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5,421자)

가산점

마흔셋 경단녀, 동기는 스물넷 · 여시결

12층 복도는 3층보다 조용했다⁠. 바닥에 회색 카펫이 깔려 있어 구두 소리가 먹혔고⁠, 벽에는 꼬박페이 광고 액자가 줄지어 있었다⁠. 마지막 액자 속에서 마흔쯤 된 여자가 노트북 앞에서 웃었다⁠. 「⁠다시 시작하는 당신을 꼬박이 응원합니다⁠」 단희는 액자 앞을 지나 실장실 문을 두드렸다⁠.

엄여란은 통유리 창을 등지고 앉아 있었다⁠. 책상 위에는 노트북과 화분 하나뿐이었다⁠. 사진 액자는 없었다⁠.

“⁠기사 보셨구나⁠. 반응 좋아요⁠. 아침부터 전화가 세 통 왔어요⁠.⁠”

“⁠민성 씨 이름을 넣어 주세요⁠. 그리고 제가 안 한 말은 빼 주세요⁠.⁠”

“⁠어떤 말이요⁠?⁠”

“⁠아이를 키우며 배운 기다림이 숫자 뒤의 사람을 보게 했다⁠. 저 그런 말 안 했어요⁠. 우리 애들은 기다림 같은 거 안 가르쳐요⁠. 기다리라고 하면 울어요⁠.⁠”

실장이 웃었다⁠. 이번에는 진짜로 웃었다⁠.

“⁠기사는 홍보팀이 써요⁠. 기자들은 이름 둘을 안 받아요⁠. 한 사람 이야기여야 읽혀요⁠. 단희 님⁠, 이 기사 덕에 다음 주에 고용노동부에서 장려금 현장 점검을 나와요⁠. 투자사에서도 봤고요⁠. 요즘 같은 때 투자사가 우리 기사를 읽어 준다는 게 어떤 건지⁠…⁠.⁠”

“⁠그럼 민성 씨 이야기를 쓰세요⁠. 기능을 짠 사람은 민성 씨예요⁠.⁠”

“⁠스물넷 개발자 이야기는 아무도 안 읽어요⁠. 매년 몇만 명이에요⁠.⁠”

단희는 가방에서 명함 한 장을 꺼냈다⁠. 목요일 촬영 날 사진가 옆에 있던 기자가 준 것이었다⁠.

“⁠정정 안 해 주시면 제가 기자님한테 전화할게요⁠. 제가 한 말과 안 한 말을 말씀드리고요⁠.⁠”

실장의 웃음이 멈췄다가 다시 붙었다⁠. 손가락이 책상을 두 번 두드렸다⁠.

“⁠회사 블로그에 공동 개발자로 민성 님 이름을 올릴게요⁠. 기사에도 한 줄 덧붙이라고 할게요⁠. 그 문장은 빼고요⁠.⁠”

“⁠감사합니다⁠.⁠”

“⁠대신 말씀드릴 게 있어요⁠.⁠”

실장이 노트북 화면을 돌렸다⁠. 「⁠1차 정규직 심사 — 4월 2일 금요일⁠, 12층 심사장⁠, 개인 발표⁠」

“⁠조 점수는 여기까지예요⁠. 1차부터는 한 사람씩 봐요⁠. 정규직은 조가 아니라 사람을 뽑으니까요⁠.⁠”

단희는 화면의 ‘⁠개인⁠’ 두 글자를 오래 보았다⁠. 이름 하나를 넣어 달라고 올라왔는데⁠, 내려갈 때는 이름 둘이 갈라져 있었다⁠.

*

3층 교육장⁠, 민성은 휴대전화로 회사 블로그를 보고 있었다⁠. 「⁠공동 개발 차민성 인턴⁠」이 기사 맨 아래 작은 글씨로 붙어 있었다⁠.

“⁠고맙다고 해야 돼요⁠?⁠”

“⁠안 해도 돼요⁠.⁠”

“⁠고맙습니다⁠.⁠”

민성은 고맙다고 하면서 의자를 끌어 제자리로 돌아갔다⁠. 지난 두 주 동안 둘의 의자는 한 책상에 붙어 있었다⁠. 꼬박이가 박수 그림과 함께 1차 심사 공지를 올렸고⁠, 교육장 여기저기서 의자 끄는 소리가 났다⁠. 다른 조들도 갈라졌다⁠. 표 선생이 창가에서 혼잣말을 했다⁠.

