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화(5,315자)

콘티

마흔셋 경단녀, 동기는 스물넷 · 여시결

월요일 새벽⁠, 떡집 시루에서 김이 올라오는 동안 춘례가 물었다⁠.

“⁠찍는다며⁠. 내일⁠.⁠”

“⁠네⁠. 교육장에서요⁠.⁠”

“⁠애 얼굴은 안 나오지⁠?⁠”

“⁠안 나와요⁠. 약속받았어요⁠.⁠”

춘례는 백설기 판을 뒤집어 도마에 탁 내려놓았다⁠. 판에서 떨어진 떡이 하얗게 김을 뿜었다⁠.

“⁠약속은 은행도 했어⁠.⁠”

단희는 대답하지 않고 떡을 잘랐다⁠. 반듯했다⁠. 춘례가 칼질을 곁눈으로 보더니 계산대 위의 달력을 손가락으로 짚었다⁠. 금요일에 동그라미가 있었다⁠. 단희가 새벽마다 온 지 두 주가 되는 날이었다⁠.

“⁠금요일에 그 앱 깔아 줄게⁠. 손녀 등록금 마감이 그다음 주야⁠.⁠”

“⁠사장님⁠, 그거 저한테 처음 말씀하시는 거예요⁠.⁠”

“⁠처음 말하는 거 맞아⁠. 두 주 됐으니까⁠.⁠”

*

월요일 오후⁠, 민성은 촬영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화면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교육장 한구석에 광고 대행사가 보낸 조명 상자가 쌓이자 민성이 처음으로 단희의 책상 쪽으로 의자를 굴려 왔다⁠.

“⁠내일 찍지 마세요⁠.⁠”

“⁠왜요⁠?⁠”

“⁠그냥요⁠. 찍지 마세요⁠.⁠”

“⁠민성 씨도 찍기 싫다고 했잖아요⁠. 실장님이 같이 찍재요⁠.⁠”

“⁠저는 안 찍어요⁠. 사장님도 찍지 마세요⁠.⁠”

“⁠이유를 말해 주면 안 찍을게요⁠.⁠”

민성은 입술을 깨물었다가 의자를 굴려 제자리로 돌아갔다⁠. 단희는 민성의 등을 한참 보았다⁠. 회색 맨투맨 어깨가 굳어 있었다⁠.

월요일 밤⁠, 개봉동 아파트 거실에서 찬결이 소파 위를 뛰었다⁠.

“⁠엄마 테레비 나와⁠?⁠”

“⁠테레비 말고 휴대전화에⁠.⁠”

“⁠그럼 나 휴대전화 계속 봐도 돼⁠?⁠”

해윤은 시큰둥한 척 숙제를 하다가 연필을 내려놓았다⁠.

“⁠엄마 광고 나오면 우리 반 애들 다 볼 거야⁠. 공개수업 때 인턴이 뭐냐고 물었던 애도⁠.⁠”

“⁠그러면 좋아⁠?⁠”

“⁠좀 좋아⁠.⁠”

해윤은 다시 연필을 들었다⁠. 공책 귀퉁이에 사람 하나를 그리고 목에 줄을 그었다⁠. 줄 끝에 네모를 달고 네모 안에 「⁠우리 엄마⁠」라고 썼다⁠.

*

화요일 아침 여덟 시 사십 분⁠, 엘리베이터 화면에 「⁠투자 혹한기⁠, 구로 핀테크 두 곳 감원⁠」이 지나갔다⁠. 3층에 내리자 실장이 교육장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실장은 단희를 상담실로 데려가 서류 한 장을 내밀었다⁠. 맨 위에 「⁠모델 계약서⁠」가 있었다⁠.

“⁠오늘 촬영분은 캠페인 본편으로 써요⁠. 모델료 삼백만 원 드려요⁠. 다른 인턴분들은 몰라요⁠.⁠”

단희는 숫자를 보았다⁠. 삼백만 원이면 경채의 계산기가 말한 마이너스 십만 원을 서른 달 메웠다⁠. 하원 도우미를 한 해 넘게 부를 수 있었다⁠. 단희는 이번에는 서류를 처음부터 끝까지 읽었다⁠. 네 장이었다⁠. 마지막 장에 「⁠계약 기간 2년⁠, 광고 속 인물의 이야기와 다른 사실을 공개하지 않는다⁠」가 있었다⁠.

