너왔다⁠. 손에 해커톤 공지를 띄운 휴대전화가 들려 있었다⁠.

“⁠해커톤 저도 나가요⁠. 일반 인턴은 선택이래요⁠.⁠”

“⁠알아요⁠.⁠”

“⁠두 명까지 팀으로 나갈 수 있대요⁠.⁠”

“⁠알아요⁠. 나 혼자 나가요⁠.⁠”

민성은 휴대전화를 내리지 않았다⁠. 화면 속 공지의 「⁠팀 등록 마감 5월 6일⁠」에 엄지가 머물러 있었다⁠. 단희는 모니터를 보며 말했다⁠.

“⁠마감 전까지 민성 씨가 누구랑 나갈지는 민성 씨가 정해요⁠. 나는 정했어요⁠.⁠”

민성은 의자를 굴려 돌아갔다⁠. 이번에는 빛줄기 둘만 건넜다⁠. 하나는 둘 사이에 남았다⁠.

*

목요일 오후 세 시⁠, 단희는 구로역 앞 키즈카페의 문을 열었다⁠. 아이들 비명이 천장에 부딪혀 쏟아졌다⁠. 계산대의 나혜율이 단희를 보고 표정을 굳혔다가⁠, 양말 한 켤레를 내밀었다⁠.

“⁠양말 필수예요⁠. 어른도요⁠.⁠”

단희는 양말을 신고 볼풀장 옆 의자에 앉았다⁠. 혜율은 쉬는 시간까지 이십 분 동안 아이들 신발을 정리했다⁠. 쉬는 시간이 되자 혜율이 종이컵 두 개를 들고 와 옆에 앉았다⁠. 볼풀장에서 공 하나가 날아와 단희의 무릎을 맞혔다⁠.

“⁠각서 때문에 아무 말도 못 해요⁠. 어제 말씀드렸잖아요⁠.⁠”

“⁠말씀 안 하셔도 돼요⁠. 1기 분들은 지금 어디 계세요⁠? 그것만요⁠.⁠”

혜율은 볼풀장의 공을 하나 집어 손바닥에 굴렸다⁠.

“⁠셋이었어요⁠. 한 명은 물류센터 야간조 가셨어요⁠. 한 명은 다시 집에 계시고요⁠. 저는 여기 있고요⁠. 아무도 꼬박 얘기는 안 해요⁠. 다 각서를 썼어요⁠. 모델료가 셋 다 달랐는데 각서는 똑같았어요⁠.⁠”

“⁠제가 다르게 끝나면요⁠?⁠”

혜율이 공을 볼풀장에 던졌다⁠. 공이 아이들 사이로 가라앉았다⁠.

“⁠단희 씨가 다르게 끝나면⁠, 저는 아들한테 뭐라고 해요⁠? 엄마는 그때 왜 못 했느냐고 물으면요⁠?⁠”

단희는 대답하지 못했다⁠. 혜율이 일어나 다시 계산대로 갔다⁠. 단희가 양말을 벗어 돌려주자 혜율은 받지 않았다⁠. 가져가세요⁠, 다음에 아이 데리고 오세요⁠. 단희는 키즈카페 양말을 가방에 넣고 계단으로 내려왔다⁠.

*

금요일 새벽 여섯 시 반⁠, 떡집 계산대 위에 춘례의 휴대전화가 놓였다⁠. 단희가 꼬박페이를 깔고 화면을 한 단계씩 넘겼다⁠. 이름⁠, 가게⁠, 본인인증⁠. 세 번째 화면에서 소득 증빙 대신 새 문장이 떴다⁠. 「⁠최근 석 달 카드 매출을 보여 주시겠어요⁠?⁠」

“⁠눌러요⁠?⁠”

“⁠사장님이 정하세요⁠.⁠”

춘례가 엄지로 눌렀다⁠. 화면이 잠깐 돌더니 석 달 치 매출이 그래프로 내려왔다⁠. 비 오는 날 꺼지고 이튿날 두 배로 솟는 줄⁠. 맨 아래에 작은 글씨가 있었다⁠. 「⁠매출이 끊긴 날⁠: 0일⁠」

춘례는 화면을 한참 보았다⁠.

“⁠이거 석 달만 보는 거야⁠?⁠”

“⁠지금은 석 달이에요⁠.⁠”

“⁠열 해 봐도 0일이야⁠.⁠”

“⁠알아요⁠. 제가 문 앞을 지나다녔잖아요⁠.⁠”

춘례는 휴대전화를 들어 화면을 사진으로 찍었다⁠. 손녀한테 보낸다고 했다⁠. 한도는 손녀 등록금을 넘었다⁠. 춘례는 대출 신청 버튼은 누르지 않고 휴대전화를 앞치마 주머니에 넣었다⁠.