“⁠수학에서는 이걸 집합이 쪼개진다고 하죠⁠. 교집합은 공집합이 되고⁠.⁠”

“⁠이제 진짜 경쟁이네요⁠.⁠”

민성이 화면을 보며 말했다⁠. 단희는 대답 대신 형광펜 뚜껑을 닫았다⁠.

점심에는 사내 점심 짝 맞추기 앱이 단희를 개발팀장 길영두와 묶었다⁠. 영두는 오늘 운동화가 은색이었다⁠. 회사 앞 국밥집에서 영두는 국물을 한 숟갈 뜨고 말했다⁠.

“⁠오늘 아침에 기사 보고 나 킹받았잖아⁠. 좋은 뜻으로⁠.⁠”

“⁠팀장님⁠, 킹받는다는 건 화났다는 뜻이에요⁠.⁠”

“⁠어⁠?⁠”

“⁠엄청 화났다는 뜻이요⁠.⁠”

영두의 숟가락이 공중에서 멈췄다⁠.

“⁠아⁠, 그래서 아침에 애들이 웃었구나⁠. 내가 단톡방에 ‘⁠다들 킹받는 하루 되세요⁠’ 했거든⁠.⁠”

단희는 깍두기를 씹다가 웃음을 참지 못했다⁠. 영두도 따라 웃다가⁠, 국밥을 휘저으며 지나가듯 말했다⁠.

“⁠근데 단희 님은 심사 걱정 안 해도 되잖아⁠. 다시봄은 따로 보는 거 있지 않나⁠?⁠”

“⁠따로요⁠?⁠”

영두가 기침을 했다⁠. 국물이 잘못 넘어간 기침인지 말이 잘못 나간 기침인지 단희는 알 수 없었다⁠.

“⁠가산점⁠. 가산점 같은 거⁠. 정부 사업 끼면 다 그래⁠.⁠”

*

다음 주 월요일 오전⁠, 고용노동부에서 장려금 현장 점검이 나왔다⁠. 회색 점퍼를 입은 주무관 둘이 교육장 뒷문으로 들어왔고⁠, 실장이 앞장서 안내했다⁠. 실장은 교육장을 한 바퀴 돌더니 자연스럽게 단희의 책상 앞에서 멈추었다⁠.

“⁠이분이 기사에 나온 금단희 님이세요⁠.⁠”

젊은 주무관이 볼펜을 꺼냈다⁠.

“⁠여기 오시고 뭐가 제일 힘드세요⁠?⁠”

“⁠열두 시 반이요⁠.⁠”

“⁠네⁠?⁠”

“⁠어린이집 하원이 열두 시 반이었어요⁠. 첫 주에요⁠. 회의는 한 시였고요⁠.⁠”

주무관이 받아 적다가 볼펜을 멈추었다⁠. 실장이 웃으며 말을 이었다⁠.

“⁠첫 주에 적응 기간이 겹쳤는데 지금은 다 정리되셨어요⁠. 그렇죠⁠, 단희 님⁠?⁠”

“⁠지금은 연장반에 맡겨요⁠. 한 달에 이십만 원 더 내고요⁠.⁠”

나이 든 주무관이 처음으로 고개를 들어 단희를 보았다⁠. 젊은 주무관은 서류의 「⁠현장 적응도⁠」 칸에 무언가를 적었다⁠. 단희가 고개를 내밀어 보니 「⁠우수⁠」였다⁠. 주무관 둘이 나가자 맨 앞자리의 민성이 화면을 보며 혼잣말을 했다⁠.

“⁠열두 시 반이 우수래⁠.⁠”

“⁠정부는 시간을 다르게 읽나 봐요⁠.⁠”

표 선생이 창가에서 거들었다⁠. 교육장 여기저기서 웃음이 터졌다⁠. 실장만 웃지 않고 복도로 주무관들을 배웅하러 나갔다⁠.

*

이튿날부터 개봉동 아파트 화장실이 연습실이 되었다⁠. 단희는 샤워기를 틀어 놓고 거울 앞에서 발표를 했다⁠. 물소리가 있어야 아이들이 깨지 않았다⁠. 경채가 화장실 문 앞에 쪼그려 앉아 휴대전화 초시계를 눌렀다⁠.