“⁠이야기와 다른 사실이 뭔데요⁠?⁠”

“⁠그런 일은 없을 거예요⁠. 형식적인 조항이에요⁠.⁠”

“⁠형식적인 조항이면 빼 주세요⁠.⁠”

실장이 웃었다⁠.

“⁠촬영 끝나고 다시 얘기해요⁠. 서명은 그때 하셔도 돼요⁠.⁠”

단희는 서류를 접지 않고 실장에게 돌려주었다⁠. 실장은 서류를 받아 들고 잠시 단희의 손목을 보았다⁠. 오늘은 보호대 위에 팔찌가 없었다⁠. 촬영용으로 가방에 넣어 둔 참이었다⁠.

*

화요일 오후 한 시⁠, 대행사 분장 담당이 단희의 얼굴에 파운데이션을 두드렸다⁠. 스물 몇 살의 분장 담당은 단희를 어머님이라고 불렀다⁠.

“⁠어머님⁠, 손목 보호대는 빼실게요⁠. 그림이 안 예뻐서요⁠.⁠”

“⁠이게 제 손목이에요⁠. 열 해 동안 애 둘 안은 손목이요⁠.⁠”

“⁠그럼 소매로 살짝 덮을게요⁠. 어머님 보조개 너무 예쁘세요⁠. 웃으실 때만 나오죠⁠?⁠”

“⁠요즘은 잘 안 나와요⁠.⁠”

분장 담당은 단희의 볼에 분홍빛을 한 겹 더 얹었다⁠. 거울 속의 얼굴이 열 해 전 창구 시절처럼 화사했다⁠. 단희는 가방에서 구슬 팔찌를 꺼내 보호대 위에 찼다⁠. 분장 담당이 팔찌를 보더니 손뼉을 쳤다⁠. 이거 콘티 첫 장에 있는 거예요⁠.

*

화요일 오후 두 시⁠, 3층 교육장은 촬영장이 되었다⁠. 블라인드는 반쯤 내려 봄 햇빛을 줄무늬로 맞췄고⁠, 흰 책상 하나만 남기고 나머지는 벽으로 밀었다⁠. 광고 감독은 서른 중반의 남자였다⁠. 감독은 광고 장면을 칸칸이 그린 그림 대본⁠, 콘티를 탁자에 펼쳐 놓고 단희에게 손짓했다⁠.

“⁠단희 님⁠, 타이핑하시다가 아이 전화 받으시고 미소 지어 주세요⁠. 따뜻하게⁠.⁠”

“⁠실제로 받으면 미소 안 나와요⁠. 보통 한숨이에요⁠. 열이 났거나 뭘 안 가져갔거나⁠.⁠”

“⁠한숨도 좋아요⁠. 따뜻한 한숨으로⁠.⁠”

조명 기사가 웃음을 참느라 반사판을 떨어뜨릴 뻔했다⁠. 단희는 따뜻한 한숨을 세 번 쉬었다⁠. 감독은 세 번째가 좋다고 했다⁠.

다음은 ‘⁠멘토 팀장⁠’ 장면이었다⁠. 길영두가 오늘을 위해 새로 산 한정판 운동화를 신고 나타났다⁠. 흰 바탕에 금색 줄이 들어간 것이었다⁠. 감독이 모니터를 보더니 고개를 저었다⁠.

“⁠팀장님⁠, 운동화가 너무 튀어요⁠. 시선이 다 발로 가요⁠. 구두 있으세요⁠?⁠”

“⁠이거 추첨으로 산 건데요⁠.⁠”

“⁠그러니까 더 튀죠⁠.⁠”

영두는 구두로 갈아 신고 화면 가장자리로 갔다⁠. 단희의 어깨에 손을 얹고 고개를 끄덕이는 장면이었다⁠. 영두는 고개를 열두 번 끄덕였고⁠, 끄덕이는 내내 한 번도 단희의 눈을 보지 않았다⁠.

‘⁠젊은 동기⁠’ 장면은 찍지 못했다⁠. 민성은 촬영 시작 전에 9층 회의가 있다며 올라가 내려오지 않았다⁠. 실장은 휴대전화로 누군가에게 메시지를 보내고 나서 감독에게 말했다⁠. 동기 컷은 다음 주에 따로 가요⁠.