“⁠빌리는 건 내가 정할 때 해⁠. 앱이 정할 때 말고⁠.⁠”

여섯 시 사십 분⁠, 골목 끝에서 민성이 뛰어왔다⁠. 편의점 조끼를 벗어 손에 든 채였다⁠. 밤 열 시부터 여섯 시까지 서고 바로 온 길이었다⁠. 민성은 숨을 몰아쉬며 휴대전화를 내밀었다⁠. 춘례의 영수증 두루마리 두 주 치가 날짜별로 정리되어 있었다⁠.

“⁠어젯밤에 다 했어요⁠. 손님 없을 때요⁠.⁠”

단희는 휴대전화를 받아 화면을 넘겼다⁠. 비 오는 날마다 민성이 작은 우산 표시를 달아 두었다⁠. 단희는 고맙다는 말 대신 백설기 한 조각을 종이에 싸서 민성에게 내밀었다⁠. 춘례가 계산대 끝에서 둘을 번갈아 보았다⁠.

“⁠둘이 싸웠네⁠.⁠”

“⁠아니에요⁠.⁠”

둘이 동시에 말했다⁠. 춘례가 코웃음을 쳤다⁠.

반찬가게 이모가 셔터를 반쯤 올리다 말고 민성을 발견했다⁠. 이모는 셔터를 내버려 두고 휴대전화를 들고 건너왔다⁠.

“⁠총각⁠, 마침 잘 왔다⁠. 우리 딸 사진 봐 봐⁠. 서른둘⁠. 공무원이야⁠.⁠”

“⁠이모님⁠, 저 지금 밤새우고 와서요⁠.⁠”

“⁠그러니까 지금 봐야지⁠. 정신 들면 안 봐⁠.⁠”

민성은 사진을 보는 척하며 단희에게 눈으로 구조를 청했다⁠. 단희는 백설기를 자르며 못 본 척했다⁠. 열한 해 창구에서 가장 많이 한 일이었다⁠. 오늘은 못 본 척이 조금 즐거웠다⁠. 춘례가 칼을 내려놓고 한마디 했다⁠.

“⁠자기 딸 작년에 결혼했잖아⁠.⁠”

“⁠둘째 딸 얘기야⁠. 둘째도 공무원이야⁠.⁠”

반찬가게 이모는 아랑곳하지 않고 사진을 한 장 더 넘겼다⁠.

*

일요일 밤⁠, 개봉동 식탁에서 단희는 경채에게 다 말했다⁠. 그림 대본⁠, 포스트잇⁠, 실장의 세 줄⁠, 해커톤⁠. 경채는 끝까지 듣고 나서 말했다⁠.

“⁠거봐⁠. 처음부터 안 되는 거였잖아⁠. 그만둬⁠.⁠”

“⁠해커톤 가⁠.⁠”

“⁠그 주말에 나 출장이야⁠. 부산⁠. 팀장이 잡았어⁠. 거래처 사장 아들 결혼식까지 끼어 있어⁠.⁠”

“⁠빼⁠.⁠”

“⁠어떻게 빼⁠?⁠”

“⁠열 해 동안 주말에 나 혼자 애 본 날이 몇 번인지 세 봤어⁠?⁠”

“⁠그걸 왜 세⁠?⁠”

“⁠나는 셌어⁠. 해윤이 태어난 해부터⁠. 달력에 동그라미 쳐 가면서⁠.⁠”

경채가 입을 다물었다⁠. 거실 냉장고 문에서 시간표가 냉장고 모터 소리에 맞춰 가늘게 떨렸다⁠. 해윤이 방문을 빼꼼 열었다⁠. 손에 색종이 카네이션 두 송이가 들려 있었다⁠.

“⁠엄마⁠, 이거 할머니 거랑 엄마 거야⁠. 토요일에 줄 거야⁠.⁠”

“⁠토요일에 엄마 회사 가⁠.⁠”

“⁠토요일에도⁠?⁠”

해윤은 카네이션을 내려다보았다⁠. 단희는 대답을 고르다가 해윤의 손에서 한 송이를 받아 들었다⁠.

“⁠엄마 건 지금 받을게⁠. 할머니 건 토요일에 아빠랑 갖다 드려⁠.⁠”

경채가 고개를 들었다⁠. 단희는 카네이션을 손목의 구슬 팔찌 사이에 끼웠다⁠.

“⁠그래도 가⁠. 당신이 출장을 가든 안 가든⁠, 나는 가⁠.⁠”

경채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일어나 냉장고 문의 시간표를 떼어 왔다⁠. 자석 넷이 바닥에 떨어져 굴렀다⁠. 경채는 시간표를 식탁에 펴고 5월 7일과 8일 자리를 오래 내려다보았다⁠. 빨간 선이 부산까지 뻗어 있었고⁠, 노란 선이 15층까지 올라가 있었다⁠. 초록과 파랑은 갈 데가 없었다⁠.

8화는 어땠나요?

댓글 0

로그인하면 댓글을 남길 수 있습니다.

첫 번째 댓글을 남겨 보세요.

수료로 끝 · 마흔셋 경단녀, 동기는 스물넷 · 나오늘 책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