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5,361자)

남구로시장

마흔셋 경단녀, 동기는 스물넷 · 여시결

월요일 아침⁠, 가람디지털센터 엘리베이터 화면에 단희의 손목이 떴다⁠. 빨강⁠, 노랑⁠, 초록 구슬 팔찌와 「⁠WOM⁠」 손목 사진 아래로 굵은 글씨가 지나갔다⁠. 「⁠공정을 고른 경단녀 — 가산점을 스스로 내려놓은 꼬박 다시봄 인턴⁠」 엘리베이터 안의 낯선 직원들이 화면을 올려다보았다⁠. 단희는 손목을 카디건 소매 안으로 밀어 넣었다⁠.

3층에 내리자 꼬박이가 고친 결과를 올려 두었다⁠. 「⁠본인 요청으로 다시봄 가산점을 뺀 1차 결과예요⁠! 1위 차민성 95점⁠, 2위 금단희 88점⁠.⁠」 이번에도 박수 그림이 붙어 있었다⁠. 민성은 의자에 앉아 단희의 손목 광고를 휴대전화로 보고 있었다⁠.

“⁠이것도 사장님이 이겼네요⁠.⁠”

“⁠나 이등이에요⁠.⁠”

“⁠광고에선 일등이에요⁠.⁠”

민성은 휴대전화를 엎어 두고 키보드를 쳤다⁠. 단희는 대꾸할 말을 찾다가 그만두었다⁠. 점수에서 지고 광고에서 이기는 일은 은행에서도 본 적이 없었다⁠.

열 시⁠, 길영두가 2차 현장 시험을 알렸다⁠. 오늘은 운동화가 형광 초록이었다⁠.

“⁠4조 기능을 실제 가게에서 돌려 볼 거야⁠. 두 주 동안 가게 다섯 곳에서 매출 흐름 심사를 써 보게 하고⁠, 반응을 받아 와⁠. 조로 나가고 점수는 각자 받아⁠. 어디로 갈지는 둘이 정해⁠.⁠”

민성이 먼저 말했다⁠.

“⁠단지 지하 푸드코트요⁠. 사장님들 다 젊고 앱 잘 써요⁠. 다섯 곳 하루면 돼요⁠.⁠”

“⁠푸드코트 사장님들은 세무사가 있어요⁠. 소득 증빙 화면에서 안 나가요⁠. 우리 기능이 필요 없는 분들이에요⁠.⁠”

“⁠그럼 어디요⁠?⁠”

“⁠남구로시장이요⁠.⁠”

영두가 운동화 끝으로 바닥을 톡톡 쳤다⁠.

“⁠시장⁠? 거기 할머니들 앱 깔 줄 알아⁠?⁠”

“⁠제가 깔아 드릴게요⁠. 열한 해 동안 거기서 통장을 만들어 드렸어요⁠.⁠”

*

열한 시⁠, 단희는 12층 실장실 문을 두드리지 않았다⁠. 실장이 먼저 3층으로 내려왔다⁠. 엄여란은 교육장 뒷문에서 단희를 손짓으로 불러내 복도 끝 창가로 갔다⁠. 창밖으로 구로디지털단지의 유리 건물들이 햇빛을 되쏘았다⁠.

“⁠어제 올린 거 반응이 기사보다 좋아요⁠. 공유가 사천 개 넘었어요⁠. 가산점을 스스로 내려놓은 경단녀⁠. 사람들이 이런 걸 기다렸나 봐요⁠.⁠”

“⁠가산점 빼 달라고 한 걸 광고로 쓰셨어요⁠.⁠”

“⁠단희 님이 하신 일이 이 회사에서 제일 좋은 이야기가 됐어요⁠. 나쁜 일은 아니잖아요⁠.⁠”

“⁠제 손목은 제 거예요⁠.⁠”

실장이 휴대전화를 몇 번 넘기더니 화면을 보여 주었다⁠. 입사 첫날 단희가 서명한 서류 묶음이었다⁠. 열네 번째 장에 「⁠사진 및 영상 활용 동의⁠」가 있었고⁠, 맨 아래에 단희의 서명이 있었다⁠.

“⁠열네 장째요⁠. 다들 안 읽고 서명하시더라고요⁠.⁠”

단희는 서명을 오래 보았다⁠. 첫날 아침 아홉 시⁠, 찬결의 양말 한 짝을 찾던 손으로 한 서명이었다⁠.