*

세 시⁠, 교육장 뒷문으로 여자 하나가 들어왔다⁠. 단희 또래였고⁠, 단발머리에 키즈카페 이름이 박힌 앞치마를 가방에 접어 넣고 있었다⁠. 단희는 여자의 얼굴을 알았다⁠. 12층 복도 마지막 액자⁠, 엘리베이터 화면의 작년 광고⁠. 「⁠다시 시작하는 당신을 꼬박이 응원합니다⁠」의 얼굴이었다⁠.

“⁠1기 다시봄 인턴 나혜율 님이세요⁠. 오늘 선배로 한 컷 같이 가 주시기로 했어요⁠.⁠”

실장이 혜율의 등에 손을 얹었다⁠. 혜율은 웃으며 고개를 숙였다⁠. 촬영은 짧았다⁠. 선배가 후배의 노트북 화면을 보고 엄지를 드는 장면이었다⁠. 혜율은 엄지를 정확히 다섯 번 들었다⁠. 작년에 많이 해 본 동작이었다⁠.

쉬는 시간⁠, 단희는 정수기 앞에서 혜율과 나란히 종이컵을 채웠다⁠.

“⁠지금은 어디서 일하세요⁠?⁠”

“⁠구로역 앞 키즈카페요⁠. 주 사흘⁠, 오후에만요⁠. 아이 하원 시간이랑 맞아서요⁠.⁠”

“⁠꼬박은⁠…⁠.⁠”

“⁠수료증 받았어요⁠.⁠”

혜율은 물을 한 모금 마시고 웃었다⁠.

“⁠그게 다예요⁠.⁠”

“⁠정규직 심사는 안 받으셨어요⁠?⁠”

“⁠심사요⁠?⁠”

혜율의 웃음이 조금 늦게 지워졌다⁠.

“⁠아⁠, 이번 기수는 심사를 하는구나⁠.⁠”

단희가 종이컵을 내려놓았다⁠. 정수기에서 물이 한 방울 떨어졌다⁠.

“⁠무슨 말씀이세요⁠?⁠”

“⁠저 말 못 해요⁠. 각서 썼어요⁠. 모델료 받을 때 회사 일은 밖에서 말 안 하겠다고⁠. 아이 학원비가 거기서 나왔어요⁠.⁠”

혜율은 엘리베이터가 있는 복도를 턱으로 가리켰다⁠.

“⁠아들이 엘리베이터 화면에서 제 광고를 봤어요⁠. 친구들한테 엄마가 핀테크 회사 다닌다고 자랑했대요⁠. 아직도 다니는 줄 알아요⁠. 저는 이 건물에 올 때 계단으로 다녀요⁠. 엘리베이터에 제 얼굴이 나와서요⁠.⁠”

혜율은 종이컵을 구겨 쓰레기통에 넣었다⁠. 돌아서면서⁠, 단희에게만 들리게 말했다⁠.

“⁠콘티 보세요⁠. 마지막 장이요⁠.⁠”

*

네 시⁠, 대행사 사람들이 장비를 정리하러 복도로 나간 사이 단희는 촬영 탁자 앞으로 갔다⁠. 그림 대본은 열세 장이었다⁠. 첫 장은 손목이었다⁠. 구슬 팔찌와 「⁠WOM⁠」이 연필로 그려져 있었다⁠. 두 번째 장에서 열한 번째 장까지는 오늘 찍은 장면들이었다⁠. 단희는 열두 번째 장을 넘겼다⁠.

「⁠#12 수료식⁠. 단희⁠, 수료증을 받는다⁠. 박수⁠. 옆에서 일반 트랙 1위 인턴이 남색 정규직 출입증을 받는다⁠.⁠」

연필 그림 속에서 여자는 종이 한 장을 들고 있었고⁠, 옆의 청년은 목에 줄을 걸고 있었다⁠. 청년은 안경을 쓰고 있었다⁠.

「⁠#13 단희⁠, 수료증을 품에 안고 어린이집으로 달려간다⁠. 문이 열리고 아이가 안긴다⁠. (⁠아역 섭외⁠)⁠」

맨 아래에 자막이 적혀 있었다⁠. 「⁠엄마의 두 번째 출근⁠, 여기까지도 충분히 눈부십니다⁠. 꼬박이 응원합니다⁠.⁠」

열두 번째 장 귀퉁이에 노란 포스트잇이 붙어 있었다⁠. 실장의 글씨였다⁠. 「⁠#12 다시봄은 수료까지 — 이사회 조건 그대로⁠. 정규직 컷은 일반 트랙 1위로⁠.⁠」 단희는 포스트잇 귀퉁이를 들어 보았다⁠. 뒷면에 볼펜으로 날짜가 적혀 있었다⁠. 3월 2일⁠. 단희가 찬결의 양말 한 짝을 찾다가 출근한 날이었다⁠.