“⁠칠 분 십이 초⁠. 이 분 넘었어⁠.⁠”

“⁠어디서 줄여⁠?⁠”

“⁠떡집 얘기⁠. 떡집 얘기만 이 분이야⁠.⁠”

“⁠떡집이 핵심이야⁠.⁠”

“⁠그럼 물세를 줄여⁠. 샤워기 계속 틀어 놨잖아⁠.⁠”

단희가 문을 열고 경채를 내려다보았다⁠. 경채는 초시계를 다시 눌렀다⁠.

“⁠임원 질문 연습도 해야지⁠. 내가 해 줄게⁠.⁠”

경채는 무릎을 펴고 일어나 넥타이를 매는 시늉을 했다⁠. 그리고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아이가 아프면 어떻게 하실 거예요⁠?⁠”

단희는 대답하지 못했다⁠. 샤워기 물이 바닥 타일을 계속 때렸다⁠. 경채가 어깨를 내렸다⁠.

“⁠나도 못 대답해⁠, 그 질문⁠. 우리 팀장한테 들었으면 나도 못 대답했어⁠.⁠”

“⁠당신한테는 아무도 안 물어⁠.⁠”

경채는 대꾸하지 않았다⁠. 대신 샤워기를 잠갔다⁠. 물소리가 그치자 거실 시계 초침 소리가 화장실까지 들렸다⁠.

*

4월 1일 밤 열한 시⁠, 신림동 고시원 3층 끝방에서 민성은 책상 대신 침대에 노트북을 놓고 앉았다⁠. 방에는 책상을 펼 자리가 없었다⁠. 벽 너머에서 옆방 사람이 라면 봉지를 뜯었다⁠. 휴대전화가 떨었다⁠. 「⁠학자금 상환이 두 달 밀렸습니다⁠. 다음 달까지 납부하지 않으면 신용 정보에 등록될 수 있습니다⁠.⁠」

민성은 알림을 지우지 않고 엎어 두었다⁠. 화면에는 떡집 심사를 돌린 결과가 떠 있었다⁠. 숫자를 다시 보다가 손가락이 멈추었다⁠. 장날이 낀 주와 안 낀 주의 매출을 같은 무게로 섞고 있었다⁠. 단희가 식탁에서 공책에 그었던 줄이 생각났다⁠. 장날 앞에는 두 배가 된다⁠. 민성은 코드 세 줄을 고쳤다⁠. 떡집의 점수가 조금 올랐다⁠.

고친 파일을 보내려다 민성은 받는 사람 칸에서 멈추었다⁠. 내일은 개인 발표였다⁠. 민성은 파일을 제 발표 폴더에만 넣었다⁠. 노트북을 덮고 누운 뒤에도 천장의 형광등 자국이 한참 눈에 남았다⁠.

*

4월 2일 금요일 오전 열 시⁠, 12층 심사장은 3층 교육장보다 천장이 높았다⁠. 긴 탁자 너머에 세 사람이 앉았다⁠. 재무이사⁠, 기술이사⁠, 그리고 맨 끝의 엄여란⁠. 단희는 연노랑 카디건 소매를 걷고 손목 보호대를 풀어 가방에 넣었다⁠. 팔찌만 남겼다⁠.

발표는 칠 분에 끝냈다⁠. 떡집 얘기는 일 분 사십 초로 줄였다⁠. 기술이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재무이사가 볼펜 끝으로 서류를 톡톡 쳤다⁠.

“⁠좋네요⁠. 하나만 여쭤볼게요⁠. 아이가 아프면 어떻게 하실 거예요⁠?⁠”

심사장이 조용해졌다⁠. 실장은 서류를 보았다⁠. 단희는 화장실 거울 앞에서 끝내 하지 못한 대답을 지금 했다⁠.

“⁠지난달에 아팠어요⁠. 수족구였어요⁠. 그 주에 저는 그만두겠다고 메시지를 보냈어요⁠. 다음 날 밤에 동기가 우리 집에 왔고⁠, 식탁에서 둘이 이 기능을 만들었어요⁠. 남편은 처음으로 반차를 냈고요⁠.⁠”

재무이사가 볼펜을 내려놓았다⁠.

“⁠아이는 또 아플 거예요⁠. 그때마다 그만두지 않는 방법을 지금 배우는 중이에요⁠. 아직 다 못 배웠어요⁠.⁠”

“⁠솔직하시네요⁠.⁠”

“⁠하나 여쭤봐도 될까요⁠? 같은 질문을 다음 발표자한테도 하실 건가요⁠?⁠”

기술이사가 웃음을 참는 소리를 냈다⁠. 재무이사는 대답하지 않고 다음 서류를 넘겼다⁠. 실장이 처음으로 고개를 들어 단희를 보았다⁠. 눈이 웃지 않았다⁠.