“⁠열 해 전에 제가 창구에서 고객님들한테 그 열네 장째를 안 읽어 드렸어요⁠. 다들 바쁘셨거든요⁠.⁠”

“⁠그럼 아시겠네요⁠. 서명은 서명이에요⁠.⁠”

“⁠네⁠. 그래서 이번엔 읽을게요⁠. 다음 서류부터는요⁠.⁠”

실장은 웃으며 휴대전화를 넣었다⁠. 웃음 끝에 작은 한숨이 붙어 있었다⁠. 단희가 처음 듣는 실장의 한숨이었다⁠.

*

남구로시장은 구로동 뒷골목에 길게 누운 오래된 재래시장이었다⁠. 화요일 오전 열 시⁠, 아케이드 지붕 아래로 생선 비린내와 참기름 냄새와 튀김 기름 냄새가 한데 엉켜 흘렀다⁠. 시장 입구 모퉁이에 단희가 열한 해를 다닌 동녘은행 남구로지점이 있었다⁠. 지금은 휴대전화 할인 매장이었다⁠. 유리문에 「⁠공짜폰⁠」이라는 글씨가 빨갛게 붙어 있었다⁠. 단희가 서류를 들고 매일 드나들던 문이었다⁠.

“⁠여기 있었어요⁠. 제 창구가 저 할인 매장 계산대 자리였어요⁠.⁠”

민성은 공짜폰 글씨를 한 번 보고 단희를 한 번 보았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시장 안쪽 세 번째 골목 끝에 떡집이 있었다⁠. 간판은 열 해 전 그대로였다⁠. 「⁠춘례네 떡집⁠」 큰 시루에서 김이 올라와 천막 아래를 하얗게 메웠다⁠. 김 너머에서 예순넷의 옥춘례가 백설기를 칼로 자르고 있었다⁠. 단희는 숨을 한 번 고르고 앞으로 나갔다⁠.

“⁠사장님⁠.⁠”

춘례가 고개를 들었다⁠. 칼이 멈추었다⁠. 몇 초 동안 춘례는 단희의 얼굴을 보았다⁠. 동그란 얼굴⁠, 반묶음 머리⁠, 웃으면 생기는 보조개⁠. 단희는 웃지 않고 있었다⁠.

“⁠금 대리⁠?⁠”

“⁠네⁠. 금단희예요⁠.⁠”

“⁠은행 사람이 왜 와⁠. 은행 문 닫은 지가 언젠데⁠.⁠”

“⁠은행 그만뒀어요⁠. 열 해 됐어요⁠. 지금은 꼬박이라는 회사에서 인턴을 해요⁠. 가게 사장님들 대출 앱이요⁠.⁠”

춘례가 칼을 내려놓았다⁠. 칼등이 도마를 탁 쳤다⁠.

“⁠앱⁠? 꼬박페이⁠? 그 하루하루 떼어 가는 거⁠?⁠”

“⁠네⁠.⁠”

“⁠그게 일수지 뭐야⁠. 앱으로 하는 일수꾼⁠.⁠”

“⁠일수랑은 달라요⁠. 이자가⁠…⁠.⁠”

“⁠금 대리⁠.⁠”

춘례가 김 너머로 단희를 똑바로 보았다⁠.

“⁠자기 그만두던 해 겨울에⁠, 내 대출 연장 안 해 줬잖아⁠. 본점 지시래⁠. 나는 그 겨울에 일수 썼어⁠. 하루에 삼만 원씩 떼어 갔어⁠. 설 대목 앞에 쌀은 사야 했으니까⁠.⁠”

단희의 손목에서 스마트워치가 떨었다⁠. 단희는 손목을 등 뒤로 감추었다⁠.

“⁠알아요⁠.⁠”

“⁠알면서 와⁠?⁠”

“⁠알아서 왔어요⁠. 이번엔 다르게 해 보려고요⁠.⁠”

“⁠은행 사람은 다 문 앞에서 그렇게 말해⁠. 돌아가⁠.⁠”

춘례는 다시 칼을 들었다⁠. 백설기가 네모나게 잘려 나갔다⁠.

*

민성은 떡집 맞은편 반찬가게 앞에서 붙잡혀 있었다⁠. 반찬가게 이모가 민성에게 시식용 꽈리고추 멸치볶음을 이쑤시개로 찍어 내밀었고⁠, 옆 건어물 가게 이모가 다가와 민성의 안경을 들여다보았다⁠.