단희는 그림 대본을 들고 오래 서 있었다⁠. 열세 번째 장의 아이는 얼굴이 없는 동그라미였다⁠. 아역 섭외⁠. 단희가 지킨 것은 아이의 얼굴이었고⁠, 회사가 섭외한 것은 다른 아이의 얼굴이었다⁠. 손목의 스마트워치가 떨었다⁠. 「⁠하원 18⁠:30⁠」 아직 두 시간이 넘게 남아 있었다⁠.

*

여섯 시 십 분⁠, 교육장에는 둘만 남았다⁠. 단희는 경채에게 하원을 부탁하는 메시지를 보내고 휴대전화를 엎었다⁠. 민성이 9층에서 내려와 가방을 챙기다가 단희의 책상 위에 펼쳐진 그림 대본을 보았다⁠. 민성의 손이 가방 지퍼에서 멈추었다⁠.

“⁠알고 있었어요⁠?⁠”

민성은 대답하지 않았다⁠. 블라인드 사이로 저녁 해가 줄무늬로 들어와 그림 대본 위에 누웠다⁠. 열두 번째 장의 안경 쓴 청년 위에 빛줄기 하나가 걸쳐졌다⁠.

“⁠민성 씨⁠, 알고 있었어요⁠?⁠”

“⁠네⁠.⁠”

“⁠언제부터요⁠?⁠”

“⁠1차 심사 날이요⁠. 심사 끝나고 팀장님이 건물 뒤에서 담배 피우다가 말했어요⁠. 다시봄은 수료로 끝난다고⁠. 이사회에서 그렇게 정했다고⁠. 그러니까 너만 잘하면 된다고⁠.⁠”

“⁠그런데 왜 말 안 했어요⁠?⁠”

민성은 가방을 내려놓았다⁠. 한참 있다가 입을 열었다⁠.

“⁠말하면 사장님이 그만두실까 봐요⁠. 그만두시면 현장 시험 저 혼자예요⁠. 떡집 사장님은 사장님만 보세요⁠.⁠”

“⁠그것뿐이에요⁠?⁠”

“⁠아니요⁠.⁠”

민성은 단희를 똑바로 보았다⁠. 검은 뿔테 안경 너머로 눈이 붉었다⁠.

“⁠솔직히 저한테 유리했어요⁠. 사장님은 처음부터 경쟁자가 아니었으니까요⁠. 제 경쟁자는 3조 애 하나였어요⁠.⁠”

민성은 숨을 한 번 고르고 말을 이었다⁠.

“⁠팀장님한테 들은 날 밤에 편의점에서 내내 생각했어요⁠. 말해야 하나⁠. 바코드 찍으면서도 생각했어요⁠. 근데 아침에 사장님이 떡집에서 쌀가루 묻혀서 오시는 거 보니까 말을 못 하겠더라고요⁠. 말하면 그 쌀가루가 다 헛것이 되잖아요⁠.⁠”

“⁠쌀가루는 헛것 아니에요⁠. 사장님이 금요일에 앱 깔아 주신대요⁠.⁠”

단희의 목소리는 차분했다⁠. 민성이 고개를 숙였다⁠.

단희는 손목의 팔찌를 엄지로 굴렸다⁠. 「⁠W⁠」가 손목 안쪽으로 넘어갔다가 돌아왔다⁠.

“⁠가산점 빼 달라고 단체방에 올릴 때도 알았어요⁠?⁠”

“⁠네⁠.⁠”

“⁠나 그때 이등이 됐어요⁠. 어차피 아무것도 아닌 이등이요⁠. 민성 씨는 내 옆에서 그걸 봤고요⁠.⁠”

“⁠네⁠.⁠”

민성은 더 변명하지 않았다⁠. 단희도 더 묻지 않았다⁠. 복도에서 청소 카트 바퀴가 덜컹거리며 지나갔다⁠. 둘 사이의 책상 위에서 그림 대본의 열세 번째 장이 저녁 바람에 한 번 들렸다가 내려앉았다⁠. 얼굴 없는 아이가 수료증을 든 여자에게 달려가고 있었다⁠.

7화는 어땠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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