다음 발표자가 민성이었다⁠. 복도에서 엇갈릴 때 민성은 단희를 보지 않았다⁠. 문이 닫히고 사 분쯤 지나 안에서 재무이사의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밤샘 가능해요⁠? 민성의 대답은 짧았다⁠. 네⁠.

*

오후 다섯 시⁠, 꼬박이가 폭죽 그림과 함께 결과를 올렸다⁠. 「⁠1차 정규직 심사 결과⁠! 1위 금단희 98점⁠, 2위 차민성 95점⁠, 3위⁠…⁠.⁠」 단희의 점수 옆에 작은 글씨가 붙어 있었다⁠. 「⁠다시봄 가산점 10점 포함⁠」

단희는 작은 글씨를 세 번 읽었다⁠. 12층 휴게실 소파에서 표 선생이 휴대전화를 들고 다가왔다⁠. 표 선생의 이름은 여섯 번째 줄에 있었다⁠. 같은 작은 글씨가 붙어 있었다⁠.

“⁠나는 가산점 받고도 육 등이에요⁠. 십 점을 빼면 몇 등인지 계산하기도 싫네⁠.⁠”

“⁠선생님 발표 좋았어요⁠. 엑셀 함수로 대출 이자 보여 주신 거요⁠.⁠”

“⁠이사님이 그러더라고요⁠. 강사 출신이라 설명은 잘하시네요⁠. 설명은 잘하시네요⁠.⁠”

표 선생은 같은 말을 두 번 하고 웃었다⁠. 두 번째는 재무이사의 말투를 흉내 냈다⁠. 단희도 따라 웃었다⁠. 웃음이 끝나자 표 선생이 목소리를 낮추었다⁠.

“⁠단희 씨⁠, 가산점 붙은 사람이 일등 하면 다들 가산점만 봐요⁠. 우리 학원 장학생도 그랬어요⁠. 걔가 아무리 잘해도 장학금 받는 애였어요⁠.⁠”

표 선생이 휴게실을 나가고 나서 민성이 엘리베이터 앞에서 다가왔다⁠. 12층 복도 끝⁠, 광고 액자 속 여자가 둘을 보며 웃고 있었다⁠.

“⁠가산점 빼면 제가 일등이에요⁠.⁠”

“⁠알아요⁠. 지금 봤어요⁠.⁠”

“⁠알고 계셨어요⁠?⁠”

“⁠몰랐어요⁠.⁠”

“⁠그럼 이제 아셨네요⁠.⁠”

민성의 목소리는 높지 않았다⁠. 대신 평소보다 느렸다⁠.

“⁠기사는 사장님 이름이었고⁠, 점수는 사장님이 일등이에요⁠. 저는 공동 개발이고 이등이에요⁠. 다음엔 뭐예요⁠? 현장 시험도 가산점 있어요⁠?⁠”

“⁠민성 씨⁠, 나 그거 달라고 한 적 없어요⁠.⁠”

“⁠알아요⁠. 달라고 안 해도 주잖아요⁠. 저는 달라고 해도 안 줘요⁠.⁠”

엘리베이터가 12층에 와서 문을 열었다⁠. 아무도 타지 않았다⁠. 문이 다시 닫혔다⁠. 단희는 휴대전화를 들어 인턴 여덟 명이 들어 있는 단체방을 열었다⁠. 실장도 단체방에 있었다⁠. 단희는 엄지로 천천히 썼다⁠.

「⁠1차 심사 다시봄 가산점⁠, 저는 빼 주세요⁠. 점수는 다른 분들과 똑같이 받겠습니다⁠. — 금단희⁠」

“⁠그러면 사장님이 이등이에요⁠.⁠”

민성이 단희의 화면을 보며 말했다⁠.

“⁠알아요⁠. 계산은 은행에서 열한 해 했어요⁠.⁠”

단희는 전송을 눌렀다⁠. 단체방의 「⁠읽음⁠」 숫자가 일곱에서 여섯⁠, 다섯으로 줄어들었다⁠. 마지막 하나가 남았다⁠. 실장이었다⁠. 숫자는 한참 동안 사라지지 않았다⁠. 민성이 엘리베이터 버튼을 다시 눌렀다⁠. 이번에는 둘이 같이 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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