“⁠총각⁠, 몇 살이야⁠?⁠”

“⁠스물넷이요⁠.⁠”

“⁠장가갔어⁠?⁠”

“⁠아니요⁠.⁠”

“⁠우리 딸 서른둘인데⁠, 연상 괜찮아⁠?⁠”

“⁠저 지금 일하는 중이라서요⁠.⁠”

“⁠일하면서 장가가는 거지 장가가고 일하나⁠?⁠”

민성은 이쑤시개를 입에 문 채 단희를 찾았다⁠. 떡집 앞에서 돌아 나오는 단희의 얼굴을 보고 민성은 멸치를 삼켰다⁠. 시장 골목의 라디오에서 뉴스가 흘러나왔다⁠. 「⁠소상공인 대출 연체율이 넉 달째 올라⁠…⁠.⁠」

“⁠문전박대요⁠?⁠”

“⁠문전박대요⁠.⁠”

“⁠다른 가게 가요⁠. 저 이모님은 앱 깔아 주시겠대요⁠. 사위 삼아 주시면⁠.⁠”

단희는 웃지 않고 떡집 천막을 돌아보았다⁠. 시루의 김이 아까보다 낮게 깔려 있었다⁠.

“⁠딴 데는 안 가요⁠. 저기서 시작할 거예요⁠.⁠”

“⁠사장님⁠, 여기 가게만 오십 곳이에요⁠. 다섯 곳만 받으면 돼요⁠.⁠”

“⁠다섯 곳이 다 저 사장님을 봐요⁠. 저 사장님이 안 쓰면 이 골목 아무도 안 써요⁠. 창구에서 그건 배웠어요⁠.⁠”

민성은 반찬가게 이모에게 명함을 건네고 앱을 깔아 드렸다⁠. 이모는 앱 대신 민성의 전화번호를 물었다⁠.

*

수요일 오후 두 시⁠, 단희는 혼자 떡집에 갔다⁠. 춘례는 단희를 보고도 못 본 척했다⁠. 단희는 떡집 앞에 쌓인 빈 떡 상자를 골목 끝 폐지 더미까지 날랐다⁠. 상자는 가벼웠지만 손목이 시큰거렸다⁠. 세 번을 날랐을 때 춘례가 말했다⁠.

“⁠그거 내 일이야⁠.⁠”

“⁠압니다⁠.⁠”

“⁠은행 사람이 상자를 왜 날라⁠?⁠”

“⁠은행 사람 아니에요⁠.⁠”

춘례는 대답 대신 백설기 한 조각을 종이에 싸서 계산대 끝에 놓았다⁠. 단희에게 주는 것인지 손님에게 주는 것인지 알 수 없는 자리였다⁠. 단희는 집지 않았다⁠.

목요일에도 갔다⁠. 춘례는 손녀 이야기를 했다⁠. 단희에게 하는 이야기가 아니라 옆집 방앗간 사장에게 하는 이야기였다⁠. 손녀가 올해 대학에 붙었다고⁠, 등록금이 사백이 넘는다고⁠, 떡을 몇 판을 쪄야 사백이 되느냐고⁠. 단희는 떡 상자를 나르며 들었다⁠. 다 듣고 나서 단희가 말했다⁠.

“⁠사장님 카드 매출은 설 앞 한 달에 몰려요⁠. 그 한 달 매출만 보면 은행은 사장님한테 많이 빌려주고⁠, 여름 매출만 보면 하나도 안 빌려줘요⁠. 꼬박페이는 석 달을 봐요⁠. 끊긴 날이 있는지⁠, 꺼졌다가 언제 다시 오르는지요⁠. 사장님 가게는 한 번도 끊긴 적이 없어요⁠. 열 해 동안요⁠.⁠”

“⁠그걸 어떻게 알아⁠?⁠”

“⁠문이 열려 있었잖아요⁠. 제가 그 앞을 십 년 동안 다녔어요⁠.⁠”

춘례는 칼을 내려놓았다⁠. 이번에는 칼등이 도마를 치지 않았다⁠.

“⁠써 보라고⁠?⁠”

“⁠네⁠.⁠”

“⁠그럼 매일 아침 여섯 시 반에 와⁠. 시루 내릴 때⁠.⁠”

“⁠여섯 시 반이요⁠?⁠”

“⁠은행은 맨날 아홉 시에 문 열었지⁠. 장사꾼은 여섯 시에 시작해⁠. 그 시간에 와서 내 매출 얘기를 들어⁠. 두 주 동안 하루도 안 빠지고 오면 그 앱 깔아 줄게⁠. 하루라도 빠지면 다시는 오지 마⁠.⁠”

옆에서 민성이 휴대전화를 떨어뜨릴 뻔했다⁠.

“⁠여섯 시 반이요⁠? 저 편의점 끝나는 게 여섯 시예요⁠.⁠”

단희가 돌아보았다⁠. 민성은 입을 다물었다⁠. 춘례가 둘을 번갈아 보았다⁠.

“⁠총각은 안 와도 돼⁠. 금 대리만 와⁠.⁠”

“⁠갈게요⁠.⁠”

단희의 대답은 시루의 김보다 빨랐다⁠.

시장을 빠져나오는 길에 단희가 물었다⁠. 편의점이 무슨 말이냐고⁠. 민성은 아케이드 지붕을 올려다보며 걸음을 빨리했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주말에 잠깐 하는 거요⁠.⁠”

“⁠여섯 시에 끝나는 일을 잠깐 해요⁠?⁠”

“⁠사장님⁠, 남의 시간표는 안 보셔도 돼요⁠. 사장님 시간표도 꽉 찼잖아요⁠.⁠”

민성은 버스 정류장까지 한 번도 돌아보지 않았다⁠. 단희는 민성의 회색 맨투맨 소매 끝이 닳아 실밥이 나온 것을 그제야 보았다⁠.

*

목요일 밤 열 시⁠, 개봉동 식탁에서 단희는 냉장고 시간표를 떼어 펼쳤다⁠. 아침 일곱 시 사십 분의 노란 선⁠, 해윤과 찬결의 등원을 빨간 색연필로 덧칠했다⁠.

“⁠아침까지 내가⁠?⁠”

경채가 시간표를 내려다보았다⁠.

“⁠두 주만⁠.⁠”

“⁠나 여덟 시에 회의 있어⁠.⁠”

“⁠여덟 시 회의를 여덟 시 반으로 미뤄⁠.⁠”

“⁠팀장 회의를 내가 어떻게 미뤄⁠?⁠”

“⁠당신 팀장 회의는 못 미루고 내 떡집은 미뤄⁠?⁠”

“⁠당신 떡집은 인턴 과제고⁠.⁠”

“⁠당신 회의는 정규직 과제고⁠?⁠”

경채는 입을 열었다가 닫았다⁠. 단희가 다시 말했다⁠.

“⁠사장님이 하루라도 빠지면 다시는 오지 말래⁠. 열 해 전에 내가 그분 대출 연장을 거절했어⁠. 그분은 그 겨울에 일수를 썼고⁠.⁠”

경채는 시간표를 한참 보았다⁠. 빨간 선이 두 주 동안 아침 일곱 시 사십 분에 걸쳐 있었다⁠.

“⁠두 주⁠. 대신 해윤이 머리는 못 땋아⁠. 묶기만 해⁠.⁠”

“⁠묶는 것도 못 하잖아⁠.⁠”

“⁠배우면 되지⁠.⁠”

자정⁠, 경채는 해윤의 곰 인형을 식탁에 앉혀 놓고 휴대전화로 머리 땋는 영상을 틀었다⁠. 곰 인형의 귀 사이 털을 세 가닥으로 나눴다가 놓쳤다가 다시 나눴다⁠. 단희는 소파에서 곰 인형과 씨름하는 경채를 보다가 잠들었다⁠.

*

금요일 새벽 여섯 시 이십팔 분⁠, 남구로시장 아케이드에는 불이 반만 켜져 있었다⁠. 생선 가게는 얼음을 깔고 있었고⁠, 방앗간에서는 기계 도는 소리가 났다⁠. 떡집 천막 아래로 시루의 김이 피어올랐다⁠. 단희가 숨을 몰아쉬며 떡집 앞에 서자 춘례가 손목시계를 보았다⁠.

“⁠이 분 일찍 왔네⁠.⁠”

“⁠버스가 빨리 왔어요⁠.⁠”

춘례는 대답 대신 걸어 둔 앞치마 하나를 벗겨 단희에게 던졌다⁠. 밀가루와 쌀가루가 하얗게 묻은 앞치마였다⁠.

“⁠왔으면 일해⁠. 매출 얘기는 시루 내리면서 하는 거야⁠.⁠”

단희는 연노랑 카디건 위에 앞치마를 둘렀다⁠. 손목의 구슬 팔찌 위로 쌀가루가 내려앉았다⁠. 춘례가 시루 뚜껑을 열자 뜨거운 김이 둘의 얼굴을 한꺼번에 덮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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